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의 발언은 신민당 내부에 파란을 몰고왔다.
‘내각제 협상용의’를 표명한 이른바 ‘이민우 구상’과 내각제 지지발언으로 당론을 정면으로 부인한 이철승, 이택희 의원에 대한 징계문제를 둘러싸고 신민당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두 김씨는 이들과 결별하고 별도의 당을 창당하기로 뜻을 모으고, 소속의원 75명이 탈당, 이 중 69명 (상도동계 37명, 동교동계 32명)이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민우를 비롯하여 정부의 내각제 개헌에 동조하는 일부를 제외한 두 김씨 계열의 국회의원 대부분이 이탈하면서 신민당은 형해화되고 통일민주당이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창당대회는 김영삼을 총재에 선출하고 사면복권이 안된 김대중은 총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김영삼은 1980년 5.17쿠데타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지 7년 만에 다시 제1야당의 총재가 되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여전히 복권이 되지 않은 상태여서 당원의 자격을 얻지 못하고, 가택연금으로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5월 1일 역사적인 통일민주당의 창당일, 선생님댁 주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전경버스가 20여대, 병력이 1천 5백여 명으로 증강 배치되었다. 민주당 창당대회를 마친 당원 8백여 명이 오후 1시 15분부터 2시 30분까지 신촌로타리와 동교동로타리에 나뉘어 “김대중 선생 불법감금을 즉각 해제하라”, “독재타도”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도 가세하여 골목마다 나와 박수와 환호로 열렬히 격려해 주었다.
이때 김옥두 차장과 남궁진 비서가 선생님 자택 지붕위로 올라가 대형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김대중 선생 불법 감금을 즉각 해제하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한 시간 동안 지붕위 시위를 벌였다. (주석 7)
이민우의 이반과 신당을 창당하기로 한 김대중의 증언이다.
이 총재는 이미 언급했듯이 상도동계 사람이어서 김영삼씨가 몇 차례 설득하려 했지만,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년도에 이민우 총재는 미국에 가서 슐츠 국무장관을 만나 크게 환영과 격려를 받았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은 의논 끝에 새로운 당을 만들기로 했다. 그 때에도 나는 아직 사면과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활동은 할 수 없었다. (주석 8)
통일민주당이 창당되기 얼마 전 그러니까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통해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 5공 헌법으로 1988년 2월에 정부를 이양할 것과 그에 따른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선거를 연내에 실시할 것, 개헌논의를 올림픽 뒤로 미룰 것 등을 밝혔다.
전두환의 담화는 그동안 야권과 국민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고 다시 체육관선거를 통해 재집권하겠다는 뜻이었다. 친위쿠데타가 좌절되면서 택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4ㆍ13 호헌조치’는 5공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타는 장작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일반 시민들까지 불붙기 시작한 반독재 저항의 열기는 각계 인사 9천여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추도회와 49제 등을 치루는 과정에서 정국은 고문정권 규탄 및 민주화 투쟁으로 더욱 가파르게 전개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대공간부 3명에 의해 축소 조작된 것으로 폭로되면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내연하던 민주화의 열기가 거세게 폭발한 것이다. 6월항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무참하게 짓밟힌 지 7년이 지난 1987년의 봄, 국민의 반독재 투쟁과 5공세력의 사활을 건 한판 승부가 접점을 모른 채 치닫고 있었다.
김대중은 ‘연금’과 ‘외출’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민추협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재야ㆍ민주세력이 집결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연계하면서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연행ㆍ연금으로 최루탄과 경찰봉이 난무하는 시위대에 직접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1987년 4월 이후 김대중의 주요 활동을 정리한다.
△ 민추협 상임운영위 주재 (4월 4일).
△ 민주헌정연구회 정기이사회 참석 예정이었으나 가택연금 (4월 9일).
△ 경찰, 자택 외부인 출입차단 조치 (4월 9일).
△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동교동에서 회담예정, 경찰저지로 불발 (4월 11일).
△ 솔라즈 미하원 동교동방문, 미국의 한국 민주화정책 공개촉구 (4월 18일).
△ 광주항쟁 7주년 맞아 추도사 발표 (5월 16일).
△ 주한미대사관 아비주 서기관 동교동 방문, 국내정세 피력 (5월 19일).
△ 미하원 100여 명, 슐츠 국무장관에 서한 보내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를 위한 미국의 영향력 촉구 (5월 20일).
△ 일본 중참의원 55명, 김대중 노벨평화상 후보추천 (6월 23일).
△ 거국내각 구성 촉구 등 성명 발표, 자택 방문한 김영삼과 회담, 연금해제 (6월 25일).
△ 6ㆍ25평화대행진과 관련 다시 가택연금 (6월 26일).
전두환 정권은 1987년 5월과 6월, 시민혁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김대중을 “묶었다 풀었다”를 거듭하면서 큰 ‘뇌관’의 하나를 제거하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했다.
4월 10일부터 6월 29일 사면 복권이 될 때까지 54차례나 가택에 연금시켰다.
1ㆍ5일 만에 하루 꼴의 가택연금이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집주위에는 감시초소 12개가 설치되었다. 이발소에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조차 부인이 깎아 주어야 했다.
주석
7) 김옥두, 남궁진, '김대중연금일지',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297쪽, 일월서각, 1987.
8) <김대중 자서전(2)>,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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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추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