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구시민회관에서 있은 러시아내셔널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갔었습니다. 첫
연주곡이 글린카 작곡의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러시아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뿌쉬낀의 서사시를 바탕으로
1837~1842년 사이에 작곡된 곡입니다. 1842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1820년 봄 발표된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여섯 장으로 된 낭만적 서사시로 러시아 낭만주의 도래를 알려주는 효시로 평가되는데 젊은 세대의 환영을 받았지만
구세대로부터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17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837년 1월 연적과의 결투 후유증으로 사망한 뿌쉬낀은 한국에서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너무나 유명한 작가이지요.
지난 2012년 7월, 길을 가다 어느 가게에
전시되어 있던 것을 제가 찍은 것입니다. 이 시는 또 지하철 1호선 반월당 역 진천 월배 방향 플래트 홈 스크린 도어 쪽에도 붙어있습니다. 아마 50대 이상
분이라면 기억나시겠지만 제가 어린 시절 이발소에서 액자에 걸려있던 이 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뿌쉬낀은 당시의 중요한 개혁운동 (예를 들면 1825년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에 연루 의심을 받았고, 실제 저항적 조직 인사들과 친분이 있긴 했지만 정치조직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저항시들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장편 시 중에 ‘청동기마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여기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일어나 지금은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에 네바 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자 '표토르 대제'(영어로 피터 대제)의
청동기마상을 모델로 했습니다
그 내용은 말단 관리 예브게니가 대홍수로(실제로 1824년 11월 있었습니다) 애인 빠라샤를 잃고 삶의 모든 꿈과 희망을 포기한 채 세상을 등지고 문전걸식으로 미치광이 같은 삶을 살다 홍수로 무너진 애인의 집
문턱에서 쓸쓸히 죽는 그런 내용입니다.
'청동기마상' 앞을 흐르는 네바강은 참 아름다운 강입니다
가엾은 미치광이 예브게니는
우상의 발치를 빙빙 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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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동상 앞에 우울하게 서서
마치 악마의 힘에 사로잡힌 듯
이를 악문 채 두 주먹 불끈 쥐고서
무섭게 떨며 중얼거렸다.
<좋다, 너 기적의 창조자야!
어디 두고 보자--!> 그리고는 갑자기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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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을 높이 쳐든 청동 기마상이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그의 뒤를 쫓아 달려온다.
가련한 미치광이가 어디를 가든
청동기마상이
무겁게 말발굽 소리 울리며
밤새도록 그의 뒤를 따라왔다.
-번역은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을 사용함
예나 지금이나 권력 앞에 보통사람은 약자일 수 밖에 없지요. 동상에 속으로
욕 한 번 했다. 동상이 무섭게 쫓아오는 환영에 시달리는 예브게니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집합인 민중들은 때로 역사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약자이지요.
이 시대의 작가
이문열은 그 점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새하곡’(중국 시에 이런 제목이 다수 있지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중위: 사병근성?
강대욱 병장: 네, 무책임하고 피동적이고
잘 굴종하고 거기다가 뇌동하는 버릇, 감격하는 버릇, 그리고
정대하지 못하고 잔꾀에 밝은 것'
이런 말 하면 제 얼굴에 침 뱉기지만,
제가 교사시절 보면, 아이들이 무서운
하는 교사는 학교생활이 상대적으로 편합니다. 왜냐면 아이들이 알아서 기기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무서운 교사가 조금만 잘해주면
아이들은 쉽게 감격하고 환호합니다.
그러나 한번 아이들에게 만만하게 보인 교사는 어지간히 잘해 줘도 아이들은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 한 번 자기들 마음에 안들면 금방 대들지요.
사회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상대가 나름 힘이 있고 보복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대체로 사람들은 그 사람을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어지간해서는 보복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지요.
요즘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지만 사회 곳곳에는 인문학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고전들이 다시금 주목 받고 있고요. 고전이 고전인 것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해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좋아하는 사기를 예로 들면 사기를 읽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보다는 반고가 '한서'에서 사마천을 평한 것,
‘그 문장은 바르고 사실은 정확하며, 근거
없이 미화하지 않았고 악은 숨기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실록이라고 한다’
其文直,其事核,不虛美,不隱惡,故謂之實錄
를 사기를 읽고 읽어낼 수 있다면 그래도 인문학이 우리에게 유용한 무엇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뿌쉬낀의 작품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나오는
‘살리에리-
모든 사람이 말하지
지상에 정의는 없다고
그러나 정의는 천국에도 없어
내게는 이 사실이
기본음처럼 명백해’
(푸슈킨 선집, 최선 옮김, 민음사, 2011)
의 메시지가 뭘까를 곰곰 생각해 봅니다.
첫댓글 깊은 내용의 글에 저는 어릴 적 이발소 생각이 나네요. 그때 이발소를 장식했던 예술품()으로 생각나는 것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올리비아 핫세와 레오나드 화이팅)의 나란한 옆모습 상,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소녀, 그리고 위 사진 푸시킨의 두 줄. "생활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푸.시.킨" 제가 기억하고 있는 구절과는 조금 다르고 작자의 이름 표기도 조금은 다르네요. 그때의 가난했지만 넉넉했던 생활상이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러시아어 표기는 어느 것이 맞는지 참 가늠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일단 'ㅍ'발음은 원어로'ㅃ'가 맞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푸쉬킨'으로 통용되었지요.
그리고 시의 번역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사진에서 보통 '삶'으로 하는 부분을 '생활'로 한 게 특이하네요. 분위가 예전 이발소 분위기라서 한 번 찍어봤습니다. 요새도 저런 액자가 있네 하고요.
저도 요즘 가난했지만 마음은 정감 넘치고 풍요로웠던 옛날이 자꾸 그리워집니다.그러나 지난 일은 다 그리운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