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하느님의 표징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르코 8,11-13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증적인 증명을 통해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을 통하여 얻은 실천적 지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자는 논리적 방식의 실험을 통해 얻은 자연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문명사회를 낳았고, 후자는 논리보다는 추론과 경험을 통한 인격적 친교로 얻은 신뢰에 기초한 다양한 형태의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증명되고 확인되어야 진실이라고 믿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수많은 형태의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정말 하느님에게서 온 분이라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가치들, 곧 그들이 신뢰하는 방식으로만 진실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눈에 보이는 가치들만 좇아 정작 우리 삶을 둘러싼 기적들을 보지 못하는 세대들에 대한 탄식이 들립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하느님의 표징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바친 제물을 다르게 받으셨을 뿐, 아벨을 카인보다 더 사랑하고, 카인을 미워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이는 카인이 범죄한 뒤 두려워 떨 때 그에게 표를 찍어 주시어 목숨을 지켜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카인의 죄는 눈에 보이는 표징만 쫓고,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죄를 짓고도,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양심을 거스른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은 우리 삶의 작은 기적들입니다.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순간이 기적이고, 내 마음 하나 추스르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미움의 나락에서 용기 있게 손을 내미는 순간 얻는 평화야말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된 표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표징을 보이며 살라고 부르시지 않으실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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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글 드립니다~~~
「수상 거부」
군축이나 평화 증진에 현저히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아주 권위 있는 상이 있습니다. 바로 노벨 평화상입니다. 많은 분야의 노벨상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노벨 평화상입니다. 그런데 이 노벨 평화상을 거부한 사람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베트남 전쟁 종결 당시 총리였던 레둑토입니다. 그는 “조국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면서 상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지향했던 평화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 베트남을 위한 것이었기에 수상 거부를 한 것이지요(혹시 다른 이유 때문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보이니 저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어쩌면 진정으로 상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한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아닌 사랑이 가득한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존경할까요? 자기를 위한 마음보다는 남을 위한 마음을 갖춘 사람을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도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마음, 즉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더욱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캐서린 앤 포터)>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마르8,11-13)
「どうして、今の時代の者たちはしるしを欲しがるのだろう。はっきり言っておく。
今の時代の者たちには、決してしるしは与えられない。」
(マルコ8・11-13)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Amen, I say to you,
no sign will be given to this generation.”
(Mk 8:11-13)
年間第6月曜日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オッチハヨ イ セデガ キジョグル ボヨ タルラゴ ハヌンカ!
나는 분명히 말한다.
ナヌン ブンミョンヒ マランダ。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イ セデエ ボヨジュル チンゾヌン ハナド オッタ。"
(마르8,11-13)
「どうして、今の時代の者たちはしるしを欲しがるのだろう。
도오시테 이마노 지다이노 모노타치와 시루시오 호시 가루노다로오
はっきり言っておく。
핫키리 잇테오쿠
今の時代の者たちには、決してしるしは与えられない。」
이마노 지다이노 모노타치니와 켓시테 시루시와 아타에라레나이
(マルコ8・11-13)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Amen, I say to you,
no sign will be given to this generation.”
(Mk 8:11-13)
Monday of the Sixth Week in Ordinary Time
Mark 8:11-13
The Pharisees came forward and began to argue with Jesus,
seeking from him a sign from heaven to test him.
He sighed from the depth of his spirit and said,
“Why does this generation seek a sign?
Amen, I say to you, no sign will be given to this generation.”
Then he left them, got into the boat again,
and went off to the other shore.
2025-02-17「「どうして、今の時代の者たちはしるしを欲しがるのだろう。」
+神をたたえよう。神は偉大、すべては神を造られた。
今日は年間第6月曜日です。
すべて依り頼む者に対して恵みゆたかなるイエズスの聖心とよろこびの源聖マリア、そして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に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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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ルコによる福音
<「どうして、今の時代の者たちはしるしを欲しがるのだろう。>
そのとき、8・11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来て、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天からのしるしを求め、議論をしかけた。12イエスは、心の中で深く嘆いて言われた。「どうして、今の時代の者たちはしるしを欲しがるのだろう。はっきり言っておく。今の時代の者たちには、決してしるしは与えられない。」13そして、彼らをそのままにして、また舟に乗って向こう岸へ行かれた。(マルコ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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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ン・ヨンミン使徒ヨハネ神父様の「今日の黙想」です。
世界を理解する方法には二つの道があります。一つは、実証的な証明を通して合理的に生きることであり、もう一つは、体験を通じて得た実践的な知識に基づいて生きることです。前者は、論理的な方法での実験を通して得られた自然科学の飛躍的な発展によって文明社会を生み出しました。後者は、論理よりも推論と経験による人格的な交わりの中で得られた信頼を基盤に、多様な形の人類共同体を築いてきました。現代社会は、すべてが証明され、確認されなければ真実とは認めません。しかし、私たちが知っていることがすべてではなく、論理的に証明できない多くの信念の中で生きているのも事実です。
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イエスに、「本当に神から来た方なら、しるしを見せてください」と要求しました。彼らは、目に見える価値、つまり自分たちが信頼する方法でのみ真実を信じたいと考えたのです。しかし、「心の中で深く嘆かれた」イエスの姿には、目に見える価値だけを追い求めるあまり、私たちの人生を取り巻く奇跡に気づかない世代に対する嘆きが込められています。
カインがアベルを殺したのは、神のしるしを誤って読んだからです。神は二人が捧げた供え物を異なる方法で受け取られましたが、アベルをカインよりも愛し、カインを憎んだとはどこにも書かれていません。それは、罪を犯した後、恐れて震えるカインに「しるし」を付け、命を守られた神の慈しみのうちに見て取ることができます。カインの罪は、目に見えるしるしだけを追い求め、誤解と偏見に囚われた結果、取り返しのつかない殺人の罪を犯したにもかかわらず、「知りません。わたしは弟の番人でしょうか。」と平然と答え、良心に背いたことにあります。イエス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中に、そのような姿を見られたのです。
天からのしるしとは、私たちの人生の中にある小さな奇跡です。私が息をし、生きているその瞬間が奇跡であり、心を落ち着かせれば世界は美しく見え、憎しみの奈落の中で勇気を持って手を差し伸べたときに得られる平和こそが、神が示される真のしるしではないでしょうか。もしかすると、イエスは私たちに、そのようなしるしを示しながら生きるよう呼びかけておられるのかもしれ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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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たしたちが、御父の真のしるしであるイエス様のしるしになれますように聖霊、き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