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최용현(수필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경북 청송군 주왕산 국립공원에 있는 주산지 안에 그림처럼 떠있는 작은 암자에서 노승과 함께 기거하는 어린 동자승이 소년기와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 노승이 되기까지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사계절에 함축하여 파노라마처럼 담아낸 영화이다.
이 영화는 독특한 미장센으로 인간의 성장과 욕망, 고통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시적(詩的), 서정적으로 그려내어 김기덕 감독의 작품 중에서 완성도나 대중적인 평가에서 최고작으로 불리고 있다. 또 불교적인 세계관을 무난하게 잘 표현했다는 평도 듣고 있다.
어린 동자승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사계절의 흐름에 맞춰서 살펴보자.
- 봄 : 어린 동자승은 노승(오영수 扮)과 함께 산중 호수 안에 있는 암자에서 생활하고 있다. 봄이 되자, 심심해진 동자승은 호숫가에서 물고기와 개구리, 뱀을 잡아 몸뚱이를 실로 묶어서 돌멩이를 매달아 놓아주는데, 이들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서 깔깔 웃으며 좋아하고 있다.
봄은 인생의 유년기로 업(業)을 쌓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동물들을 괴롭히는 동자승을 지켜보던 노승은 잠든 동자승의 등에 큰 돌을 묶어놓는다. 잠에서 깬 동자승이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승은 동물들을 괴롭힌 것은 평생의 업이 될 것이라며 원래대로 해놓으라고 한다. 동자승이 그 동물들을 찾아서 묶은 실을 풀어주지만….
- 여름 : 동자승은 자라서 17세의 건장한 소년(서재경 扮)이 된다. 몸이 허약한 동갑내기 소녀(하여진 扮)가 요양을 위해 암자를 찾아온다. 이성에 호기심을 가진 소년과 소녀는 서로 눈이 맞는가 싶더니 어느새 함께 나룻배를 타고 다니다가 노승의 눈을 피해 호숫가에서 애욕을 불태운다.
여름은 급격한 성장기이며 욕망에 휘둘리는 시기이다. 불당(佛堂)은 밤에는 침실이 되는데, 방 가운데의 문지방 너머로 소녀를 따로 자게 하지만, 한밤중에 소년은 소녀가 자고 있는 방으로 넘어간다. 이들의 밀회를 감지한 노승은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소녀가 떠난 후 집착을 떨치지 못한 소년도 암자를 떠나 세상으로 나간다.
- 가을 : 소년은 떠난 지 10여년 만에 배신한 아내를 죽인 청년(김영민 扮)이 되어 암자로 돌아오는데, 머리는 덥수룩하고 눈빛에는 광기가 번뜩인다. 청년은 솟구치는 배신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악하다가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노승은 청년을 못난 놈이라며 모질게 매질한다.
가을은 성숙과 좌절이 판가름 나는 고난의 시기이다. 노승은 암자 앞 나무 바닥에 붓으로 반야심경을 쓰면서 청년에게 살인한 칼로 그 글을 새기게 한다. 형사들이 암자로 찾아온다. 밤새도록 반야심경을 새기며 마음을 다스리던 청년은 날이 새자 형사들을 따라간다. 노승은 청년의 죄를 자신에게 물어 나룻배에서 스스로 열반(涅槃)과 다비(茶毘)를 행한다.
- 겨울 : 형기를 마친 청년은 장년(김기덕 扮)이 되어 폐허가 된 암자로 돌아온다. 그는 얼어붙은 나룻배에서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불상을 만들고, 심신을 수련하면서 승려의 본분을 찾아간다. 그리고 뒷산 정상에 세울 불상의 받침돌로 쓰일 맷돌을 줄로 묶어 허리에 매고 불상을 안고 눈 덮인 산을 오른다. 어릴 때 동물들을 괴롭히던 업을 장년승이 되어서 스스로에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은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참회의 시기이다.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암자를 찾아온다. 장년승은 여인이 자고 있을 때 보자기를 벗겨 얼굴을 보려하지만, 여인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으며 거부한다. 여인은 한밤중에 아기를 남겨둔 채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가다가 얼음구덩이에 빠져 죽고 만다.
- 그리고 봄 : 장년승은 남겨진 아기를 맡게 되고 다시 새로운 사계(四季)가 시작된다. 장년승은 어느새 노승이 되고, 자라난 동자승과 함께 봄날을 맞이하고 있다. 심심해진 동자승은 물고기와 개구리, 뱀을 잡아서 입속에 돌멩이를 넣고 있고, 동물들이 괴로워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서 해맑게 웃고 있다. 윤회(輪廻)인가, 반복되는 업인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2003년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과 기술상, 2004년 대종상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해외에서도 많은 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각본과 연출을 맡고 장년승 역할까지 한 김기덕은 세계 3대영화제로 꼽히는 칸과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경력을 가진 유일한 한국 감독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장년승 역할은 전문배우에게 맡기는 것이 몰입도 면에서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의문은 소녀와 아기를 버리고 간 여인이 동일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동일인물이라는 견해는 소녀와 헤어지게 된 청년이 이후에 결혼한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살해한 것이며, 그 소녀가 아니라면 얼굴 보여주기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견해는 불륜을 저질러 살해당한 아내가 바로 그 소녀라는 것이다. 전자가 더 유력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암자의 주위 배경이 빙빙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암자가 바지선 위에 지어진 세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승 역은 도올 김용옥에게 맡길 예정이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서 오영수 배우가 맡게 되었다고 한다. 오영수는 ‘오징어게임’으로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나 성희롱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다.
김기덕 감독은 그의 페르소나인 배우 조재현과 함께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를 성폭행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해외도피를 생각했는지 발트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에서 살 집을 알아보다가 2020년 12월 11일 코로나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였다.
그의 업적은 업적대로, 허물은 허물대로 평가를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