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교회 바깥서 교회 개혁과 생명·평화의 길 찾아야죠”
등록 :2019-10-16 20:50수정 :2019-10-17 13:09
정대하 기자 사진
【짬】 은퇴한 성공회 사제 김경일 신부
지난 13일 광주광역시 월산동 성공회 광주교회에서 만난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
벽에 걸린 나무 십자가가 작고 아담했다. 25평 남짓한 교회 안엔 8개의 긴 좌탁이 놓였다. 꽉 차도 24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교회였다. 지난 13일 오전 11시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성공회 광주교회에선 김경일(65) 어거스틴 신부 은퇴 기념 미사가 열렸다. 성공회 신부지만 스님·목사와 형·동생 사이로 지내는 그 답게 이날 감사성찬례엔 신자보다 지인들이 더 많았다. “돈 많은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면서도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해온 그를 사람들은 ‘길 위의 사제’라고 불렀다.
부산이 고향인 김 신부는 18년 전 전라도로 왔다가 2007년 광주교회로 부임했다. 신자가 달랑 1명인 작은 교회였다. 하지만 김 신부는 전도를 하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나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는 “지금은 신자가 초창기보다 10배나 늘었다”고 농담을 건넸다. 교구 지원이 넉넉지 않아 20년동안 월급 대신 약간의 지원금만 받았던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신부다. 집도 없이 교회 옆 교육관에서 생활한다. “신학원 때 한 교수님한테 들었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사제가 된 뒤에 만약 재산이 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재물을 훔친 것이다’라는 말을 잊지 않고 살았지요.” 김 신부는 “그래도 아들 신부(김윤경 힐렐)가 사제가 돼 광주교회에 부임한 것은 소원을 들어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신자가 달랑 1명인 작은 교회지만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는 전도를 하지 않았다. 지난 13일 그의 은퇴 기념 미사엔 그를 아끼는 지인들이 신자들보다 많았다.
그는 사제가 되기까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던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한 때 고시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험서를 펼쳐들면 글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연극반에 출근해 살다시피 했다. “나는 이상하게 배우는 하기 싫었다. 연출의 명령에 순종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차라라 막노동격인 무대장치가 마음이 편했다.” ‘반골 성향’이 강했던 김 신부는 무대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보다 무대 뒷일을 더 좋아했다.술과 연극에 미쳐 살던 그는 1980년 3월 신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때 총장의 부적절할 처신을 지적하는 명연설을 한 탓에 ‘총장 사퇴 주역’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그 무렵 만난 긴급조치 복학생 고 백남기 선배가 큰 의지가 됐다. 2017년 경찰 물대포에 맞아 숨진 백남기 농민이 그의 대학 선배다. “그는 말이 없고 미소만 짓는 수도자 같은 모습이었다.” 1980년 5월 흑석동에서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역까지 행진하는 시위행렬에 참가했던 그는 어느덧 학생운동의 중심에 뛰어 든 셈이었다.
촛불집회의 단골 사회자 소리꾼 백금렬씨가 13일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의 은퇴 미사가 끝난 뒤 민요 한자락을 불러 축하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성공회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1월이었다. 대한성공회 제4차 전국청년 선교대회에서 전국청년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성공회는 진보적인 케이엔시시(한국기독교협의회)에 가입돼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재야단체 중의 하나였다. 평생 정신적 스승이 됐던 함석헌 선생과 문익환 목사의 부친 문재린 목사를 뵐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당시 처음 만난 이현주 목사는 지금도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사회적 약자와 함께한 ‘길 위의 사제’
2007년 신자 1명 광주교회 부임
아들 사제 돼 같은 교회 ‘세습’
27일 대전주교 성당서 퇴임예식“종교의 바른 길 설교집 낼 생각”
황대권 작가와 출판사 ‘쇠뜨기’ 차려1985년 결혼한 김 신부는 신혼여행을 강원도 원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집으로 갔다. 장일순 선생은 그에게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전세로 바꾸고 그 차액으로 살면서 10년동안 직업을 갖지말고 책 만권을 읽으라”고 하셨다. 김 신부는 “결과적으로 책은 천권도 못 읽었고 10년여 동안 직업없이 떠돌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래로 기어라. 민중과 함께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내 삶의 잣대가 됐지요.” 그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방향을 설정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사제가 되기까지도 험난했다. 1982년 3월 우여곡절 끝에 성공회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반골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신학대학원에서 만난 친구 이춘기와 그는 부적절한 처신을 했던 신학대학원장과 주교의 퇴진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쓰는 단골 멤버였다. 신학대학원에서 쫓겨났다가 복학한 김 신부는 1994년 신학대학원 졸업 10년만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 신부는 최근 서울교구 전임 주교의 비리 의혹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써 파문이 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12일로 은퇴 공문을 받았다. 그를 아끼는 사제들은 27일 오후 4시 대전주교 교좌성당에서 그의 정년 퇴임 예식을 열기로 했다.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는 성공회 광주교회 옆 교육관에서 생활한다. 지난 13일 은퇴 기념 미사에 참석하기 전 김 신부가 환하게 웃고 있다. 정대하 기자
교회는 작게 꾸렸지만 그는 사회의 낮은 곳을 찾아 진리와 동행하는 사제였다. 생명평화결사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제주 강정마을 지키기 운동에 참여했다가 ‘해군기지건설 반대운동’을 선동한 혐의로 피고가 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를 성찰하며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걸었다. 4대 종단 3명씩 참여하는 4대강 운하건설 반대운동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해 106일동안 걷고 또 걸으며 인간의 탐욕을 참회했다.김 신부는 이날 “오늘 미사는 은퇴식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나서는 창업식”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환경운동가인 친구 황대권 작가와 ‘쇠뜨기’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그는 지난 4월 <김 신부의 삶 이야기-약속>이라는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생명과 평화에 관한 책도 내고, 종교가 가야할 바른 길에 대한 설교집도 내볼 생각입니다.“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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