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고사는것 에 대해 마음을 챙기다
스텔라 박
먹는 것보다 입는 것이 중요?
옷이 옷장 한 가득 걸려 있으면서도 우리는 외출 때마다 거울 앞에 서서 늘 같은 푸념은 한다. “어째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지?”
그렇게 많은 옷을 갖고도 입을 게 없다고 말하는 우리들에게 붓다는 뭐라 하실까.
영화 <Falling in Love>의 메릴 스트립도 <Sleeping with the enemy>의 줄리아 로버츠도 거울 앞에 서서 참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본질 아닌 것에 낭비되는 시간을 아껴 마음 공부에 용맹 정진했으면 견성을 했겠다.
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 안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들은 계절에 맞게 또 시간과 장소에 맞도록 옷을 입어야 한다. 하다 못해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 마켓에 장보러 갈 때라도 옷은 걸쳐야 한다. 스님들조차도 4계절 뚜렷한 한국에 사시는 관계로 한 벌 이상의 가사와 장삼을 갖고 계실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3가지가 의식주이다. 먹고 기거하고 입는 것이 순서일 것 같지만 어쩐 일인지 입는 것에 해당하는 의(衣) 자가 가장 앞에 왔다.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입는 것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걸까? 먹고 사는 것 만큼, 옷을 갖춰 입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 조상들은 언어에서 이미 간파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와 장소에 맞게, 드레스코드
인류는 약 17만년 전부터 옷을 입었다. 현생인류는 유인원보다 털이 적었고 빙하기를 지나온 지구의 온도가 낮았기 때문에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유추된다.
그렇다 보니 공동체의 사회적 의미가 생겨났다. 옷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계급을 나타내주는 도구였고 개인의 취향을 표현해주기도 했다. 또한 의관을 챙겨입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예절이자 사회 규범으로까지 해석된다.
한국에 가보면 하다 못해 마트에 가더라도 얼굴에 분칠을 하고 옷도 칼라를 맞춰 입는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도 공공장소에서 옷을 챙겨 입는 분위기는 대동소이하다. 유난스레 미국인들이 지나치게 캐주얼하게 옷을 입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을 중심으로 발전된 나라이다 보니 허례허식과 군더더기보다는 에센스, 편안함에 가치를 두어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미국인들은 대부분 청바지에 티셔츠 쪼가리를 입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일지라도 파티나 행사에는 옷을 챙겨입고 나온다. 드레스 코드가 바로 그것이다.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에서 드레스 코드를 잘못 알고 간 브리짓이 혼자 할로윈 바니 의상을 입고서 당황해 하는 모습은 이를 지켜보는 우리들까지 당혹스럽게 만든다.
벗은 것보다 편안한 옷
구약성서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벗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에 옷을 입었다고 한다. 물론 성서를 말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은 인간이 아주 오래 전부터 타인 앞에서 발가벗은 것을 그닥 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우리 모두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이어서인지 옷을 입지 않았을 때보다, 옷을 입었을 때가 더 편안하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입었다는 부담감이 없는 옷을 입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헐렁한 티셔츠, 착용감 없는 레깅스는 21세기, 패션 인더스트리의 스태디셀러이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보라. 레깅스를 입은 여성들이 얼마나 자주 눈에 띄는지.
편안한 옷이 아름다운 옷
“편안함과 사랑, 패션의 존재 이유는 이 두 가지이다. 편안함과 사랑을 제대로 표현한 패션은 아름답다.” - 코코 샤넬
“Fashion has two purposes: comfort and love. Beauty comes when fashion succeeds.”
― Coco Chanel
전설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한 말이다. 패션에 대한 명언을 검색했더니 코코 샤넬이란 이름이 가장 많이 눈에 띤다. 내겐 그 흔한 샤넬 백 하나 없지만 패션계에 있어 샤넬의 영향력은 의심할 바 없었다. 그녀 역시 편안함이 옷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일단 꽉 끼는 옷은 그닥 편안하지 않다. 나이 들어가며 점점 늘어가는 중년의 뱃살도 살짝 가려주고 신축성이 좋은 옷감으로 지어진 옷이라야 편하다. 화학섬유는 몸에 닿았을 때 알러지를 일으키기도 하고 땀의 흡수 역시 좋지 않으니 천연섬유가 더 나을 것 같다. 너무 장식이 많거나 화려한 옷도 권할 만 하지 않다. 아무리 멋들어지고 태가 난다 하더라도 어깨가 무거운 옷, 역시 안 좋다.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의 옷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패션 가운데 하나가 청바지에 흰 티셔츠라고 한다. 흰 색 티셔츠만큼 편안하고 아무 옷에나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 또 있을까?
『연애와 결혼의 원칙』의 저자 마거릿 켄트는 남성들을 매혹시키는 옷차림에 대해 한 챕터를 할애해 가며 말하고 있다. 이웃집 소녀처럼 부담이 없는 옷차림, 뾰족하거나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많지 않아 언제라도 그녀를 안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옷을 남자들은 가장 좋아한단다. 그러니 청바지에 흰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여성이 남성들의 로망인 것이다.
라즈니쉬, 새 옷을 입었다고 자랑하지 말라
인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제자를 두고 있는 바그완 오쇼 라즈니스 역시 옷에 대해 언급했다.
“새 옷을 입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그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남보다 잘 났다고 자랑하지 말고 그 모습이 추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옷은 입을수록 몸이 따뜻하고 욕심은 벗을수록 마음이 따뜻하다. 옷은 오래 입을수록 그 두께가 얇아지고 욕심은 오래 걸칠수록 그 두께가 두꺼워진다.”
물론 가시적인 옷을 더렵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옷이란 마음에 대한 메타포일 터.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이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마음의 습대로 다시금 마음에 때가 끼는 것을 주의하라는 가르침이다. 욕심과 아집 역시 빨리 벗어버릴수록 가볍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임을 라즈니시는 옷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옷에 대한 가르침
창세기 외에도 성서에는 옷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그 가운데 마가가 전한 복음서에는 예수의 의식주에 대한 가르침이 멋지게 요약돼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깨달은 이들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구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음을 예수 또한 간파하고 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무엇일까.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모든 우주의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여여함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게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검소한 옷, 분소의
우리의 스승, 붓다는 그의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조목조목 일러주셨다. 비구들의 의복은 분소의(糞掃衣)가 기본이었다. 분소의는 시체를 쌌다가 버린 낡은 천 조각들을 주워 모아 만든 옷이다. 수행자가 입는 것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터이다.
본래 인도에서는 가사 자체가 비구들의 옷이었지만 불교가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가사만으로는 추위를 이겨낼 수 없게 되자, 장삼을 입고 가사를 위에 걸치게 됐다. 이것 역시 때와 장소에 따라 의복에 대한 규정이 달라진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승복은 전통적으로 숯을 갈아 물들인 회색 옷이었다. 꼭 불교계 뿐만 아니고 유럽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과 수녀들도 회색 옷을 많이 입었다. 규칙을 따르고 금욕 생활을 하는 구도자라는 의미에서 이들은 공통점을 지닌다. 회색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자신에게는 무한한 엄격함을 발휘하지만 타인에게는 무한한 너그러움의 힘을 뿜어 내는 것이 회색이다.
일본의 한 패션 디자이너는 한국 승려의 회색 옷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면서 “어느 천과도 잘 어울리고 간소하면서도 존재감이 빛나는 색채”라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실제 디자이너 다미르 도마(Damir Doma)의 2011년 봄 여름 컬렉션은 “비구니의 자유(The Freedom of Women Monks)”라는 주제로 꾸며졌었다. 자기 존재를 사랑하는 여성을 위한 이 컬렉션은 여러 나라 불교 수도승들의 가사와 스타일에서 아이디어를 받았다고 한다. 느슨하면서도 섹시한 이 옷들은 당시 관객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었다.
원수라도 마주칠 것처럼 입고 다녀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다. 어디 원수뿐일까. 날 버리고 떠난, 그래서 이제는 원수가 된 그 남자도 꼭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미래의 어느 날이 됐든 “난, 너 없이도 이렇게 잘 살고 있거든. 네가 버렸던 여자가 얼마나 예쁘고 매력적인지, 네가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다.”라며 이를 갈지만, 그를 마주치게 되는 날은 정말 도둑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런 날은 보통 머리도 감지 않아 깻잎 머리일 터이고 트레이닝 바지에 색이 바랜 후디(Hoodie), 그리고 아줌마 슬리퍼를 신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DJ DOC의 노래, ‘머피의 법칙’에서도 “꼬질꼬질 지저분한 내 모습. 그녀에게 들키지 말아야지 하면, 벌써 저기에서 그녀가 날 왜 어이없이 바라볼까.”라고 했었다.
원수 같은 옛 연인도 그렇지만 나의 적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아야 하는 이가 현대사회에 몇이나 될까. 그러니 21세기의 원수는 나를 괴롭히는 직장의 보스, 회의 때마다 날 못 잡아먹어 난리인 동료들일 게다. 이들에게 굳이 나의 가장 취약한 점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들은 민낯에 요가 팬츠와 티셔츠 쪼가리 하나 입고 있는 나를 청초하다고 봐주지 않는다. 가능하면 당당하고 있어 보여야 한다. 적 앞에서든, 원수 같은 옛 이성 친구 앞에서든.
아마도 그런 의미일 거다. 패션모델이었던 키모라 리 시먼즈(Kimora Lee Simmons)라는 여성이 “항상 가장 싫어하는 원수를 곧 만날 것처럼 옷을 입어라.”고 했던 건. 흑인 아버지를 둬 얼굴이 검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전 중 미군에게 입양돼 미국에서 자라난 한국인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옆집 순이의 이미지가 발견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10살 때 그녀의 키는 이미 5피트 10인치를 넘었다고 한다. 껑충하게 큰데다가 눈이 양옆으로 짝 찢어진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었다. 한국인인 그녀의 어머니는 키모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11살이 된 딸을 모델 스쿨에 보냈다. 2년 뒤, 그녀는 모델로 발탁됐고 14살 생일 날에는 샤넬과의 독점 모델 계약을 맺었다. 그녀는 1989년 샤넬의 디자이너, 라거펠드(Lagerfeld)의 오또 쿠튀르(Haute Couture) 드레스를 입고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모델계의 떠오르는 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플(People) 지와의 인터뷰에서 “전에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이제 멋진 것이 되어있었어요.”라고 말했었다.
그녀를 키운 건 어쩜 증오였는지도 모른다. “복수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 제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증오는 때로 성공으로 향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싹을 내리고 자라났던 자신을 따돌렸던 초등학교 친구들을 향한 증오. 그녀는 그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활용했다. 예수도 성전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장사하는 이들에 대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분노를 표출했었다. 그의 분노는 인류를 복수와 증오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며 사랑과 화해의 시대를 열었다.
얼마나 산다고 원수를 가슴에 품고 살겠냐마는, 스님이 아닌 이상, 외출할 때만은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라도 마주칠 것처럼 옷을 입는 것도 세상 사는 한 방법인 것 같다. 단지, 옷에 마음을 빼앗길 정도가 아니라는 선에서. 그 경계를 지킨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진정한 중용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