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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항 본성의 빛의 무능함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은 이 본성의 빛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 조차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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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의 빛’의 존재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이라는 말로 도르트 신학자들이 말하는 ‘본성의 빛’을 표현한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전자는 ‘일반은총’(혹은 본성의 빛)으로 구원 자체를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비해 후자는 불가능하다고 성경을 기초로 바르게 정리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뭐라고 주장하는지 보자. “부패한 자연인이 일반 은총(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이 용어로 본성의 빛을 말함)이나, 타락 이후에도 남겨진 은사들을 아주 잘 사용할 수 있으며, 이를 선하게 사용함으로 더 큰 은혜 즉 복음적 은혜 또는 구원의 은혜와 구원 자체를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심에 필요한 방편들을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오류 5)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본성의 빛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대등하게 취급한다. 두 가지를 근본적 차이로 보지 않고 정도의 차이로만 본다. 그들 중 어떤 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가장 부패한 사람, 둘째, 덜 부패한 사람, 셋째, 특별히 알맞은 사람이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16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작성된 벨기에 신앙고백서(1561)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다만 그 중에서, 인간이 변명치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약간의 흔적만 남았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배가 파선하여 겨우 ‘나무판자만 남아 있는 상태’와 같다. 그 넓은 바다에 나무판자 조각이 떠돌아다닐 뿐이다.
로마서 2:14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불신자도 신실하고 정직하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본성의 빛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불신자도 신자처럼 같은 봉사와 선을 행할 수 있지만, 그 원리가 다르다. 신자는 율법을 사랑의 원리로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 물론 외식하는 자들도 사랑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본성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담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죄의 오염은 영혼, 마음, 정신 등 모든 부분으로 퍼졌다. 전적부패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사람이고, 희미하게 지식과 의와 거룩함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도르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별했다. 넓은 의미의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남아 있지만, 좁은 의미의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사라진 것으로 본다. 이것이 “희미함”의 의미이다. 사람이 사고의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은 죄 된 것으로 사용한다.
로마교회는 타락의 범위가 초자연적 은사로 본다. 인간은 타락 이후에도 자연적 은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성적 사고, 선과 악의 구별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 초자연적 은사를 받을 능력과 준비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을 그리스도의 ‘특별은총’과 대등한 위치에 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이다. 이들은 모두 반쪽(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 신학자들은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본성의 빛’이란 인간이 그것으로 뭔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은 그 본성의 빛을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본성의 빛을 희미하게 남겨 두신 것)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 본성의 빛은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능력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성의 빛’의 사용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은 이 본성의 빛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조차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본성의 빛’, 곧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그렇다. 인간은 ‘본성의 빛’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소유한 ‘본성의 빛’이 자신의 구원에 얼마나 될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
도르트 신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한다.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인간이 소유한 ‘본성의 빛’은 엉망진창이고 비뚤어져 있을 뿐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자신의 기준을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연과 사회에 관한 일들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불신자들 가운데 생각보다 잘 하는 사람들도 본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지, 이방인에게 칭찬할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제아무리 멋진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종교적 선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본성의 빛을 가진 자연인은 영적인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참 회심은 본성과 이성의 빛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문명으로도 불가능하다. 심리학적인 효과로도 불가능하다. 참된 회심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이 기록하여”(렘 31:3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 44:3)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본성의 빛’의 결과
“......게다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타락 후에도 남겨 두신 ‘본성의 빛’을 잘 사용해서 구원에 이를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는다. 이제 우리는 ‘본성의 빛’의 실제를 만나게 된다. 물론 인간 속에 남아 있는 ‘본성의 빛’은 선하다.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이 희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의 빛’을 오용한다. 불신자의 학문도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 본성의 빛을 사람들이 오용하여 종교를 만들기도 한다. 불교나 유교나 도교가 그렇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람을 신화화한다. 사탄 숭배자들도 있다.
사람 속에 있는 ‘본성의 빛’을 이용해서 악한 불량배가 고상한 철학자와 학자인 척 할 수도 있다. 적그리스도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최고로 창조된 인간이 부패하면 가장 나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은 뭔가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없다. ‘본성의 빛’은 쓸모없게 되었고 희미해 졌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의 빛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아주 추악한 죄들에 빠지고 만다(롬 1장).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래서 사람은 무시무시한 죄를 짓는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그러면 ‘본성의 빛’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성의 빛’은 은혜이고 특권이다.
‘본성의 빛’의 역할(목적)
“......사람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본성의 빛’을 남겨 두신 목적을 볼 수 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희미한 본성의 빛은 무슨 역할을 할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저는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어요!’라고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의 빛’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종교 개혁가들은 구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주장했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교리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성경 말씀에 의하면 구원에 있어 ‘오직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그것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려 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믿는다. 결국 자신의 ‘자유’를 바란다. 외부로부터의 하나님의 법을 거절하고 스스로(auto)가 법(norm)이 되는 자율적(autonomous)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현대 철학도 ‘자유’이야 말로 구원이고 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빠진 함정도 바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의 자율이다. 첫 아담(고전 15:45)은 에덴동산 시험에서 “하나님과 같이”(창 3:5) 되어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로서 혼자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삶의 의미가 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불순종하게 되고 그것이 곧 죄이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인 예수님은 유대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마 3:17)이시지만 첫 아담처럼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며 승리하셨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스스로 자유하려 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셨다.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은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근거임을 믿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 구원의 튼튼한 반석이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