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관곡지·세미원… 여름 연꽃에 마음을 씻다 / 오태진
짙푸른 연잎의 바다에 등불 밝히듯 꽃들이 환하게 솟았다.
청아하면서 화려하고, 고귀하면서 농염하다. 막 밀어올린 연꽃 망울은 붓 같고 촛불 같다.
부풀어 벙그러지려는 봉오리는 복숭아를 닮았다. 활짝 열어젖혀 난만한 연꽃은 그대로 천국이다.
꽃 지고 영그는 연밥도 빛깔이 제각각이다. 물감 칠한 것처럼 밝은 노랑, 해사한 연두, 발그레한 분홍이다.
고개를 빼고 서서 성급하게 가을을 기다린다. 연꽃은 이를 때도, 질 때도 두루 좋다.
7~8월 내내 피고 지는, 여름 꽃 중의 꽃이다.
가까운 곳은 오히려 선뜻 걸음하지 않게 된다. 지난 주말에야 처음 시흥 관곡지에 갔다.
서울시청에서 34㎞, 보통천변에 19만㎡, 6만 평 연밭이 있다. 꽃은 갓 피기 시작했다.
아침 여덟 시 채 안 돼 도착했는데도 주변 도로에 차 세울 데가 없다.
사진가들이 연밭 복판, 작은 홍련(紅蓮) 못을 에워싸고 셔터를 눌러댄다.
관곡지는 조선 세조 때부터 내려오는 연못이다.
문신(文臣) 강희맹이 명나라 남경(南京)에서 연꽃 씨를 받아 와 심었다.
뾰족한 꽃잎 끝이 담홍빛 띠는 백련(白蓮)이 여기서 퍼져 나갔다.
시흥시가 널따란 백련밭을 일궈 연꽃
테마파크로 키웠다. 꽃은 이번 주말쯤부터 볼만할 것 같다.
양평 세미원 연꽃은 이미 한창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곁에 있다.
연밭만 치면 1만7000평으로 아담하지만 잘 가꾼 '물과 꽃의 정원'이다.
연못가를 거닐자니 노란 연밥 위에 쪽빛 나비잠자리가 올라앉았다.
뒷날개가 앞날개보다 넓고 빛깔도 짙어 얼핏 나비같이 보인다.
날개를 팔랑팔랑 흔들며 날아다닌다.
세미원(洗美苑)이라는 이름은 '장자(莊子)' 구절 '觀水洗心 觀花美心'에서 따 왔다.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연꽃에 마음을 씻는다.
전남 무안 회산지는 10만 평 백련밭이다.
연근을 얻으려는 만생종(晩生種)이어서 8월 중순 돼야 꽃이 절정에 오른다.
부여 궁남지는 10여년 꾸준히 연밭을 늘려 회산지에 맞먹는다.
지난 주말 갔더니 1년 사이 더 커졌고 더 잘 다듬었다.
[오태진의 길 위에서] 궁남지·관곡지·세미원…
여름 연꽃에 마음을 씻다
궁남지만큼 구경하기 좋고 사진 찍기 즐거운 연밭도 드물다.
쉰 가지 넘는 연꽃을 크고 작은 연못에 나눠 심고 둑길을 걸어 다니게 했다.
못 안으로도 두렁길을 내 코앞에서 꽃을 감상하고 찍을 수 있다.
백련이 곧은 선비라면 홍련은 화사한 미인이다. 여느 진분홍 홍련과 달리 새빨간 진홍련도 많다.
자줏빛 황금빛 연꽃도 있다. 쉴 곳도 세심하게 만들어 천만 송이 연밭을 다 돌도록 지루한 줄 모른다. 궁남지(宮南池)는 백제 무왕 때 궁궐 남쪽에 판 연못이다.
으뜸가는 연꽃 명소가 된 데엔 이계영이라는 말단 공무원이 있다.
문화재를 발굴하고 공사판처럼 버려진 습지에 그가 2001년 연꽃을 심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유월 빗속에 홍수련 300촉을 한 촉 한 촉 꽂았다.
궁남지에 살다시피 하며 매달린 끝에 2003년 첫 축제를 열었다. 정성이 통했던지 뜻밖에 반응이 좋았다. 10여년 꼬박 갖가지 연을 구해다 심어 최고 연꽃 축제를 일궈냈다. 그는 작년 말 문화재관리팀장으로 퇴직했다.
연은 더러운 개흙에서 수려하고 고결(高潔)한 꽃을 피운다.
군자(君子)의 꽃이자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꽃이다. 처한 곳이 더러워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라 이른다. 이계영씨가 일일이 돌탑 쌓듯 연꽃 세상을 가꾼 것도 공덕 쌓기에 다름 아니다.
연꽃을 보며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 운(芸)을 생각한다.
19세기 초 청나라 심복(沈復)은 동갑 아내 운과 23년을 살다 병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그가 쓴 '부생육기(浮生六記)' 중 절반이 사부곡(思婦曲)이다.
운은 문장을 잘 짓고 자수와 바느질에 뛰어났으며 살림도 알뜰했다.
차를 주머니에 싸 저녁 연꽃이 오므라들기 전 화심(花心)에 놓아뒀다.
이튿날 꽃잎이 벌어질 무렵 꺼내 남편에게 끓여줬다.
은은한 연꽃향과 아내의 진한 사랑 밴 화심차가 얼마나 향기로웠을까.
연밭을 다니면서 부부 사진가를 자주 본다.
나란히 연꽃을 찍고는 카메라 모니터 들여다보며 서로 품평하고 조언한다.
한쪽만 사진을 찍는 부부라도 카메라 가방을 메주거나 양산을 받쳐준다. 연꽃보다 아름다운 사진감이다.
궁남지에서 700m 떨어진 '그 집에 가면'에 간다. 동남주공아파트 건너편 작지만 깔끔한 음식점이다.
낙화암 어귀에서 십몇 년 크게 장사하던 집이었다.
아이들 다 키우고 지치기도 해서 부부가 조용한 주택가로 옮겨왔다.
두툼한 놋그릇에 6000원 보리밥과 7000원 비빔밥을 차린다. 삼삼한 무채, 시원한 열무김치, 담백한 콩나물, 배추 겉절이, 미역 냉국…. 반찬 겸 비빌 거리도 하나같이 정갈하고 친근하다.
무엇보다 고추장이 눈길을 붙든다. 요란하지 않은 빛깔만 봐도 집 고추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달지 않고 칼칼한 맛이 반갑다. 된장·간장도 안주인이 담근다고 한다.
그리고 구수한 시래기 된장찌개가 한 뚝배기 오른다.
집 밥같이 속 편하고 마음 편해 연꽃처럼 물리지 않는 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