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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님 사랑
한민족(동이) 철기 사용 연대는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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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물질문화 발전 단계에서 연모를 철기로 만들어 썼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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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시대(鐵器時代, 기원전 1200년경 ~ 586년경)는 철을 주로 사용하여 도구나 무기를 만들던 시대를 말한다. 고고학에서 선사 시대를 분류하는 세 단계 중 마지막 단계이다.
일반적으로 철기시대의 연대와 물품들은 분포된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기원전 12세기 그리이스와 고대 중동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기원전 11세기 인도, 기원전 8세기(중유럽)와 6세기(남유럽)에 걸친 유럽지역으로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되었고 로마제국과 헬레니즘 혹은 북유럽 초기 중세기 즈음에 막을 내린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철기시대는 또한 철제품을 만들때 최고로 정교한 금속가공법 개발되었던 시대라고도 칭할수 있다. 쇠의 단단함, 높은 용해온도, 그리고 풍요한 철광자원 (구리보다 저렴한 생산비용)을 바탕으로 철은 청동기를 몰아내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금속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과 호주는 유럽인들에 의하여 식민지화 되면서 철기가 직접 전파되었기 때문에 철기시대가 없다.
목차 |
중기 청동기 시대에 녹인 철광물(니켈이 부족한 유성 철광석과는 구별되는)의 증가가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인디아 아대륙, 레반트, 지중해, 이집트에 나타났다.
혹자는 해면철과 같이 철이 구리 제련의 부산물로 만들어 졌으며, 당시의 기술로는 다시 녹여서 사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가장 초기의 체계적인 생산품과 철기 도구의 사용은 아나톨리아에서 기원한다. 철기의 아프리카 생산품은 거의 동시대에 시작되었거나 아나톨리아 이전에 제작되었음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에서 철기가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아나톨리아에 등장했음을 알려준다. 갠지즈 강 언덕의 최근 고고학적 연구에서 인디아도 기원전 1800년 경에 철기가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200년 경에는 철기가 중동 지역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나 청동기의 지배적인 사용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청동기는 융점이 낮기 때문에 철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도구이다. 철기 시대는 보다 높은 온도에서 녹는 기술이 개발되어 시작되었다. 철기 시대에는 가장 좋은 도구와 무기는 강철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철에 탄소 내용물이 무게로 0.02%에서 1.7% 정도 섞이게 된다. 강철 무기와 도구는 거의 청동기와 거의 같은 무게지만, 더욱 강했다. 그러나 강철은 생산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철기 도구는 제련한 철기이다. 제련된 철기는 청동기보다 약했지만, 덜 비싸고, 조작하기 쉬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근동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13세기경 아나톨리아(現 터키)와 코카서스(現 유라시아)지역에서 제철기술과 제련기술이 개발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중동아시아 전 지역에 급속도로 전파되어 기원전 1세기에는 청동무기가 쇠무기로 대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히타이트(Hittites)가 급속도로 이곳의 강력한 패권자로 부상된 이유는 바로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에게해(Aegean) 인근에서 최초로 제련기술이 개발되어 히타이트가 철제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히타이트의 세력이 확장되며 철기문화는 유럽과 아시아에 함께 확장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와의 교역을 통하여 아시아 지역으로, 도리안(Dorian)과의 교역을 통하여 유럽으로 제련기술이 전파되었다. 아시리아 왕국 또한 교역을 통하여 최초로 철기 제련법을 접한 나라였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있다.
철기의 발견
발견된 비귀금속의 초기 사례와 분포.[1]
년대 | 크레타 | 에게해 | 그리스 | 키프러스 | 전체 | 아나톨리아 | 총합계 |
---|---|---|---|---|---|---|---|
1300–1200 BC | 5 | 2 | 9 | 0 | 16 | 33 | 65 |
1200–1100 BC | 1 | 2 | 8 | 26 | 37 | N.A. | 74 |
1100–1000 BC | 13 | 3 | 31 | 33 | 80 | N.A. | 160 |
1000–900 BC | 37E | 30 | 115 | 29 | 1.40 | N.A. | 211 |
전체 청동기 시대 | 5 | 2 | 9 | 0 | 16 | 33 | 65 |
전체 철기 시대 | 51 | 35 | 163 | 88 | 337 | N.A. | 511 |
주철(鑄鐵, 혹은 무쇠)로 만든 초기 철제유물은 기원전 6세기 주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972년, 기원전 14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칼날에 쇠도금이 된 청동도끼가 허베이 성(河北)지역에 있는 가오청 시(藁城) 근처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의 검사 결과 이 청동도끼의 쇠 성분은 운석물질로 판명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철기 시대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 사이에 현재의 신장의 차우후우커우 지역에서 철 광석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것은 곧 만주 평야에서 기원전 9세기에 야금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철 야금술은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러 양쯔강 계곡에 도달하게 된다. 몇 몇 유물이 창샤와 난징에서 발견되었다. 무덤 유적의 발굴품은 전국 시대 중기에서 말기(기약전 350년)에 영남(嶺南)에서 처음 사용된 철기임을 알려준다.
이 영남에서 사용된 기술은 뚜렷한 남부의 전통이 나타나는 이매패류 주형 조합과 중원에서 사용된 금형의 조합이었다. 이러한 두 시기의 결합으로 만든 제품은 종과 그릇, 무기, 장식품, 그리고 정교한 주형이었다.
티베트 고원의 철기 문화는 티베트의 초기 기록에 언급된 샹슝 문화와 관련이 깊다.
한반도에는 서한시대(기원전 300년)가 시작되기에 바로 앞서 교역을 통하여 철기가 도입되었다. 금괴같이 생긴 쇠절편들은 선사시대 한국에서 장례식때 필요했던 중요한 부장품이었다. 기원전 2세기경 제철 기술이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었으며 서기 1세기 경에는 한반도 남쪽지역에서도 농민들이 철기구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는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후 300년에 걸친 일본의 역사 시대이다. 아요이 시대의 뚜렷한 특징으로는 새로운 종류의 도기의 등장과 제대로 된 농경의 시작에 있다. 야요이 시대는 기원전 14000년에서 500년에 이르는 조몬 시대(繩文時代) 다음에 등장하였고, 야요이 문화는 지리적으로 남쪽 큐슈에서 북쪽으로는 혼슈에 이른다.
이어지는 고분 시대(古墳時代)는 250년 경에서 538년까지 이어졌다.
철기 제품이 유럽으로 도입된 것은 소아시아에서 기원전 1000년 전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북쪽과 서쪽으로 500년에 이어져 서서히 확대되어 간다.
초기 기원전 1000년은 동유럽에서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폰틱(그리스) 스텝과 코커서스 지역에서는 철기는 기원전 900년에서 800년 경의 코반 문화, 체르노고로프카와 보로체르카스크 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타르코 키메르족의 이주를 통해 할슈타트 문화로 확산되었다.
중앙 유럽에서 철기 시대는 일반적으로 초기 할슈타트 문화(기원전 800–450)와 후기 철기 시대인 라텐느 문화(La Tène culture) (기원전 450에 시작되는)로 나눠진다. 이 철기 시대는 로마의 침공으로 끝이 난다.
이태리에서 철기 시대는 빌라노반 문화(Villanovan culture)에 의해 도입되었지만, 이 문화는 청동기 문화로 추측된다. 반면 다음의 에투루스칸 문명(Etruscan civilization)은 철기 시대의 특징을 가진다.
영국 제도에서 철기 시대는 기원전 800년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침공과 5세기 비로마화된 부분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 시대의 구조물들은 매우 인상적이며, 브로치와 북부 스코틀랜드 그리고 여러 섬의 요새에서 발견된다.
철기 시대는 고대 로마 철기 시대와 로마 시대의 철기 시대로 나뉜다. 이것이 민족 대이동 다음에 오는 시대이다.
북부 독일과 덴마크는 야스토프 문화(Jastorf culture)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반면, 스칸디나비아의 남쪽은 매우 유사한 그레건 철기 시대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초기 스칸디나반도의 철기 제품은 습지 철의 획득과 전형적인 관련이 있다. 스칸디나 반도의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는 초기에 세련된 철기 제품을 선보이고 있고, 지금으로부터 3000년에서 2000년에 걸쳐 있으며 더 자세한 연대측정은 현재 불가능하다. 이러한 지식은 스칸디나비아의 비게르만과 연관되어 있다. 철제품과 아스베토스 토기는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방열과 보온 용량에서 동일한 말이 된다
다른 견해
중국과 다른 한반도의 철 생산 기술, 고조선, 고구려의 철기, 초기철기시대,철 생산 방법, 철 생산유적지
<중국과 다른 철 생산 기술>
개마무사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면 중국은 왜 고구려와 같이 개마무사를 도입하지 않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것이 상식이다.
물론 중국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병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이 도입한 기병제도는 중국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에 복속한 이민족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용병이어서 고구려 군과 같은 결집력이 부족하여 전투력이 떨어졌다.
한편 중국이 고구려와 같은 개마무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하는 학자들이 많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는데 반하여 다른 국가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강원도 철령에서 발굴된 3세기경의 철마군단(고구려연구회 제공).
세계적으로 볼 때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이란,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기원전 1200~1000년경에 연철을 열처리하여 강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유럽에서 생산된 철기는 전부 연철이고 주철은 그보다 늦어 14세기경 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처음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누어지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되었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백색주철 주조성좋고 강도높아
반면에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되어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가장 낮은데도(1,130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한편 강철 제련은 선철의 경우 보다 높은 온도 즉 보통 1,500도 이상에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철을 만드는 비법은 철의 용융점이 1,539도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려야 한다.
진천 석장리 제철용 송풍관, 한민족이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도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되어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며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문화가 진전되었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들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에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 되는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 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 최고의 철 생산 능력>
철은 온도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는데 기본 방식은 유사하다. 당시 철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이다.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선철생산 공정은 철광석을 일정한 덩어리로 만들어 숯을 여러 층으로 엇바꾸어 넣고(용재로 석회석을 소량 삽입) 밑에서 불을 지핀 다음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때의 연로로도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하는데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개마무사와 방패, 고구려는 질 좋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적들과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050~1,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되어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로 되며 1,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갈라진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철을 다시 녹여 1,500도 정도로 온도를 높여 강철을 만드는데 과거의 제철 능력으로 볼때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온도인 1,500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강철을 만드는데도 비밀이 있다. 숯(탄소)을 적절하게 배합시키면 제련로 안의 온도가 1,200도가 되어도 철의 용융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 속에 탄소가 4.3퍼센트 정도 들어가면 철탄소합금의 용융점이 1,130도로 낮아지며 1,200도 정도에서도 탄소를 적절히 융합하면 철이 용융한다.
제련과정을 거쳐 뽑아낸 철을 괴련철(잡쇠덩이)이라 하는데 아직 불순물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괴련철을 다시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단단한 철만 남는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의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조선 영역에서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률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고광록』에 의하면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있다.
'고조선 강철' 최강국가 발돋움 원동력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철 생산지가 많다. 오늘의 무산일대와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가 철산지로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 연철제품이 발굴되었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기원전 2~1세기에는 강철을 제작했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중요한 철광지를 지키기 위하여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000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수ㆍ당은 현재의 무순 지역의 신성(고이산성)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고구려가 이곳을 수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은 무순 지역이 철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신성은 동천왕 18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이래 봉상왕 2년(293)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격퇴시킨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영양왕 24년(613) 수양제의 침입이나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의 침략 때에도 신성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성은 중국의 동진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신성의 중요성은 보장왕 26년(667) 고구려를 침입한 이적(李勣)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신성은 고구려 서변의 요새이니 먼저 이곳을 빼앗지 못하면 나머지 성도 쉽게 취하지 못할 것이다.’
고이산성은 70~140미터 전후의 3개 야산을 하나로 묶은 환성(環城)으로 최고봉인 장군 봉으로부터 세 줄기의 산등성이가 남으로 뻗어 있으며 산꼭대기에 넓은 평지가 있어 마을을 연상케 한다. 신성은 남으로는 혼하와 동쪽으로는 그 지류인 무서하를 천연의 해자로 하고 있으므로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성곽은 서성의 서쪽 외곽인 서성지 일대와 남위성의 서남단과 동성의 동남쪽 산등성이 부분에 주로 남아 있으며, 그 외 많은 부분이 토성이다.
이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중안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쓰러져 있는 신성(고이산성) 표지석, 중국은 신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고구려에게 번번히 격퇴되었다.
현재는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되어 있으며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보인다. 필자가 신성을 찾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지만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거의 잦아볼 수 없고 입구를 비롯하여 희미한 증거만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고이산성을 가리키는 석비도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문헌과 심증으로본 필자의 견해
KBS HD스페셜 제2편 신석기인들 바다를 건너다 라는 동영상을 보면 울산시 울주군 태화강 상류 대곡천에 반구대가 암각화가 나온다. 그림참조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복제본
선사시대 신석기인들에 풍속도(재연)
내몽고 적봉에서 ‘한국형’ 암각화 발견
- 한국 암각화의 뿌리를 새롭게 밝힐 단서
연원을 둘러싸고 설왕설래했던 내몽고 지역에서 방패 모양의 ‘한국형 암각화’가 처음으로 발견돼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기획연구사업단의 지원사업인 ‘한국 상고시대의 신앙과제사’의 일환으로 최광식 고려대 교수(현 국립중앙박물관장)가 이끄는 ‘고려대 한국고대사 연구팀’은 지난 2008년 7월 28일 ~ 8월 3일 중국 내몽고 적봉시(赤峰市)일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이 일대에서 고령 양전동, 울산 천전리 등 한반도 남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한국형 암각화가 다수 확인됐다고 26일 밝혔다.
1971년 경상북도 울산 천전리 암각화가 처음 발견된 이후 20여 개소의 암각화 유적이 확인된바 있다. 그러나 암각화의 대부분이 경상도 지역에 밀집 분포하고 함경북도 무산 지초리를 제외한 한반도 중부와 북부지역에서 알려진 암각화가 없어서 그 계통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한국 암각화의 기원을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에서 찾아왔었다. 하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방패모양(검손잡이모양)’ 암각화가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알려진 적이 없어서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방패모양 암각화를 ‘한국형’ 암각화라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연구팀은 기원전 20~15세기 무렵 조성된 청동기기대 석성인 적봉 지가영자 유적가운데 석성 유적의 남쪽사면에 있는 바위에서 한국형인 방패형 암각화를 발견했다. 기하학무늬, 호랑이, 마름모모양, 사람얼굴모양, 동심원 무늬가 보이고 있어, 울산 천천리 암각화를 연상케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번 내몽고 적봉일대의 암각화 조사를 통해, 한국 암각화의 뿌리가 서요하 상류지역의 청동기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한국 암각화의 뿌리를 찾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8월 29일 오후 3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술발표회를 통하여 이번 조사의 의의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학술발표회 안내]
ㅇ일 시 : 8월 29일(금) 오후 3시-5시
ㅇ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제1강의실
ㅇ발표주제 : 내몽고 적봉일대의 암각화와 한국의 암각화
ㅇ발표자 : 최광식(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국립중앙박물관장)
ㅇ토론자 : 장명수(한국암각화학회 회장)
가영자 암각화1
적봉 지가영자 석성유적 남사면 상단의 인위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바위에 새겨진 각종 기하학무늬, 호랑이, 밭 전(田)자 모양, 어골문이 수직으로 밀집된 모양, 마름모 모양, 사람얼굴 모양, 동심원 무늬가 보이고 있어, 울산 천전리 암각화(아래 사진)를 연상케 한다.
지가영자 암각화2
적봉 지가영자 석성 유적 남사면 하단에서 발견한 방패모양 암각화. 크기나 모양이 포항 칠포리의 방패 모양 암각화(아래 사진)와 비슷하다.
각로영자
극십극등기 각노영자 백차하 유역에서 발견된 기하학무늬 암각화. 동심원을 기준으로 우측 상단에 소형의 방패모양무늬 또는 검파형 무늬 등 기하학무늬가 보이고 있어 고령 양전동 암각화(아래 사진)를 연상케 한다.
상기방영자 암각화
내몽고 적봉 상기방영자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유적 서쪽 외곽에서 발견한 방패모양 또는 검파모양 암각화. 영천 보성리 방패모양 암각화(아래 왼쪽 사진) 내지 포항 인비리 석검모양 암각화(아래 오른쪽)를 연상케 한다.
삼좌점 암각화1
내몽고 적봉 삼좌점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유적 내의 얼굴모양 암각화. 나선형 무늬와 꺽쇠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선형 무늬는 무산 지초리 암각화(아래 그림)와 같은 모양이다.
삼좌점 암각화2
내몽고 적봉 삼좌점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유적 내 윷판 모양 암각화. 포항 칠포리 암각화(아래 왼쪽 사진) 내지 집안 우산하 암각화(아래 오른쪽 그림)와 유사하다.
삼좌점 암각화3
내몽고 적봉 삼좌점 하가점하층문화 석성 유적 치(마면)에 그려진 마름모 모양 암각화.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마름모(아래 사진)와 유사하다.
<지도> 한국형 암각화 유적 분포도
문의 :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실(2077-9011)
반구대 암각화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천전리 각석포함 296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경남 창년군 비봉리 유적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도토리,개의 머리뼈,망태기(초본류 유물),굴껍질이 출토돼였다.우리나라 지리학상 산성땅이 많아 쉽게 부패하는 것인데도 초본류의 유물인 망태기가 출토되고 굴껍질이 출토돼였다.내륙에 위치한 곳에서 왜 패총이 나왔을까?
부산 동산동 신석기시대 의 고래의 척추뼈가 나왔다,신석기 시대의 고래뼈가 왜 썩지않고 출토 돼였을까? 그것은 조개더미 속에 비밀이 있다.조개더미 속에 쌓인 고래뼈는 특별한 보호를 받게된다,신석기인들이 해안가에 내다버린 조개더미 위에 흙이 덮히고 또다른 무리들이 이주해와 흙이 덮혀 층이 형성되고 비가 올때마다 조개껍질에 칼슘이 녹아내리고 고래뼈에 보충해주고 그로인해 알카리성이 강해진 땅에는규산이 흘러나와 니스를 칠한 효과를 내기 때문에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것이다.
이로인해 간빙기가 시작된 이래로 지각변동(빙하기가 끝날무렵 극동 아시아는 하나의 대륙이었음)이 있었고 반구대 유적지와 창녕 비봉리 유적지는 바닷물에 영향을 받은것이다.반구대 암각화 그림 문양에는 어로행위가 묘사되어 있는데 배를 타고서 고래를 포획하는 그림이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신석기인들은 배를 건조할수있는 그 시대로서는 최첨단 고도의 기술이 있었다는 애기다.
일본 큐슈 이키리키 신석기 유적에서 한반도인이 타고갔던 소나무로 만든 직경150센티의 유구(유선형 배 바닥)가 출토되어 수영장에 보관중이다.탄소연대측정 결과 5200년전것으로 판명되었다.그 당시에 이미 간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간도끼로 직경 150센티에 나무를 벨수는 있으나 그 통나무(길이 10미터)를 반절로 자른다는것은 불가능한일이다. 배의 내부는 간도끼와 숯을 이용해 태워 가면서 팔수 있다 하지만 외부는 불가능 하다고 본다. 선수와 선미는 유선형으로 제작되었기에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제작되었기에 필자는 예리한 쇠 도구를 사용했다고 본다.그이유는 4800전인 치우천황은 이마에 동두편액을 쓰고 대궁과 창 쇠로만든 검을 사용하였고 쇠로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81명의 형제들도 같은무기와 갑옷을 입었다고 지나족에 정사인 상서,사기.산해경에 나와있고 우리나라에 정사인 규원사화.환단고기.삼일신고 등에 기록이 있다.
치우천황 그는 누구인가?
치우천황은 고조선 이전 존재했던 고대국가 배달국의 14대 한웅(또는 환웅)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은 기원전 2749년 배달국의 도읍지 신시에서 태어았습니다. 그는 명문가 치우의 자손으로 치우천황의 시조 치우는 초대 거발한 한웅 때 거발한 한웅이 배달국을 세운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즉위 후 치우천황은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신병기 즉 철제무기(청동기 무기라는 주장도 있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형제,친적 중 뛰어난 인물 81명을 골라 장군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치우천황은 인류최초로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치우천황은 길로산에서 쇠를 캐내어 도개(칼),모극(창),대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갑옷으로 무장한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보고 당시 미개인이었던 중국인들은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가졌고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81명의 형제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군제개혁을 단행한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제후국 염제국의 유망이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배달국에 반기를 들려고 하자 군사를 일으켜 유망을 정벌하여 공상에 입성하여 유망을 멸망시켰습니다. 한편 치우천황이 공상에 입성했다는 소문을 들은 중국인들의 수장 공선헌원(황제헌원)은 자신도 치우천황처럼 천하르르 호령하는 천자가 되고자 치우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그가 군사를 일으킬 때 마다 치우천황에게 패했습니다. 당시 치우천황의 배달군은 철제무기에 갑옷을 무장하여 헌원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또한 염초와 유황을 태워 연기를 일으켜 헌원군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와같은 사실을 안 헌원은 배달국에 첩자를 보내 배달군의 무기및 갑옷 제조기술을 빼내오고 연기에도 항상 남쪽만을 가리키는 지남거란 수레를 만들어 연기속에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헌원은 이런 무기들을 믿고 배달국에 도전하였으나 치우천황의 배달군에 패했습니다. 이 때 치우천황의 동생인 치우비가 공을 세우려다 전사했는데 중국인들이 이 사건을 보고 마치 치우를 죽였다 라고 사기라는 역사책에 기록했습니다. 한편 치우비의 전사소식을 들은 치우천황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비석박격기라는 투석기를 발명하여 헌원군을 공격하여 탁록에서 마침내 헌원이 항복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탁록대전이라고 합니다. 치우천황은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2599년 1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의 무덤은 산동성 수장현에 있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민족인 치우천황께서는 4800년전에 철제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과 6000년에 요하의 홍산문명이 시작되었을시 그 지방에 새겨진 암각화와 유적물이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기법으로 제작된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민족에 철기 사용연대를 5-6000년대로 보는것이 옳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암각화에 미세한 그림을 새기기 위해서는 예리한 철제도구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실선같은 가느다란 선을 새기기 위해서는 간석기도 아니요 흑요석도 아니요.동물의 뼈인 상아도 아니다.1미리 정도의 가느다란 선을 새기기 위해서는 강한 쇠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로 미루어 보아 어쩌면 극소량이지만 지금으로부터 8000년전인 사해문명에도 철제도구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주장하는 이유는 미국이 핵을 보유하고 핵폭탄 제조기술을 극비리에 감추었지만 스파이들에 의하여 정보가 서서히 누출이 되어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이스라엘.인도, 파키스탄.북한 9개국이 보유하고 있지만 제조기술은 이미 확보 되어있지만 강대국의 견제하에 보유하지 못한 나라까지 합한다면 잠정적 보유국이 몇나라로 늘어날지 모른다.
한 이십년쯤 되었을것이다.우리나라 학생들이 유학을 빙자해 호주에 금덩어리를 찾으러 간 사건이 있었다.실제로 사막의 토끼에서 몇십키로 짜리 금덩어리를 주워 횡재한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5-6000년전에도 아주 극소량에 쇠붙이들이 발견이 되어 이미 열을 가해 토기들을 구워 사용을 하는 우리민족은 철을 단련하여 철제를 만드는법을 알고 있었다는 애기다.실제로 여러분들이 철제를 사용하지 않고 반구대 암각화의 재질인 암석(shale=미사(微砂)나 점토 크기의 세립질 입자로 구성되고 층상구조를 가진 퇴적암)에 실선을 새겨보라.철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민족에 철기시대를 5~6000년 이라고 강력 주장한다.
*저도 역사를 공부하고 많은 연구와 시간을 할애 하고 있습니다.이 한편에 글을 쓰기 위해 약 3개월정도 시간을 준비하고 확실한 증거를 찾기위해 검색 하였습니다.이글은 저의 생각일뿐 공식적인 검증은 되지 않았습니다.하여 같이 토론하고 연구하는것은 좋으나 조소와 욕설은 사양합니다.
관련자료 첨부
KBS HD역사스페셜 2편 신석기인들 바다를 건너다 http://www.kbs.co.kr/1tv/sisa/hdhistory/vod/vod/index,1,list,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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