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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들의 자치권(생존)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그린 영화 <Warriors of the Rainbow: Seediq Bale(무지개 전사)>를 다시 감상하고 나서 내가 집필하고 있는 (참파왕국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니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참으로 많이 생겨난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놓았을 뿐이지 사건의 맥락과 본질을 따져본다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삶)이란 게 전부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기 때문이다.
참파족(champa)과 비엣족(viet) 사이에 벌어진 민족적인 문제만이 다툼의 이유였을까? 아니면 힌두교(참파족)와 불교(비엣족) 사이에 벌어진 종교적 요인이 번져나간 전쟁이었던 것일까? 이런 모든 것을 단순하게 지금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의 시선과 입장에서만 보자면 ‘원주인이면서 용의 후손이며 불교를 숭배하는 월족(viet)의 후예들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 온 힌두교를 신봉하는 오랑캐(도래인) 참파족을 상대로 오랜 전쟁에서 끝내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결론 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월족 + 불교 > 참파 + 힌두교) 라는 수학적 공식이 성립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이런 틀 속에 당시의 역사를 함축시켜서 가두어 놓고 어떤식으로든 승자 혹은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결론 내려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진실은 밝혀져야만 하고 참 역사는 어떤 이유에서건 진실 위에서 쓰여져야 하고 후대들에게 가르침으로 전달되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엣족(viet)의 경우 한무제의 남진 정책에 밀리면서 베트남의 북부지역에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연합체를 형성하여 저항하면서 역사의 장에 처음 등장했다. 남월. 안남. 남만의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한 연맹체들 구성원이 모두 비엣족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월족(viet)은 그들 구성원들에 속한 일개 부족이었던 것이다. 월족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용(龍)의 후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남하 정책에 저항하는 부족들이 모여서 연맹체를 구성했는데 그 핵심 지배층을 월족이 차지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이제 시대가 흘러내려가면서 이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국가 월남(viet nam)으로 이어져 내려갔으며, 월남을 지배하며 이끌어가는 주체가 여전히 월족 중심이 된 것이다. 오랜 시간 서로 모여 섞이면서 혼인 등을 통해 섞여 살다보니 자연스레 베트남이라는 하나의 집단이자 하나의 부족국가로 변모해 나가게 된 것이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처지가 다르고 뿌리가 다르고 열망이 다른 세력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늘 그래왔듯이 성씨를 살피다 보면 애초에 정권을 차지했던 왕족과 적극적 협력한 귀족 성씨가 있고, 그 세력권에 들기는 했지만 외래에서 흡수된 지배 세력의 줌심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어느 시기 어느 줄기에선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그런것을 족보(혈통)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한나라(중국) 이라는 강력한 외부세력이 등장하면 여기에 대항하는 베트남(비엣족) 안에서도 각자의 처지에 따라 생각과 대처하는 방법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베트남을 차지하고 지배하던 월족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비결이 오로지 하나뿐으로, 중국에 끝까지 대항하여 승리함으로써만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스란히 고수하고 유지하는 생명줄이겠으나, 그중에서도 최고 권력에 오르지 못한 월족 중에는 차라리 중국과 내통하여 차기 권력을 노려 이중적 태도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월족에게 실질적 권력을 빼앗긴 복속인들 입장에서는 여차하면 월족의 베트남을 뒤집어엎을 생각을 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았겠는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내용이 너무 길어질까 그렇지........ 비엣족의 내부 역사에는 실질적으로 그런 사건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과연 어디까지가 비엣족의 역사일까? 중국역사와는 어떻게 구분지어야 할까? 한반도에 중국이 동북공정을 벌이듯이 베트남을 향한 동남공정은 없는것일까?’하는 의문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이런 우려는 참파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우리가 폴리네시안(Polynesian) 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태평양에 흩어져 사는 해양민족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같은 핏줄의 민족이긴 하지만, 한참 더 위쪽까지 조상대대로 살아온 내용과 의식과 가치관에선 다소 차이가 분명했으며, 서로 교류가 없었고 언어가 달라서 이질적인 타민족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뿌리가 이어져 내려와 비슷한 해양문화를 공유했고, 어떻게 하다 보니 유사한 힌두교라는 종교를 같이 공유한 무늬만은 상당히 같은 폴리네시안들 이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그들 중에서 최초의 도래인은 아마도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 섬에서 건너 온 아체네 족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보르네오 섬이라는 의견도 있고,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도래인들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섬이 널려있고, 말레이시아 반도에 고대인들이 생활하던 섬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태평양 어디에선가 도래인(참족)이 바다를 건너 인도차이나 반도에 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게 한 명도 아니고, 또 한 번에 그친 것도 결코 아니다. 거듭거듭 반복되면서 이미 인도차이나반도으; 베트남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비엣족의 나라 남월(안남. 남만)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되고 성장했다는 말이다. 출발지는 다 달랐지만 비슷한 생김새에 비슷한 생활문화와 힌두교라는 종교를 공유한다는 이유를 바탕으로 나중에 참족(champa)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으며, 그들이 훗날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왔겠고 말레이시아에서도 왔겠고, 필리핀에서 오지 말란 법도 없으며, 나중에 크게 성공했다는 소문을 듣고 괌이나 하와이나 멀리 파푸아뉴기니에서까지 오지 말란 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초기에 이들을 규합하여 참족으로 명명된 사람들은 중부지역 나짱을 근거지로 삼아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북쪽으로 계속 비엣족을 공격하고 몰아내면서 영토 확장을 꾀했었다. 단일민족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출신지가 다른 참족들의 국가에서 과연 최고 실력자는 나짱에 남아서 거점을 다스리며 부와 권력을 향유했을까? 아니면 믿을만한 관리자에게 맡기고 북쪽의 최전선에서 끝없는 정복 전쟁에 나섰을까? 어떻게 해야만 국가와 권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을까? 혈연으로 이어진 단독국가에서도 항상 시간이 자나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형제사이에도 처절하고도 참혹한 비 인륜적인 왕권다툼이 필연처럼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나의 부족 이름으로 뭉쳤다고 해도 최고 권력의 자리는 늘 하나뿐이고, 그 권력은 수도의 왕궁에 남아 철퇴를 휘두르거나, 아니면 최전선으로 출정하여 적들을 무찌르고 영토를 꾸준히 확장시키는 공을 세워 절대 권력유지를 해 나가거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또 그런 선택을 지켜보면서 유불리를 따지고 혹시나 하는 기회를 엿보는 무리가 어딘가에 숨어서 상황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가족 형제간에도 그럴 진데...... 하물며 출발지가 다른 여러 부족들이 모였고, 당장 차지한 권력자리에 대부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는 것이다. 참파왕국 역시도 나짱의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력과 북쪽에서 비엣족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세력으로 동시대에 두 개의 정부로 나뉘어 참파왕국을 다스리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초기에 나짱의 부족국가에 대부분 투신한 반면에. 남쪽으로 몰려 내려가 일찍 남인도로부터 힌두교를 받아들였던 푸난(Funan)왕국으로 흡수된 세력과 내륙 깊숙이 들어가 현 캄보디아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도래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역시나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이 푸난왕국이 내륙의 세력과 연합하여 크메르왕국(캄보디아)의 근간이 되었다고도 하고, 푸난이 오랫동안 참파왕국의 남쪽으로 괴롭히며 마찰을 벌이다가 참파에 흡수 통합되었다고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게 나짱을 근거로 하는 참파왕국의 세력과 남쪽이나 내륙으로 들어가 기반을 다졌던 또 다른 참족 사이에 참혹하게 동족상잔의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 진다. 이것을 내분으로 볼 것인지 다른 국가와의 전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뉘고 있다.
어쨌거나 이제 인도차이나 반도는 그야말로 부족과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터로 점차 변해갔다.
가장 강력해 지는 것은 크메르 왕국(캄보디아)이다. 북쪽의 비엣족(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는 참족(참파왕국)의 거점인 나짱을 쳐들어가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감행하고 사원들을 파괴해 버린다. 참파왕국의 상당부분이 점령당하게 된다. 사실 이 전쟁은 인도차이나 반도 안에서 벌어진 힌두교 문화권 국가들 사이에 ‘누가 진짜 참족 지배세력인가’를 겨루는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않을까 싶기도 하다. 참파는 급하게 수습을 위해 왕국의 거점을 중부지방으로 끌어 올린다. 그곳이 다낭 인근이자 호이안 근처가 되는 것이다. 참파왕국은 그곳에 첫 수도를 건설하고 끝내는 크메르왕국의 침략을 버텨내고 다시 빼앗겼던 것들을 모두 수복 한다.
크메르왕국의 동진은 잠시나마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냈는데 그 틈을 노려 이번엔 느닷없이 아유타이왕국(태국)이 서쪽에서 크메르 왕국의 배후를 친다. 수도 앙코르와트까지 침공한 아유타이는 약탈과 살육과 방화를 저지르고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크메르 군대가 회군한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국가 아유타이가 힌두교국가 크메르 왕국을 침략해 성공했다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 참혹하고 거대한 흔적을 남겨 오늘의 여행객들에게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부처조각상의 머리 부분만을 모조리 잘라내 가지고 갔다. 뱀이나 동물 조각상의 꼬리 부분만을 모조리 잘라내 가지고 갔다. 전리품인 것이다. 태국 방콕 인근의 아유타이 유적지에 가면 크메르 왕국에서 잘라내서 가지고 온 전리품들이 돌담장처럼 길거리와 사원 곳곳에 널부러져 있다.
이런 방식의 인도차이나반도의 전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점차 란상왕국(라오스)과 란난(버마왕국)도 참여하게 되고....... 인도차이나 반도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로 변해간다.
가장 큰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은 훗날........ 크메[르왕국과의 계속 이어지는 참혹하고 지겨운 전란의 결과로 참파왕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다시 강력해진 비엣족(베트남)의 통일 전쟁에 따른...... 분열되고 부패한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의 멸망으로 크게 한 획을 긋게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20세기 말까지 이런 인도차이나의 분쟁과 참화는 계속된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한정된 이 지역안에서 벌어지고 자행된 살륙의 전쟁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보다도 2차 세계대전 보다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의 소멸이었다. 집단 학살의 전시장이었다. 슈퍼에서 나누어 주는 검은 비닐 한 장으로 몇 사람이나 죽일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숫자를 세던 일이 캄보디아에서 벌어졌다. 인도차이나는 점차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갔다.
다만, 그중에서 오로지 태국(아유타이왕국)의 역사만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말이다.
바로 위에 게재한 ‘사진속의 문화유물을 만나보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드려본다면, 추측하건대 아마도 이런 대답들이 나올 것이라 생각된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가면 똑같은 유적과 유물들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어요.’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올 것 같다.
‘태국 방콕 인근의 아유타야 유적지에서 본 것들과 똑 같아요.’라는 대답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뒤를 이어서 미얀마 박물관도 나오겠고, 라오스 박물관도 나올 것이다. 개중에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의 족자카르타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베트남이라는 대답이 나오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보았다. 위에 게재된 사진들은 모두 베트남의 참파문화에 대한 사진들이며, 참파의 문화재는 거의 대부분이 다낭의 <참파 박물관>에 본관 전시되고 있고, 사진은 그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 대답들이 나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동남 아시아권에서 힌두교 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웠고 아름다우면서도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캄보디아이며, 앙코르와트는 힌두문화재의 최고 정수라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기풍의 문화재들이 태국이나 라오스나 미얀마나 고르게 널리 퍼져있는 이유 또한 그들의 역사 저변에 깔려있는 힌두분명이 영향력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태국의 경우는 오로지 순수한 불교국가였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힌두교와 불교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유사한 과정과 엇비슷하게 때론 공존을 하고 때론 구분되어지는 변천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불교와 힌두교가 전혀 다른 별개의 종교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불교와 힌두교는 많은 부분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좀 더 세세하게 따져봐야만 알게 되는 것으로는....... 동남아는 소승불교에 속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은 대승불교에 해당된다. 일상적으로 보여 지는 것은 동남아 국가의 소승불교가 힌두교와 밀접하게 잘 융화되어 보이는 듯싶은데, 불교 교리에 들어가면 힌두교는 오히려 우리나라의 대승불교와 많이 비슷하다 할 수 있다.(이런 불교 교리와 종교적 관점은 필자의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다.)
인도차이나반도의 국가들이 대부분 본래는 힌두교 국가들이었으나 후대에 들어서 모두 불교국가로 개종을 하게 된 경우들이지만, 베트남의 경우에는....... 자신들은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오로지 월족(viet)에 의한 불교국가를 숭상했고, 실제로 1.600여 년 동안이나 베트남의 중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을 털어내고 지워버리고 싶은 외세의 침략시기로 철저하게 외면해 온 결과에서 생겨난 일이다. 20세기 말엽까지 베트남 역사는 참파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에서 제외시켜왔고 역사교과서 어디에서도 참파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베트남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참파’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그자의 일인 것이다. 베트남의 학자와 지식인들이 나서서 참파 문화와 문자와 문화재와 생활풍습을 찾아내고, 참파의 역사를 베트남 역사에 편입시켜 교과서에 올린 것은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나짱 여행을 다녀오면서...... 포 나가르 사원을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참파(champa)’라는 용어를 접해 본 여행자들이 상당할 것이다. 불교국가 베트남에서 조금은 낯설거나, 조금은 이질적인 기분으로 포 나가르 사원을 방문해서....... 그런 것은 어찌되었던(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다 잊어버릴 테니) 멋진 사진이 많이 쏟아지는 뷰포인트로 붉은 탑이 있던 ‘나짱의 참파 사원’정도로 기억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나짱의 포 나가르 사원을 보시고 참파 문화의 어떤 새로운 점을 느껴보셨습니까?’
‘참파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이나 나짱의 포 나가르 사원이나 모두 같은 부족 사람들이 만든 힌두교 사원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짱의 포 나가르 사원이 베트남의 힌두문화재 전부인가요?’
이제 우리는 나짱을 벗어난 참파왕국의 발자취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자.
압사라(Apsaras)는 힌두교와 불교의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속의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다. 매혹적인 미모에 우아한 자태를 갖추고 특히 아름다운 춤에 예술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로 비유하자면 물과 구름의 요정이요 춤의 뮤즈라고 할 수 있으며, 영어권에서는 님프라 부르겠고 우리나라로 치자면 선녀쯤 된다고 하겠다.
현실로 돌아와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권에서 살펴본다면, 궁중에서 시중을 주로 드는 노예에 해당하는 간다르바 계급의 부인들을 아프사라고 부르는데 이 여인들은 처음부터 춤에 소질이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 중에서 골랐다. 신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 때나 왕을 비롯한 최고 권력자들이 잔치를 벌일 때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남편인 간다르바들이 만들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쉽게는 궁중 무희라 할 수 있겠지만 속속들이 내용을 들여다보자면 한반도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기쁨조’를 떠올려보면 아주 이해하기가 쉽겠다.
힌두교 문화재를 관람하다보면 곳곳에서 비교적 쉽게 압사라를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아마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유명한 압사라를 꼽자면 당연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군 중에서도 ‘반디아이쓰리 사원의 압사라’가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압사라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이 ‘반디아이쓰리 사원의 압사라’를 다른 이름으로 ‘알드레 말로의 압사라’라고 부른다. 바로 위의 사진을 참조해 다른 압사라 부조상들과 비교를 해 보든가, 아니면 따로 SNS 검색을 통해 다른 지역이나 국가의 압사라들과 비교 검토를 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이 압사라 조각상이 그토록 유명하냐?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20세기를 살다가 떠난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이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의 이름과 이력 뒤에는 항상 (20세기의 최고 지식인)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 지성인) 이라는 칭호가 따라붙는다. 2차 대전 중에는 직접 탱크를 몰고 독일군에 대항하는 전차부대여단장으로 참전을 했다. 종전 후 드골정권에서 그는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현대적 지식인의 표본이었다.
그랬던 그가....... 천하의 앙드레 말로가 1923년 그야말로 영원히 씻어 내거나 지울 수 없는 최악의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던지....... 2차 대전의 종전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프랑스인들이 저마다 국기를 손에 흔들며 파리 시내로 뛰쳐나오던 그날의 열광적인 사건만큼이나 뜨거운 이유였다고 한다. 모든 프랑스인은 물로 전 세계가 경악과 충격에 빠져들고 말았던 희대의 사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20세기의 최고 지성인으로 불리던 앙드레 말로가 이집트나 그리스도 아닌 한낱 미개한 식민지로만 치부되던 변방 아시아의 한 구석에 위치한 정글 속에서 그 식민국가의 국보급 문화재를 훔쳐서 가지고 도망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뉴스가 세계만방에 긴급뉴스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말로가 순간적으로 돌았나?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거야? 투칸타멘왕의 황금 마스크쯤 된단 말인가?
사태는 뉴스가 보도되는 순간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되어버렸고, 이제부터 정작 세계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말로가 훔치고자 했단 말인가?’하는 범죄 원인제공물품에 대한 온갖 소문과 추측과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폭되고 있었던 것이다. 언론매체들은 지난 날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난 되어 1년 이 넘도록 모든 언론과 매스컴을 완전 장악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앙드레 말로의 도난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 문화재가 바로 위의 사진중에 가장먼저 게재된 ‘앙드레 말로의 압사라’인 것이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곳곳에 기둥과 벽마다 붉은색 사암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장식한 부조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할 정도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가히 ‘이것이 크메르 예술의 극치로구나’하는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거대하면서도 웅장하고 장엄하면서도 빼어난 건축적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이나 바이욘 사원들에 비교하자면 반디아이쓰리 사원은 궁전 출입문 옆의 문간방 정도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반디아이쓰리 사원의 중앙신전 기둥면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곡선이 유독 아름다운, 관능적인 몸매에 길고 나긋해 보이는 가녀린 손가락 동작으로 요염함과 섹시미를 한 것 뽐내는 압사라 부조상이 놓여있다. 빵빵하게 드러난 유방과 하늘거리듯 옅은 바람에도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같은 치마 사이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각선미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감히 그 강한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한 순간에 바로 그 돌조각에 빠져들고만 ‘미친 놈’이 하나 있었다. 자기가 무슨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 쯤 된다고 착각도 된통 큰 착각을 해버렸던 듯하다.
말로는 전문직업인(도굴꾼)을 사서 사원의 벽면에서 조각상을 떼어냈다. 나무상자에 담아서 잘 포장하고는 부랴부랴 즉시 귀국길을 서둘렀다. 내 집까지 무사히 가져가야만 비로소 완전한 내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씨엠립에서 수도 프놈펜을 통해 프랑스 파리로 막 출발하려던 때에 세관에 적발되어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불법 도굴에 문화재 밀반출 사범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희대의 아이돌이랄 수 있는 앙드레 말로가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단순히 처음인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재판을 받았는데........ 희대의 유명인 프랑스 지식인이 범죄를 저지른 캄보디아가 아니라 프랑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어떻게......... 최고의 변호사들이 넘쳐났고 거기다 항소까지 이어졌다면(아마도 캄보디아 법정이었다면 종신형쯤?)....... 말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석방되었다. 물론 도굴된 문화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복원되었다.
앙드레 말로는 이런 이력이 차고 넘침에도 훗날 프랑스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다. 루브르 박물관이 거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더해서...... 훗날 <앙드레 말로 박물관>이 탄생했는데 대부분이 인도차이나의 문화재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웃긴다고 해야 하나? 지랄발광을 떤다고 해야 하나? 똘레랑스( Tolerance)의 나라에서는 그 정도쯤은 뭐 별거 아니라는 말인가?
앙드레 말로는 <캄보디아 압사라>에 홀려서 그만 그런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다.
지금 나나......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당신 앞에 위에 게재된 4개의 압사라 조각상을 가져다 놓고, 그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나 당신의 선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치명적 매혹의 섹시함이라면 <인도 압사라>가 압도적일 것이고, 전체적 구도 속에 꽉 채워진 생동감과 멋스러움은 <인도네시아 압사라>가 으뜸이겠고,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보일 정도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베트남 압사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단 하나의 조각상을 선정해야만 하고, 그 원본과 똑 같은 모조품을 만들어 선물로 받아 소장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조각상을 선택해야만 할까?
아마 나라면.....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먼저 밝힐 수 있겠다.
‘<앙드레 말로 압사라>는 아닐 거야.’ 라고 말이다. 직접 본 사람의 입장에서 말이다.
‘어이 말로씨. 수준이란 게 겨우.........’(어디까지나 내 주관적 생각과 판단에서는)
암튼, 이쯤에서 이제 우리는 나짱을 벗어난 참파왕국의 발자취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자.
지도의 부연 설명에서 1.300년이라고 한 것은 참족의 처음 등장에서 소멸까지는 약 1.600여 년의 시간이 맞겠으나. 처음 도래해서 부족국가의 형틀을 만들고, 최후에 몰락은 했으나 허수아비 위성 왕국을 잠시 세워서 흡수 통일에 따른 혼란으로부터 안정을 시키려는 등의 노력 기간들을 따져볼 때, 실질적인 존립과 실효 지배의 기간을 대략 1.300년 정도로 본다는 뜻이다. 그래야 역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굳이 부연 설명을 해 두는 바이다.
베트남은 한반도 전체 면적보다 약 1.5 정도 크다. 남북으로 아주 길게 늘어진 독특한 형태로 해안선의 길이로만 따지면 칠레에 이어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나라다.
대충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2세기 말엽에 남중국해(태평양) 바다 전편에서 목숨을 걸고 카누에 의지한 채 해안에 상륙한 다수의 무리가 있었으니 훗날 참파 왕국이 되는 참족들의 출현이었다. 나짱 인근에 상륙하여 부족들이 살아가는데 적합한 입지를 찾다가 마침내 나짱을 보금자리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서 결국엔 참파 부족국가가 등장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꾸준히 저항운동을 벌이며 이어져 내려온 비엣족(월족)의 베트남은 이제 남쪽에서 세력을 키워 올라오는 도래인 집단 참파족과 영토의 절반을 나누어 가지고 대립하는 양상으로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2세기 말엽으로 돌아가 도래인(참파족)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려 하는데, 이 대목에서 이제까지 내가 찾아본 어느 베트남 역사 논문이나 기타 자료에도 명확하게 해답이 명시되지 않은 한 가지 의문에 대해서 사전에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만하겠다.
참족의 역사는 스스로 남겨 놓은 자료들이 별로 없고, 훗날 승리자가 되는 비엣족에 의해서 일부러 지워졌으며, 중국의 입장에선 자신들과 특별하게 사건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잡다하게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적거나 아예 없었으리라. 끝내 패망과 몰락으로 결론지어진 참족의 역사는 이런 이유로 상당부분을 베트남의 역사와 중국의 기록을 근거로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서기 2세기 말엽에 도래인(참족)이 남중국해 바다를 건너 들어왔고, 중남부 지역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거점을 마련하면서 부족국가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거점도시를 까우타라(K까authara)라고 당시에 불렀으니 바로 지금의 나짱(nha trang) 이다. 이들의 상륙을 원주민에 해당하던 비엣족(nan viet)은 침략이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었고, 점차 부족 세력 간의 대치와 견제로 변해가다가 마침내 192년 반란으로 인하여 참족 부족국가가 베트남 역사의 전면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참족 역사, 베트남 역사, 중국 역사에서 모두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중국의 역사기록서 중에는 이 사건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고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있다.
“서기 192년 지역관리의 아들인 쿠리엔(區連)이 이끄는 반란이 리난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샹린(象林, Xianglin - 현재의 후에, Thừa Thiên Huế 성)에서 한족 치안 판사를 살해했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런가하면 다른 기록에도 “서기 192년경, 샹린현(西林長縣)의 공로(公家)의 아들인 오롄(Ou Lian)이 현(縣) 치안판사를 살해했다.”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베트남의 고문서에 따르면 “Tượng Lâm(象林 Xianglin)에서 중국의 두 번째 지배기간에 한 왕조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참파 왕국을 세웠다. 서기 192년의 일로 샹리현 공로장교의 아들인 스리 마라(Sri Mara) 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지명이나 이름에 대한 제각각의 부연 설명이 있다고는 하나, 분명한 것은 <서기 192년에 반란이 일어나 한족 관리를 살해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참파족의 부족국가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건이 192년에 발생했다는 점, 처음 반란이 일어난 장소가 리난 이라는 점, 반란의 우두머리였던 한족 관료의 아들 스리 마라(Sri Mara)가 상리현(현 후에)에서 치안 판사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에 올랐으니 참파왕국의 초대 왕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내심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한참 후대에(적어도 8세기 이후)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전에도 어떤 기록들이 있었는데 사라졌다거나, 아니면 구전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라든가...... 어쨌거나 현재의 모든 기록은 적어도 실제 사건이 벌어진 이후로 적어도 500년 이상 지나서 쓰여 졌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사건을 192년에 벌어졌고, 스리마라가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초대 참파왕국의 왕이라는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참파라는 용어와 참파 왕국이라는 고유 명칭은 7세기 중국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고 8세기부터 모든 기록에 참파왕국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워지고 사라진 참파왕국의 고대 역사에서 7세기 이전의 왕조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참파 역사에 흡수되었는지 까지는 내가 전문 학자가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7세기 이전에 참파왕국의 왕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된 자료는 없다. 그저 사건에서 사건으로 꿰맞추기 식으로 나열을 해서 생각해 볼 뿐이다. 더욱이 중국과 베트남 자료에 따르면 참파왕국 초대 왕위에 오른 반란의 우두머리 스리마라(Sri Mara)가 한족 관리의 아들이라고 혈통에 대해 명기해 놓았으니, 이 또한 밝혀져야 할 일이다. 한족은 외부 지배세력인 중국을 가리키고, 비엣족은 베트남의 원래 주인인 월족을 가리키고, 바다를 건너 온 도래인은 500년이 지나서야 참족(Champa) 이라고 명칭을 붙이게 되니...... 고대의 현실 속에서 그들의 신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는 좀 더 살펴볼 일이다. 스리마라가 기록된 바처럼 한족이라면.... 그것은 중국인 지배세력 내에서의 쿠데타였어야만 한다. 반란이 아니라 내란이고 그가 왕이 되었다면 그는 중국 변방의 반란군 왕이었어야만 하는 것이다. 반란 진압군이 아닌 내란 토벌대가 중국 본토로부터 파견되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중국과 베트남의 기록에서 그가 한족 관리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참파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고 하니........ 혹, 한족 반란군과 참족 우두머리들이 그 당시에 벌써 짬짬이(?)를 했다는 말인가? 혹 돌아가면서 왕을 하기로?????
다음으로는 서기 192년에 반란군이 한족 치안판사를 살해했다는 사건의 해당 년도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의문에 배경에는 처음 반란이 리난에서 일어났으나, 살인 사건의 장소는 역사도시인 중북부 지역 후에(Hue)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나는 이 의문을 꽤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처음 후에와 미선 유적지를 직접 다녀 온 2017년 이후로 아직까지 이 의문의 해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당시(2017년)의 여행에서 남겨 온 자료와 내가 작성한 메모를 몇 번이고 다시 찾아내서 읽어 보지만 아직도 오리무중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젊어서 하라는 공부나 열심히 했었더라면...... 혹시라도 역사학 교수라도 되어서 베트남에 교환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후에 박물관에 한 이삼년 머물렀었더라면....... 논문을 발표했거나, 최소한 해답은 얻었을 텐데 말이다.
참족이 건설한 도시들은 모두 해안에 위치했다. 나짱처럼 말이다.
참파왕국의 수도였거나 수도 못지않은 중요거점 도시였던 판두랑가(Panduranga). 까우타라(K까authara). 뀌논(Quy Nhon). 비자야(Vijaya) 등이 모두 해안을 끼고 형성된 도시들이었다. 다만 꼭 한 군데만 빼고 말이다.
참파왕국의 최고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수도였던 인드라푸라(Indrapura)만은 투 본(Thu Bồn)강 줄기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변에 참파왕국 최고의 무역항 꾸어다이치엠(Cua Dai Chiem)을 건설하여 중국과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바다 비단길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만들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 다낭여행의 가장 중요한 핫 플레이스로 중심역활을 하고 있는 호이안(Hội An)이다. 아마도 지금 보다는 항구 유역이 훨씬 넓었고 수심 또한 매우 깊었으리라. 상당한 규모를 갖춘 국제 무역항이 바로 호이안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호이안은 참파 왕국의 수도 인드라푸라(Indrapura) 영역 안에 설치한 항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호이안 입구에 해당하는 남중국해와 연결되는 포구에서 시작하여 응강 패스 고개(Ngang Pass)까지 사방으로 갈라져 뻗어진 강줄기를 따라 박짜미. 뿌닌. 히엡덕. 꿰손 현과 다이록. 쭈이쑤엔 현을 강변을 따라 형성 시켰다. 이들 모두를 포함하는 거대 영영이 바로 참파왕국의 수도인 인드라푸라(Indrapura) 영역이었고, 인근 산악지역 숲속에 참파왕국의 역사상 가장 신성한 지역인 미선(My Son) 신전 구역이 세워졌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오늘날의 다낭과 같은 항구를 건설할 수가 없었다. 바다 비단길의 중심으로 발전해가는 상황에서 커다란 항구가 절실히 필요하였음에도 방파제를 막고 항구를 세울 건설력이 없자, 강의 폭과 깊이가 보장되고 꾸준한 수량이 확보되는 투 본강의 강줄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지역에 항구를 건설한 것이다. 이는 바다에서 벌어지는 천연재해인 태풍이나 해일로부터 무역항을 지켜주는 역할도 하였으며, 오랫동안 남중국해에서 기생해 온 해적들로부터 방어에 크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드러난 이야기나 과정이야 어찌 되었던,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들은 나짱 인근에 둥지를 틀었고 토착민이었던 베엣족과의 마찰을 피해가며 세력확장을 꾀하긴 한 모양이다. 스리마라(Sri Mara)라는 인물이 주동이 되어 북쪽으로 진출을 하던 중에 나짱(nha trang)과 꾸년(Quy Nhơn)의 중간쯤에 있는 해안마을 리난에서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한나라(중국)의 지배세력들과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하여 이 사건을 역사에는 참족에 의한 최초의 반란으로 기록되었다. 이제 한족(중국)과 그들의 지배를 받는 비엣족(베트남과)에 맞선 참파족 간의 전면적인 영토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와중에 기어코 상림현까지 북진을 한 스리마라가 이끄는 참파족에 의해 한나라에서 파견한 현령이 살해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한나라가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를 여러 차례 파견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스리마라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첫 참파왕국의 왕이 되었으니 그것이 서기 192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건을 그저 단순하게 ‘서기 192년에 모두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면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해 질 정도로 상당히 곤란해진다.
도래인들이 기틀을 다진 후에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다 보니 리난에 닿았고, 거기엔 한나라의 지휘를 받는 군대 세력이 이미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당시로 비록 숫자는 적었다고 할지언정 베트남 전체 지역의 어디인들 지배세력의 군사와 관료들이 없었겠는가? 그들이 본래 주인이었고 토착세력이었으니 말이다. 나짱에서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다보니 리난 이었다는 말과, 빼앗으려는 사람과 안 뺏기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연히 싸움이 있었을 것도 충분히 예측이되고도 남는다. 이제 싸움은 벌어졌고 정체도 들통이 난 마당에 양측이 모두 사활을 걸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을 것도 뻔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첫 주둔지였던 나짱(Kauthara)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상림현(象林縣)까지의 거리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도로망을 기준으로 624km나 된다. 여행사 투어버스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약 13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아주 먼 거리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서울에서 부산 까지의 거리가 대략 323km로 볼 때, 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아주 먼 거리다. 그 거리를 고속버스도 기차도 아니고, 소수의 군사 지휘부만 겨우 말을 이용했고 군대의 대부분이 보병이었던 고대에 죽어라 걸어서 이동을 해야한다면....... 좀 생각을 깊게 해 보아야 할 필요가 반듯이 생긴다. 제대로 된 길이 없었을뿐더러, 더운 나라라서 이동식 천막까지는 필요 없다 해도 개인 병장기와 식량 등의 보급부대까지는 따라가야만 한다면, 제대로 뚫린 길이 마땅치 않는 상황에서 군대의 이동과 진군은 가히 속도를 계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래인(참족)의 경우는 물론 해양민족이었으니 바닷길을 이용해 배를 타고 북상했을 가능성은 있다.
반란이 확인되었으니 리난에서 상림현(후에)까지 가는 여정에 얼마나 마찰과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그냥 매일 뛰다시피 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황영조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뛰어갔다가 다시 뛰어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며칠이나 걸릴까? 밥 먹고 죽어라 뛰기만 해서 다녀 올 수는 없을 테니, 밥먹고 뛰다가 쉬고 또 먹고 쉬다가 뛰고 먹고 자고, 무리하지 않고 완주하려면 주 5일 근무는 아니래도 중간 중간에 쉬고, 치료도 하고....... 안되겠다. 길이 없어서 산 넘고 물 건너고 강을 헤엄치고 비가 왔다하면 난리도 아니고....... 거기다가 월남이면 한낮에 푸ㅜㄱ푹찌는 온도가 얼마며, 뱀에다 독충 많지 풍토병이 장난이 아니지, 쌀국수만 먹고 뛰라고 할 수도 없을테고....... 시키지 말자. 황영조 금방 쓰러진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현령 살인사건이 192년에 벌어졌다면, 아마도 리난에서의 최초 반란은 187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161년에 벌어졌지 말란 법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국토 3/1 정도를 1년 안에 차지했다는 말보다, 싸우고 빼앗고 또 싸우고 빼앗고 올라가다 보니 대충 한 20년 이상 걸렸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난에서 192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군 모두를 기차에 태워서 13시간을 죽어라 달려서 상림현 해변에 내린 후에, 고을 관청까지 일주일을 달려가 기어코 고을 현령을 죽였다’라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번쯤은 살며시 귀를 기울여 보거나 관심을 가져볼 만한 기록이 하나 중국 수나라 때의 문서에서 나왔다. 정말 우연히 이 기록을 접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내 메모에 의하자면 내가 스리마라(Sri Mara)를 한족으로 볼것이냐. 아니면 참족으로 볼 것이냐를 두고 의문을 품었었고, 그 과정에서 우련(區連) 이라는 이름을 찾아냈었는데, 어디선가 스리마라를 중국에서는 우련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수나라 시대 기록의 주인공이 바로 우련(區連)이었다.
참족이 세운 참파왕국의 첫 국왕의 이름이 제각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에는 우련(區憐)이라 적었고, 양서(梁書)와 수경주에는 우달(區達) 이라고 적었다. 또 우련을 베트남에서는 꾸리엔(Khu Lien)이라 불렀고, 이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참파족이 남긴 문화재의 비문에는 스리마라(Sri Mara)로 적혀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인 기록에는 우련이 상림현 출신으로 아버지가 상림현의 공조 신분이었다고 밝혀 놓았다. 이 상림현이 진(秦)나라 때는 임읍이었다가 한나라 시대에 상림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족인 우련이 192년에 상림현을 공격해 현령을 죽이고 그곳을 차지한 후에 임읍왕에 즉위했다. 임읍(林邑)이라는 명칭은중국의 기록에서 보자면 수나라 때까지 사용했으며, 이후로 참파왕국의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며 이어져 내려가다가 1832년에 와나전히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졌다. 진서와 수경주에 기록을 더 살펴보면 우련에게 후사가 없어서 외손자인 범웅(范熊)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기록까지 있는 것으로 보자면, 스리마라(Sri Mara)와 우련(區連)이 동일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족인 우련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워 초대 왕에 올랐는데, 그것이 참파 왕국의 왕조였다고 한다면....... 우련의 한족 왕조가 참파족을 흡수해 놓고도 참족의 나라라고 선물처럼 해준 것인지....... 참족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웠는데 바지 사장으로 우련을 내세웠다가, 차차 안정을 찾은 다음에 참족의 왕조로 회수해서 다시 세운 것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문제가 풀려야만 참파 역사의 정통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가 하면 수나라 시대의 어떤 기록에 의하자면......... 서기 137년에 일남군에서 봉기(반란)이 있었는데 주동자가 우련(區連)이다 라고 하는 설이 또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나는 당시에 바로 이 대목에 등장하는 ‘137년’과 ‘우련’이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여기에서의 일남군은 베트남 북쪽 지방인 수도 하노이의 남쪽 경계선 지역이다. 참족은 도저히 그곳까지 갈 수가 없다.
평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을 하고자 애썼고,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밝혀보고자 몇 번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는 필자(본인)의 입장에서 이제까지 드러난 참족이 시작되는 시기를 창작을 통해서 들여다본다면 어떻게 써야만 할까에 대해서 내 나름으로 고심 아닌 고심을 좀 했었다.
그래서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미스테리와 같은, 서기 192년 경의‘참족의 도래와 출발’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 결론지었다.
“서기 2세기 후반이 아닌, 초기에 바다 건너 도래인들이 카누를 타고 인도차이나반도 비엣족의 나라 중남부에 위치한 해안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 도래인 무리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건너 온 아체네 족이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멀고 험난한 망망대해를 작은 카누에 의지한 채 목숨을 걸고 헤엄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들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하여 처음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길과 방법을 모색하거나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고향이었다. 새로운 터전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여기저기를 쏘아 다니다가 살아가기에 딱 알맞은 지역으로 까우타라(Kauthara. 나짱)를 발견했고 그곳에 터를 닦아 정착했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오는 도래인들이 자신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마트라섬은 물론이고 자바섬과 훨씬 남쪽인 말레이시아 반도의 여러 섬에서도 계속 적으로 유민이 속속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들과 원주민인 토착민들은 생김새부터가 전혀 달랐다. 그리고 토착민들은 불교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래인들은 힌두교를 믿었는데, 바다 건너 여러 곳에서 계속 적으로 몰려오는 도래인들이 모두 공히 같은 힌두교를 믿었으며, 생김새와 생활풍습이 모두 똑 같았던것이다. 오로지 다른 것은 몰려온 지역과 부족 단위로 통용되는 언어가 달랐으나 그마저도 그렇게 심각한 정도의 언어적 차이가 아니었던지라 조금 시간이 지나 소통엔 전혀 문제가 없는 정도가 되었다. 그들 모두의 언어적 바탕에는 인도의 산크리스트어 기반이 공동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용어의 뜻과 의미는 같으나 읽는 발음이 다른 정도였다고 할까?
토착민들과 이주민들 사이에 경계심을 넘어서 점차 생존 문제에 걸림돌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이들은 태생적으로 적대 적의 관계였으니 말이다. 다만 토착민인 비엣족이 처한 상황은 진나라 이후로 몰락하여 이어진 한족이 북쪽 하노이에 식민 정부를 두고 베엣족을 다스리고 약탈을 하던 시절인지라, 비엣족에겐 자위권이 없을뿐더러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온 독립운동(반란)과 진압의 과정에서 변변한 군사력이 미미한 시점이었다. 오로지 모든 권한이 하노이에 주재하는 한나라 파견 정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기반으로 북쪽으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도래인(이해를 위해 참족이라 표현해야만 하겠다. 참족이란 표현은 앞으로 5백 년이 더 지나야 등장하지만 말이다)들에게, 서서히 부족국가의 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했고, 여기에서 참족의 리더로 스리 마라(Sri Mara)가 등장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태평양 곳곳의 섬에서 흩어진 채로 몰려든 도래인들은 이제 스리 마라의 지도 아래서 하나의 부족국가로 탄생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까우타라(나짱)을 떠나 해안선을 따라 북상을 감행하다가 리난에서 처음으로 한족이 지배하고 있는 토착민 세력과 처음으로 정면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137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충돌이 부랴부랴 하노이의 한족 지배층에게 보고가 되었고, 이것이 곧 참족이 일으킨 최초의 반란으로 기록되어 진 것이다.
한나라는 이 멀고도 먼 변방 구석의 반란을 진압하기는 해야겠는데, 실익이 별로 없는 이곳까지 정규군대를 파견할 수가 없었다. 사방의 오랑캐와 전쟁을 벌이느라 나름의 사정도 실재했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반란군 참족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할 수 있는 군사력은 토착민인 비엣족의 기득권자들이 하노이 인근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뿐이었다. 한나라의 명령을 받은 비엣족 토벌군이 남쪽으로 진격하고, 기세가 등등해진 참족 반란군이 수시로 심심하면 붙었다가 또 물러섰다가 위에서 닦달하면 또 붙었다가 불리하면 뒤로 물러서기를 꾸준히 반복했을 뿐이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큰 싸움도 치명적 피해도 없이 붙었다 떨어지면 또 쬐끔 북쪽으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상림현(象林縣 현 후에)은 한나라 정부가 강력하게 남진정책을 강행하면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자 거점으로 세운 남방한계선과 같은 중요한 지역이다. 현령을 두고 여기 남쪽지역의 정책과 통권에 대해서는 독자적 권한을 주었을 만큼 요충지였다. 중국 입장에서는 상림현까지 만이 쓸모있는 병합시킨 영토였다. 그 이남은 정글과 습지와 쓸모없는 돌덩이 섬으로만 가득하고 온갖 독충과 풍토병만이 만연한 쓸모없는 땅이라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었다. 중국이 참족의 반란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이유에는 어쩌면 그런 영토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북상해 온 반란세력이 상림현을 침략하여 중국 정부가 파견한 한족 고위 관료인 현령을 참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192년의 일이다. 이제부터가 바야흐로 반란군이 한나라의 영토까지 침범을 했고, 한나라의 관료를 참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국가적 중대사안이 되었다는 말이다.
상림현은 스리 마라가 이끄는 참족 군대가 점령을 했고, 상림현을 참족의 중심도시로 삼은 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참파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는........ 나는 이렇게 전개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참족의 부족국가로의 등장이 이 시기인 서기 192년 이라면, 137년 리난에서 처음 군사적 봉기(반란)를 일으킨지 55년이 지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나짱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도래인(참족)들이 체재를 갖추고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면서 시작하여 후에(상림현)까지 치고 올라와 비로소 국가라는 위상으로 격상되기까지 대략 60년 정도가 소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 하나 둘이 보여 무리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서 세력을 형성한 후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군사적 무기와 체계와 어느 정도의 훈련을 거친 후에야 정벌이든 원정이든 나설 것이며, 군대가 움직이면서 싸움을 계속하자면 엄청난 군비가 필요해 진다. 거기다가 싸워서 이겼다고 무작정 지나간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싸움에서 승리해서 지나가게 되는 고을마다 관리자를 두어 통제와 운영을 해야 하고, 공평하게 세금을 거둬 전쟁비용을 지속적으로 충당해야 한다.
그런 고대의 시기에 서울 부산을 두 번 왕복해야 하는 대략 624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쳐 올라가는데 60년 가까이 걸렸다면.........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이 아닌 바에야 엄청 빠른 진출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와 같은 방식의 생각이 전제가 되어야만 그나마...... 참파왕국 초기의 역사가 풀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 보라. 신라가 한반도 지도를 북에서 남으로 갈라서 한쪽 거리만(백제)을 넘어가 차지하는데도 600년 이상이 걸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추풍령에서 서해까지 진출하는데 600년이 걸렸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참파족은 아직 상리현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그럼 우련(區連)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된다.
만약 필자라면....... 내 소설속에 등장하는 우련은 진짜로 한족이며 아버지가 상림현의 고급 관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겠다. 하지만, 그는 별로 품질(?)이 좋지않는 권문세가의 어긋난 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한족 고급 관리라는 세도를 믿고 망나니 짓을 일삼다가 실제로 수도 하노이의 변두리에 있는 일남군에서 사고를 크게 쳤고, 그 사태를 수습할 길이 없자 불량배 무리를 모아서 그 일남군에서 도적괴수(반란군)가 되었을 수 있겠다. 그것이 137년에 일이었으며, 이후로 양산박의 도적 흉내를 내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참 세월이 지나 참족이 거세게 북상해 오더니 상림현을 침범하였는데, 이때 과거에 우련의 망나니질을 통해 일족이 몰살당한 또 다른 한족이 복수심에 불타 참족과 내통하여 적지않게 공을 세웠는데, 그의 이름이 하필 우련(區連)과 비슷한 우달(區達) 이었다.
이런 사실들이 하노이의 파견 정부 관리에게 보고되고, 다시 거치고 거치고 또 거쳐서 본국 한나라 왕실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기록상의 오류와 보태지는 속설들의 결과로 저렇게 도무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는 참족 역사 미스터리 비스무리가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다.
사건이 벌어졌고 보고서가 작성되어 올라갔으니 해당 년도는 필수 사항이라 맞겠는데, 말이 옮겨갈 때마다 이름과 지명이 비슷한 것도 있고, 표기상에 오류도 있을 수 있고, 전해들은 가설이 진실처럼 왜곡돼 첨부되거나 문맥이 연결 안되게 중간부분이 삭제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그 다음 담당자는 무슨 수를 쓰던지 그 막힌 문맥을 어떻게든 다시 이어나가려 나(필자)처럼 창작의 요술을 부려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진실은 알지 못하지만 일단 보고서는 올라가야만 한다면........ 보고 못하면 당장 끽(죽음)인데?????????
어디까지나 필자의 소설적 가상과 추측에 의한 역사 재해석일 뿐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나의 가정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난다면....... 그럼 그때부터 참족 역사가 제대로 술술 풀려가게 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나짱의 포 나가르 사원(Po Nagar Cham Towers)을 보고나서 그것이 ‘참파문화의 정수’인양, 혹은 ‘참파문화의 전부’ 라던가 ‘유일하게 현재에 남은 마지막 참파유산’쯤으로 오해하는 오류는 절대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있음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을 따름이다.
나짱은 참파 문화가 베트남 영토에서 처음 시작된 곳이고, 그들 참파족은 꾸준히 북상하여 오늘날의 호이안 근교에서 가장 화려하게 문화의 꽃을 피웠었다. 참파 전성시대의 수도가 그곳이었고, 참파족이 가장 신성시하는 절대성소인 하늘과 조상께 제사를 올리던 제단도 그곳에 있었다. 미선(My Son) 유적지가 바로 그 신성한 장소이다.
나짱에서 다낭이나 호이안까지 10시간 이상을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다보면 주변 풍경의 곳곳에서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참족의 탑을 여럿 볼 수 있다. 참족이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해 가면서 도시를 세우고 사원을 만들고 성채를 쌓았던 흔적들이다. 그것들 모두가 포 나가르 사원 못지않은 참족문화재인 것이다.
참족의 역사가 베트남 역사에 흡수되고 정식으로 인정받은 지가 불과 수십 년에 불과하다. 그 전까지 베트남 사람들과 베트남 역사는 참족의 역사를 수치스럽고 지워버리고 싶은 오랑캐의 역사라고 인식하고 대응해 왔다. 그러다보니 사실 제대로 남은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다낭에 있는 <참족 박물관> 이나, 호이안에서 좀 더 깊은 내륙에 위치한 미선 유적지를 가보지 않았다면 베트남 영토 속에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에도 버젓이 남아있는 ‘참족 문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옛 영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찬란했던 참족의 문화를 직접 만나보고 느껴보고 충분히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포 나가르 사원은 찬란했던 참족 문화의 극히 단편적인 일부분일 뿐이다.
어쨌거나 이제 다시 본론인 역사로 되돌아가 보자면........
나짱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온 스리 마라(Sri Mara)의 참족이 서기 192년에 상림현(후에)에서 중국 관리 현령을 죽이고 부족국가를 세워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드러난 전부이다. 몇 년에 왕에 올랐다는 것인지, 어떤 정치 체계를 세웠고 대외적으로 어떤 정책을 추진했는지 아무것도 전해지는 게 없다. 이 시기에서부터 대략 한 300년간의 공백이 생긴다. 그동안의 일은 그냥 상상에 맡기거나 막연하게 이런저런 추론을 해 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나름 근거가 있는 확실한 이야기는 스리마라가 상림현을 점령했고, 하노이의 한족 파견 정부가 반란 소탕을 목적으로 꾸준히 비엣족 군대를 내려 보냈는데 번번이 그 토벌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이제 상림현은 중국과 베트남과 참파왕국에 더없이 아주 중요한 요새 도시가 되고 말았다. 누구에겐 전초기지가 되고 누구에겐 최후방어선 역할이 주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새로운 주인인 스리마라의 참족이 차지한 영토였고, 한족과 비엣족 입장에서는 서둘러 반듯이 빼앗아야만 하는 잃어버린 요새가 된 것이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다면 상림현은 태생적으로 이런 비운을 타고 난 억울하고도 슬픈 도시라는 말인가? 적어도 1.300년 이상을 참족과 비엣족이 대립하고 허구한 날 심심하면 쌈질이 벌어지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얼떨결에 놓여진 도시가 바로 상림현(후에)였다면....... 이 가혹한 운명은 참족이 멸망하고 난 뒤에도 벗어날 수 없는 저주처럼 20세기까지도 이어져 베트남의 내전 기간 동안에 남(베트남 민주정부)과 북(호지명의 북베트남. 쉽게 표현해 베트콩)이 대립하는 가장 참혹한 전쟁 한복판인 ‘비무장 지대’였거나 베트콩의 최전선 사령부였으니...... 그 도시의 운명이 과연 어땠으랴?(흡사 우리나라 철원 이북의 비무장지대라고 할까?)
베트남의 지리적 특성을 살펴볼 때, 반도의 딱 중간쯤에 특이하게 서쪽에서 흘러내려와 남북으로 갈라서며 줄기를 틀어대는 산악지대가 있는데 안남산맥이다. 이 산맥에 의해서 베트남의 지형은 북쪽이나 남쪽이다 갈라지게 된다. 참 특이하고 신기한 모습이다. 이 안남산맥이 동쪽으로 흘러내리다 바다에 이르는 마지막 산자락을 타고 넘어 다니며 사람들이 살아왔는데 이 험악한 고개의 이름이 하이반 고개(베트남어: Đèo Hải Vân / 𡸇海雲)요, 이 길을 <하이반 패스>라고 부른다. 지금이야 너른 포장도로에 터널이 뚫려 나름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눈물 고개요 죽지 못해 넘어야 하는 고개였을 테니, 흡사 우리 고향 충주 인근에 있는 <새재>쯤 되겠다.
그 고개를 스리마라가 군대를 이끌고 넘었을 것이니, 당시에는 비엣족(남월)과 참파의 경계였고, 베트남 전쟁 때는 남과 북의 경계였고, 현재는 다낭시와 후에시의 경계인 것이다.
지금은 분명 스리마라의 참족이 상림현의 주인이 되었고, 참파왕국의 전성기에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300km를 더 북진하여 응안쩌우(Nghe An Chau, 현 하띤시 Ha Tinh) 인근까지 점령하기도 한다. 반명에 배엣족과 한나라 정부(중국)의 목표는 무조건 상림현을 다시 빼앗는 것이야말로 참파왕국을 쳐부수는 시발점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스리마라와 참족 지도부는 고심에 고심을 했을 것이다. 전쟁의 최전선에 겨우 확보한 상림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말이다.
베트남의 중부지역까지 올라오다보니 그동안의 중심 거점이었던 까우타라(K까authara, 나짱)은 너무나 멀었다. 나짱에 중심을 두고 여기까지 전령을 통해 화급한 전쟁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상림현을 새로운 중심 거점으로 삼는 것도 다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준비를 단단히 한 적군이 엄청난 숫자를 앞세워 단숨에 들이켜 상림현을 빼앗기기라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왕국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람대로라면 스리마라의 참족들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하노이는 물론 중국의 원남성 지역까지 영토와 세력을 확장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목적을 이루고 나면....... 당연히 국토의 중간쯤에 수도를 세워야 전 영토를 고르게 통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스리마라 때부터 이런 고민은 충분히 있었으리라. 하지만 보다 분명하게 누구에 의해서 언제 구체적 계획이 세워졌고 실행에 옮겨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역시나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니 말이다.
다만 참족 지휘부는 상림현이 이미 방어 요새의 개념으로 완성된 도시로 중요하기는 하나 자칫 왕국의 운명을 걸고 차지해 들어앉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일단 하이번 고개는 넘어 이남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적의 대군이 급습하여 상림현을 빼앗겼다고 쳐도, 험준한 하이번 고개를 통하여 얼마든지 방어진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시간을 벌게 된다면 얼마든지 정비와 재편성을 통해 반격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이번 이남의 최고 주둔지 입지 조건은 당연히 지금의 다낭(Da Nang) 이었다. 충분히 수도를 건설할만한 여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하지만, 자칫 북쪽의 침략군이 강력한 수군을 앞세워 침입을 해온다거나, 이미 바다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해적들의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약점이 있었다. 해변을 끼고 아주 길게 성채를 세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거기에는 엄청난 인력과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데...... 당장은 참족에게 그런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찾아 낸 장소가 바로 지금의 호이안 지역이다. 안남산맥에서 발원한 투본강의 물줄기가 인체의 실핏줄처럼 너른 지역에 골고루 나뉘어 물줄기를 이루며 호이안 근처로 몰려들어 바다로 빠져 나갔다. 이곳에 도시를 세우면 바다로 부터의 침략에 방어하기에 유리했고,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도 뱃길을 이용해 모든 물자이송이 수월했다. 참파왕국이 이 유역에 거점을 만들고 강 하구만 관리 통제 방어할 수 있다면 더없이 훌륭한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상림현까지의 직선거리가 대략 120km 이었으니, 중간에 하이번 고개를 넘어야 하고 슾지를 지나 이곳까지 누군가가 쳐들어오려면 상당한 시간과 전력 소모가 뒤따라야 한다는 나름의 계산들이 맞아떨어진 것이다.(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이들의 이런 계산을 틀렸다는 것을 검증받게 되지만 말이다.
어느 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족들은 이 지역을 새로운 근거지로 개발함과 동시에 남쪽으로부터 주민을 이주시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참족의 새로운 거점도시를 쩐끼에우(Trà Kiệu)라고 불렀다.
쩐끼에우(Tra Kieu)는 이제 참파왕국의 가장 크고 중요한 중심도시가 되었고, 시간이 좀 지나서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참파왕국의 첫 번째 정식 수도가 되었다. 호이안은 이 시기에서부터 동남아 무역(바다 비단길)의 중심지로 중국과 아랍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며 국제 무역항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다낭에서 호이안 항구까지의 거리가 30km였고, 여기 호이안 항구에서 내륙으로 강의 줄기를 따라 8km를 더 올라가는 지점에 참파왕국의 첫 수도 쩐끼에우(Trà Kiệu) 성채와 궁전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채의 무너진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리 멀지않은 인근 지역에 참파족의 성소 ‘미선 유적지(My Son)’가 위치해 있다.
참파왕국의 시대에는 호이안을 람압포((Lam Ap Pho)라고 불렀다. 지금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부르는 이름인 호이안(Hoi An,會安)은 ‘평화로운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기 192년 상림현에서 한나라 판관을 살해하고 스리마라가 참족 왕국을 세웠다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이후로 서기 600년까지 별반 전해지는 다른 기록들이 전무하다. 다만 스리마라가 터전을 닦아 놓은 트라끼우(Tra Kieu, 베트남식 발음 쩐끼에우)를 참족의 수도로 건설했고 덕분에 호이안이 인도차이나반도 최고의 국제 무역항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는 정도일 뿐이다.
이제 참파왕국은 중국은 물론 인도와 서쪽의 아랍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신흥강국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황이면 본래 이 땅의 주인으로 자신들의 영토 절반 이상을 빼앗기고도 중국의 압제에서 식민지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베엣족의 심정이야 어떠했겠는가? 어서 빨리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비엣 왕국을 세우고 남쪽의 참족을 몰아내야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대적 상황과 급변한 국제 정세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중국(당시 수나라)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중국이 북쪽 언저리라고 할 수 있는 하노이 지역(남월. 혹은 남만)만을 점령하고 지배한 이유는, 점령지 이남의 지역은 모두 정글에다가 사방이 습지이며 독충과 풍토병만이 창궐하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땅이거나 바다에 박혀있는 쓸모없는 돌덩이 섬들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정복의 필요성의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반도의 중간지역에 참족이 나라를 세우고 국제무역을 통해 크게 번성하고 있음을 목격한 중국(수나라)의 시선과 생각은 이전과 달리질 수밖에 없게 되지 않았겠는가? ‘남쪽도 쓸만한 영토였구나!’라고 말이다.
서기 605년, 마침내 수나라(중국)는 장군 유방(劉方)으로 하여금 참파왕국을 정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중국정부의 정규군이 이제는 반란 토벌이 아니라 적국 참파왕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남하를 했던 것이다. 장군 유방은 탁월한 장수였던 모양이다. 창업군주 스리마라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자 상림현을 수도로 삼지 않고 험준한 하이번 고개를 넘어 이남지역에, 그것도 내륙의 투본 강 유역 깊숙한 곳에 방어 요새를 구축한 후에 수도 트라끼우(Tra Kieu)를 건설하였던 것인데......... 유방이 이끄는 수나라 군대는 단숨에 상림현을 점령하였음은 물론 손쉽게 하이번 고개마저 넘고 투본 강 유역으로 진군해 왔다, 참파의 코끼리를 앞세운 방어 전략에 대해서 이미 유방은 현지의 비엣족 군사들을 통해 이미 들어서 알았고 나름의 격파 전략을 갖춘 후였던 것이다.
수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수도 트라끼우를 공격했고 단숨에 점령해 버렸다. 참족 군대와 지휘부는 정글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점령군은 트라키우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리고 호이안에 점령 사령부를 세우고 주둔하면서 지속적인 약탈을 계획했다.
하지만...... 하늘의 보살핌이었을까? 수나라의 참파왕국 점령은 그만 아주 짧은 기간에 너무도 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수나라 전역에 민란(반란)이 자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 세민이 이끄는 반란군이 그만 수나라 왕실을 전복시켜 버리고 새롭게 당나라 시대를 연 것이다.
이런 혼란의 시기이자 수나라가 붕괴 직전의 시기가 하필 이때였는지라 점령군 사령관 유방은 모든 군대를 이끌고 수나라 조정을 지키기 위하여 부랴부랴 되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참파는 그야말로 저절로 해방이 되었다. 저절로 해방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참파가 도망친 틈을 타서 비엣족이 영토 회복을 했어야만 했음에도, 비엣족은 수나라의 식민지였고 수나라의 명령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이 틈을 노리지 못하고 유방의 군대를 따라 다시 하노이 부근으로 따라 나서야만 했던 것이다.
참파 왕국 정부는 정글에서 나왔고 전란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상림현에 최정예 방어군을 주둔시키고 무너지고 파괴된 수도 트라끼우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의 패배를 교훈 삼아서 보다 안전한 수도 방위에 힘썼다. 하여 트라키우라는 참파왕국의 너른 수도권 영역 안에 ‘사자의 도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심하푸라(Simhapura)라는 성채도시를 새로 건설하였다. 흡사 우리나라 수도 한양 안에 건설한 한성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그런가하면 국제정세의 흐름에 점차 눈을 뜬 대응책으로 서기 620년 새로운 중국으로 등장한 당나라(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스스로 당나라의 봉신이 될 것임을 청하며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는 대신 자치권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나라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관리와 군사력을 파견하여 직접 점령하면서 빼앗아 오는 세금이 아니라, 스스로 신하가 되기를 자청하며 세금을 거둬 자진납부를 하겠다는데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푸는 겪이 아니겠는가? 자진해서 수하로 들어왔으니 툭하면 독립하겠다고 반란을 벌일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수나라 황제는 이를 허락하는 조서에서 처음으로 참파족을 ‘흥 부엉(Hoan Vuong)과 흥왕(Huanwang) 이라고 부르며 적었다. 이제 람압이니 남월이니 남만에서 제대로 중국이 인정하는 참파왕국의 새 이름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까지도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 이라는 용어는 공식 이름으로 탄생하지 못했는데, 참족의 기록에 따르자면 서기 629년의 참족 기록에 처음으로 참파(Champa)라는 용어가 등장을 하게 되고, 다시 667년 크메르 왕국의 외교문서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참파(Champa)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참파왕국은 물론 참파왕국의 수도로서 트라끼우라는 이름 대신에 ’사자의 도시 심하푸라(Simhapura)가 동남아시아의 역사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심하프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부서진 탑과 비석 몇몇을 제외하면 그저 허물어진 성벽의 잔해와 크기를 가늠케 하는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후로 참파왕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수많은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참혹하게 파괴된 때문이다.
남은 것은 참파왕국의 운명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떠밀려 사라졌다가 20세기 말엽 영행과 관광이 새로운 산업으로 등장하면서부터 베트남을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지로 급부상하게 된 호이안(chữHán: 會安)이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는 참파의 생활문화유산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흔히 호이안(Hoi An)이라고 부르는 이 도시의 어원은 ‘평화로운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태생적으로 이미 국제 무역항이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처음 만들 시기에는 람압포(Lam Ap Pho)라고 부르고 적었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본다면 위에서 이제까지의 참파 역사 중에서 대충 잡아서 220년에서 645년까지의 일들이 전부 순수한 참파족의 역사일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상당히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192년 반란의 우두머리가 스리마라(Sri Mara)가 되었건 우련(區憐)이 되었건, 어쨌거나 그가 한나라 현령을 죽이고 반란에 성공하여 초대 참족 왕에 올랐다는데, 분명 기록엔 그가 한족 관리의 아들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럼 참족이 도래인인 것은 맞겠지만 그 참족의 지휘부는 역시나 중국인이라는 전제가 된다. 이후로 혼인 동맹등을 통해 피가 섞이고 참족 계통에서 왕이 새로 나왔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 역사가 람압인이라고 부른 종족이 참족이 아닌 다른 부족이었으며, 이들을 정복하였거나 흡수통합한 후에 새로운 왕조의 주인이 된 것이 참족이라는 말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 도래인들이 나짱 인근에 상륙하였을 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인도에서 거슬러 올라와 메콩강 하류에 도래인들 보다 먼저 부족국가를 세웠던 첸라왕국(Chenia)과 나짱에 상륙한 도래인(참족) 사이에 이미 시투 왕국, 볼랴오 왕국, 취두첸 왕국 등 수십 개의 왕국이 있었음에도 어느 시점에서부터 이들 모두가 일절 다시 거론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들은 참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주민인 비엣족도 아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 진다. 언제 어디로 흡수되었거나 아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또한 이들을 적어도 비엣족 입장에서는 적으로 판단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배세력인 한족(중국) 또한 이들은 정글 속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미미한 세력의 오랑캐 정도로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도래인(참족)이 등장을 했고 그들이 점차 체계를 갖추고 세력 확장을 꿰했다면...... 혹여 중국측의 기록들이 참족과 사라진 다른 부족과의 혼돈에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애초의 도래인과는 전혀 상관없게......... 여러 부족들 중에서 누군가가 흡수 통일과 세력 확장을 꾀하였고, 후에 중국이 그들은 참파왕국이라 부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래인(참족)을 처음부터 지켜보았고 가장 원수로 삼은 사람들은 비엣족(베트남)이었다. 훗날 비엣족에 의한 베트남 통일을 이룬 후에 끝까지 참족을 몰아내고 지워버리려 했던 것으로 보아서는 또 도래인(참족)이 참파왕국의 주인 이라는 증거가 확실한데 말이다.
어쨌거나...... 220년에서 645년까지의 역사는 여전히 어느 정도 미궁 속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제부터 살펴 볼 그 이후의 역사는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의 역사가 분명하다.
수나라(중국)의 침공으로 수도 쩐끼에우(Trà Kiệu)까지 함락 당했던 참파는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수도 쩐끼에우(Trà Kiệu) 안에 또 하나의 핵심 요새를 건설하고 ‘사자의 도시 심하푸라(Simhapura)’를 세웠는데, 이후로 수도의 이름을 아예 쩐끼에우에서 심하푸라로 바꾸게 된다.
새로운 중국 당나라(唐)이 등장하자 서둘러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비록 조공을 받치는 상하관계 이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협약을 맺음으로써 외교와 국방에 대한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당연하게 비엣족(베트남)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서기 2세기경 스리마라의 영도 하에 반도의 중부지역인 이 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참족은 쩐끼에우에 터전을 잡으면서부터 이미 참족의 종교인 힌두교 사원을 건설해 성지로 삼았었다. 나짱의 포 나가르 사원이 남부 지역의 성소였다면, 쩐끼에우에 세운 미선(My Son) 사원지역은 참파왕국 전체를 아우르는 절대적 신성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2세기경에 이미 세워진 미선 사원은 힌두신에게 국가적 행사로 제사를 지내거나, 사원 인근에 사망한 왕들의 무덤을 만들었었다. 처음 그 사원들은 기초를 석재로 하고 건물은 주로 목재를 사용해 건축하였는데 수나라의 침략과 수차례의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상태였다.
바로 이 시기에 참족역사에서 성군으로 존경받는 프라까샤다르마(Prakāśadharma) 참족 왕이 즉위(653~687)했다.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세제를 개편하고 군사력 확충에 힘썼다. 특히 이 시기에 성장한 해군은 동남아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더불어 성소(My Son) 재건에 힘써서 석재와 붉은 벽돌을 이용해 바로 지금 남아있는 형태로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추진한다. 이와 더불어 모든 참파의 영역에 고르게 사원을 비롯해 도로를 정비하고 다리를 놓고 관청과 성채를 짓는 등의 국가적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다.
참파왕국의 국제무역항이라 할 수 있는 람압포(Lam Ap Pho, 호이안 지역)에 중국인에서 아랍인에 이르기까지 무역상들이 몰려들었고, 참족의 교역선단은 남중국해로 나가서 북으로 중국과, 남으로는 인도네시아 열도와 남서쪽으로 말레이반도와 인도를 지나 아라비아까지를 오가며 향신료와 도자기와 비단은 물론 상아와 알로에를 사고팔았다. 해상을 통한 국제 무역이 호황을 이루게 되자 동남아는 물론 멀리 일본에서까지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하게 되었다. 참파는 강력해진 해군을 동원해 자국의 무역 해상로를 보호하고 해적들을 소탕하기도 하였지만, 아주 가끔씩은 다른 라이벌 무역선을 상대로 노략질을 벌이기도 했다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바다 비단길이 활성화되고 국제 무역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이제 부자나라로 급부상한 참파왕국의 소문이 점점 퍼져나가자 언제나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많은 부작용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게 되었다.
쉽게 다시 말해서...... 적들이 새롭게 여기저기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국가적인 재난 내지는 재앙이 서서히 시작되어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남아 최강의 해군력까지 갖추었지만........ 한 명의 도둑을 백 명의 경찰이 늘 막아낼 수는 없다는것 또한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 많이 길어져서 아무래도 다음 이야기로 나누어야만 하겠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