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세 명과 함께 3박4일 일정의 남도 명산 탐방에 나섰다. 오후 두 시경 서울 양재역 부근에서 합류하여 M의 차량에 탑승하여 강진을 향해 출발했다. M과 H는 강진읍에 땋을 때까지 차령터널, 입암, 영암 등 8년 전 ‘삼남 길’을 도보로 종주할 때 지나온 길들을 더듬으며 기억을 되뇐다. 경부, 논산천안, 서해안, 남해 등 고속도로를 갈아타며 천 리 길을 달려, 어둠이 온전히 내려앉은 시각 강진 읍내로 들어섰다.
영랑로에 위치한 읍내에서 가장 번듯해 보이는 고층 빌딩의 B 호텔에 짐을 풀고, 단층의 민가를 식당으로 개조한 ‘영랑추어탕’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들었다. 평범한 식당의 평범한 음식과 주인아주머니의 친절에는 특유의 맛깔스러운 남도의 맛과 정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산책삼아 식당에서 지척 거리 보은산 끝자락에 자리한 영랑 생가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안내판이 문 닫을 시각이 일찌감치 지난 영랑 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을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준다.
“모란이 피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던 시인 김영랑은 가고 없지만, 그의 고향 탑동마을에는 매년 봄이 되면 모란꽃이 활짝 핀다. 봄은 아니어도 마을을 찾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항상 모란꽃이 피어 있다. 우리 마을에는 시문학파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가 있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머물던 고성사 보은산방이 있다. 또한 한국 바둑의 거목 김인 국수가 어린 시절 바둑을 배웠던 마을이기도 하다.”
영랑생가에서 300여m 거리에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곳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4년 동안 기거했던 주막집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은 주막집 늙은 주모와 주모 외동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기거하던 뒷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했다. 유배 중에도 선비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으로 '담백한 생각(思宜澹), 장엄한 용모(貌宜莊), 과묵한 언어(言宜認) 신중한 행동(動宜重)' 등 네 가지를 꼽고 실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 고성사의 보은산방, 1806년 가을에 제자 이학래의 집, 1808년 다산초당으로 각각 거처를 옮겼다.
영랑생가길, 보은로, 사의재길, 청렴길, 모란빌라, 영랑빌라 등 거리나 건물의 이름에서 영랑과 다산의 고장 강진 땅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옛 극장통 거리의 볼링장 건물은 ‘별들의 故鄕’,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영자의 全盛時代’, ‘바보들의 行進’ 등 전면 벽면에 걸린, 오래된 영화 포스터들이 예전에 이곳이 영화관이었음을 알린다. 밤은 깊어 가고 내일은 두륜산 산행이 예정되어 있어, 숙소로 돌아와서 남도 기행 기대로 들뜬 마음을 다독이며 잠을 청한다.
이튿날, 우리 일행은 두륜산 산행을 마친 후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 자락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을색이 무르익은 아늑한 마을길을 지나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초당으로 올랐다. 친구 B가 기와로 덮인 다산초당을 보며 ‘다산와당(茶山瓦堂)’이라 우스갯말을 하는 단아한 초당 안에는 다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각종 저작을 집필하며,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니, 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목민심서 등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이 탄생한 다산 사상과 학문이 집대성된 곳이라 하겠다.
초당 오른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200여 년 전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 스님을 찾아가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초입의 안내문이 눈길을 잡는다.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 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백련사에 혜장선사(惠藏禪師)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산비탈을 올라 능선마루에 자리한 해월루(海月樓)에 올라 아홉 개의 하천이 흘러든다고 하여 ‘구강포’로 불리던 강진만을 한 번 조망했다. 다산초당에서 발을 옮긴지 반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작은 차밭을 지나 백련사에 닿았다. 백련사는 통일신라 때인 839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일주문, 해탈문, 만경루를 지나 대웅보전과 명부전 등을 둘러보았다. 경내 마당 한편에 자리한 배롱나무 고목이 온갖 시련에도 꺾이지 않을 듯한 옹골찬 가지를 드러낸 채, 고찰의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며 자리하고 있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해월루가 자리한 산줄기 가장자리를 휘돌아 다산초당 주차장으로 발길 다잡는다. 이른 봄이면 떨어진 꽃잎에 바닥까지 붉게 물든다는 백련사 동백(冬柏)은 꽃망울만 맺었을 뿐, 간간이 진녹색 잎사귀 사이로 한 송이 동백을 수줍음 많은 처녀처럼 붉게 내놓았다. 시인 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고대했고, 다산은 붉은 동백꽃 숲을 지나 백련사로 벗을 찾아갔다. 동백과 모란이 피는 계절에 강진을 다시 한 번 더 찾아야 겠다. 그때는 좀 더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