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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날, 61년 전의 창경호(昌慶號) 해난사고를 돌아보다
오래 된 신문을 읽다가 ‘창경호 침몰, 승객 330여명 생수장(生水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하고 읽어보았습니다. ‘330명 수장’이라는 기사 제목이 지난 4월 16일의 세월호 해난사고와 방불하여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원 초과로 침몰되어 백 수십 명의 인명을 생케한 초춘호 및 편리호 사건 등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거니와 연달아 발생되는 해상사고방지책이 한층 더 요생되고 있는 이때 이번에는 일백오십 톤급 대형 강철 여객선이 침몰되어 약 이백오십 명의 인명을 일시에 바다에 몰아넣은 희유의 대참사가 다대포 앞 해상에서 발생했다.
동아일보 1953년 1월 11일 기사의 일부입니다. 전날 이미 ‘창경호 침몰, 승객 330여명 생수장(生水葬)’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접했던 국민들은 뉴스에 귀를 기울였고, 너무나 많은 희생자에 놀란 국회는 긴급히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1953년 1월 9일 하오 2시에 여수항을 떠나 부산으로 가던 146톤급 여객선 ‘창경호’가 다대포 인근 해상에서 풍랑으로 침몰하여 승선 인원 369명 중 단 7명만 구조되고 모두 수중고혼이 되었다. 신고를 받은 해군함정국 ‘센베이지’ 공작대와 수상경찰서 교통부 해운국, 소속선박회사 대동상선의 선박 등 30여척의 각종 선박이 출동했으나 선장 하량모(河亮模. 46세)씨 등 선원 3명과 군인 1명, 중학생 2명이 구조되었을 뿐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쌀 496가마니 등 적재된 화물이 너무 많고 선체가 낡아 배가 풍랑을 견디지 못해 균형을 잃은 탓으로 밝혀졌다. 창경호는 20여 년 전에 화물운반용 범선(帆船)으로 건조했던 것을 객선(客船)으로 변조했는데, 이 또한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범선의 선저(船底)는 객선보다 만곡도(灣曲度)가 작으므로 밑바닥이 날카롭게 되어 있지 않고 둥글넓적해서 동요가 심한데 변조 때에 선체의 복원력을 강하게 하는 ‘로오리쪽커’ 시설을 하지 않아 심한 풍랑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국회 조사단의 보고서 요약인데 최근에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다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20년 된 낡은 선체를 복원력을 무시하고 불법 변조했고, 화물의 과다 적재에 선장과 선원들만 살아남았다…… 딱 지난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의 판박이였던 것입니다. 뿐 아니라 후에 신문에 실린 후일담 기사는 더욱 기막혔습니다.
교통부장관 김석관(金錫寬) 씨는 다음과 같은 무책임한 공식 발표를 통하여 책임회피를 하다가 행정책임을 지고 그 후에 사임을 하였다.
“금번 조난사고는 순전히 풍랑에 의한 불가항력의 소치로서 천재지변에 따르는 피해와도 같은 것이다. 상세한 사고원인은 조사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조금도 인위적 소루(疏漏)는 없다고 본다. 또 출항 당시의 감독에도 별 소루가 없었다고 인정되지만 암야(暗夜)에 급격한 풍랑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줄로 안다.”
잘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불가항력의 사고였다…… 최근에 세월호 사건을 두고 ‘교통사고’ 운운한 어떤 나리의 주장과 흡사한 망발이더군요. 게다가 사임한(파면이 아니고) 교통부장관 김석관 씨의 아들 김진태(金鎭泰)가 사고를 낸 창경호의 선박회사 대동선박의 부산지사장임이 밝혀졌으니…… 여론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국회조사단이 발표한 사고 원인의 개략입니다.
1. 화물적재 과중 = 특히 유보갑판(遊保甲板) 위에 화물을 과다 적재하여 선체의 중심을 고부(高部)에 이동케 하여 복원력을 현저히 감소케 한 것이 최대의 원인이다.
2. 정원 234명을 최소한 100명 이상이나 초과해 태웠다.
3. 당일 동서풍 내지 서풍이 강한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선체가 과도히 육지에 접근 항해하여 과파(過波)의 영향을 받았다.
4. 선원들은 위급당시에 갑판상의 화물을 바다에 투입 내지 타저위장소(他低位場所) 전재(轉載) 등의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요컨대 ‘화물을 과다 적재하여 복원력을 잃게 하고 정원 이상의 승객을 태운 터에 일기의 불순함을 무릅쓰고 불안한 항해를 한 데다 위기의 순간 배를 구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게 창경호 사건의 원인이라는 이야기인데, 앞서 조사 발표한 불법 개조와 함께 세월호 사건과 너무나 흡사하여 데자뷰 현상의 증거를 보는 듯 섬뜩했습니다. 수백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고서도 최소한의 학습효과조차 얻지 못한 당국자들의 무지가 61년의 세월을 격하여 대참사로 되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인터넷 언론 ‘제주의 소리’ 2014년 5월 6일자 기사에서 찾은 ‘오피니언 칼럼 - 침몰한 것은 대한민국이다’ 제하의 ‘20년마다 반복해 온 대한민국 선박참사의 역사’ 부분입니다. 위에 예로 든 창경호 사건 등 우리나라 선박 참사의 역사와 문제점을 잘 지적하셨기로 옮겨 봅니다.
뒤집어진 건 세월호만이 아니다. 나라가 뒤집어졌고, 국가의 신뢰가 뒤집어졌다. 모든 것이 뒤집어지자, 이 나라의 적나라한 치부가 드러났다. 국가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 그것이다.
국민의 삶을 안전하게 보장해야할 시스템의 실종과 위험에 대처하는 위기대응시스템, 대처매뉴얼의 부재. 멀쩡한 듯 보이던 대한민국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 해난사고의 역사를 더듬어 보며 살펴보자.
한국해난사고의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재난으로서의 대형 해난참사는 ‘창경호 침몰사고’가 가장 앞선다. 146톤급 여객선 ‘창경호’는 1953년 1월 9일 여수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부산 다대포 인근에서 풍랑으로 침몰하고 만다. 배 안에 있던 236명 중 단 7명만 생존하고, 모두 익사했다.
당시 사건 직후 동아일보 보도로는 236명 중 229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월 27일 경향신문은 26일까지 263구의 시체를 인양했으며, 사고 희생자는 3백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탑승자 수가 정확치 않았던 건 이때부터였다. 1차적인 사고의 원인은 악천후와 풍랑이었지만, 선령이 20년 이상 된 화물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이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탑승인원이 실제 수용 가능한 인원을 넘어섰으며, 쌀 200가마까지 실어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또한 배에 비치되어 있었어야 할 구명보트와 구명복을 본사 창고에 보관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 사고로 당시 김석관 교통부 장관이 사퇴했다. 창경호 책임자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은 창경호 선장 등 4명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으나, 부산지법은 징역 3년형을 내리는 데 그쳤다. 솜방망이 처벌의 전통은 그 당시에도 여전했다.
두 번째 사고는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27분, 남해 여수 인근 ‘소리도’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제주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862톤짜리 여객선 남영(南榮)호가 침몰한 것이다. 인명피해 323명, 사상 최악의 연안 해난사고였다. 당시 국내 최대의 대형여객선이었던 남영호의 침몰은 선원들의 근무태만과 안전불감증이 만들어낸 인재(人災)로 밝혀졌다.
정원초과와 과적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정원 302명에 탑승인원은 338명. 연말 대목을 노리고 마구 실은 농산물 화물의 규모는 130톤의 적재정량을 넘어선 230톤에 이르렀다. 남영호는 성산포항을 떠날 때부터 좌현으로 10도 기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항을 강행했다. 사고는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사고의 뒤처리 역시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국가적 망신까지 불렀다. 침몰 당시 남영호에서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국내에서는 단 한 곳도 수신하지 못하였고, 일본에서만 희미하게 수신할 수 있었으며, 사고 현장 부근을 순시하던 일본 해상 보안순시선 구사사카마루호가 남영호의 참사현장을 확인해 일본 해상보안청에 직접 보고했다.
이에 따라 일본 교도통신이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으며, 15일 오전 11시에는 국내 라디오 전파를 타고 남영호 침몰참사 소식이 도민들에게 전해졌다. 결국 생존승객들이 구조된 것은 멀리서 온 일본 어선에 의해서였다. 일본 측에서는 수신 즉시 한국 해경에 무선연락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해경은 4시간 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나온 이후에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결국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 1시. 일본의 순시선 급파보다 네 시간이나 늦었다. 당국이 헤매는 사이 표류하던 생존자들은 추가 구조된 6명을 제외하고는 영하의 바다에서 얼어 죽었다. 총체적 부실이었음에도 몇몇 하위직만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쌍고동에 허공 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가 들어간 가요 ‘밤 항구 연락선’조차 국가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국가 위신 추락은 정부와 관료들이 저지르고, 국민들만 타박한 셈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가 정원 초과와 악천후 속의 무리한 운항으로 침몰해 292명이 희생됐다. 사고 발생 이틀 만인 10월 12일, 사고 현장을 방문한 김 대통령은 ‘사과’부터 했다. 또, 해당 사고의 ‘최종 책임 주체’인 대통령으로서 재발 방지를 다짐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승객들은 대부분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낚시꾼들로, 구명조끼 등을 제대로 입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났다.
출항 당시 기상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당시 기상 상황을 고려하면 선장은 출항을 해서는 안 되었지만, 출발예정 시간인 9시를 한참 지난 9시 40분에 무리하게 출항했다. 출항 후 갈수록 파도가 높아지고 기상이 악화되어 항해가 불가하다고 판단한 선장이 회항하려 선수를 돌리는 순간, 선체가 심한 파도너울에 기우뚱거렸고, 승객과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서해훼리호는 정원을 초과해 운항했다. 정원(221명)보다 141명을 더 태웠고, 배의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정원 초과와 악천후에도 출항하게 된 배경은 운영난 때문이었다. 정부의 낙도보조항로 보조금이 예산부족으로 끊기자 운영난 타개를 위해 정원초과 등 무리한 운행을 감행했다. 또한 부실 운행 행태도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서해훼리호에는 승선원이 12명 있어야 하는데, 사고 당일에는 7명만이 탑승했다. 이 중 비상상황에 대처할 안전요원은 단 2명이었다. 특히 이날은 항해사마저 휴가를 이유로 탑승하지 않았다. 회사는 예비 항해사를 쓰지 않고 갑판장에게 항해사 노릇을 하게 했다. 이 역시 예정된 인재였던 것이다.
이때에도 사고의 뒤처리 역시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침몰 뒤 승객 구조가 늦어져 희생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자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구조에 나선 이들은 근처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었다. 이들이 조난 승객들을 구조했다.
반면 군과 경찰의 구조선은 사고 발생 뒤 1시간이나 지나서 현장에 도착했다. 군산해양경찰서가 신고를 받은 것은 사건발생 5분 만이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서야 전북경찰청 헬기 1대가 출동했고, 사고 현장에는 사고발생 55분 만에야 도착했다. 또 해양경찰서 소속 경비함정도 현장 도착에 1시간이나 걸렸다. 경찰헬기와 경비함은 단 한사람의 생존자도 구출하지 못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했다. 역대 4번째 초대형 사고다. 1953, 1970, 1993, 2014. 근 20여 년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일어난 대형선박사고사는 마치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고 하는 것 같다. 이 슬픈 대한민국 해난사고의 연표를 보면서, 두 세대를 넘어서는 60여 년 동안 여전히 반복되는 이 사회의 장기 지속 부실과 불감증에 놀랄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이 나라는 과거의 사고로부터 단 한 치의 교훈도 챙기지 못하는가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나라의 덩치만 키웠지 한 치도 성숙하지 못한 셈이다. 정부나 기업이나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은 “안 되면 되게 하라”, “자칫 사람이 상할 수도 있지만 당장 시급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효율성을 우선한 ‘빨리빨리’의 속도전,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에 빠져,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으며, 당장의 목표달성에 몰두하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지속시켜 왔다. 대형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아무리 재발 방지를 외치고, 온갖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체 생색을 내면서도 소용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위의 기사들에서 날짜를 지워버리면, 오늘 현재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60년 전의 문제점들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와중인 50년대에 침몰한 창경호의 경우, 사건 발생 3년 후에야 선체를 인양했다든가, 정확한 사망인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 등은 그 당시 기술력과 열악한 경제수준을 고려하면 일견 수긍이 가지만,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사고가 반복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기술적 진보니 세계적인 경제규모니 하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막상 사고가 터지면, 호들갑 떨면서 단행한 후속조치의 결과란 게 반복적인 사고의 발생뿐이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오늘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차디 찬 바다 속에 가족을 잠겨 놓고 명절을 맞을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차례 상에 음식을 올리고 술을 친들 한이 풀리겠습니까. 지켜보는 우리도 이렇게 애간장이 타는데…….
사고가 나고 다섯 달이 되어 가는 이 시점까지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한 나리님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위에 인용한 기사 중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사고가 반복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기술적 진보니 세계적인 경제규모니 하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막상 사고가 터지면, 호들갑 떨면서 단행한 후속조치의 결과란 게 반복적인 사고의 발생뿐이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부분이나마 새겨 읽으시고, 다시는 국민들이 인재(人災), 부실(不實), 안전불감증(安全不感症), 책임회피(責任回避) 따위의 말을 듣지 않도록, 그래서 기가 막혀 졸도하지 않도록, 간절히 청해 올리오니, 이 번 기회에 나라 일 한번 제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의민주주의라고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대신 반영하는 정치인이 과연 있기는 한건지 우울한 추석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버전으로 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참 정치인 열명만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나라를 용서하리라"
옳습니다. 참 정치인 열명 찾기 힘든 나라.... 원래는 부패한 몇명만 제거하면 다 잘된다가 맞는 건데....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뜨거운 걸 아는 어떤 사람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요.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한 사람쯤 쓴소리를 하고 내발로 정치판을 버림직도 한데.... 세월호 유족을 생각하면 추석도 즐겁지 않습니다.
근 20여 년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일어난 대형선박사고사는 마치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고 하는 것 같다. 이 슬픈 해난사고의 연표를 보면서, 두 세대를 넘어서는 60여 년 동안 여전히 반복되는 이 사회의 장기 지속 부실과 불감증에 놀랄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이 나라는 과거의 사고로부터 단 한 치의 교훈도 챙기지 못하는가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나라의 덩치만 키웠지 한 치도 성숙하지 못한 셈이다.- 제가 평소에 한탄스럽게 여기는 부분 입니다.
국민들의 안전불감증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은 우리나라는 스스로 책임질 줄 모르기에 [네탓민국]이지요. 좋은글 감사 합니다.
선박사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부실이 밝혀지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도덕적이지 못한 사회 지도층부터, 전우를 죽을 때까지 매 때린 사병들까지.... 나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근본적 치료방법이 있기는 한지....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개조론이 그리운 시대이기는 한데, 소위 지도층 인사들까지 저 모양이니 누굴 믿고 따를지....
다만 희망인 것은 아이들입니다. 명절 연휴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책을 사러 온 아이들을 보고 '이 아이들의 시대가 되면...'하고 희망을 걸어 보았습니다. 맑고 밝은 아이들.... 못난 어른 소릴랑 그만 듣고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볼 생각입니다. 그게 희망이에요.
@과하객 형님 가게로 저도 책을 사러 가고 싶습니다. 편도암,폐암,임파선 암 관련과 말기암을 극복한 사람들의 수기, 컴퓨터 서적... 손님들이 많아져 번창하는 고서점이 되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리피터 책읽기 좋은 계절 가을이 문턱이네요. 언제든지 방문해 주세요. 미리 전화하시고....
항상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과하객 형님 요즘 부친이 병환 중이고 집 이사 관계로 분주하여 정리되는 대로 전화 후 병점 회원과 함께
책방에 들리겠습니다.
@리피터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 주시고요.
@과하객 형님 알겠습니다. 이사간지 보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집안 정리가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친의 상태도 별로 좋지않아 걱정 입니다. 여하간 지난 8,9월, 그리고 지금
10월까지 분주함의 연속 입니다.
어쩜....고구마캐보면 줄줄이 딸려오는거 있어요
영화붙잡고 카페 들어왔다가 예사롭지 않은 글들에 심취해 있습니다
한동안 푹 빠져볼랍니다 감사합니다
여성의 고급스러운 품격이 느껴지는 닉인 샤넬 님 반갑습니다.
본 카페는 회원 간의 답글과 댓글이 타카페 보다 활성화 되어있어
서로의 마음을 허심탄회 하게 털어놓고 다사로운 정감을 나누는 카페 입니다.
과하객 님의 세련된 글과 함께 [피터의 네버랜드]에 오셔서 좋은 글과 사진과
음악이 드리는 감성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 카페의 장점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인데, 카페지기 보리수님의 인품 덕에 제가 호가호위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와 비슷한 사고가 50년전에도 있었군요...통탄할 사고가 끊이지 않은셈입니다
숭례문 화재...세월호 참사....
그러게 말입니다. 반갑잖은 사고가 20년 주기로 반복되곤 하였으니... 최소한의 학습효과도 얻지 못한 위정자들.... 답답한 일입니다.
참 답답하지요 50 년 전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명절 귀향 열차는 겨울에도 불이 나게 땀을 흘렸지요 요즘 그런 사고가 났다는 것 용서가 안되는 일이지요럽지요 줄줄이 썩었어요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기차 선반에도 복도 심지어 화장실 까지 사람들이 ...빠져나오기도 힘들어 내릴때 참 힘들었지요
그렇지만
참으로
책임감이 없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민족개조론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합니다
책임감은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지 .... 배려가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것 같아요
50년 전의 완행열차...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으로 만원이던.... 그랬지요, 그 시절은.... 카롤리나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나네요. 아직 꿈이 있었는데.... 생모도 살아계셨고.... 그립네요....
안창호 선생 전기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흥사단에서 발행한 정본으로.... 미국에 가셨을 때 조선 사람들이 서로 상투를 잡아쥐고 싸움을 하고 있는 걸 보시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셨다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편가르기 싸움이 그치질 않으니....도산 선생 같은 분이 또 나서셔야 하는데.... 서로 배려하는 사회.... 이루어지겠지요.... 우리 생전에....
와,.. 긴글 다읽게되네요 ㅎㅎ
읽어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잘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
음
잘읽었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읽고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