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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라. 호1:10-2:1
호1:10-2:1절을 중심으로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추사감사절 멧세지를 통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교계에 12월 전쟁발발설과 땅굴이 전국에 거미줄 같이 목포 거제도까지 굴착되었다는 괴담이 떠돌고 있습니다.
시찰목사님이 보내주신 영상을 보면서 무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빗나갈 수 있는가를 다시 한 번 크게 실감하게 되었지요.
노회내에서 유능한 상당한 규모의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 그 문제로 질문을 합니다. 한마디로 전쟁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땅굴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 한방 얻어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89년도에 전방 사단에서 갱도탐지장교를 하던 때 전임 사단장이 땅굴예언 민간사업자들에게 현혹되어 정상적인 갱도탐지임무보다 민간탐지자들의 지원과 안전을 감당했더니 후임 사단장이 와서 업무보고를 받으며 첫마디가 바로 ‘땅굴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하며 윽박지르던 생각이 나서지요.
12월에 전쟁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땅굴 있어 없어? 있습니다. 어디에 있어? 어딘지는 모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면 발굴해서 진급도 하고 포상도 받았었겠지요...
민간 탐사자들의 목적이 순수한 애국적인 동기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특히 권영해 김무웅장군이나 기타 이종찬 신부같은 분들의 동기까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을 한다는 전도사님의 동영상이나 공군 출신 장군의 강의를 들어 보니 이분들은 상당히 오염되고 빗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육군소령으로 사단갱도탐지장교 임무를 수행하던 89년 김**장군의 지시로 다우징으로 탐지한 갱도 예상지역을 사단 전 GOP를 표식을 하니 170여개가 되었지요. 한 사단에 한 두개의 땅굴도 많은데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많은 땅굴을 팔까요? 그래서 GOP를 헬기를 타고 정찰을 했지요...
민간굴착기를 사용해서 수십개의 시추공을 파고 그곳에서 갱도탐지대가 음파탐지기를 이용해 수십일을 감시하기를 반복했지만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급기야 백학면 구미리 24m지하에 확실히 땅굴이 있다는 주장에 따라 민간인 밭을 임대하고 공병대 포크레인 장비를 투입해 직접 파들어 갔습니다.
위험한 작업이지만 정**씨를 비롯한 민간 탐사자들의 주장이 강해서 27m까지 굴착을 했습니다. 발견한 것은 지름 20cm 되는 물구멍이었지요.
여기서 다우징은 두 개의 금속막대기를 이용해 지하에 물이 있거나 공동이 있으면 두 개의 막대기가 교차하는 것으로 공동이나 물을 찾는 방법이고 (영국중심)이고 불란서를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케뜨는 금속추를 이용해 물을 찾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다우징이나 바께뜨는 선교를 위해 우물을 파주기 위해 선교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인데 이신부가 보안대출신 정**준위와 함께 땅굴에 이용하면서 민간땅굴탐사에 들어온 방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을 지원하다가 나도 다우징으로 물을 찾을 수 있는 기술이 습득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반응하는 곳을 파면 물은 잘 나오더라구요...25년전에 있었던 일이 다시 고개를 드니 더 재미있지요...유혹입니다.
전도사의 동영상을 보니 모든 기독교인들과 대기업에서 관심을 갖고 땅굴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더라구요. 땅굴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고도의 첩보와 지하 탐지장비를 이용한 고도의 장비를 이용해 군인이 찾는 것이지 그렇게 다우징 방법으로 한 사단 정면에 수백개의 땅굴이 있는 것은 아닐뿐더러 목포 광주 거제도까지 땅굴을 무한대로 팔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 이들이 대기업의 참여를 원하는지는 그 목적이 너무 뻔하잖아요...
이러한 일은 석탄을 파는 광산에서 석탄을 파내면서 부수적으로 나오는 버럭이 얼마나 많은지 금방알 수 있습니다.
버럭에 대한 반론으로 저들이 금강산댐을 말하던데 서부지역에서 나온 버럭을 금강산까지 가지고 갔단 말인가?
24시간 한미양국의 인공위성과 항공기가 감시하고 있는데 발견하지 못한다..
땅속에서는 수많은 water poket등 산재해 있는 물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부족한 산소는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 거미줄처럼 많은 갱도안에 조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시로 함몰되는 갱은 어떻게 복구할 것이며 갱도유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동은 어떻게 도보로 할 것인가 갱차를 이용할 것인가? 한**장군이 주장한대로 갱도를 완공하려면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가는데 핵무기,미사일, 잠수함개발등에 저들의 국방예산이 집중되었는데 어떤 예산으로 했을까요? 조금은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있다할지라도 국방문제에 대해선 전국민적인 통일된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군은 국방비리나, 부조리, 폭력 ,하극상 같은 일이 없어야하겠지요.
감히 한국교회에 감히 요구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말자고요. 그러나 전쟁발발설이나 땅굴 같은 정제되지 않은 주장을 하게되면 이로 말미암아 안보의식이 되레 후퇴할까 걱정이 되니 삼가 조심하자구요.
땅굴은 군 특히 전방사단에서 지금도 24시간 각종 탐지 장비를 이용해 계속 탐지하고 있고 찾고 있고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국방문제는 군인들에게 믿고 맡기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교회의 사명인 민족복음화를 위해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절 말씀을 봅니다.
호세아란 말은 구원이란 말에서 유래하여 [구원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여호수아의 본명기도 하나 여기 호세아는 브에리(땅에서 솟구치다)의 아들이라고만 밝히면서 아내 고멜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민 이스라엘의 가증한 전방위적 타락을 지적하면서 심판 경고 및 용서와 회복의 약속을 보여주며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을 배반하고 음란을 저지른 아내 고멜을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받아주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적 사랑을 예표합니다.
호세아게 말씀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참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은 인간적인 사고나 상상력이나 의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11월 11일 한중 FTA가 체결되므로 우리의 경제영토가 세계3대 대국이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자유무역지대를 확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농민들이나 일부제조업자들을 외면하지 말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업종이나 대기업에만 이익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전 국민적 대 통합을 이루어 민족통일을 이루고 경제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와 야 수도권과 지방 영남과 호남, 고용주와 노동자가 하나되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되어 파이를 크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줄 믿고 감사하라.(10)
하나님의 약속은 정한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성취될 줄 믿습니다.
추사감사절의 유래에 대해 자주 말씀을 드렸듯이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두 달여동안 항해를 한 후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이들은 한해의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신앙을지키며 옥수수 보리 밀을 수확하였고 이들은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되었다 합니다.
첫해 농사해서 교회를 짓고 다음해 농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삼년 째 농사지어 자기 집을 지었다는 청교도들의 하나님 중심 신앙이 오늘 날 미국이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할 것입니다.
10절은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하여 심판의 고난을 겪지만, 궁극적으로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창하게 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언약(창15:5)의 반복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창할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윗 솔로몬시대에 조금 성취되었다 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이들이 BC722년 앗수르에 패망하고 이방으로 흩어진 후 헬라제국 로마제국등에 짓밟히고 노예상태로 살았지 이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번성은 맛보지 못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공허한 것, 허망한 것,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기에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줄 믿으시죠? 그렇다면 10절의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대속의 죽음의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통해 세워진 신약교회를 통해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오늘날 세계 방방곡곡에 세워지고 전해지고 있는 복음운동을 통해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신약교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연합한 자이며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을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참으로 신약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믿음으로 언약을 맺고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며 그 영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신약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 참 이스라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뿐만 아니라 호세아와 맺은 언약을 어떻게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그리고 온전히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시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시는 줄 믿고 오래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 물 흐르듯 순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방해와 핍박과 환난을 거치면서 그 약속을 이루는 일에 헌신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노고를 받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무엇도 세상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약속을 좌절시키거나 무효화하지 못하였습니다. 한치의 오차나 착오도 없이 일점일획의 가감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호세아를 통해 재차 확정하신 그 일이 오늘 우리 가운데 실제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후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원까지도 변함없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위에 굳건히 서며, 그 말씀 안에서 우리의 삶의 길과 방향을 확정지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또한 말씀과 더불어 확실하고 굳건하게 세워질 줄 확실히 믿습니다.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둘째로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헌신하라(11)
11절에서 남쪽 유다자손과 북쪽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올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한 우두머리는 누구일까요?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을 주도한 스룹바벨로 보면 그 땅 즉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 이스라엘로 올라올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것과,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실 때 그 땅 즉 죽은자들의 무덤에서 다시 올라올 것 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두머리가 누구이며 그 땅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게 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때에는 분열이 치유되고 일치된 영으로 한 지도자를 따르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 솔로몬 사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이후 무수한 전쟁과 갈등과 다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회복의 날에는 그들이 일치하여 하나되고 화목하게 되며 한 영으로 한지도자를 따르며 한 목표를 지향하는 삶을 살 것을 회복의 구체적인 면모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하아레츠:가나안땅)에서 올라오리라’는 말은 마치 봄이면 식물이 땅을 뚫고 올라와 그 땅 표면 전체를 덮을 정도로 번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이유접속사 키) 무덤과도 같았던 땅에 수많은 백성들이 이러한 본문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교회가 회복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지향해야하고 무엇이 가장 절실한 문제인지 바로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치와 하나 됨입니다.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고대하고 갈망하며 부르짖지만 실상 그것은 무의미한 구호가 되고 공허한 외침이 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풍조에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르거나 정파가 다르기 때문에 멸시하고 정죄할 뿐 아니라, 자기 탐욕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고 몸을 찢고 분열시키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서로 찢고 물어뜯을 때 교회는 성장하거나 부흥하지 않고 침체를 면하지 못합니다.
끈 하나는 쉽게 끊어지지만 삽겹줄은 끊어지지 않고 귀하게 사용되듯 서로의 상처를 싸매주고 함께 손잡고 사랑하며 나아갈 때 교회도 부흥하고 개인의 영적상태도 회복될 줄 믿습니다.
성도들이 현재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이 통전 즉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해 부분을 깨닫고 통합 즉 둘 이상의 단위가 하나로 물리적인 통합을 이루는 것과 통섭 즉 화학적 혼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물질로 거듭나는 통섭 즉 넘나듬의 사고방식으로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기독교인의 사고방식이 바뀌게 될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도의 하나됨은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합은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세울 것이며, 세상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원동력이 될 줄 믿습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이러한 일치와 연합은 그 자체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을 토대로 하나님께서는 참된 부흥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새로운 삶을 살라 (11:b-2:1)
회복된 이스라엘의 면모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이라 합니다.
다음은 형제에게 암미라 할 것이라
그리고 너희 자매에게 루하마라 칭 할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본문은 호세아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축복된 것,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르엘(יןרעאל)의 경우 그것은 비극적이고 저주스런 지명이지만 장차 하나님은 그것을 크고 영광스러운 땅으로 변모시킬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스르엘 즉 하나님께서 흩으셨다는 부정적인 말씀이 하나님께서 파종하셨다는 긍정적인 말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즉 아합왕의 왕궁이 세워진 곳이 앗수르에 의해 흩어짐을 당해 폐허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파종하실 때에 파종하시는 축복된 백성이 되어 그 심겨진 그들이 그 무덤과도 같았던 땅에서부터 올라와 번영과 형통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형제에게 암미(עמי)즉 나의 백성이라 할 것이라 합니다.
로암미 즉 내백성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셨지만 회복의 때에는 나의 백성 나의 민족이라고 그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던 처음의 상태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루하마(רחמה)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이며, 이는 고멜이 낳은 딸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즉 사랑받지 못하는 자라는 로루하마가 루하마라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랑 받는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너희 형제 너희 자매가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온전히 연합되어 서로가 서로를 형제처럼, 자매처럼 대우하게 된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을 받지 못했던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김을 받는 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세워진 신약교회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고 사랑하며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신약성도들이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고 있지만, 이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나 구원과 관계없는 루암미였고 로루하마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없는 자이더니”라는 말씀처럼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자비,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 은혜로운 대속사역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긍휼과 축복의 삶을 살도록 보장해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로운 이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을 받고 전혀 새로운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된 줄 믿습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에 의지하여 구원 받은 성도들은 “거듭난 자” 즉 다시 태어난 자라는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미라 하고 루하마라 하는 것은 성도가 과거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하기 위함인 줄 확실히 믿습니다.
성도는 저주스런 삶의 자리에서 나와 축복된 삶의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오직 그에 합당한 삶, 곧 축복된 삶, 빛된 삶,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이나 대중 집회등을 통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일시적인 믿음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뿌리가 없어 새들이 먹어어 버리는 것 같은 거품과 같은 일시적인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신유집회등을 통해 넘어짐이나 방언터짐 병고침등 이적을 보고 믿는 이적적 믿음은 돌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이적이 행해지는 동안 믿음을 가진 것 같으나 깊은 뿌리가 없어 곧 시들고 말라 버립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믿음은 일시적 믿음이나 이적적 믿음이 아니라 구속적 믿음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중생케하는 구속적 믿음 즉 성도의 심령 속에 의가 들어와 예수의 형상을 닮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애굽에서 죄의 종노릇하던 백성들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로 칭의 즉 의롭다 함을 받게 됨으로 죄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생활을 시작 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화는 오직 성령충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내주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적극 순종하는 삶을 통해 성화 성결 거룩 성령의 충만한 삶을 통해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내가 지배되어지는 상태 즉 구원 받은 자의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칭의가 의롭다함을 받아 확신을 갖게 되었다면 성화는 말씀에 의지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성화의 단계를 거친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영화의 단계라 합니다.
사람의 종말은 자연인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즉 재림이 있으며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인 우주적 종말인 파루시아가 임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안 믿는 사람은 베마라하는 심판대 즉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고 믿는 자는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파루시아) 알곡은 창고로 들어가 상급을 받고 가라지는 불에 태움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여와야, 사용자와 근로자, 남과 북, 목자와 양이 서로의 입장과 상황을 배려하여 함께 올라와 크게 됨을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줄 믿고 감사하라.(10)
둘째로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헌신하라(11)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새로운 삶을 살라 (11:b-2:1)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줄 믿고 감사하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구속적 믿음을 가진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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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로 응원해주신 님들께 특별히 더 감사합니다. 풍성한 은혜 누리세요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