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막의 구조와 구속사적 의미
성막의 출처
성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양식을 받아 지은 성전입니다 (출24:18, 25:1-9).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한 것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막의 정확한 칫수와 무게와 재료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여러 장(章)을 할애한 것은 단순히 성막의 건축 내용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과 천국의 실체와 성도의 생활 모범을 제시하기 위한 모형(표호)입니다 (히8:5, 9:23-24).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알게 하고 그와 영적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기위해 주신 표징입니다.
성막의 위치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은 구름기둥(하나님의 임재)의 인도를 따라가다가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 곳에서 멈추고 진(陣)을 칩니다(야영). 맨 중앙에는 성막을 치고 성막을 중심으로 한 주위는 레위 자손이 진을 치고 동쪽에는 유다에 속한 지파들이(유다,잇사갈,스블론), 남쪽에는 르우벤에 속한 지파들이(르우벤,시므온,갓), 서쪽에는 에브라임에 속한 지파들이(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 북쪽에는 단에 속한 지파들이(단,아셀,납달리) 진을 칩니다(민2:3-35, 계21:12).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다시 진행을 하는데, 그 때는 ①유다 진기(陣旗) ②르우벤 진기 ③성막과 레위 진기 ④에브라임 진기 ⑤단 진기 순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구름기둥이 멈출 때는 다시 그 곳에 진을 치는데 그 때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막을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진을 칩니다.
성막의 제원
성막 외부를 두룬 세마포 휘장의 전체 길이는 출애굽기27:18에 보면 장(長)과 광(廣)과 고(高)가 각각 100×50×5규빗 (50×25×2.5m)입니다. 참고로 1규빗은 45.6㎝인데 편의상 50㎝로 계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출27:17에 보면 휘장을 세우는 기둥은 남쪽(좌)과 북쪽(우)이 각각 20개씩이고 서쪽(뒤)과 동쪽(앞)이 각각 10개로 되어 있습니다(성막은 동쪽을 향하고 있음- 계7:2 참조). 거기에 은으로 만든 가름대와 갈고리 그리고 놋으로 만든 받침으로 휘장을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동쪽(앞)에는 50규빗(25m) 너비의 10개 기둥 중 중간부분 20규빗(10m) 너비의 4개 기둥에는 출입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A. 출입문 (출27:16-19)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는 짐승(생축)을 이 곳으로 끌고 들어가 제사를 드리므로 죄 사(赦)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히9:22). 그러기에 성막 동편 끝에 있는 이 출입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도 없고 영적 자유함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출입문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오늘날 이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4:6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고, 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했고, 사도행전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했고, 로마서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막은 흰 세마포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사방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며 다른 천막들과 대조를 느끼게 합니다. 이는 그 내부의 순결과 거룩함을 암시해 줍니다. 성막 전체를 두르고 있는 휘장(세마포장)과 출입문 휘장의 높이는 2.5m입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이 휘장들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모릅니다. 성막 안에 있는 진귀한 성구들과 제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 백성이 죄용서 받음을 모릅니다.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거룩과 순결과 평안을 느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둘려진 세마포장과 출입문에 수놓아진 색과 문양을 보고 느낄 뿐입니다. 그런데 출입문의 4색깔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내용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입문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한 문이기는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존재와 언행과 삶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게 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 문은 어느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도록 20규빗(10m)이나 되게 넓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은 항상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곳으로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지위고저, 학식유무를 무론하고 누구든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이는 기본회개의 의미든 중복회개의 의미든 모두에 다 적용됩니다. 요한복음7:37-38에는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사55:1), 누가복음14:21에는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잠1:20-21, 계22:17). 고린도전서1:26에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이든, 병든 자이든, 괴로운 자이든, 외로운 자이든, 번뇌하는 자이든, 근심하는 자이든, 불화한 자이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아무리 보리 떡 같고 막대기 같고 고자와 같은 자라도, 소를 몰던 자요 뽕나무를 기르던 자요 고기를 잡던 자라도 쓰임 받게 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 줍니다.
출입문은 4기둥에 휘장을 가로질렀는데 그 휘장은 청색과 홍색과 자색과 가늘게 꼰 베실(흰색)로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 색깔들은 한결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3:13,31, 고전15:47).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 (요1:1,14, 마27:43, 빌2:6).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 (삿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8, 28:18).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계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11:29, 빌2:8).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일3:5).
이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에,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에, '흰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에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4:7).
B. 번제단 (출27:1-8)
번제단은 5×5×3규빗(2.5×2.5×1.5m)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을 상자처럼 짜서 그 겉에 놋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 단 가운데는 제물을 잘 타게 하고 타고난 재가 아래로 잘 빠지게 하기 위해 그물처럼 생긴 놋 망을 가로질러 넣었습니다. 그리고 단 양편에는 놋 망을 반 중간에 고정시킬 뿐아니라, 단을 이동시킬 때 안전하고도 손쉽게 메고 갈 채(봉,pole)를 끼울 수 있도록 놋 고리를 만들어 달았습니다(25:13, 38:5). 그래서 이 번제단을 토단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20:24)
a.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줍니다.
번제단은 우선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공의'는 죄에 대해 벌하고 의에 대해 상을 주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생축(짐승)을 데리고 와서 머리에 안수를 통해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전가시킨 다음, 제사장들이 생축을 잡아 번제(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때에 사용되는 단입니다. 이때 번제로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죄값을 치루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생축을 사람 대신 죽게 한 것입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고, 히브리서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레17:14). 하나님께서 이런 율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해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곧 공의로운 성품을 알게 합니다. 그 공의의 법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벧전2:24, 롬6:10).
번제단은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랑의 성품도 함께 보여 줍니다. '사랑'은 죄행대로 갚지 않고 긍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 전가받아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사람이 죽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대신에 짐승으로 죽게 하고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택한 백성을 사랑하는지 알게 해줍니다. 그 사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게 한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영 단번에 속죄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10:4, 9:11-12).
b.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시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임을 나타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이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생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값으로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만족시켜 줄 것을 예표하는 표징입니다 (히9:11-12, 22, 10:4,11).
번제단의 재료와 모양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되어 있습니다(1절). '조각목'(아체이 싯딤, שטים עצי -BHS, shittim wood -KJV, acacia wood -NASB, NIV, RSV)은 단단하고 내구력이 강한 나무로서, 광야의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서 좋은 목재로는 쓸 수 없고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성(人性)을 가지셨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사53: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사렛의 한 촌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그의 생명을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the son of man).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시기 위함입니다 (히4:15).
c.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짠 다음 불에 타지 않도록 놋을 입혔습니다 (2절). 그리고 번제단에는 부속 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물에서 떨어지는 통, 제물의 재를 통에 담는 부삽, 제물에서 떨어진 피를 담는 대야 (24:6), 번제단에서 취한 불씨를 분향단에 옮기는데 사용하는 불 옮기는 그릇 (30:7-8, 37:23, 레16:12, 민16:46, 4:9), 잘려진 제물(고기)를 단 위에 골고루 펴는데 사용하는 고기 갈고리 (상상2:13) 등이 있습니다. 그 부속물들도 모두 불에 타지 않도록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3-7절).
민수기16:35-39에 보면, 향로를 가지고 불의의 제물을 드리려 했던 고라당 250인이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불에 타 죽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향로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지만 향로는 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향로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타지 않고 뜨거운 열도를 통과한 향로를 두둘겨 쳐서 번제단을 싸게 했습니다. '놋'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특히 그의 죄없으신 의를 상징합니다. 진노의 심판의 불에 견디려면 신성 특히 죄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죄가 있어서 죄값으로 내려진 형벌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법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 천사라도 그 진노의 벌을 이겨낼 자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심판을 견디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4:15, 요일3:5).
d.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번제단 네 귀퉁이에는 제물(생축)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묶는데 사용하기 위해 뿔을 만들었습니다 (2절, 시118:27). 열왕기상1:50-53에 보면 솔로몬이 아도니아를 죽이려 하다가 그가 이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을 보고 살려 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이 제단의 상징 의미를 알고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의 상징입니다 (단8:3-20, 삼상2:10). 번제단의 뿔은 죄로 인해 죽게 된 자를 살리는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죄로 죽을 자를 살리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과 보혈을 믿는 자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의 뿔"이라고 했고 (시18:2), 사가랴도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눅1:69). 우리는 그 구원의 뿔을 붙잡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권세가 삶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C. 물두멍 (출30:17-21)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맨 먼저 번제단이 있고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은 다른 기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크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두멍은 제사를 위한 제물을 씻거나 제사장들이 성소 봉사의 직분을 수행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근동지방은 건조한데다가 바닥이 사막 모래 땅이므로 먼지가 많기 때문에 손과 발이 더럽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소 사역을 하기 전에 매 순간 더럽혀진 수족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a.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상징합니다.
한편 물두멍은 성막 기구 중 유일하게 그 규격과 물의 양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른 기구에서 규격과 양을 기록한 것 만큼이나 물두멍에서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주신 죄가 한없다는 것을 생각게 합니다.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죄를 나눌 때 원죄와 본죄로 나눕니다. 원죄에는 정죄(죄책)와 유전죄(오염)가 있고 본죄는 자범죄와 요구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지은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103:12, 사1:18). 하나님의 용서가 한이 없으십니다.
매일 삶 속에서 지은 죄가 어떤 죄이든, 얼마나 큰 죄이든 상관없이 그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셨음을 확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에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용서를 나타내십니다 (마18:24-35). 큰 마태복음18:22에서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가르치신 주님의 한없는 용서의 마음이 느껴지게 합니다.
b. 성도에게 성결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의 수족을 씻고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사역을 하는 제사장도 거룩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물두멍의 물의 양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씻어야 할 일이 많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불가불 매 순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역사가 맹렬하고 세속 문화와 문명이 유혹하고 육체의 부패한 성품이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육체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항상 불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씻는 일이 필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결케 해 나가야 합니다. 에베소서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요15:3, 17:17, 딛3:5).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계명 어긴 자범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요구죄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롬14:23, 약4:17, 삼상12:23, 요일1:8). 물론 타인의 죄에 대한 정죄가 아닌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마7:1-5, 약2:13). 그럴 때 우리에게는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롬5:20, 6:1).
c. 성도에게 변화와 헌신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물두멍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출애굽기38:8에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놋(구리)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애굽할 때에 가지고 나왔던 거울을 물두멍 만드는 데에 바친 것입니다. 그 거울이 전에는 자신들의 육신의 더러워진 모습을 보여 주고 멋을 내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옛 성품 곧 허영과 욕심과 교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울을 바친 것은 옛 성품과 습관과 풍습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여인들은 성막에서 봉사를 하면서 성막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전무하는 제사장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을 것이고 자신들이 제사장 사역을 도와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놋(구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놋 거울을 기꺼이 바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상과 풍습과 습관과 욕망을 버립니다 (엡2:1-3).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버립니다 (요일2:16).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빌3:8). 외모를 꾸미지 않고 속 사람을 단장합니다. 곧 온유하고 안정된 심정을 가지려 합니다 (벧전3:3-4).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되면,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면,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중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을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고후8:1-3). 특히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영육 간에 도와주는 일에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갈4:15).
D. 등대 (출25:31-40, 37:17-24)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번제단과 물두멍을 맞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성소가 있는데 그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있는 것이 등대(燈臺)입니다. 등대는 밤에(저녁부터 아침까지) 등잔불을 켜서 성소 안을 밝히 비추는 역할을 하는 기구입니다(레24:3). 등대는 한달란트(34kg: 약 100근)되는 정금으로 쳐서 만들되, 밑판에 가운데 줄기를 세우고 거기에 4마디로 구분하고 꽃과 꽃받침과 살구꽃 형상의 잔을 각 마디마다 장식하고, 맨 위에 기름을 담을 등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개의 가지를 만들어 거기에도 꽃과 꽃받침과 살구꽃 형상의 잔을 3개씩 달고 그 끝에도 등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원 줄기에 가지가 좌우로 3개씩 연하게 하였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 등대에는 인칭대명사(His- KJV)가 적용되었습니다. 곧 등대가 인격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인격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등대와 같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등대는 정금 한달란트(34kg: 약 100근)로 만들어졌는데 (39절), 주조가 아닌 단조로 만들어졌습니다 (36절). 곧 금물을 주형에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공교한 금세공 기술로 쳐서(두둘겨서) 만든 것입니다. 한달란트의 정금 자체가 귀하기도 하지만 침을 받으므로 더욱 값진 기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에 대한 진노의 형벌을 받으시므로 택한 백성을 구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교회를 탄생된 것입니다.
b.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등대의 원줄기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등대의 가지들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1:20에 "~일곱 금촛대는 일곱교회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지들이 원 줄기에 붙어 있듯이 교회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했고, 에베소서5:31-32에는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지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고, 요한복음10:28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실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로마서8:35-39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c. 성령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등대의 등잔(燈盞)은 매 줄기 끝마다 하나씩 달렸으므로 모두 7개가 됩니다. 그 등잔에는 순결한 감람유 기름을 두게 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 놓게 했습니다 (레24:2-3, 27:21, 슥4:1-6).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靈)이신 성령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에 대해 상징으로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4:5에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계3:1참조).
첫째, 등잔은 등대의 모습을 비춰 주어 등대를 보게 해줍니다. 등잔이 상징하는 성령께서는 등대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해줍니다.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παρακλητοs)는 대언자, 변호자, 증거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 주고 변호해 주는 사역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알게 하고 그가 말한 모든 진귀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마16:16-17참조). 고린도전서12:3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등잔은 등대의 맞은 편에 있는 진설병상(陳說餠床)과 그 위에 있는 진설병(차려놓은 떡)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진설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진설병을 응식으로 먹는 일을 도와줍니다. 이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요14:6)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4:4).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요14:16).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진리되는 모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요6:48-59, 14:26, 16:13). 요한복음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εν τη αληδεια)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진리 안으로(ειs την αληδεια) 인도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λογs)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말씀을 적용(ρημα)하도록 도와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의지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은혜를 느끼도록 감동시키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인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벧후1:19-21, 계2:7 참조).
셋째, 등잔은 등대의 좌편(지성소 휘장 앞)에 위치한 분향단(焚香壇)을 비춥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분향단 사역을 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동시에 (롬8:34)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도록 감동시키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에 대한 감동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벧전2:9, 계5:10).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기도를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 전도, 봉사, 교제 등 모든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십니다 (요4:24,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전 생활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이 역사하실 수있도록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금집게로 불똥을 떼어 내듯이, 성령을 근심케 하고 거역하고 소멸하던 불순종의 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뜻과 의지와 행동과 육체의 모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 진설병상 (출25:23-30, 37:10-16)
진설병상(陳設餠床)은 떡을 차려 놓는 상입니다. 크기는 2×1×1.5규빗(1×0.5×0.75m)이고 재료는 번제단이나 분향단이나 법궤와 동일하게 조각목으로 만든 후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상 사면에 테를 두루고 상 위에 놓은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 언저리를 돌아가면서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었습니다. 또 이동시키기에 편리하도록 금고리 넷을 양 면에 부착하고 채(봉,장대)를 꿰어 두게 했습니다. 물론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금을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담을 수 있는 대접과 분향하는데 사용하는 숟가락과 떡에 바르는 유향을 담을 병(甁)과(레24:7) 전제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잔을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그 부속물을 모두 정금으로 만들었고, 성소 사면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a. 예수님께서 영적 양식의 제공자임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상 위에는 항상 진설병을 두었습니다. 진설병(떡,陳設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의 제공자가 되실 것을 예표합니다. 요한복음6:35,48,58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대표적 단어입니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생명을 유지하므로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주리고 죽었지만, 그것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은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요6:48-51, 고전10:1-5).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것을 알게 해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요6:1-35). 그 떡을 먹는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요6:53-58).
예수님이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진설병은 곱게 간 고운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발라 익힌 것입니다. 익히는 방법은 화덕에 굽기도 하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솥에 삼기도 합니다 (레2:1-10). 이 고운 가루는 곡식 열매가 찧음을 받으면서 빻아지고 부서져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큰 고난으로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에 노출되어 잘 구워진 떡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거절과 핍박을 통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부서지는 듯한 경험과 갈보리 산상에서의 타는 듯한 경험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b.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서 내린 양식 곧 만나를 먹게 한 것은 사람이 육신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3).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제공받아야 합니다.
첫째, 누룩과 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떡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레2:11, 6:16). 누룩과 꿀은 죄성과 외식 곧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5:9,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인본주의가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고전1;17, 렘6:16, 출20:25, 요4:24). 순수한 복음을 받기를 원하며 순수한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고전5:7-8).
둘째,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아야 합니다. 진설병(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고 물리게 했는데, 그 물린 떡은 제사장과 그의 후손들이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레24:8-9). 우리는 매 주일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특히 죄성과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갓난 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얻어 먹으려 해야 합니다 (벧전2:2).
셋째, 회막 뜰에서 먹어야 합니다.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회막뜰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레24:9, 6:16). 그 시간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교제하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설병이야말로 교제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교제의 기초는 진설병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제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희생과 고난이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 인한 은혜를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제만이 참된 교회(εκκλησια)를 이룰 것입니다.
c. 성도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진설병은 2줄로 6개씩 12개가 올려졌습니다 (레24:6).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거둔 곡식을 모두 바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므로 생명의 떡이 되어줄 것처럼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온전히 바치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 속에서 연단받은 인격과 변화된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한 쪽은 익지 않은 제물을 원치 않습니다 (호7:8). 연단된 인격과 변화된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고운가루처럼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떡이 되는 것입니다.
F. 분향단 (출30:1-10, 37:25-29)
분향단의 재료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크기는 1×1×2규빗(0.5×0.5×1m)으로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졌으며 사면에 뿔을 연하게 하고 금테를 두르고 양편에 두 고리를 만들어 조각목에 정금을 입힌 채(봉)를 꿸 수 있게 했습니다. 위치는 성소에서 제일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진설병상과 금촛대 사이에 있는 동시에 언약궤와 속죄소의 바로 맞은편 휘장 앞에 있습니다.
a. 예수님의 중보사역를 예표합니다.
분향단은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등불을 끌 때와 켤 때에 향을 사르는 곳입니다 (7-8절). 그 향연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와 속죄소 앞에서 올라갑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치르므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했습니다 (행9:14). 그리고 우리를 위해 매일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행7:55). 또한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34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롬8:26).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못했을지라도 우리를 변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요일2:1).
b. 성도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분향단 향연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41:2에도 "나의 기도가 주의 분향함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향처럼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간 이방에서도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한 것처럼 (겔11:16), 어느 곳에서 어떤 형편에서 기도하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분향단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언약궤와 속죄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25:22, 30:6), 성도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생활입니다
.
첫째, 향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향을 자기가 냄새를 맡을 목적으로 만들면 백성 중에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37~38절). 우리의 기도 목적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을 알게 합니다. 자기를 많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기 위해 하는 외식하는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또한 구하는 내용이 자기를 위한 것이어도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마6:25-33, 약4:3).
둘째, 향을 사를 때는 하나님이 지시한 재료와 방법대로 만든 향만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향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9절). 34~36절에 보면,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을 동일한 중수로 달아 거기에 소금을 치고 곱게 찧어 만들도록 했습니다. 소합향은 눈꽃 모양의 꽃이 피는 키가 작은 나무 껍질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나감향은 바닷 속의 연체 동물 덮개 딱지에서 만든 향품이고, 풍자향은 지중해 연안의 다년생 초본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유향은 감람나무과에 속한 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으로 만든 향기로운 향품입니다. 이러한 향기로운 향품으로 향을 만들게 한 것은 아마 성막에서의 희생 제물로부터 나오는 여러 냄새와 주위에 뿌린 피 냄새를 제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넣은 것은 향품을 굳게 하는 역할을 하거나 위생적 목적을 위해 넣게 한 것 같습니다. 기도의 방법을 알게 합니다. 모든 기도의 기초와 근거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구약에 나답과 아비후가 번제단(구속의 기초)에서 취한 불이 아닌, 여호와께서 취하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 당한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9:24~,10:1-2). 그리고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근거를 말씀의 약속에 두어야 하며 말씀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구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주술적 의미를 가진 습관적인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셋째,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살라야 합니다.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사릅니다 (7-8절). 이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킵니다 (27:20-21). 기도의 시기를 알게 합니다. 기도할 때 만물을 접하기 전 새벽에 기도로 시작하여 일을 마친 후 저녁에 기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꼭 아침 저녁 하루에 두번 하라는 의미보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3번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단6:10).
넷째,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야 합니다.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서 향불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8절下). 기도의 기간을 알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문제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신자된 의무입니다 (삼상12:23). 그런 다음에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특별 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기도도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정한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눅18:1-8, 겔36:37). 우리에게 기도할 제목이 있다면 항상, 그리고 그 내용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 10:12-14에 보면, 다니엘이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을 때 21일째 되는 날에 기도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향단은 1년에 1차씩 아론이 속죄피를 뿔에 바르므로 정결케 했습니다(10절). 성도는 가끔씩 특별기도 기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기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죄를 생각하며 자신의 본질적인 죄를 깊이 회개하는 특별기도 기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나 국가적으로도 특별기도가 필요합니다. 미스바 부흥 운동과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개인의 중대한 문제를 두고도 특별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핍박 문제를 두고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와 질병 문제를 두고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모르드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성역을 앞두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특별기도를 했고,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호흡입니다. 잠시라도 중단하면 우리 영혼은 생명력을 잃고 마귀에게 지게 됩니다. 한시도 깨어 기도하지도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26:40). 그리고 항상 깨어 기도하라 베드로를 통해 주신 권면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벧전5:8). 기도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력이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막9:29).
G. 휘장 (출26:31-33)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 두 방을 나누기 위해 휘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휘장은 흰색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 형상의 수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으로 입힌 네 기둥의 갈고리에 늘어뜨렸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휘장은 4지 폭의 두께로서, 말 10필로 양쪽에서 동시에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라고 합니다.
a. 하나님의 거룩성 수호를 상징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이 휘장은 성소 뒤에 있는 지성소를 가리기 위함이요 누구든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속죄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히9:7).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면 즉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이라도 하나님이 명한 규례를 지키지 않은 채 들어갈 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사역을 위해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죽어도 그 시체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다른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 그 곳에 들어갈 때는 발에 끈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그가 죽을 경우 들어가지 않고 줄을 당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기16:2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 곳에는 하나님 자신이 임재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면 죽였습니다 (출19:24).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그 지성소를 지키게 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 휘장에 그룹을 수놓게 했습니다. 그룹은 천사를 가리킵니다. 천사는 직책에 따라 4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천사이고 (창3:23-24), 줄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수종드는 천사이고,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이고, 넷째, 미가엘은 영적 전투를 맡은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휘장에 그룹은 수놓게 한 것은 지성소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로 지키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사무엘상6:19-20에 보면, 바벨론에 빼앗겼던 법궤(안약궤)가 유다 땅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유다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 보다가 70명(5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법궤가 온전한지 그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이 제대로 있는지 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표상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한 성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안전을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침범한 죄가 되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수3:4, 민4;15, 출19:24).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성성(聖性)을 지켜 나가십니다.
사무엘하6:6-7에 법궤가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상15:13).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도 잘못이나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당신이 친히 책임지시는데 붙잡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친히 세워 나가시고 지켜 나가십니다 (계2:1). 우리는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3:4, 민4:15 참조).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다스리는 곳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합니다.
휘장 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속죄피를 가지고 1년에 1차씩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히9:7).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 (히9:11-12). 이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히10:19-20). 그래서 이 휘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마27:50-52, 막15;37-38, 눅23:45).
우리는 다 본질적으로 죄인들입니다 (롬3:10). 하나님께 나아갈 수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려 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성격을 믿는 자는 사죄와 칭의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31절에 보면 휘장은 가늘게 꼰 베실(흰 세마포)에 로 짜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은 것입니다. 그 색깔들은 전에 출입문을 강해할 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한결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첫째,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3:13,31, 고전15:47).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 (요1:1,14, 마27:43, 빌2:6).
둘째,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 (삿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8, 28:18).
셋째,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계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마11:29, 빌2:8).
넷째,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일3:5).
이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에,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에, 홍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에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4:7에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했습니다(겔1:10참조).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우리도 이 4가지 색깔이 의미하는 성품을 점점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
H. 언약궤 (출25:10-16)
언약궤는 증거궤, 법궤라고도 합니다. 언약궤는 2.5×1.5×1.5규빗(1.2×0.7×0.7m)의 크기로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을 입혔습니다. 위로 돌아가면서 금테를 둘렸고 양편에 두 금고리를 만들어 채(봉)를 꿰어두게 했습니다. 물론 이동할 때 쓰는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성경에는 성막기구 중 언약궤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언약궤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열왕기상8:9과 역대하5:10에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9:4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두 돌 비석(율법판)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들은 원래 세가지 물건이 다 들어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삼상4:17), 두가지 물건은 없어지고 두 돌판만 남았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궤 안에는 처음부터 두 돌판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에 하나님은 그 법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법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또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도 그 법궤를 열어 보다가 적어도 70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정황을 볼 때 만일 법궤 안에 세가지 물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물건을 잃어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율법판만 언약궤 안에 두게 했고 (출25:21)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궤 안에 두라 하지 않고 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16:33-34, 민17:10). 그런데도 히브리서에서 세 종류가 다 안에 있었다고 한 것은 사실 여부에 관심보다는 언약궤와 관련하여 표징으로 보관되었던 물건들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대로 그 세 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있고, 그것들이 예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직분된 표호들입니다.
a. 예수님의 본질을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
첫째,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10절). "조각목"(히. 싯딤 아체이, shittim wood -KJV)은 단단하고 내구력이 강한 나무로서, 광야의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서 좋은 목재로는 쓸 수 없고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신10: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성(人性)을 가지셨음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사53:2-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애굽의 망명생활을 했으며 나사렛의 한 촌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그의 생명을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라고 했습니다.
둘째, 언약궤는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11절).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짠 다음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정금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그의 출처와 본질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으나 근본적인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근본은 태초에 만고에니라"고 했습니다 (미5: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1:2-3). 바울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빌2: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골1:15-16).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과의 자기 증명에 관한 변론에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자라고 선언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요8:51-58).
b. 예수님의 직임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16절에서 말한대로 두 돌판(율법판,증거판)이 있었습니다. 이 두 율법판은 모세가 두번째 받은 돌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율법판을 받아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던져서 깨트렸습니다(출32:19). 그리고 다시 산에 올라가 전과 같은 내용의 두 율법판을 다시 받아 안약궤 안에 넣은 것입니다 (신10:2). 율법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율법의 정죄에 의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율법의 정죄와 그 형벌을 이기시고,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민수기17:8-11에 보면, 고라당을 중심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며 쳤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위해 12지파의 족장들의 지팡이를 언약궤 앞에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론의 이름이 적힌 지팡이에만 싹이 났습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의 족장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백성이 죄사함을 얻도록 중보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7월 15일 대 속죄일에 속죄 피를 가지고 지성소 언약궤 뚜껑의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화목케 합니다. 그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히6:20).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없이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시킬 수 있습니다 (요14:6, 행4:12, 고후5:18).
셋째, 예수님의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슬같이 만나를 내려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표징을 삼게 하려고 항아리에 한 오멜의 만나를 담아 언약궤 앞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고전10:3-4).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요6:35).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로서 내린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6:49-50). 예수님은 하늘로서 와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과 말씀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 관한 모든 진리를 나타내어 우리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c. 복음 사역 방법을 제시해주는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던 이 언약궤가 가장 중심에서 갔듯이, 우리의 생활 중심이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의 현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출3:2-3, 고전1:27-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생활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할 때 존귀해집니다. 진정한 존재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 언약궤는 채(봉)로 메고 가야 합니다 (13-14절). 언약궤는 레위 자손중 고핫 자손으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가도록 했습니다 (민4:15). 수레에 싣거나 짐승으로 끌고 가게하면 안됩니다. 힘들어도 사람이 메고 가야 합니다. 사무엘하6:6-7에 보면 언약궤(법궤)를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대상15:13).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이지만,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식이 없는 수레나 이성과 영혼이 없는 소에 의해 섬김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으로서는 복음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과 영혼이 있는 인간에게 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직분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인격입니다. 바른 관계성입니다. 우리의 물질, 건강, 지식, 명예, 은사가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둘째, 채는 언약궤의 고리에서 빼지 않아야 합니다 (15절). 채를 언약궤에서 빼지 말고 항상 꿰어 두게 한 것은 하나님이 언제 이동을 명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면 즉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군사로 말하면 항재전장의 정신, 임전태세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적은 무리라도 기드온 300명 용사와 같은 항재전쟁의 정신을 가진 정예군이 필요합니다 (삿7:4-6). 신명기20:5-6에는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치 않은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자, 두려워 하는 마음에 겁내는 자는 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후서 2:4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전투 정신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I. 속죄소 (출25:17-22)
시은소(施恩所)라고도 하는 속죄소(贖罪所)는 정금으로 2.5×1.5규빗 (1.2×0.7m)의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 역할을 하도록 언약궤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위에는 정금으로 그룹을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a.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21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율법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언약궤의 사역만 있고 속죄소의 사역이 없었다면 이 은혜의 보좌는 한낱 소름기치는 무서운 심판의 보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율법판은 죄를 드러내어 정죄합니다. 죄성을 들춰 내어 더욱 반항심을 갖게 하여 죄를 더하게 하기도 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죽음을 선고합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사람에게서 제거되고 사망의 법인 율법의 심판과 정죄에서 피할 수 있는 방도로 속죄소로 언약궤를 덮게 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죄값으로 이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9:22).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무시무시한 공의의 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덮게 한 것입니다.
b.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결과를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년에 1번 있는 대속되일이 되면 대제사장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 갔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번제단에서 취한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위에 1번 뿌리고 그 앞에 7번 뿌렸습니다. 번제단에서 죽은 흠없는 생축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지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사(赦)해졌습니다. 히브리서9:7에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 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죄사(罪赦)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어 그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를 흘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게 했습니다. 에베소서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눈 같이 희어졌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도말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겨졌습니다.
둘째,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갈3:13) 다시는 그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권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롬8:33-34).
셋째,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요한일서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3:12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7:51). 그래서 22절의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된 것입니다.
c. 구속사역에 대한 천사들의 경탄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8-20절에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속죄소 위에는 그룹 천사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직책에 따라 스랍, 그룹, 가브리엘, 미가엘이 나옵니다. 그 중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룹이 하나님의 위엄을 수호하는 직책을 갖고 있지만 (창3:24), 속죄소 위의 그룹은 속죄소 사역에 수종 드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은 빈속한 순종을 위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사6:2). 또한 서로 유기적 협력을 위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겔1;11-). 그리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보좌에 있지만 (마18:10),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직접 도왔습니다 (마4:11, 28:2). 천사는 오늘날 성도의 구원 사역을 돕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고 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종 들면서 예수님의 구속과 성도의 구원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합니다. 베드로전서1:12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43:19-20).
주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고 하나님과 화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직책 곧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고후9:16, 롬1:14, 행20:23-24). 또한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엡4:32, 마18:33, 마7:1-5, 6:14-15, 18:21, 약2:13).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J. 지붕 (출26:1-14)
성막의 지붕은 4겹의 덮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덮개들은 안쪽에서부터 세마포 덮개(1-6절), 염소털 덮개(7-13절), 수양가죽 덮개(14절上), 해달가죽 덮개(14절下) 순으로 덮여 있습니다.
a. 예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지붕의 가장 안쪽에는 세마포 덮개로 덮었습니다 (1절). 28×4규빗(14×2m) 크기의 세마포를 10폭으로 만들어 서로 이어서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그 덮개는 가늘게 꼰 베실 (흰색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형상의 수(繡)를 놓았습니다. 이 4가지 색깔과 그룹 천사의 형상은 출입문과 휘장에서도 살펴본 내용입니다. 첫째, 흰색은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순결하심과 의로움의 성품을 상징하고, 둘째,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기원의 성품을 상징하고, 셋째, 자색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와 영광의 성품을 상징하고, 넷째,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의 성품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사람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누가복음에, 청색은 독수리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에, 자색은 사자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마태복음에, 홍색은 송아지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마가복음에서 각각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수종드는 천사의 성품에서도 나타나는 색깔들이기도 합니다 (겔1:10, 계4:7).
4가지 색깔들로 공교하게 수놓아진 그룹들은 항상 성소와 지성소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천사는 사역적 직책에 따라 4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수종들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사3:6,6:2).
둘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수호하며 낙원 입구를 수호하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창3:24, 출25:18).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직책을 가졌고 (단8:16, 9:21, 눅1:19,26, 행7:53, 갈3:19),
넷째,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대적과 악령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단10:13,21,유9, 계12:7). 그런데 그룹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성소와 지성소에서 사역(봉사)하는 제사장 위로 날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자세입니다. 동시에 보호하려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뿐아니라 성도의 구원 운동도 도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12에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라고 했고, 시편34:6-7에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2-3절에 보면 10폭의 세마포 앙장이 서로 연(連)하여 한 지붕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이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돕기 위해 서로 연합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1:9,11-12에 "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또한 세마포 앙장이 서로 연(連)연한 것은 성도의 연합과 교회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에베소서2:21-22에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고, 4:16에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連絡)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은사를 서로 연합하여 구원 사역을 이루어야 하고 (고전12:4-30참조), 교회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속죄를 타나내는 표징입니다.
두번째로 덮는 덮개는 30×4규빗 (15×4m) 크기의 염소털 덮개입니다. 첫번째 덮은 세마포 덮개 보다 길이가 1m 정도 더 깁니다. 이 앙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러 오심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 레위기16:18-22에 보면, 아사셀의 염소에 대해 나옵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이 염소 2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제단에서 잡아 그 피를 제단 기초에 뿌렸으며 (요1:29), 한 마리는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한 다음 무인지경에서 광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 염소는 다시 찾지도 않으며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과 그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도말해짐에 대한 완전한 상징적 의식이었습니다. 이사야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라고 하였고, 시편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였고, 예레미야31:34에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씻을 수 없는 많은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원죄(정죄,유전죄)이든 본죄(자범죄,요구죄)이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셔서 모든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과 그 증후군들이 각종 결핍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죄와 고난을 주님께서 법적인 의미를 뛰어 넘어 실제로 정복케 해주실 것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c. 예수님의 대형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지붕의 세번째로 덮는 수양가죽 덮개는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서 비록 보이지는 않는 앙장이나 성막을 좀더 보호하기 위해 덮은 가죽이었습니다.
이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대신 형벌받으신 면을 예표합니다. 창세기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무화과 잎으로 엮어서 수치를 가리려 했으나,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을 입혔습니다. 그 짐승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리기 위해 대신 죽은 대속물(代贖物)이 된 것입니다. 아담이 죄로 죽어야 할 자리에 그 짐승이 죽어 아담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롬6:23, 히9:22). 이 짐승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실 것을 예표합니다 (행4:12, 요14:6).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오실 그리스도의 대형대속(代刑代贖)하실 것을 바라보게 하려고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창세기4:3-5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 곧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첫태생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받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로 제사하는 것이 오실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속의 음영(그림자)이기 때문이요, 짐승으로 제사하는 것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것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가인의 제사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안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레위기 2장에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장에 나오는 소제(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항상 번제(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29:40, 민15:1-10). 소제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를 근거할 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열납 여부를 제물의 차이에 두지 않고 죄행에 두고 있습니다. 가인은 생활 가운데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서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12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인은 악한 자로서 행위가 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 다음 구절들에 보면 가인이 제사가 열납되지 못한 것을 보고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창4:6-7). 그래서 가인이 평소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들은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 결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곧 가인이 시기 분노하여 살인한 내용을 두고 한 말이지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22:13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수풀에 걸린 수양을 잡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수양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을 잡아 제사하면서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한 수양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죽음(피흘림) 대신 짐승의 죽음(피흘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 수양이 대신 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실 대석자에 대한 음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53:5-6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신 대형대속(代刑代贖)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d. 예수님의 인성를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성막 지붕의 맨 마지막 덮개는 해달의 가죽 덮개입니다. '해달'(海獺)은 각주에 물돼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일강이나 홍해에서 떼를 지어 서식하고 있는 해양동물 곧 수달입니다. 이 동물은 광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물입니다. 아마 이 가죽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신발을 만들 구실로 가지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해달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보여 주는 완전한 그림자입니다. 해달 가죽은 색상이 없고 약간 붉으스레한 회색의 우중충한 덮개입니다. 이 덮개는 매혹을 줄만한 가치나 볼품이 전혀 없었습니다. 덮개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맨 위에 덮여져 있기 때문에 해와 비와 폭풍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외부 요인들로 인하여 혹독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면 사방이 정금으로 싸였고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정교하게 수(繡)놓은 찬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출입문을 지나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여 성소로 들어간 자만이 볼 수 있는 진귀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음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는 해달가죽 같습니다. 이사야53:2-3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고, 마태복음13:55-57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 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유가 그의 외부적인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요1;10-11).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 미련하게 보일 뿐이요 거리끼는 것일 뿐입니다 (고전1:18,23). 하나님이 하시는 우리를 통해서 해 나가시는 진리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말씀을 공급받고 기도의 교통을 하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자는 그 보배로움을 압니다. 그 영적 아름다움은 받는 자만 아는 세계입니다 (계2:17). 그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삽니다 (마13:44).
우리는 성막의 지붕 덮개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막의 구조와 영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음영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헌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두멍의 놋도 여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거울로 만들어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특히 본문에 나왔던 해달 가죽은 백성들이 신발을 만들어 신기 위해 가지고 나왔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성막을 이루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섭리해 주셨습니다. 신명기8:4에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고 (29:5), 느헤미야 9:21에도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물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opendoor.or.kr/chnet2/board/index.html?code=data03&gfile=view&id=226&start=0
첫댓글 병원예약일..6월11일은 인슐린과 여러가지
약을 타야하는데 돈이 많이듭니다 도와주세요..
후원을 해주셔야 카페가 계속해서 운영됩니다
그렇지만 후원참여는 전혀 안되고 있습니다....
월말입니다 낼것도 많고 월세도 내야합니다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치료약값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이드네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