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아가 4장 1-11절
설교제목 : 아름다움을 보는 자
흘러감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기록적인 북극 한파로 인해 한 겨울의 시린 맛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이 겨울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추운 겨울이 더욱 야속한 소외계층들이 있습니다. 한 보도에서 15만 가구가 아직도 연탄으로 난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가운 계절이 더욱 힘든 분들 또한 추위를 잘 이겨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시의 첫 연이 생각납니다. “너에게 묻는다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 사람이었느냐.”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연탄은 되지 못하여도 우리의 작은 온기로 나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설연휴에 모처럼 교회를 비우고 시골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하필 가장 추운 시간에 교회를 비웠더니 수도가 2년 만에 얼어버렸습니다. 화장실에 난방기를 틀어놓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수도를 녹이기 위해 철물점 사장님이 방문하여 수도를 녹이기 위해 시도했지만 녹이지 못했습니다. 이 번 일을 계기로 중요한 일리를 다시 곱씹어 보았습니다. 닫혀진 수도꼭지는 얼어붙고 결국 작동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흐르지 않으면 멈추고, 멈추면 생명력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고이지 않고 흘러갈 때일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야 썩지 않듯 우리의 생명력도, 우리의 정신 에너지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
오늘 본문, 아가서 4장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 (1).” 아름답다고 두 번 강조하면서 사랑하는 님의 아름다운 자태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고백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 인생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러줍니다. 아름다움, 어여쁨을 보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때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신기하게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또한 어떤 사심도 없이 순수하게 내어줄 수 있을 때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을 예쁘다고 하듯이 아이들이 어릴 때 자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정말 내가 낳은 자식들인가!’ 생각하면서 아름다워 보입니다(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바라볼 때도 그런 심정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과 마주할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삶이 지칠 때, 잠시 눈을 감고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머물렀던 푸른 풀밭과 호수와 산을 떠올리면, 풀냄새, 신선한 공기, 소똥 냄새, 초록의 빛깔까지 선명하게 각인되곤 합니다. 아름다움이 주는 치유의 힘입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생동감이 다시 살아나고, 어떤 온기로 느끼고, 활력적으로 변합니다. 언제나 아름다움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매혹의 과정이 일어나서 사랑할 때도 겉보기에 육체적이고 인간적인 갈망이 있지만, 후면에는 보다 높은 단계의 연합을 시도하려는 본능적 충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가슴이 뛰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가서가 표상하는 것은 한 개체의 사랑으로 환원될 수 있는, 피상적으로 노래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신부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유대 주석가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신부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지켜가려는 순종의 태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는 묵상에 잠긴 영혼과 교회를 의미합니다. 신랑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눈에 어여쁘고 아름답게 보이는 신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지켜가려는 순종의 마음을 지닌 자이자,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묵상하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사랑하는 눈길로 바라보시지만, 특별히 아름답고 어여삐 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눈과 귀, 이, 몸을 깨끗이 단장한 자, 곧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정화된 영혼,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해 단장한 자를 어여삐 보시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작성하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보실때 아름다움은 고상하고 한숨이 나오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저와 여러분을 보시고 어여쁘고 아름답고 노래하실만한 그런 태도가 우리 삶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의 젓가슴의 의미
우리가 봉독한 새번역은 번역을 아주 고상하게 바꾸었지만, 4장 노래에서 대단히 육감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5, 개역개정)”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아름다운 신부의 가슴을 과거를 향하면 모세와 아론으로, 미래를 향하면 두 메시야로서 보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약속 혹은 쌍둥이 율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고려하였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렀던 피와 물로 간주하였습니다. 후대의 은유적 해석은 심리적인 의미와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신부가 그리스도인의 순종하는. 사랑하는 태도이자 교회라면 그 신부의 젖가슴은 풍요로움과 배고픔, 자양분을 제공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진정한 생명의 양식, 자양분을 제공하고 길러내는 가슴은 바로 에로스,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물과 피로 변화되고, 갱신된 자라면 그 가슴에서 흘러나와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길러내는 것은 바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젖입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 수평적으로 타자를 향한 사랑을 위해 내 가슴에 흘러나오는 사랑의 젖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자문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을 지나서 들어가려던 베드로가 나면서 못걸은 구걸하며 살아가던 자에게 외쳤던 말이 떠오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걸으라(행 3:6).”
무언가 결핍을 갈구하며 의존하며 살아가고, 기능하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바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자화상처럼 보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있으면서도 늘 물질을 갈구하며 살고 심리적으로 의존하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은 삶을 채워가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배고픔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나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있다는 베드로의 당당한 고백은 우리에게 도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가 지닌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그분은 인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젖을 먹고 사랑으로 누군가를 먹일 수 있다면 그곳에는 평화와 기쁨, 감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서 사랑의 젖이 흘러나와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풍요와 생명을 선물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고통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여인과의 만남이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번 때문에, 목에 걸린 구슬 목걸이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9).”
‘마음을 빼앗다’라는 표현을 불가타 성서의 프랑스 번역은 “그대는 그대의 한쪽 눈으로 나의 마음에 상처를 내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만남은 마음을 사로잡히는 과정입니다. 이 사로잡힘은 상처를 입히거나 침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 발생하는 상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의식의 법칙에 상응합니다. “항상 무의식적이고 투사된 내용들을 통합하는 것은 자아의 손상을 가져온다”[C.G. Jung, “The Psychology of the Transference”, CW 16. para.472.]
이는 기독교의 핵심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 근간한 케노시스, 자기비움입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비움으로 낮아지고, 축소되고, 제한된 육신 안으로 속박되고, 십자가를 통하여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런 자기 비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그리스도가 실현한 궁극적 사랑의 실현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빼앗기고 상처받고 작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만 노래하지 않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달콤한 그대의 사랑,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한다(10).” 신부가 신랑에게 보이는 사랑은 신랑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누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살고 있으신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너무 피상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그분을 즐겁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의 문제이기에 앞서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즐거움과 기뻐하면 부모가 흐뭇해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공동번역의 집회서 14장 5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인색한 사람이 누구에게 베풀 수 있으랴. 그는 제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른다.”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그 많은 재산도 쓸모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전에 내 자신을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존중해주고 아끼고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