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일. 습지, 열정의 낭비
습지
아침엔 원효봉 정상주변의 늪을 둘러보았다. 임도변은 병꽃들의 절정이 지나고 찔레가 피기 시작했다. 정상도 노랗게 수놓은 미나리아재비가 한풀 꺾이고 쥐오줌풀과 엉겅퀴가 나오기 시작했다. 원효봉 부근의 눈개승마가 화사했다. 하지만 눈개승마를 지켜보는 내 눈은 안쓰럽다. 이곳에는 할미꽃 등 여러 가지 꽃이 피었다. 특히 정상 사자봉에서 원효봉에 이르는 길 주변엔 과거 군부대의 철책 주변부라 사람의 손을 별로 타지 않아 귀한 야생화가 피어 있다. 하지만 등산객들의 채취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늘 위태위태하다. 사실 천성산의 대부분에 다양한 꽃이 많았지만 채취의 수난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상습지를 꾸준히 지켜보니 기쁨과 슬픔처럼 기대와 우려가 또한 교차한다. 본격적인 가뭄은 아니지만 사자늪과 애기늪은 벌써 말랐다. 사자늪이 습원을 유지하며 늪으로 자리잡기에는 물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 연병장의 자연복원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것도 서쪽 1/4 정도에 머물고 나머지는 건조해서 풀들이 정착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다. 애기늪은 군대가 있을 때 파놓은 참호선과 물골로 습지이긴 하지만 역시 물골로 물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물골과 둑의 높이차로 습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세 곳 습지 중 원효늪이 가뭄 때를 제외하면 꾸준히 물이 흐르는 습지이다. 하지만 이곳도 과거 쓰레기 매립지였던 탓에 환경이 좋지 않다. 시차를 두고 계속 지켜보니 이렇게 안보이던 것들도 저절로 많이 알게 되면서, 더불어 부풀었던 기대 대신 우려와 아쉬운 마음이 강해진다. 이렇게 큰 산도 문명 앞에 흔들리는 촛불과 같다.
열정의 낭비
그런데 오늘은 산악자전거가 80대나 내려왔다. 가장 많은 숫자다. 1년이 넘게 확성기로 계속 안내방송을 하고, 간혹 직접 만나 대화를 했지만 이들은 도무지 막무가내다. 심지어 지난봄엔 점프대까지 몰래 설치해 타기 시작하는 팀이 생기더니 그것이 소문이 났는지 오늘은 갑자기 숫자가 확 늘어 금지했을 때보다 훨씬 많아졌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혐오감도 들었다. 내가 느낀 절망감은 이미 수십 번 인이 박히게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다. 오후에 올라가보니 정상에 매달아놓은 ‘자전거는 내려가지 마시오’ 안내판도 누군가 떼어 없애버렸다.
사람들의 이성이 마비되고 욕망과 열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다. 겨울에도 지치지 않고 매주 오다시피 하고 점프대까지 설치한 20, 30대의 청년들은 더 그렇다. 그들은 당신은 당신 일을 하시오 우리는 우리 일을 하겠소 하면서 모든 말을 무시하고 제 하고 싶은 대로만 했다. 법적으로 고발하고 벌금을 물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러자면 양산시를 움직여 자연공원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연공원법에 의거해 이러이러한 사람은 고발고치하겠다고 고시를 하고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양산시는 그럴 마음이 없다. 이런 사정을 아니 산악자전거인들은 점점 자전거 통행금지 안내판이나 확성기 방송 따위를 완전히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 젊고 패기 있는 청년들이 습지복원지역과 습지보호지역, 그리고 도립공원의 등산로에서 산악자전거를 타며 공공의 이익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쾌락추구의 자유만 주장하다니 몹시 실망스러웠다. 청년들에게 큰 실망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늙고 젊고를 따질 수 없겠구나 싶다. 처음엔 이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막가파식 노인들 탓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청년들의 잘못된 열정이 오히려 잘못된 산악자전거문화의 동력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버텨주니 중년과 다른 동호회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결국 법대로 하라는 전략이다.
모든 개인적 열정에도 공공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이들은 모른다. 교사를 처음 시작할 때 일이 생각난다. 한 기독교계열의 고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는데 선생님들의 열성이 대단했다. 수업이 아닌 방과 후까지 아이들을 데려다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가르쳤다. 단체 예배 때는 열정적인 찬양과 더불어 명문대에 가서 예수님의 권능을 세상에 펴라는 강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종교가 그런 식으로 세속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젊고 매력적인 학교였지만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때 깨우친 것이 열정의 낭비에 대한 각성이었다. 개인의 열정이 부당한 시스템에 대한 기여로 귀결되고 있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열정의 낭비와 소진을 조장하고 있다. 요즘은 아마 경쟁을 나쁘게 얘기하면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을 들을 것이다. 심지어 경쟁이 좋은 게 아니냐고 반문을 하기도 한다. 당장 TV의 대중가요판 만 봐도 그렇다. ‘나는 가수다’ 이후 TV예능이 온통 경쟁과 경연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시청자들의 귀가 엄청 예민해졌다. 가수들도 혼신의 힘으로 기량을 뽑아낸다. 생존의 몸부림에 가까운 에너지를 동원하여 부르는 노래니 어찌 감동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곡 마다 스펙타클이 되고 있다. 그러며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시스템이 강화되었다. 아이돌 그룹을 기르는 대형기획사 시스템은 이런 문화를 선도해 어느덧 한류의 주역이 되었다. TV 프로그램이나 기획사가 내세우고 있는 유일한 원칙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아닌가? 경쟁의 극한을 추구하고 승자가 된 영웅에 열화와 같은 찬사가 쏟아진다. 그리고 이 모든 문화는 총체적으로 경쟁은 좋은 것이라고 찬미하고 있다. 생각이 아니다. 감성으로 스며들고 온몸으로 채득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주의 경쟁과 독점 시스템을 감성의 차원에서 내면화하고 있는 세대다. 박지성, 김연아, 박세리, 강정호, 이세돌 등의 얘기를 해도 똑같다. 현대스포츠라는 것이 경쟁과 스포츠영웅 탄생의 구조로 되어 있다. 세계자본주의 원리와 시스템을 확대재생산하는 기능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다. 사실 위에 든 스포츠 영웅들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과 재능, 그리고 기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다국적 기업, 개발논리, 세계자본의 작동에 대해서는 점점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라. 스포츠 영웅치고 이런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스포츠 메니아치고 이런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컴퓨터 게임시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게임영웅이 필요한 법이다. 각 분야의 영웅들이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시스템 영웅이자 그 아바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개인의 열정이 이렇게 시스템에 소진된다. 열정과 기량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도 이제 뒷방의 노인네가 되는 모양이다. 청년들의 열정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글을 맺으려 하니 대안학교 다닐 때 일들이 생각난다. 아이들 중에는 축구에 한창 열을 올리는 친구도 있었고, 가요 오디션에 열을 올리는 친구도 있었다. 가급적이면 스포츠 대신 운동이 되기를 바랬던 나는 축구강사 등 엘리트 체육을 지향하는 것에 반대했었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경쟁의 문화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랑과 자유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공기를 어쩔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열정 앞에 너희들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우선 남의 잘못을 지적할 만큼 내가 완벽한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자신이 없었고, 아이들이 스스로 경험하면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통찰하고 깨달아 나가는 길을 미리 단정하고 차단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의의 폭력도 폭력인 한 폭력의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지지하는 편이 되었지만, 지금도 기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사회는 온통 열정을 낭비하고 소진하게 하는 구조다.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며 경쟁해야 하는 구조다. 매일이 생존경쟁이다. 학교라는 곳에서 소위 시험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고 끔찍한 생각이 든다.
아니다. 하지만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더구나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가?
5/30/월. 반대의 필요
며칠 전엔 오소리똥 속에서 범벅이 된 4~5마리의 보라금풍뎅이를 보며 자연의 풍성함과 건강에 감탄을 했는데, 오늘 아침엔 산길에 깔려죽은 보라금풍뎅이가 홍개미들에게 뜯기는 모습을 보며 자연의 냉혹함과 어둠을 생각했다.
모든 생명은 상대적이다. 홍개미에게는 홍개미의 삶과 시공간이 있고, 보라금풍뎅이는 보라금풍뎅이의 삶과 시공간이 있고, 나는 나의 삶과 시공간이 있다. 이 셋이 공유하는 객관적인 시공간이 있는가 라고 물을 때 나는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셋이 공유하는 시공간을 이야기할 때 그것 자체가 이미 사람인 나의 제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 사이의 존재하는 깊은 어둠을 완전히 건너 뛸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심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실존의 상황이다.
그렇다. 나는 어둠에 대해 말하련다. 해가 저물 무렵 고개를 드는 어둠에 대해. 삶이 다하고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있음에 대한 없음에 대해, 말 다음의 침묵에 대해. 다행히도 나는 음양론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음만으로 혹은 양만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균형과 역동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다.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힘빼기를 하고, 성공이 찾아오면 실패와 휴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리고 새삼 모든 것이 풍요로운 물질의 시대에 빈곤과 허무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한다. 채움과 완성이 아니라 비움과 미완성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감성이고 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중학교1학년 어느 날의 원체험을 잊지 못한다. 그 무럽 책에서 읽었는지 혹은 과학시간에 배웠는지, 나는 세포와 우주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 몸이 수많은 세포와 미생물이 공존하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인에 달라붙은 개미처럼, 내가 지구 혹은 그보다 더 거대한 어떤 것의 일부에 달라붙어 살지만 너무나 엄청나게 커서 감히 그것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방바닥에 누워 상상했다. 하지만 내 몸의 작은 것들로 생각을 모아나가면 작은 것의 더 작은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작은 것의 작은 것, 큰 것의 큰 것은 모두 어디까지 갈까? 까마득한 느낌과 함께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더 곤란하게 했던 것은 빅뱅이었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했다는데 그럼 우주에도 끝이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우주의 끝 그 밖은 뭐란 말인가? 우리우주가 태어나기 전엔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아무것도 없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아무리 상상하려 해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상상으로 우주밖 그 끝 경계까지 날아가보지만 생각 밖의 경계에서 나는 그만 세상이 빙글빙글 맴맴 도는 현기증에 빠지고 말았다. 겨우 현기증에서 벗어나 생각해보니 내 생각을 초월한 까마득한 것이야말로 진짜인데 나는 도무지 그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공(空)도 무(無)도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이 까마득한 느낌의 뿌리에서 나 자신을 의식하곤 했고, 그것이 이후 삶에서 상대적 시각과 균형감을 갖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있음과 없음도 초월한 그것이야말로 나를 보증하는 것이 아닌가? 우주는 정말 꿈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힌두신화와 힌두교의 사고를 좋아한다. 그들은 이 우주는 비슈누의 꿈이라고도 하고, 신의 리라(유희,춤)라고도 한다. 이런 상대적인 시각을 갖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문제를 다시 보면 훨씬 여유와 균형을 갖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생태든 공동체든 자유든 사랑이든 아나키즘이든 무엇이든 해변의 모래밭에서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는 아이만큼만 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늘 욕심과 집착에서 발생하니 말이다. 하지만 연로하신 부모님과 지인들을 볼 때 나는 쓰라린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은 누구도 심연을 극복할 수 없다. 내가 그러하든 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또한 그럴 것이다.
곧 하얀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을 휩쓸어 가리라는 것을 알며 모래성 쌓기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처럼. 모래와 휩쓸려가는 성을 보며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다시 새로운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처럼. 우리가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게는 어둠이 필요하고 반대가 필요하고 삶의 무의미도 필요하다. 그들이 배의 바닥짐처럼 내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