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방학특강1 2015. 6.16.mp3
대학원 방학특강1-2 2015.6.16.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6월 16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제2장 연기법
2-4. 연기법을 통해 발견된 위빠사나 수행
구도자께서는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연기가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거듭 면밀하게 통찰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가지 요소가 모두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통해서 생긴 문제의 해답은 오직 몸과 마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불교의 세계관이 탄생됩니다. 불교는 오직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합니다. 붓다께서 내가 전부를 알았다거나 또는 일체를 알았다거나 또는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때의 전부나 일체나 모든 것은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말합니다.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오온(五蘊)이라고 하는데 이 오온을 벗어난 것은 불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우주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전부나, 일체나, 모든 것은 오온이며 십이처(十二處)고 십팔계(十八界)입니다.
오온은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십이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십팔계는 십이처에다 다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포함되어서 십팔계가 됩니다. 바로 이 십팔계가 불교의 세계관이며 전부입니다. 이것을 벗어난 것은 관념이고 추론이며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논외로 칩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지금 여기 있는 몸과 마음이며 이것들은 언제나 증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가령 어떻다고 가정을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런 가정으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이 연기의 구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보니 몸과 마음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느낌이었습니다. 느낌은 연기에서나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합니다. 구도자께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니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사마타 수행밖에 없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근접집중을 얻은 뒤에 근본집중에 이르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고요함을 얻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을 시작하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정신적 요소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과 하나가 되는 밀착수행을 합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 회의적 의심입니다. 수행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 내제해 있는 이러한 요소들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니 느낌이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느낌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리라는 것은 하나가 되지 않고 객관화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합니다. 이렇게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집중이 찰나삼매입니다. 이 찰나삼매가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와 같이 찰나삼매로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린 위빠사나 수행이 지혜수행입니다.
위빠사나라는 말은 대상을 분리해서 본다는 뜻 외에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면 대상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대신 고요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대상을 분리해서 보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발견합니다.
이 세 가지 법을 본 지혜로 욕망이 끊어지면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행자를 막론하고 연기와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역대의 모든 붓다와 아라한이 모두 똑 같습니다. 또 무아는 깨달음을 완성하는 마지막 지혜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있는 한 영원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있는 한 집착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두콩알 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자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아는 연기의 열두 가지 요소 중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연기에는 단지 그 순간의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흐름만 있지 이것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나 자아는 결코 없습니다. 자아를 아트만(ārtman)이라고 하는데 이는 영혼, 불변하는 실체를 말하는 힌두교의 교리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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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법문 가슴에 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