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씨와 떠나는 `미수 허목의 자취 찾기'
삼척 가는 길은 늘 감회 남달라 …
처음으로 기차 타고 도착한 곳
차창 밖으로 바다도 처음 보았고
해수욕을 처음 해본 곳이기도
외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죽서루(竹西樓)로 안내
죽서루 올라 허목의 글씨인
제일계정(第一溪亭)을 보았을 터
풍랑으로 바닷가 피해 잦으니
동해 칭송하는 글 `동해송'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로 비문 새겨
풍랑 진정시킨 비석 `척주동해비'
척주동해비 있는 초록의 육향산
어두워졌을 때 건너편서 바라보면가로등 불빛에 비친 어떤 나무
마치 거대한 부처 형상처럼 보여
언제부턴가 삼척 주민들은
이사나 개업을 하는 사람에게
탁본한 척주동해비를 왕왕 선물
자연재해로부터 지켜준다고 믿어삼척(三陟)가는 길은 늘 감회가 남다르다. 어린 시절 흙먼지 풀풀 날리던 대관령을 넘어 강릉역에 도착한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삼척이다.
처음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기차 안에서 바다도 처음 보았고 해수욕이란 것도 처음 해본 곳이 바로 삼척이었다. 삼척은 산골마을에 살던 내게 있어 온통 처음의 것들이 지천인 곳이었다. 그러하기에 이번에 허목(許穆) 선생을 만나러 가는 마음 또한 그의 동해송(東海頌)처럼 `출렁댐이 넓고도 깊었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의 삼척행에서부터 이미 미수 허목의 자취와 만나고 있었다. 삼척 사람들은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죽서루(竹西樓)와 그 앞 오십천을 건너가는 출렁다리(지금은 철거되었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지금의 삼척항인 정라진(汀羅津)이다. 거기에다가 마침 내가 머물렀던 친척집은 정라진으로 가는 언덕길(지금은 그 언덕도 사라졌다) 근처, 육향산(六香山) 건너편의 산동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몰랐지만 죽서루에 올라 머리를 젖혀 허목의 글씨인 제일계정(第一溪亭)을 보았을 터이고 헉헉거리며 육향산 계단을 하나하나 밟은 뒤 검은 돌에서 지렁이인지 올챙이인지가 기어가는 듯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평수토찬비(平水土贊碑)를 기웃거렸다는 얘기다. 또 어느 날은 정라진 방파제에 나가 하릴없이 쏘다녔는데 그곳은 바로 척주동해비를 처음 세웠던 돌섬인 만리도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저 코를 줄줄 흘리던 꼬맹이일 뿐이었다.
먼저 삼척시립박물관에 가기 위해 죽서루 남쪽 오십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옛날 오줌을 찔끔거리게 만들었던 출렁다리 대신에 생겨난 콘크리트 다리였다. 관장 겸 학예사인 김태수 선생의 허목 사랑이 대단했다. 박물관에는 허목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그에게 만리도에 있던 원래의 척주동해비가 파손되고 지금의 육향산으로 자리를 옮긴 까닭에 대해 물었다. 풍랑에 의해 파손되었다는 설과 허목의 반대쪽 당파에서 고의로 파손했다는 설, 그리고 전서체(篆書體)의 일인자였던 그의 글씨를 허다하게 탁본해야 했던 탁본부역이 힘들어서 누군가가 파손했다는 설이 삼척 일대에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턴가 삼척 사람들은 이사를 하거나 개업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탁본한 척주동해비를 왕왕 선물로 한다는 것이다. 그걸 걸어놓으면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믿는 모양이다. 실제로 지난 2002년에 들이닥친 태풍 루사는 삼척지역에 500㎜의 비를 퍼부었는데 탁본을 소장하고 있던 집이나 걸려 있던 방은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1993년의 해일, 그리고 1983년에는 일본 해저의 지진여파로 발생한 쓰나미가 들이닥쳐 삼척항 일대가 침수된 적도 있었다. 기록에는 1959년의 사라호 태풍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적혀 있다. 그동안 삼척 사람들과 바다와의 관계가 만만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즉시 박물관 기념품코너에서 허목의 동해송이 적혀 있는, 천연염색한 스카프 두 장을 구입해 목에 걸었다. 물론 한 장은 강원일보 최유진 기자에게 주었다. 애인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관동팔경 중 가장 빼어나다는 죽서루였다. 옥빛의 오십천이 돌아나가는 절벽 위에 죽서루는 자리하고 있었다. 벚나무, 오죽, 모란, 향나무, 그리고 다른 어떤 나무보다 우람한 회화나무 세 그루의 그늘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죽서루에는 과연 시인 문사들의 자취로 가득했다. 이승휴, 정철, 이이, 숙종, 정조…. 하지만 나의 눈은 어두워 겨우 이름이나 더듬을 뿐이었다. 죽서루를 그린 그림 또한 많다고 한다. 강세황,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허목은 1660년 당쟁에서 패배한 뒤 삼척부사로 임명돼 처음으로 죽서루를 찾았을 것이다. 당시의 관아가 있던 자리는 지금의 죽서루 마당이었다. 2년여의 재임 동안 허목은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실시하고 삼척부 읍지를 편찬했는데 그것이 척주지(陟州誌)다. 서문에서 `척주는 산과 바다의 모퉁이인 동계(東界)의 궁벽한 곳으로서 문헌도 없고, 고사(古事)도 밝혀져 있지 못하며,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것도 역시 빠뜨린 부분이 많고, 특히 근자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편찬 의도를 밝혔다. 아마 그 과정을 통해 목민관으로서 삼척의 제반 상황에 대해 숙지하였을 것이고 그 인식이 척주동해비와 평수토찬비 건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죽서루에 걸린 그의 글씨는 물이 좁고 넓은 바위틈을 빠져나가듯 유연하고 힘이 있어 보였다.
최 기자와 나는 육향산에 오르기 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삼거리 근처의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냉면집이었다. 열어 놓은 문 너머로 척주동해비가 있는 초록의 육향산이 보였다. 내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육향산이었다. 어두워졌을 때 건너편 산동네에서 바라보는 육향산은 왠지 신비로웠다. 그것은 어떤 나무 때문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육향산의 나무는 마치 거대한 부처의 형상처럼 보였다. 산동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여름밤 마당의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부처를 닮은 나무를 바라보았던 기억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어른들은 건너편 시멘트회사의 직원이 고정간첩으로 밝혀져 잡혀갔다는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꺼내놓곤 했다. 무서움에 떨다 잠이 든 나는 다음 날 육향산 곳곳을 쏘다니며 밤에 본 나무를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실망한 나는 형이 영사기사로 일하는 산 아래 정라극장의 컴컴한 어둠 속에서 문오장, 박노식이 나오는 영화만 줄곧 보다가 나왔는데 다시 밤이 돌아오면 부처를 닮은 나무는 어김없이 불빛 속에서 되살아나곤 했다. 냉면을 먹고 나와 지금은 사라진 정라극장 자리를 찾았지만 햇살이 몹시 뜨거워 서둘러 육향산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1661년 삼척부사 허목이 `동해의 풍랑으로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아 이를 막고자 동해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로 비문을 새겨 바닷가에 세워서 풍랑을 진정시킨 비석이 동해척주비라고 한다. 그 뒤 앞에서 밝힌 것처럼 1710년 삼척부사 박내정이 유실된 비석의 탁본으로 옛 비석과 같은 비석을 다시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홍양호는 “지금 동해비를 보니 그 문사(文辭)의 크기가 큰 바다와 같고, 그 소리가 노도와 같아 만약 바다에 신령이 있다면 그 글씨에 황홀해질 것이니, 허목이 아니면 누가 다시 이 글과 글씨를 썼겠는가”하고 감탄하였다 한다. 평수토찬비도 같은 내력을 지닌 비석이다.' 나는 육향산 정상의 비석 주변을 탑돌이하듯 천천히 돌았다. 그동안 길이 바뀌고 집이 사라지고 새 집이 생겼지만 척주동해비의 단단한 글씨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단호하게 포구 너머의 동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수 허목은 2년여의 짧은 시간을 삼척에 머물다 떠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줄곧 삼척에 머무르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바다 넓고 넓어 / 온갖 냇물 모여드니 / 그 큼이 끝이 없네 / 동북쪽의 사해(沙海)여서 / 밀물과 썰물이 없으므로 / 대택(大澤)이라 할 만하네 / 바닷물 하늘에 닿아 / 출렁임이 넓고도 깊으니… - 척주동해비에서
육향산 아래 `미수사'를 둘러보고 삼척을 떠나려다가 곰치국을 파는 인근 식당에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옆 벽에 큼직한 척주동해비 탁본이 걸려 있었다. 주인 김성수씨에게 탁본의 내력을 물었다.
“거래처에서 개업 선물로 줬어요.”
“좋은 일이 있었어요?”
“손님이 많이 오지 뭐!”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돌아오는 길, 동해는 처음처럼 푸르고 창창했다.
역사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 미수 허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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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대표하는 도학가이자 정치거물, 서예가로도 이름 높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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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지성 허목,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선비
-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미수 허목'
그는 왜란 중에 태어나
20대 말에 인조반정 거쳐
40대 초에 병자호란 겪어
일생 자체가 조선왕조의 격변기
30세에 과거의 뜻 버리고
30년 넘게 산림의 길 걸어
조선성리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도가사상에 심취해 유유자적
73세 만년에 '청사열전'으로 결실
63세 사헌부 지평에 특채
양란으로 무너진 사회질서를
禮로 사회정의 세우려 했지만
'기해예송'에서 남인이 패배하고
그는 삼척부사로 외보
강원도와 인연 맺게 된 것
향약으로 백성 교화하고 동해송 지어,
이 글은 조수 피해 잦은 곳에 세운
척주동해비의 비문이 되었고
그가 즐겨 쓰던 고전체로 새겨
도덕성과 일관된 지조 지킨 결과
88세까지 천수를 다했다
미수 허목(1595~1682년)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흔히 조선왕조의 지식인을 선비라고 하는데 허목은 일반적인 선비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선비이자 선명한 정치노선을 걸은 사대부였다.
그는 왜란 중에 태어나 20대 말에 인조반정을 거쳐 40대 초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그의 일생 자체가 조선왕조의 격변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92년(선조25)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시작된 왜란은 동양 삼국(조선 중국 일본)이 벌인 당대의 세계대전으로 7년간이나 계속되었고 전쟁터가 된 조선의 피해가 가장 컸다.
조선은 16세기 사림의 정계 진출로 학파가 정파로 전환되어 붕당이 형성되던 시대였다. 영남학파가 동인으로 기호학파가 서인으로 전환되었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되어 남인 북인 서인의 삼당체제가 되어 있었다. 기존의 훈구파는 여전히 정치집단으로 존재했지만, 사림을 주축으로 정계가 재편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 정계가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물갈이되는 정권교체기를 이용했던 것이다.
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의병활동으로 명분이 강했던 광해군정권이 들어섰지만 왕권강화를 앞세워 민생문제를 등한시한다는 비판과 새로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외교정책이 현실론에 치우쳐 사림사회의 노선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더욱이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함)라는 패륜행위로 지탄받게 되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에 순수 성리학도인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권이 들어섰으나 불과 10년 후에 병자호란으로 패전의 상처를 입었다.
허목은 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교(喬)의 삼 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으로 태어날 때부터 손에 문(文)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를 문보(文甫)라 하였다. 그는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이 경기도 연천이었으므로 그 곳의 태령산(台嶺山)에서 따다가 호를 태령산인으로 하였다. 그러나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긴 늙은이라고 하여 나이 들어서는 미수(眉 )라는 호를 즐겨 썼다.
사촌형인 관설헌(觀雪軒) 허후(許厚· 1588~1670년)와 같은 집 같은 방에서 7년 차를 두고 태어났다. 허후는 허목의 존경하는 형이자 선생이요, 평생의 지기로 영원한 멘토였다. 어려서는 허후에게 배웠고 23세에 허후와 더불어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년)를 찾아가 3년 동안 사사하였다. 그는 허후와 함께 퇴계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감으로써 도통론(道統論)적 위상을 확립했던 것이다.
퇴계의 고제로 꼽히는 한강의 학통에 들어가 퇴계학파의 일원이 되고 17세기 붕당정치에서 남인 중 청남의 영수로 활약하였지만, 그의 가계는 원래 북인으로 소북계였다. 광해군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그 주도세력이었던 북인은 이름만 남고 정치력을 상실하여 대부분이 퇴계에 학통을 대고 근기남인으로 편입되었는데 허목의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17세기 붕당정치의 중심축은 산림(山林)으로서 학파와 정파의 영수이자 세도(世道·세상을 다스리는 올바른 도리)를 담당하는 존재였다. 이에 실권한 붕당의 학자들은 산림의 길을 선택하여 몇십 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며 때를 기다리는 풍조가 생겨났다. 허목이 산림의 길을 택한 것도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다. 그의 나이 29세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북인이던 그의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조반정 다음해인 1624년 30세에 과거의 뜻을 버리고 경기도 광주 우천의 자봉산에 들어가 30년 넘게 산림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여 이미 조선에 토착화된 조선 성리학의 주류에서 벗어났다. 도가사상에 심취하였고 도가적 우주관과 인생관으로 은일의 삶을 살며 유유자적하였다. 이때의 지적 탐구는 뒤에 `청사열전(淸士列傳)'으로 결실을 맺었다. 조선 전기의 도가로 알려진 김시습·정희량·정렴·정작·정두경·강서·조충남 등 일곱 사람의 열전이다. 73세의 만년에 이 책을 엮은 것을 보면 그의 도가사상에 대한 경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 허교 역시 도가로 알려진 박지화(서경덕 제자)의 제자였다.
그의 학문은 육경(六經: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주례)을 기본텍스트로 하였다. 글은 육경에 바탕을 둔 육경고문이고 학문도 육경을 기초로 한 육경고학(古學)이며 글씨도 요순시대의 서체라는 고전체(古篆體)를 즐겨 썼다. 성리학이 논맹용학시서역(논어·맹자·중용·대학·시경·서경·역경)의 칠서(七書)를 정전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조선 성리학자들의 기본경전도 칠서였음에 비하여 그는 원시유학의 정전이던 육경을 선택하여 차별성을 분명히 하였다. 허목의 학풍과 문풍은 모두 고(古)라는 글자로 대변되었고 조선성리학에서 벗어나 육경학을 기초로 유학의 원류에 소급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었다.
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이념 정당인 붕당사이에 전개된 붕당정치 하에서 학계의 주류가 정계의 주류가 되는 것이 대세였는데 서인이 조선성리학계의 주류로 부상하자 허목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육경학을 고집하며 고학(古學)을 추구하였다. 이는 당대의 정치 쟁점이던 예송논쟁에서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그는 30년 이상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였고 산림으로 대접받아 1657년 63세의 나이로 사헌부 지평(정5품)에 특채되었다. 효종이 산림들을 초치하여 국가재건을 도모하던 비상시국에 남인산림으로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란(왜란과 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상처받은 국민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국가적 과업이었다. 산림들은 붕당을 초월하여 문치주의를 계승하고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예치(禮治·예로써 나라를 다스림)를 지향하였다. 양란으로 무너진 사회질서를 예를 기준으로 재정비하여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17세기 후반 전개된 예송은 예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예가 정치문제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기간에 대하여 붕당사이에 이견이 제기된 것이다. 이것이 제1차 예송인 기해예송이다. 서인은 신권을 강화하려는 입장이었고, 남인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입장이었다. 학문적 차이가 예를 적용하는 기준의 차이였다.
기해예송에서 남인이 패배하고 허목은 삼척부사로 외보되었다. 허목이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기해예송이 일어난 다음해인 1660년(현종원년) 9월 66세로 삼척에 부임한 허목은 다음해인 1661년에 향약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동해송을 지었다. 이글은 조수의 피해가 잦은 곳에 세운 척주동해비의 비문이 되었고 그가 즐겨 쓰던 고전체로 새겼다. 그의 독특한 서체는 스스로 과두문자( 文字)라고 규정하였듯이 올챙이를 닮았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었다. 1662년 68세로 `척주지(陟州誌)'를 지어 삼척에 대한 관심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해 가을 파관하고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갔다. 햇수로는 3년이나 만 2년간 삼척부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후 12년 간 고향 연천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674년(현종15) 삼조석덕지사(三朝碩德之士·효종, 현종, 숙종 삼대에 걸쳐 봉사한 큰 선비)로 인정받아 대사헌에 특배되었다. 이해에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일어나고 남인이 승리한 결과였다. 예송의 와중에서 현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한 숙종이 남인의 예론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예를 사회정의 구현의 준거로 삼자는 데는 각 붕당이 합의하였지만, 방법론의 차이로 왕권 강화냐, 신권 강화냐 하는 두 개의 노선으로 분립하였던 것이다. 인조반정 후 여당의 역할을 하던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허목은 각각 자기 붕당을 대표하는 산림출신 이론가로서 예송의 대표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붕당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기의 강력한 맞수였지만 인간적인 믿음 또한 두터웠다.
송시열이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자 당대의 유의(儒醫)로 이름 높던 허목의 약 처방을 받게 되었는데 그 처방에 비상이 들어있었다. 주위에서는 모두 의심하며 말렸지만 송시열은 허목을 믿었고 또 비상은 극약이지만 꼭 필요할 때 소량을 쓰면 효과가 크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처방을 따라 약을 지어 먹고 완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갑인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였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노선분화하자 허목은 영의정 허적(1610~1680년)이 주도하던 탁남에 맞서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탁남이 귀족화하는 행태를 비판하며 맑음의 정신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강경파가 청남이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정권이 몰락할 때도 향리인 연천에 방출되었을 뿐, 88세까지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도덕성과 일관된 지조 지킴의 결과였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프로필
■1942년 5월24일 춘천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 서울대 대학원 졸업
■2007년 8월 서울대 명예교수
■경력
1981년 7월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1999년 5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관장
2008년 3월 제10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화재위원회 문화재위원
한국고전번역원 기획편집위원회 위원
유네스코 문화분과위원회 위원
감사원 환경문화자문·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문제 자문위원회 위원
문화관광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서울역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 등
■수상경력
2004년 제4회 비추미여성대상 별리상(교육·연구개발 부문) 수상, 2010년 제1회 민세상 학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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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먼저 삼척시립박물관에 가기 위해 죽서루 남쪽 오십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옛날 오줌을 찔끔거리게 만들었던 출렁다리 대신에 생겨난 콘크리트 다리였다. 관장 겸 학예사인 김태수 선생의 허목 사랑이 대단했다. 박물관에는 허목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이 글을 쓴 김도연 소설가가 김태수관장님을 인터뷰 한 내용입니다. 평찬 출신 이 소설가는 강원대 불문과 출신으로 강원일보 신춘문예, 중앙문예신인상을 통한 촉망받는 작가로 임순례 감독, 공효진·김영필 주연의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47세에 아직 미혼 부모님과 진부에서 농사를 짓고 잇습니다.
기분좋은 소식 올려줘서 고마워요, 성옥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