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박사는 없었다 (1), 고대의 한국과 일본은 같은 나라였다.
왕인은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 이야기
고대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하였다는 왕인 박사의 스토리는 일본인만의 기록이며 관심이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왕인이 느닷없이 한국인의 현실세계에 재현하게 된 것은 조선이 멸망할 무렵, 근대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면서부터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왕인의 이야기가 재탄생된 데에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경영정책으로 5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왕인박사의 부활을 위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왕인박사비의 건립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되던 시대에, 왕인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헌책에서 꺼내어 '내선일체' 라는 사상으로 조선인을 속박한 것이다.
식민지 조선인 교육의 모델, 왕인
왕인은 지어낸 이야기
왕인과 아직기는 고대의 한국과 일본 간에 있었던 활발한 문화교류의 상징으로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없고 일본기록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왕인은 500년대 초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ㆍ야공ㆍ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여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워 아스카飛鳥 문화의 원조가 되었고 학문의 스승이 되어 기술, 공예, 가요의 창시 등 일본문화의 시조로 추앙받는 등 일본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기록된다는 것으로 이는 초등학생에게도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AD.500년 이전의 일본에는 천자문 책도 없었고, 글자도 없었다는 전제하에서 왕인박사의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데, 과연 이 시기의 일본 열도에는 한자라는 글자가 없었을까?
중국 역사서의 413~502년간의 기록에는 왜5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을 보내고 진동대장군 또는 정동대장군의 대단한 관직을 책봉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왜5왕 이전의 시대에 명문銘文이 새겨진 동경(청동거울)이 다수 출토되었는데도, 500년대 초가 되어서야 왕인이 달랑 천자문책 한 권을 들고 건너가서 일본문화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왜5왕보다 훨씬 이전의 일로, 왜의 여왕인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179~247)가 중국과 신라에 사절을 보낸 일이 있고, 중국으로부터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관직을 받았던 기록도 있다.
이 '히미코' 시대의 국제외교는 왕인보다 무려 200~300년 이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문자의 매개가 없이 이러한 고도의 외교활동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수가 있을까?
왕인보다 먼저 왜국에 갔던 아직기는 말을 기르다가 경서에 능통한 것을 안 왜왕이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는데, 후에 아직기보다 더 훌륭한 왕인이 백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왜왕이 왕인을 진상하라고 백제왕에게 명령하여, 왕인이 건너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이 높았다는 아직기가 말 기르는 일을 맡으려고 일본에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했던 아직기가 문자도 없는 왜국에서 무슨 대단한 학문활동을 펼칠 일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직기가 경서에 능통한 것을 일본 왕이 알고서 태자의 스승으로 삼을 정도였는데, 그러한 아직기를 두고 일본왕이 새삼 천자문과 논어를 지참하고 왕인을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그렇게 된다면, 경서에 능통했던 아직기는 왜의 태자에게 천자문을 빼고 다른 무엇을 가르쳤는가?
이러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일본에 문자가 없었다는 주장은 아주 큰 잘못이 있다.
왕인은,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옮겨간 이야기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워서 아스카飛鳥 문화와 나라奈良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든가, 천문ㆍ역법ㆍ지리 등을 전하여 백제문화가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도록 했다는 왕인의 업적이라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두 국가 차원에서 제왕이 추진할 수 있는 성격이며 일개 학자가 일국의 문화를 창달하거나 못하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왕인의 업적이라는 것은 아예 백제인들이 문화와 산업을 몽땅 가지고 일본으로 옮겨갔다는 얘기로만 해석될 수 있다.
말하자면 유럽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해줬다고 말하기보다, 유럽인들이 대거로 미국 땅에 건너와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대로 미국인이 되었고, 유럽인들이 타고 온 메이플라워 등의 선편과 출발지ㆍ도착시간ㆍ승객명단 등의 기록이 분명히 있음에도, 이를 두고 미국인들이 유럽에서 건너온 사실은 지워버리고 막연히 도래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하였고 미국은 유럽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도래한 유럽인들은 바로 미국인 자신들로서 자기가 자기자신과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는 이상한 이야기로 되어버린다.
그것은 미국 땅에 건너온 사람들은 감춰지고 오직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만이 남게 되는데, 일본서기에 나오는 왕인의 문화 전수는 이와 동일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백제의 영역이었던 익산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이나 금동관모와 거의 같은 것이 일본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에서 출토되었고, 양국의 고분에서 서로 유사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백제의 우수한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장례의 풍속은 인간의 관습 중 가장 늦게 변하는 속성이 있는데, 백제와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분명히 한사람이 만든 것처럼 동일한 형태로서 피장자가 같은 혈통이거나 같은 집단에 소속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본다면 백제가 수만 가지의 문화나 산업을 전해 줬다기보다 숫제 백제 사람들이 문화와 산업을 통째로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다.
▲ 익산 입점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좌)와 고흥 길두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중앙) 그리고 일본의 '에다후나야마'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우). 백제와 왜에서의 출토품은 같은 사람, 또는 동일집단이 만든 것이 분명하다.
▲ 익산 입점리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좌)과 일본의 '에다후나야마'에서 출토된 동일한 모양의 금동신발(우). 위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백제와 왜가 분명히 같은 나라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단순히 문화를 주고 받았던 그런 관계가 절대 아니다.
백제와 왜 양쪽에서 출토되는 동일한 형태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그리고 왕인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윤영식(고대의 일본은 백제ㆍ가야의 영토였다고 주장)과 '존 카터 코벨'(AD. 369~697의 기간 동안 일본이 가야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의 학설이 출현하기를 내심 기다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윤영식은 의문투성이의 두 사람을 “왕인은 근구수왕(백제 14대 왕)이며 아직기는 아신왕(백제 17대왕)"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전왕인묘'의 의미
오사카 부府의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왕인의 무덤은 그냥 ‘왕인묘'라고 하지 않고 '전왕인묘傳王仁墓'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왕인의 묘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여기에 대하여 특별히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가 매우 강하다.
"명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전伝일 뿐이며, 학문적으로 보증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18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발견되었다는 이 무덤은 왕인과 관련이 있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무덤 위에 묘석이 얹혀져 있는데 이러한 풍습은 고고학적으로도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에도시대 말기 국수주의적 학문인 고학(국학)이 보급되면서 새로운 전설이 더해졌는데, 왕인은 재능이 많으면서 천황에게는 충직한 하인(loyal servant)으로 칭송되어 묘에는 당시의 왕자 이름이 새겨진 석비가 세워졌다.
1800년대 말, 일본의 조선 합병을 위한 상징성이 더해졌는데, 그것은 왕인이 한국인이면서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역사적 선례가 되는 인물로 그려지면서 정치적으로 이용(polictically exploited) 되었다는 것이다.
에도시대에 시작된 왕인 스토리
왕인박사는 가공의 인물임에도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처럼 꾸며지고 조명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일본에서 유교가 가장 번성했던 에도시대 중기인 1731년, 쿄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並河誠所가 지리서를 편찬하기 위해서 오사카의 '후지사카' 마을에 들렸다가 유래를 알 수 없는 자연석을 발견하여 그것을 '왕인의 묘'라고 단정하여 옆에다 '박사 왕인의 묘'라고 쓴 나무 기둥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재일사학자인 김영달 씨는 여기에 대하여 “일개학자의 소망, 즉흥적인 착상, 공명심에 의한 역사의 날조로서 막부의 권위를 내세운 강압적(억지)인 비의 건립이다”라고 명확하게 답을 내리고 있다. 아래는 그의 글의 일부분이다.
"1731년, 쿄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가 지리서를 편찬하기 위해서 명소와 유적을 탐방하던 중 ‘킨야’禁野 의 ‘와다사'和田寺라는 절에서 '왕인분묘내조기'王仁墳廟来朝紀라는 고기록을 보았고, 그곳을 답사하여 '후지사카藤坂 마을의 ‘오니총’(才二塚)이라는 자연석을 보게 되었는데, 이렇다 할 근거도 없는 이곳을 '왕인의 묘' 라고 단정하여, 그 지역의 영주에게 진언하여 '박사왕인지묘'라고 새긴 묘석을 건립하였다.
'나미카와'의 지지편찬 조사사업은 막부(무신정권)의 명에 의한 것으로, 고서탐색과 비의 건립에 대하여 상부관청의 증서를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그는 막부의 권위를 배경으로 필드워크를 해온 것이다.
따라서 지방의 영주라고 하여도 그의 진언을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일개학자의 소망, 즉흥적인 착상, 공명심에 의하여 저질러진 역사의 날조로서 막부의 권위를 내세운 강압적인 비의 건립인 것이다.
더구나 ‘왕인분묘내조기'라는 것도 그 주변에 많이 있는 왕인 전승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시작된 왕인의 스토리는 일제의 조선병탄이 확실시되는 무렵에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추진되어 한일고대사에 있어서의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본천황을 섬기는데 한국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이만큼 적합한 인물이 달리 없으며, 한국인을 다스리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던 셈이다.
출처:『왕인 박사는 가짜다』, 곽 경, 2010, 19~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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