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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랑정 원문보기 글쓴이: 혜경씨뭐해?
1월 20일(목), 서울 중구(구청장 박형상)는 충무아트홀 컨벤션센터에서 남산공원 내 국궁장인 석호정 존치를 위한 공청회를 예정대로 개최했다. 이날 발표된 자료와 토론회 내용을 몇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며, 첫 번째로 나영일 교수의 "남산공원 내 석호정 존치의 필요성"에 관한 발제문 전문을 소개한다.【국궁신문】 남산공원 내 석호정 존치의 필요성
서울대학교 교수 나영일 1. 문제제기 남산은 명산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명당중의 명당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를 보더라도 이 정도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남산은 조선시대 이후 다양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이고, 생태환경의 중심이면서 서울시민들의 대표적 휴식공간이자 관광명소이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남산르네상스’를 통하여 남산의 생태·역사성의 지속적인 회복과 시민과의 소통을 통한 새로운 남산 자락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전략사업을 발굴하고, 이와 더불어 한국의 전통이미지를 기반으로 남산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기본구상과 추진방향을 제시하며, 총 30개 사업에 2,325억 원이 들어가는 거창한 사업계획을 발표하였다1). 그러나 남산르네상스의 계획이 발표되고, 체육시설 이전에 대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어났다. 남산공원 내 15개소 1,718명이 이용하고 있는 생활체육 시설의 철거로 중구민들의 수많은 민원을 제기하였고, 철거반대를 위한 서명을 통하여 2만7097명이 서명한 중구민 이용 체육시설 철거반대 서명부를 서울시에 제출하기도 하였다2). 중구의회는 많은 시민들이 남산을 즐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남산 브랜드를 창조하겠다는 남산르네상스의 기본계획에는 찬동하고 있으나, 수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석호정을 비롯한 장충리틀야구장· 테니스장 등 체육시설에 대한 일방적인 철거에는 반대하고 있다. 중구신문에 따르면, 2010년 11월 3일 제184회 중구의회(의장 김수안) 임시회에서 송희 의원 외 2인의 발의로 「중구민 이용체육시설 철거반대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송 의원은 “남산은 구민에게 가장 친근한 자연휴식처이며 주민 생활체육활동의 중심지이다. 우리는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남산르네상스 사업을 지지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남산자락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생활체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중구의 현실을 무시한 채 많은 시민들이 애용하고 있는 체육시설을 강제철거하고 있다”고 밝히며 “이에 체육시설에 대한 일방적인 철거 반대와 기존 체육시설에 대한 현대적인 기자재 확충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시울시에 제출하고자 한다.”고 제안이유를 밝혔다3). 그리고 중구의 국회의원인 나경원 의원은 의정보고4)에서 오세훈 시장을 만나 배드민턴장, 장충체육회는 존치하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석호정은 그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어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시설로서 체육계와 문화계에서 그 존치의 필요성이 아주 높은 생활체육 시설인데도, 아직까지 남산공원내 석호정 존치여부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2005년, 헌법 전문과 헌법 제9조에서 말하는 ‘전통’, ‘전통문화’란 역사성과 시대성을 띤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고 판시하였고5), 2003년 구 전통사찰보존법 제6조 제1항 제2호 등 위헌소원 심판에서 “민족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국가의 은혜적 시혜가 아니라 헌법상 의무이므로, 일단 관할 국가기관에 의하여 민족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통사찰의 경우,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를 최대한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헌법 제9조 등의 규정취지에 부합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6). 본 고는 남산르네상스와 관련하여 중구의 체육시설인 석호정을 이전하는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정책인지 아니면 존치하는 것이 타당한 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동안 논의된 사실들을 살펴보고, 과연 석호정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시대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남산르네상스계획에 부합하는 석호정의 존치를 위한 대안을 생각해본 글이다.
2. 남산르네상스와 석호정의 운명 남산르네상스 계획을 시작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난 2003년 서울시 12개 공원의 공원관리 서비스 만족도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산공원은 공원관리 서비스 종합 만족도 10위, 공원 근접성 7위, 시설이용만족도 10위 등으로 조사되었다7).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공원과 남산공원의 실태를 살펴보고, 작은 체육시설에 불과한 전통 활터 석호정의 사원들이 왜 공룡과도 같은 서울시와 법정다툼을 하면서 이곳을 지키려고 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세계의 공원과 남산공원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미국 뉴욕주 맨해튼의 중심부에 있는 공원으로 1876년에 개장하였고, 해마다 2,500만명이 찾는 대표적인 도심 공원이다. 공원은 동서로 800미터, 남북으로 4km에 걸쳐져 있고, 공원에는 인공 호수와 연못, 극장, 정원, 야생 동물 보호구역, 넓은 자연림이 있고 몇 개의 산책로, 두 개의 아이스링크, 테니스장, 운동장 등이 있다. 이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를 위한 유용한 공간인데, 무려 9,000개의 벤치가 있고, 26개의 작은 야구장, 21개의 운동장이 있다8). 공원 주위의 10km 내외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이들로 붐비는데, 이곳에서의 이러한 장면을 미국영화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도심공원과 서울의 남산공원과 비교하는 것은 규모면에서 적합하지 않고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 동일한 조건에서 비교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공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비교적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동경의 요요기(代代木) 공원, 히비야(日比谷) 공원, 우에노(上野) 공원 그리고 기타노마루(北の丸) 공원은 일본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요요기공원은 북측의 A지구와 스포츠 시설이나 이벤트홀 등이 있는 남쪽의 B지구로 나누어져 있다. 이 공원에는 NHK방송센터를 비롯하여 메이지 신궁, 시부야 머슬 극장, 1960년 동경올림픽을 치룬 요요기경기장과 제1,제2체육관 등의 시설이 있다. 히비야 공원은 1903년에 조성된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 긴자와 신주쿠를 연결하는 지역에 있다. 한때 일본군 연병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공원 조경의 대부분은 일본과 독일의 정원 양식을 혼합한 것이다. 대형 분수, 일본식 정원, 독일식 화단 이외에 야외음악당, 히비야도서관, 히비야공회당, 테니스장 등이 있다. 우에노 공원은 요요기 공원과 함께 대표적인 도시공원으로 62만 평방킬로미터의 넓은 대지를 에워싸고 있는 문화공간이다. 공원 안에는 도쿄문화회관, 일본예술원, 우에노동물원, 도쿄도미술관, 도쿄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등 문화 공간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일본인과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이자 휴양지이다. 황궁 옆에 있는 기타노마루 공원은 에도성의 일부로서 1969년에 공개된 도심속 공원이다. 원래 에도성 유적지의 일부로 푸른 잔디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도쿄 도심의 유적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도쿄올림픽 때 체육관으로 사용한 일본무도관(日本武道館),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과학기술관 등이 있다. 이처럼 일본 동경의 공원에도 올림픽경기장이나 일본무도관 그리고 테니스장과 같은 체육시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본의 공원은 시민이 자연을 즐기고, 자기 문화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알리며 맘껏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일본의 공원에서는 스포츠시설의 중요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일본 동경내의 62개의 공원은 동경도공원협회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데, 특히 야구장, 테니스장, 축구장 등 스포츠시설이 매우 많이 있고, 시설 사용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게 되어 있고, 안내가 아주 잘되어 있다.9) 서울의 남산공원이 그 이름을 처음 얻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40년이다10). 남산공원은 총면적이 2,935,762㎡ (약 889,624평)이고, 연간 840만명이 찾는 서울의 명소이다. 남산이 ‘남산(南山)’이라는 이름을 얻고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한 때부터이다. 인경산(引慶山)이라 불렸던 남산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도읍을 서울로 옮기며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세우고 남쪽에 솟아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 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1395년에 남산에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고 산신, 기우제를 지냈고, 1397년에 국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이곳에 도성을 축조하고 5개의 봉수대를 설치하여 도성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흙산으로 이루어진 남산은 산록이 푸르고 계곡이 깊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졌으며 절기별로 다양한 놀이가 행해졌다11). 현재 장충단공원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하기 위해 1900년에 설치한 ‘장충단(奬忠壇)’이라는 제단을 설치한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장충단공원은 어영청의 별영인 남소영(南小營)터 위에 세워졌는데, 이곳에서는 활쏘기를 비롯한 각종 무예를 시험보는 무과시험이 행해졌다. 현재 남산한옥마을에 있는 ‘남소영터’라는 표시석은 잘못된 것이다12).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공원을 조성한다는 미명하에 민족혼 말살을 위하여 남산에 위치한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서울성곽, 봉수대, 국사당 등을 철거하고, 침략의 중심기관인 공사관, 통감부, 헌병대사령부와 신사, 관사 그리고 각종 공원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장충단, 남쪽성곽 밖, 한양공원, 왜성대공원을 포함하여 남산 전체를 공원화하는 '대산림공원계획(大山林公園計劃)'을 수립하여 남산의 지형을 크게 훼손하였다. 일제는 고종황제가 항일의 뜻으로 세운 장충단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면서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는데, 이곳은 현재 신라호텔자리이다. 이후 일제는 1940년에 남산공원(348,000㎡)과 장충단공원(418,000㎡)을 각각 지정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 학교, 호텔, 군부대, 공공기관 등이 남산주변에 건립되면서 남산의 자연환경과 경관이 다시 훼손되었다. 8·15광복과 한국전쟁 후 남산주변에 월남민과 피난민의 주거지가 형성되고 박문사, 조선신궁 등 일제 잠식시설이 군부대, 학교, 호텔, 공공기관, 민족의식 관련기념관 등으로 대체되었으며, 수십 개의 동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자연파괴가 행해졌다. 또한 1962년 7월에는 장충단공원의 일부를 해제하고 자유센터, 타워호텔(1968년 완공)을 건설하였고, 1970년 남산2호터널 개통, 1971년 장충 리틀야구장 건설, 1972년 남산 외국인 임대아파트(16-17층)완공, 1973년 국립중앙극장,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건설, 1974년 어린이회관(지상13층, 지하 3층, 現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개관, 1975년 서울타워 개관, 1978년 남산3호터널 개통 등 공원용지 해제와 잠식시설물 조성으로 남산공원의 훼손이 심화되었다. 1984년에 장충단공원은 남산공원으로 흡수 합병되었다13). 그러나 가수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란 노래와 함께 기억되듯이 장충단공원이란 명칭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남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자연성을 강화하는 종합적인 노력을 실시하는 등 정책적으로 적극적인 남산회복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1년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통하여서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1994년 남산외인아파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남산 야외식물원, 팔도 소나무 광장,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였으며, 1998년 필동 수도방위사령부를 이전하고, 남산한옥마을을 조성하였다.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통한 10년간의 노력 후에도 여전히 몇몇 잠식건물의 철거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계획으로 남아있고, 시대변화와 이용자 증가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또한 2004년 남산공원의 이용 실태분석 및 개선방향 연구, 2006년 도심재창조 종합계획의 열린남산만들기 등을 통하여 남산 가꾸기를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 남산르네상스와 석호정 관련 정책의 갈지자 행보 서울남산공원의 홈페이지에 석호정은 장충지구의 편의시설로서 그 연혁이 1970년 9월 20일 사단법인 대한궁도협회에서 설치하였고, 1972년 3월 6일 서울시에 기부채납한 궁도장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부지면적은 1,016.5㎡(308평), 과녁장이 198.35㎡(60평), 활터가 684.3㎡(207평), 건축물 1동이 133.88㎡(40평)인 건물로만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 오해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는 석호정에 대한 정책의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2009년 남산르네상스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리틀야구장과 테니스장을 이전한다는 계획은 있었지만14), 석호정을 이전한다는 어떠한 계획도 세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석호정을 비롯한 10개의 조망점에 남산에서 시가지를 바라보기 위한 조망데크를 조성한다고까지 하였을 정도였다15). 그런데, 2010년 2월 6일 동아일보에 “남산 활터 ‘석호정’ 운영주체 변경 진통”이란 기사가 나오고, 2010년 6월 17일자 문화일보에 “남산자락 국궁도장 ‘석호정’ 철거 싸고 갈등, 서울시 “녹지 훼손… 불광동에 새 장소 마련” vs 궁도인 “380년 전통 문화유산… 꼭 보존해야”라는 기사가 등장하였으며, 2010년 11월 4일에 와서는 서울시 푸른녹지국에서 보도자료를 통해 석호정을 포함하여 남산 테니스장, 리틀야구장 등 3개 생활체육시설을 철거하고 이전하려고 한다는 공식적인 계획을 발표하였다16). 2007년 중구청에서는 석호정을 보존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활을 쏠 수 있도록 1억여원의 기금을 지원하여 햇볕 차양막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서울시는2008년 7월 10일 석호정이 배타적인 회원제 운영으로 일반시민고객의 자유로운 이용이 제한되는 등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운영방법을 개선한다는 공문(푸른도시정책과 9083)을 발송하고, 12월 31일부로 위탁관리 기간이 종료될 것이므로 새로운 사용ㆍ수익허가자가 시설을 운영하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서울시는 공유재산(국궁장 석호정) 사용ㆍ수익허가 입찰공고(서울특별시남산공원관리사업소공고 제2008-사-1호)를 냈고, 석호정회원들은 그 부당함을 진정하면서 맞섰다. 석호정측에서는, 1970년 원래 있던 석호정을 남산터널공사로 인하여 이전하라는 명령에 따라 당시로서는 거금인 420만원(현재시가로는 10억 원 상당)을 들여 건설부장관 및 산림청장의 인가 및 협의를 득하고, 1970년 9월 30일에 석호정 이전신축공사를 완공한 후, 1971년 10월에 서울특별시장에게 기부채납하여 공원법령에 의하여 공원시설물 관리위탁허가를 받아 무상사용기간을 갱신하면서 석호정을 활터로 사용하여 왔다. 그리고 서울시내에 있는 다른 활터시설도 같은 처지인데 유독 석호정에 대해서만 이렇게 처우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석호정회원들은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지은 석호정을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고, 근 4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였는데, 갑자기 운영방법을 개선한다는 미명하에 그 운영권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려는 것이 석연치 않다고 해석하였고, 그 배후에 우연히 석호정을 방문한 오세훈 시장이 문전박대 당하여 기분이 나빠서 운영방법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17)과 입찰과정에서 특정 단체와 관련한 의심들을 하면서 몇 가지 억측들이 생겼고, 이와 관련하여 조직 내의 내홍으로 석호정 사두가 중도 사퇴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서울시는 2009년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1억여 원을 들여 남산 석호정 아래 중턱을 깎아내어 체험용 활터를 만들어 상업적으로 운영하려다가 석호정과의 소송 등으로 현재까지 그 체험용 활터는 한 번도 사용되지 하지 못하였다. 활터를 통한 수익사업 정책은 남산르네상스가 추진하는 남산자락복원이라는 원래의 계획과는 전혀 상반된 정책이었다. 그리고 다시 2010년에 와서는 석호정 이전을 추진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시와 석호정은 지금까지도 법정다툼을 하고 있다. 3) 서울시와 석호정간의 법정다툼 석호정의 운명은 현재 풍전등화와 같다. 석호정은 서울시와 법정다툼까지 가서 고등법원에서 패소하였고, 현재 대법원에 상고를 한 상태이다. 문제의 발단은 2008년 서울시 푸른도시국의 한 장의 공문과 뒤이어 서울시남산관리사업사의 공개 입찰을 통해 대한국궁문화협회라는 단체를 운영관리 업체로 낙찰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시는 2008년 7월 10일 ‘국궁장 「석호정」 관리ㆍ운영방법 변경시행 통보’라는 공문을 보냈다18). 그리고 12월까지 석호정의 운영개선을 이유로 사용·수익허가 방식에 의한 일반 공개입찰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2008년 12월에 「석호정 사용·수익허가 입찰공고」를 내면서 낙찰자에게 1년치 사용료 22,550,000원(예정가)을 낙찰일 7일 이내에 납부토록 하였다. 석호정 측에서는 수익사업에 관여하는 것이 석호정의 목적사업에 부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 40년간 무료 위탁해오던 조치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고 입찰에 응하지 않았고, 서울시는 대한국궁문화협회에 운영관리를 낙찰시키고 말았다. 이에 석호정에서는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내면서(동아일보, 2009년 2월 9일자) 2년여에 걸친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2년여에 걸친 서울시와 석호정의 법적 다툼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어 진행되고 있다. ① 남산공원관리사업소의 국궁장「석호정」명도요청에 대한 행정소송(1심에서 패소하여 고등법원에 항소중) ② 공원시설사용허가증서교부처분무효확인 소송(대법원에서 진행중) 따라서 서울시와 석호정간의 법정다툼의 핵심은 석호정 존치의 문제가 아니라 석호정 운영의 주체가 석호정 회원들이 되는가 아니면 특정 외부단체에게 양도하는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석호정의 전 사두 박용훈씨는 중도 사퇴를 했으며, 심무섭 사두는 서울시와의 소송으로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고, 김태우 고문을 비롯한 전체 사원들이 요로에 진정서를 내는 등 석호정 살리기에 온힘을 쏟고 있다.
3. 석호정의 역사적 의미 1) 석호정 창정관련 기록 남산 석호정의 창건시기와 관련하여 4가지의 서로 다른 기록이 보인다. 석호정은 황학정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활터로 최소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활터이다. 1966년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에 “석호정지(石虎亭址):현 중구 장충동 2가에 위치. 장충공원 뒤쪽에 있었던 사정이다. 6·25전쟁 때 없어졌다”고 하였다19). 이처럼 석호정은 1950년 6.25전쟁으로 정 건물은 물론 정에 관한 모든 서류까지 타버려 활터의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다. 서울에 있는 황학정의 기록은 분명하지만, 석호정의 경우 창정연도의 기록이 분명치 않다. 1921년도 매일신보의 기록, 1940년도 동아일보의 기록, 1956년에 만들어진 '석호정중수기(石虎亭重修記)'의 현판 기록 또 2000년 석호정 총회의 기록 그리고 2007년의 민속박물관의 조사보고서 등이 모두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혼란과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하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 석호정이 운영되었고 활쏘기가 시행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① 1920년설 2007년 민속박물관에서 조사한 활터보고서에는 석호정의 창정을 1920년으로 기록하였다. “1920년대까지는 신문기사에 등장하여 석호정의 존재가 확인 가능하지만, 그 이전 사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20)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우선 1920년에 석호정 관련 신문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921년 4월 28일 동아일보의 “新設된 兩處의 公園, 奬忠壇은 공원으로 경성뎨일훈련원은 운동쟝으로 꿈일터”라는 기사에 장충단 공원에 “운동장이 두군데요 활쏘는 터가 한군데요”라고 활쏘는 터를 설명하고 있는 기사를 말하거나, 석호정 관련 신문기사가 최초로 보이는 1921년 8월 9일자 매일신보의 “石虎亭이 又慘敗”라는 것을 참조하였을지 모르겠다. 이 활터보고서는 전국에 있는 330여개의 활터보고서를 모두 쓰면서 정확한 조사를 하지 않고, 대한궁도협회의 명부에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29개의 대표 정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조사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수많은 사진을 보유한 코리아니티(www.koreanity.com)에는 석호정 현판이 들어간 사진이 있는데, 거기서는 1910년경이라고 하였는데, 누가 보아도 이 시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② 1910년설 동아일보는 1940년 3번에 걸쳐서 석호정 관련 보도기사를 냈다. 동아일보는 1940년 5월 3일에 “四海의 射員 參戰하라 全朝鮮弓道聯合大會서 五月十二, 三, 四日 奬忠壇公園 後麓石虎亭에서”, 12일에는 “石虎亭에서는 오늘부터 弓道大會”, 그리고 14일에는 “古代尙武精神再興 오늘 石虎亭의 弓道大會盛大 弓道를 呼叫振興”이라는 석호정 대회의 기사와 사진을 함께 보도하였다. 이중 5월 12일자에는 “시내 장충단공원내 석호정(奬忠壇公園內 石虎亭)에서는 금년으로 三十주년을 맞이하여 금 十二일 十一시부터 석호정에서 조선궁도연합대회(조선궁도연합대회)를 열기로 되엇다.”라고 하여 1940년이 30주년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사에 근거한다면 석호정은 1910년에 창정한 것이 될 것이다. ③ 1897년설 그러나 석호정에 있는 1956년의 ‘석호정 중수기(重修記)’라는 아래와 같은 현판의 내용에는 1897년에 창정되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이곳의 여러 가지 비밀이 담긴 내용이 나온다.
漢陽의 南 木覓山下에 石虎亭이 있으니, 卽 多士習藝의 場이라. 李朝初로부터 三禮를 講習하여 其才를 試選하니, 此에서 由出이라 本亭 初建歷代는 未詳이오나, 獎洞壇 後麓에 十八技舊址가 있어서 檀紀4230年(서기1897년) 光武元年(高宗32年) 丁酉七月之望에 有志諸賢이 協力努力하여 是亭을 創建하고, 化龍舞鶴南德으로 더불어 合하여 成爲一亭하다. 중략... 前 射頭 高相奎, 副射頭 松崗 朴成黙, 敎長 治隱 李賢載씨 外 射員 諸彦이 常時遺憾으로 生覺하여 是亭 重建을 相應, 同志와 苦心硏究할새 此 近處에 公有建物 白雲樓가 있어 自來로 騷人墨客이 無時接蹤하여 玩賞의 所로 著名하였다. 그러나 此亦 爆擊으로 緣由하여 東頹西傾하고 彈痕이 蜂巢하여 百空千瘡이라. 此를 高相奎氏 名義로 所管當局에 讓與를 引受하여 修理改造하고 扁額하여 石虎亭을 再建하다. 중략...- 檀紀四二八九年(西紀1956年) 丙申 季秋初旬 이 기록에 의하면, 처음 건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고, 광무원년(고종32년)에 정을 창건하였다고 하니 바로 1897년이다. 그리고 18기구지(十八技舊址)란 남소영에서 18기군이 훈련하던 옛터라는 말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자료다21). 이것은 추후에 다시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당시 백운루(白雲樓)라고 하는 곳을 수리하여 편액하여 석호정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④ 1630년설 2000년 석호정 사원들은 창정기록이 미흡함을 알고, 역사학자들에게 자문을 받기에 이르고, 총회를 열어 창정기록을 새롭게 정하였다. 당시에 참조한 것은 조선궁술연구회가 1929년에 만든 『조선의 궁술』이란 책에 근거한다. 조선궁술연구회는 1928년에 황학정의 성문정 사두와 석호정의 맹성술 사두를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창립 발족시킨 것으로 오늘날의 대한궁도협회의 전신이다. 그리고 1929년 조선궁술연구회에서는 『조선의 궁술』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발행하게 되는데, 석호정에서는 맹성술, 김경진, 임창번 3인이 참여하며, 맹성술씨와 김경진씨가 36명의 발기인 중에서 제일 앞에 명기되고, 그 다음으로 회장인 황학정의 성문영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제일 원로로서 대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의하면, 임진왜란이후 선조대왕이 국민의 상무정신을 진흥하고자 경복궁안에 오운정을 세워, 이를 개방하여 일반 백성에게 습사를 장려한 것이 민간 사정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고, 17세기 인조, 효종, 숙종조에 이르러 무관의 과거가 빈번함으로 이에 자극되어 민간 사정이 일시에 발연한 바 그 중에도 가장 ‘오랜 사정(古亭)’의 하나가 아래대(下村: 지금의 남산골)에 위치한 석호정22)이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석호정이 1630년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측하여 2000년도 정기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1630년 5월 5일을 창정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궁술에 나온 기록보다 더 오래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도 있다는 점에서 연대를 더 소급한다면, 1435년(世宗 17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세종은 성내에 8곳의 활터(射場)를 세웠다면 남산의 석호정 터를 빼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병조에 전지하기를, “사어(射御)의 시급한 급무(急務)를 의당 강습(講習)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훈련관에 모여 사격을 연습하기 때문에, 하룻동안 연습하는 것이 수십명에 불과하여 한갓 사격 연습의 이름만이 있을 뿐, 그 실효가 없으니, 이제부터 궁성 안과 민가가 희소한 곳에 사격장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나누어 집합하게 하여 사격 훈련을 권장 시험하게 하되, 그 절차는 삼군 도진무와 이를 의논하라.” 하니, 모두 의논하고 아뢰기를, “서울 안에 사장(射場) 8개소를 설치하고 번(番)을 난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그 부근의 사장에 모여서 습사를 연습하게 하고는, 훈련관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어 이를 감독 관장하게 하고, 또 궁성 안에 사장 2개소를 설치하고 번을 든 군사들로 하여금 습사를 연습하게 하고는, 입직한 진무(鎭撫)로 하여금 이를 감독 관장하게 하되, 그의 근만(勤慢)과 능부(能否)를 상고하여 이를 문부에 기록하고, 맞힌 자는 도(到) 하나를 주고, 이르지 못하는 자와 이에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벌을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23) 2) 전통활터가 있던 남소영, 비파정, 백운루 석호정이란 이름을 갖기 전에 이미 남산의 장충지구에는 활쏘기가 성행하였다. 특히 무과시험의 장소로서 남소영은 아주 유명한 활터였다. 1810년에 편찬된 『무과총요(武科總要)』에 의하면,병조에서 아뢰기를 식년(式年) 초시(初試)에 목전(木箭) 시험이 있었는데 예에 따라 훈련원과 모화관에 설행하였습니다. 정시(庭試) 초시에는 바야흐로 두 곳에 설행하려고 하다가 방(榜)을 내기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 설치한 예가 있습니다. 정시 초시에는 1소(所)는 남소영(南小營)에, 2소는 남별영(南別營)에 옮겨 설치하고자 하는 뜻을 시험장소에 분부하도록 하소서.(1761년, 乾隆辛巳八月) 라고 하여 남소영에서 무과시험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소영은 조선시대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으로서 중구 장충단(奬忠壇)의 남소문(南小門) 옆에 있었는데, 터가 194간(間)이나 되었다. 이곳에서 날을 정하여 활쏘기를 익혔으며, 초관(哨官) 1명과 향군(鄕軍) 12명이 근무하였던 곳이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 24년(1800) 3월 21일 “경사 끝에 보이는 정시 초시를 보이다”라는 기사에 “무과 1소는 훈련원(訓鍊院)에다 설치했는데 참가자가 1만 1천 5백 91명이었고, 2소는 모화관(慕華館)에다 설치했는데 참가자가 1만 50명이었으며, 3소는 남소영(南小營)에다 설치했는데 참가자가 1만 4천 2백 50명이었다. 그리하여 3개 소 참가 인원이 도합 3만 5천 8백 91명이었다.”24)라고 하여 남소영에는 무려 1만 4천2백50명이 시험에 참가하는 대단히 넓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직접 남소영이란 편액을 썼다. 그리고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게 명하여 불후의 명작인 조선시대의 대표적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저술하였는데, 무인이며 시인인 박제가는 『정유각시집(貞蕤閣詩集)』에서 「남소영 과녁(南小營射侯)」이라는 시를 지었다.
활쏘기를 한두번 해보아서는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시위가 활을 떠나 베 과녁에 안착하는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이곳에서 남산에서 활을 쏘던 박제가의 처남인 이몽직(李蒙直)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중 잘못 날아온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는 사건25)도 있었다. 이몽직은 박제가의 처남으로 어린 시절에 연암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반가문이었다. 각종 문서수발 내역과 부대 업무와 관련된 주요 내용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어영청초등록(御營廳抄謄錄)』26)과 『어영청등록(御營廳謄錄)』에는 남소영 사정(射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어영청초등록(御營廳抄謄錄)』에 1806년(丙寅年 純宗朝6年) 신영(新營), 남창(南倉), 남소영(南小營)의 세곳 사정에 잡인의 습사를 금한다는 기록이 보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어영청등록(御營廳謄錄)』5월의 기록에, 아직도 잡인이 유희를 한다고 하면서 입직을 서는 초관(哨官)에게 명령을 내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남소영입직 초관에게 보내는 전령 …中略… 영문(營門)은 엄중한 곳이니, 본래 잡인의 출입을 엄금한다. …中略… 근래 흰옷 입은 한량과 잡인 따위가 습사(習射)하려고 어려움 없이 출입을 하고, 곧 유희의 장소를 만들고 혹은 담장을 넘어 왕래하거나 벽과 창을 부수고 깨뜨리고 어지럽히는 일이 더욱 심하다는 소식이 들리니, 종전에 단단히 타일러 경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초관이 보통의 일로 여기기에 다시 오는 자들이 엄청 많아 깜짝 놀랄 일이다. 지난일은 더 이상 조사하지 않고 처리하겠으니, 이제는 이것을 다시 엄하게 알리고자 한다. 차후로 한량과 잡인들과 함께 습사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금하고, 영내에 감히 접근하는 것도 금지한다. 만약 이와 같이 다시 법을 어기는 일이 있는 경우에는 초관은 마땅히 엄단할 것이니 두려운 마음으로 거행하고, 이 전령을 벽에 붙임으로써 항상 눈으로 보아 엄금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이라.27) 이처럼 남소영의 사정에는 한량과 일반인들이 함부로 들어와 군기가 무너져 문제가 생겨 한량과 잡인들이 활쏘기(習射)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6년간 일기를 쓴 무관 노상추의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63-1829)』에서 비파정 아래(琵琶亭下)에 가서 활을 쏘았다는 기사가 정조9년(1785)부터 순조8년(1808)까지 11번이나 나오고 있다28). 이중에 정조17년(1793) 4월 15일의 기사에는 “往射琵琶亭下, 日以三十巡爲度”라고 하여 비파정 아래에 가서 활을 쏘아, 하루에 30순을 한도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정조 17년 10월 3일에는 “往射琵琶亭橫基下”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가서 활 쏜 곳이 비파정 옆 기단 아래라고 위치를 이야기하였다. 이는 현재 석호정 옛터의 표석이 있는 곳29)과 거의 비슷하다. 정조 22년 8월 17일에는 “與文汝緝共登琵琶亭上峰, 同射”라고 하여 문여집(文汝緝)과 함께 비파정 위의 봉우리에 올라서 함께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1809년 순조8년의 『일성록(日省錄)』에 남산 비파정 근처 주민 김태흥(金泰興)이 작은 호랑이(小豹)를 잡았다는 기록30)이 있는데, 이처럼 이곳은 호랑이가 나올 정도의 서울의 외진 곳이었다. 그리고 ‘남산 비파정’에 대한 기록은 1593년 임진왜란이후에 수도방위를 위해 설립된 훈련도감과 관련하여 많이 보인다. 훈련도감의 역사와 자세한 운영원칙을 정리한 『훈국총요(訓局總要)』31)에는 군총(軍摠)항목에서 별기군(別技軍)중에서 마보군(馬步軍)과 대년군(待年軍) 중 나이가 어리고 건장한 자를 가려 뽑아 교관을 붙여 2월부터 9월까지는 비파정에서, 10월부터 정월까지는 하도감(下都監)에서 십팔기(十八技)를 연습한다32)고 하였고, 마보군(馬步軍)의 혼자서 스스로 익히는 사습(私習)에 관한 내용 속에서도 남산 비파정에서 시예를 훈련하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마병(馬兵)은 1개월에 세 차례씩 2월 3월 4월, 8월 9월, 10월은 기사(騎射)를 한다[주:東小門밖에서], 5월 6월 7월은 사회(射會)를 하고 11월 12월은 정지한다. 보군(步軍)은 1개월에 세 차례 훈련하는데 두 번은 사습(私習)을 한다. 2월부터 10월까지 18차례를 한다. [방포는 6차례, 연미정에서 시예(試藝)는 6차례 남산 비파정(南山 琵琶亭)에서, 포진(布陣)은 모화관(慕華館)에서 각각 실시한다33). 비파정이란 정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몇가지 기록들이 있다. 서울의 고지도인 『고지도첩(古地圖帖)』34)의 도성도(都城圖)에 비파정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다른 지명보다 크고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옆의 어영창(御營倉)35)의 위치로 보아 장충단, 동국대학교와 가까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국가 및 서울의 제도·지리·인문적 사항을 적은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집을 설명하면서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있는데, 비파정위(琵琶亭上)에 시단(詩壇)이 있다. 위에는 훈국(訓局)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36)고 한 것으로 보아, 『훈국총요』에서 말하는 비파정은 이 시단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고, 훈국의 병사들이 훈련하던 십팔기지터도 그 근처였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1896년 독립신문에도 “아래 묵적골 사는 열아홉 살 된 강도성이란 아이가 비파정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여”37)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어 1896년까지 비파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동악시단은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학림관 우측에 표시석이 있는데, 1984년 동국대학교에서 고시학관을 지을 때 이동하려 했으나 심한 풍화로 깨져서 현재는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어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다. 현재 석호정 제1표시석은 시단과 약 300미터거리에 있고, 물이 있는 수표교와는 100미터도 안된다. 동국대학교는 장충단공원과 붙어있으며 표고차는 약 2-30미터에 불과할 정도의 자그마한 언덕위에 세워져 있다. 석호정의 제1표시석과 남소영 그리고 비파정은 거의 한 공간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석호정 중수기’에 나오는 백운루(白雲樓)를 고쳐서 석호정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제시대에 3·1운동 48인 중의 1인인 임규(林圭: 1867-1948)는 장충단 남록에 있던 백운루에 대하여, 『북산산고(北山散稿)』38)에서 늦은 가을 백운루에 올라 쓴 시「모추등백운루시(暮秋登白雲樓詩)」를 썼다.
여기서 ‘백운루는 장충단 남쪽 기슭에 있다’고 한 장소는 장충단이란 비석이 있던 영빈관에서 남쪽 기슭에 해당하는 리틀야구장 부근 옆 한글학자 최현배의 동상이 있는 석호정 제2표시석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동국대(수영장)쪽에서 흘러내리는 물길과 테니스코트 쪽에서 수표교로 향하는 물길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39). 그래서 이곳에는 예전부터 안개가 많이 꼈기에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란 노래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인 1917년에 간행된 『경성부남산공원설계안(京城府南山公園設計案)』에 따르면 장충단과 관련한 내용에서 “현재의 장충단 앞의 광장은 현상을 보존하고 다만 붕괴된 부분을 수선하거나 혹은 흙 위에 많은 소나무 등을 열을 지어 심는 등 크게 변경을 가하지 않고 다듬어 고치고, 종래의 큰 길, 작은 운동회장, 활터(弓場), 승마연습장을 이용한다.”40)고 하였다. 여기서의 궁장은 바로 석호정을 이야기함은 두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회사업요람(京城府社會事業要覽)』41)의 경성부 공원개요에 의하면, 장충단공원은 1919년 6월에 만들어졌으며, 면적은 64,111평이고, 시설물에는 산책도로, 운동장, 아동유원지, 휴게소, 식장, 정(亭), 벤치, 축산, 화단, 다방(喫茶店), 연못, 분수, 온실, 변소, 기념비, 조명시설 등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저 ‘정(亭)’이라고만 표기 한 것이 아마도 석호정일 것이다. 해방이후 장충단공원은 선거유세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57년 5월 25일, 조병옥 박사가 장충단 공원에서 이승만의 독재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이 날 조병옥 박사의 연설을 듣기위해 운집한 군중은 20만명이나 되었다42)고 한다. 또 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전대통령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세를 하던 곳으로, 당시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이 일본 신문은 70만 명, 미국의 신문에서는 90만 명이라고 보도했고, 김대중의 나의 『삶 나의 길』에서는 무려 100만명의 청중이 운집43)하였다고 했을 정도였다. 남소영, 비파정 그리고 백운루가 있던 이곳은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이었고 일제시대 그리고 1980년 이전까지 수십만이 모일 수 있는 그런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3) 남산 석호정이란 이름의 출처 석호정이란 이름이 신문에 처음 보이는 것은 1921년 8월 9일 매일신보의 기사인 ‘石虎亭이 又慘敗’란 내용인 것 같다44). 이 기사는 황학정, 청룡정, 남덕정 그리고 석호정 4개 정이 모여서 편사를 한 기록이다. 여기서 석호정은 장충단 석호정 등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석호정은 남산과 함께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산과 석호정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역사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문집인 사가집(四佳集: 간행연도 [肅宗31年(1705)])에는 “영평부의 팔경. 역승 조정의 조카를 위하여 짓다(永平府八景爲驛丞曹整姪子作)”란 글에 남산석호가 나온다.
여기에 남산석호(南山石虎)란 시가 있다.
이 시에서 이 장군(李將軍)은 한(漢) 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을 가리키는데, 그에 관해서는 『사기』에 자세히 나온다. 이광이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을 적에도 손수 호랑이를 쏘아 잡았는데, 한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있는 돌을 보고 호랑이인 줄 알고 활을 쏘았더니, 화살이 돌에 꽂혀 파묻혀버렸는데 자세히 보니 돌이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45). 또한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46)에는 남산석호와 관련하여 사가정 선생이 지은 시에 대하여 ‘묻는 말에 대답하다’라는「수답(酬答)」이라는 시가 있다. 四佳先生赴京於途中作永平八景奉和/사가정 선생이 북경에 가는 도중에 영평 8경 봉화를 지었네. 南山石虎/남산석호
사가정 선생의 남산석호는 비록 현재의 남산이나 포천의 영평이 아닌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48) 남산을 이야기하지만, 조선시대에 ‘남산석호’는 너무도 흔히 쓰이는 일반적인 관용어였다. 조선시대에 산릉(山稜)을 만들 때, 반드시 담 안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세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석호가 넷인데(좌우 둘씩이다), 길이가 각각 4척, 너비가 각각 2척, 높이가 각각 3척9촌이다. …중략… 담 안에는 석양(石羊) 넷(좌우 각각 둘씩이다.)과 석호(石虎) 넷(좌우에 각각 둘씩이다.)씩 벌여 세우는데, 석호(石虎)는 남쪽에 있고, 석양은 북쪽에 있게 하되, 서로 사이하여 놓는데, 모두 밖을 향한다49). 따라서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남산 석호정이란 이름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현재 석호정에는 여러 명의 문필가가 있어 석호정이란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김종린, 김상주 수필가 그리고 남정혜, 호미숙 등의 시인이 있는데, 이중에서 남정혜 시인은 ‘너의 이름이 좋아 너(石虎)를 만났고’로 시작되는 ‘석호정’이란 이름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석호정은 그저 단순한 건물만이 아니라 문학과 기록에서 끊임없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이어지고 있다. 4) 국궁과 양궁의 전당, 석호정 1928년 동아일보주최로 제1회전조선궁술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석호정은 1928년 제1회전조선궁술대회 단체전에서 우승을 하였다. 이 대회를 계기로 조선궁술연구회가 구성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대한궁도협회의 전신이다. 동아일보는 동년 6월 15일부터 7월 16일까지 사설과 광고, 대회소식, 화보를 포함하여 십여차례에 걸쳐 이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하였다50). 당시 서울지역의 석호정을 비롯한 7개 사정(석호정, 황학정, 일가정, 청룡정, 서호정, 화수정, 숭무정)이 6월 30일에 모여 먼저 경기규정을 결정하였고, 이어 7월 13일에 전조선궁술대회가 개최되기 전에 서울과 경기지역의 14개 사정 대표들이 황학정에 모여 중앙조직의 이름을 조선궁술연구회로 정하고 이 14개 사정의 대표들이 발기인이 되었다. 이 조직이 최초의 전국중앙조직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석호정은 해방이후인 1947년 제2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준우승을 필두로 수많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석호정은 역사적으로 관설 사정인 황학정과 함께 전국의 대표적인 민간사정으로 체육계에서 이름이 높다. 그동안 석호정의 유성권, 이원식 사두가 대한궁도협회장을 역임하였고, 이종봉 사두가 초대 서울시궁도협회장, 구자원 명예고문이 7대 서울시협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65년 2월부터 옛 무관들이 하듯 월례대회인 삭회(朔會)를 540여회나 지속하여 왔다51). 정부는 2006년부터 한국형 스포츠클럽시스템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스포츠클럽시스템의 원조는 석호정과 같은 사정이다52). 사정은 관설사정과 민간사정이 있는데, 마치 오늘날 공공체육시설과 민간체육시설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1800년대 말까지 서울에만 약 40여개의 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많은 사정이 없어졌다. 사정은 전통 스포츠문화의 뿌리이다. 조선시대의 사정은 학교와 학원기능을 한 교육기관이면서, 지금의 전국체전이나 행정고시와 같은 무과시험이 열린 대회장이고 연습 장소였다. 사정에는 사두(射頭)라고 불리는 대표가 있고, 사범이나 선생을 통하여 국궁을 배우고, 서로를 접장(接長)이라고 부며 각종 예의범절을 교육하고 전수하고 있어 서양의 스포츠클럽과는 차원이 다른 가장 한국적인 전통 스포츠클럽이다. 그동안 역사성과 지역성, 정통성을 지닌 국궁처럼 문화유산으로 각광받아야 마땅할 전통무예가 외면 받고 올바로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문화유산은 유형이건 무형이건 우리의 소중한 보배이고 자산이다. 우리 겨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든 민족 문화의 정수이다. 문화유산을 제대로 알고 찾아서 가꾸는 일은 나라 사랑의 근본이며 겨레 사랑의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53). 국회에서 2008년 전통무예진흥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2010년 말에 전통무예진흥을 위한 기본계획 토론회가 열려 대략적인 윤곽이 밝혀졌다. 이 기본계획안에는 무예 종목에 대한 접근성 제고와 교류 및 경연대회 등의 개최 지원과 생활체육보급 프로그램에 전통무예 프로그램 10% 이상 의무 반영을 추진하고 있으며, 학교를 통한 우리 무예 종목 보급 확대 추진과 관련하여 방학 중 초등교사 및 스포츠 강사 대상 연수 실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석호정에서는 2004년부터 중구청의 도움으로 청소년전통문화체험교실을 열어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활쏘기교육을 실시하여 서울시와의 분규가 있기 전인 2008년까지 이미 수천 명의 학생들을 교육시킴으로써 우리의 전통무예보급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석호정은 한국 양궁이 탄생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 양궁은 그동안 LA올림픽이후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16개, 은메달 9개, 동메달 5개로 총 30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는데, 당시 석호정의 사원이었던 석봉근 수도여고 체육교사가 청계천에서 중고 양궁활을 구입하여 연습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3년 9월 9일 국내 최초로 석호정에서 양궁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는 초창기부터 대한궁도협회의 양궁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궁도협회는 1975년 4월 5일 제28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및 76년 몬트리올올림픽대회의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석봉근을 코치로 임명하고, 석호정의 오영숙선수를 대표선수로 선정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54).
4. 석호정의 시대적 사명 1) 관광명소로서의 석호정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1년 365일 거의 매일같이 석호정에서 연습을 하는 오원섭 명궁에 의하면, 남산을 찾는 수많은 외국인과 내국인들이 석호정의 사원들이 활을 쏘는 모습을 보면 너무너무 신기해한다고 한다. 그리고 양궁에 익숙한 이들은 145m의 먼 거리에 있는 과녁을 향해 조용히 활을 쏘고 있는 사원들에게 수시로 말을 건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렇듯 외방인이 구경하고 묻는 것이 활 쏘는 것을 훼방하여 불편하게 여겼지만 이것도 한국을 알리는 중요한 사명이라 여긴 석호정 사원들은 석호정 앞에 영어 간판을 세워서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또한 석호정 사원 중에는 외국인이 7명이 있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사원들도 다수 있다. 석호정 사원인 독일인, 코흐가 조선일보에 투고한 글에 “나는 독일인이다. 세상 누구나 애국심이 있듯 나 역시 독일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런 내가 매일 활을 쏜다.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國弓)이다. 서울 남산의 활터 석호정(石虎亭) 정식 멤버로서 국궁 공인 초단(初段)이기도 하다. 석호정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유단자 명단에 'Koch'라는 명패가 스무 명의 한국인들과 함께 섞여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하였다55). 왜 그는 한국의 활쏘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또한 석호정 앞에는 외국인 궁사가 활을 쏘는 모습이 그려진 입간판이 서있다. 입간판의 주인공은 미국인 제시 버그씨다. 버그씨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 2010년 8월 7일자 조선일보에 “활시위 당기다 보면 '비움의 철학' 알게 되죠”라는 기사에 나온다56). 전국궁도대회 우승자 호미숙씨와 국궁 배우는 미국인 버그씨의 기사에서 호미숙은 “사고로 남편 잃은 뒤 활 쏘며 절망 비워내었다”고 하고, 제시 버그는 “국궁의 매력에 빠져 한국 정착해야겠다 생각할 정도예요”라고 이야기하였다. 석호정은 그만큼 한류문화를 대변하는 유명 명소라고 할 수 있다.
2) 남산르네상스에 부합하는 석호정 남산르네상스의 핵심은 자연환경과 역사복원이다. 원래 르네상스(Renaissance)란 말은 ‘문예부흥’이라고 번역되는데, 말 그대로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재생시키고, 부활시키며 복원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남산르네상스가 목표로 하는 복원은 언제를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조선시대인가 아니면 일제시대인가? 이러한 것이 조금 불명확한 것 같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은 세계자연유산 등재 후보로 설악산 국립공원을 유네스코에 등록하려 했으나 야생동물이 별로 살지 않는 동물 생태계 미흡과 주민 반발을 이유로 신청을 철회한 적이 있다. 동물이 살지 않는 자연은 살아 숨쉬는 공간이 아니라 황폐함 그 자체다. 문화유산도 역시 그렇다. 국궁은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수천 년을 이어온 대표적인 무형문화재다. 전국에는 370여 곳의 궁도장이 있다. 서울에만 8곳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백운정이 헐리고 석호정이 놀이공원처럼 변해 전국 궁도인의 불만이 높다. 궁도장은 대부분 국공립공원의 자연녹지에 있는데 이러한 조치가 확대되면 자랑스러운 전통 무예인 국궁은 맥을 잃어버릴지 모른다. 석호정은 서울시가 법적으로 책임을 지기 시작한 1970년부터라고 해도 40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수백 명의 사원들이 활을 쏘면서 심신수련을 하였던 도량이고, 수천 명의 어린아이들이 활쏘기 연습을 통해 전통문화를 습득하던 곳이며, 수만의 관광객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를 지켜봤던 역사적 공간이다. 이러한 역사적 공간을 복원하고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남산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소나무를 심고, 인공적으로 물을 흐르게 하며 체육시설을 철거한다고 하여 자연생태가 복원되고 역사가 복원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훈련원자리에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동궁(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결혼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 운동장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해방후 동대문운동장이란 이름으로 바뀌면서 83년간 역사적 공간으로서 개장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각종 체육단체, 각급학교, 언론기관에서 주최한 축구, 야구, 정구, 육상, 종합경기 등 전국규모의 대회와 올림픽 및 월드컵축구대회의 출전을 위한 예선전 등의 각종 경기대회가 개최되던 역사적 공간이었다57).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은 한국 현대 스포츠에 있어서 의미 있는 역사적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보다 더 큰 효율성을 지닌 동대문시장이라는 상권에 밀려 나게 되었다. 경성운동장은 해방과 더불어 그 명칭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꾸면서 일본의 두 번째에서 대한민국 첫 번째로 변신했으나, 1984년 우리 손으로 만든 잠실운동장에 그 지위와 역할을 넘겨주고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운동장 주변 동대문 지역도 노점상이 보도를 거의 차지하고 극심한 주정차 혼잡과 무질서로 슬럼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지역상권은 물론 서울의 경제와 관광 산업마저 위기에 몰리게 되어, 국내외 전문가들이 논란을 거듭한 끝에, 지식기반 산업, 창조산업인 디자인산업 단지를 만든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가칭)’를 건립하기로 하였다. 동대문운동장은 610년 된 성곽의 사적(史蹟)문화재로서의 가치와 80년 된 운동장의 근대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동일한 장소에서 상충되었는데, 당시 서울시는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하면서, 공모 지침서에서 성곽 복원은 물론, 운동장 일부를 문화재적 가치로 보존하는 방안을 주문하였다. 당선자 영국의 하디드는 일제가 파괴한 성곽을 ‘돋보이게’ 복원하고 디자인플라자 건물이 성곽을 품어 싸고 있는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일제의 운동장보다 조선시대의 성곽을 절대적인 문화적 실체로 인정하고 이를 작품의 핵심적 요소로 자리매김했다58). 이러한 선례에서 보듯 우리는 남산르네상스라는 엄청난 과제 속에서 역사성과 시대성을 동시에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석호정 존치의 필요성은 바로 역사적 의미와 시대적 사명을 동시에 살펴볼 때 가능한 일이다.
5. 남산르네상스와 석호정의 공존 방안 1990년 8월 17일 노태우대통령에 의해 ‘남산제모습사업’이 승인되고, 고건 서울시장은 1991년 ‘남산제모습찾기’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그 다음해인 1992년에 ‘남산제모습가꾸기’로 명칭이 바뀌어 시행된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이규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제 모습을 찾는다’는 것이 남산의 파괴가 본격적으로 일어난 일제강점기 이전으로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인지 불분명해 토론 끝에 ‘가꾸다’라는 용어로 대체하게 됐다고 한다59). 당시 보고서나 문헌들뿐 아니라 현재까지 두 용어를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2009년 서울시는 ‘남산 르네상스’ 계획을 ‘회복과 소통’이라는 기조 아래 회복을 위한 실천 전략으로는 생태성 회복, 남북 녹지축 연결, 산자락 복원, 역사성 회복을 꼽고 있고, 소통을 위해 상징적인 이미지 구축, 접근성의 개선, 자락별 문화공간의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 이중에서 역사성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장충자락의 문화공간에 자리 잡은 장충체육관과 지금은 없어진, 훈련원자리에 지어진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남산경관관리를 위한 시뮬레이션연구에서는 남산의 문화적 경관을 조선의 도읍지의 안산으로서의 남산, 국가방위의 중심, 명산?명승?명당 그리고 시민의 풍류와 놀이터라고 그 특성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60). 그런 의미에서 석호정은 국가방위의 중심이고 시민의 풍류와 놀이터라는 두 가지 특성을 잘 갖추고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지난 2004년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일반시민들의 공원이용목적은 휴식/산책 27.7%, 운동이 26.7%, 자연감상 9.7%, 관람/구경 9.3%이며, 서울 시민들이 남산공원에 바라는 개선 사항으로는 이용시설 부족(20%)이 가장 많았고, 가장 보완이 필요한 사항은 편익시설(21%)과 운동시설(21%)로 나타났다61). 서울 시민들, 특히 중구민들은 남산에 아주 쉽게 접근하여 푸른 숲을 거닐며 남산과 더불어 즐기고자 한다. 그저 공원을 바라만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남산르네상스는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예산이나 규모로 보나 역사성으로 보나 매우 원대한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일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석호정과 관련된 정책결정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석호정은 단순히 1970년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시설물이 아니다. 석호정은 사람처럼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고 최소한 법에서 말하는 법인격을 가진 존재이며 역사적 생명체이다. 2007년 전국 240여개의 정을 조사한 결과, 시와 군에서 소유하고 있는 곳이 186개, 정 자체가 소유한 것이 56개로 나타났다. 그리고 인구비례로 보았을 때, 서울특별시의 활터가 8개밖에 안 된다는 것은 서울시가 전통문화를 저버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활터의 수를 보면, 경기도가 81개, 인천이 10개, 울산이 8개, 대전도 5개나 되는데, 서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국유지나 시유지 위에 가건물 등을 사용하고 있고, 대부분의 정이 자체의 재산보다는 국가나 시도 등의 자치단체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여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개발사업 등이 시행될 때 취약함을 드러낸다. 대체할 공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정이 사라지는 경우도 생긴다”고 이미 지적하였다62). 우리의 전통문화인 활터의 취약함이 바로 이것이다. 몇몇 자치단체에서는 자기 지역의 활터를 복원하고 사정을 건립하는데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이는 곳도 있고, 신입사원이 들어오지 못해서 사정을 운영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사정을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와 기관장의 의지에 따라 전통문화가 보존되거나 폐기되는 상태가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석호정이 무너지면 전국의 대부분의 활터가 동일한 상태로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석호정 사원들이 필사적으로 사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헌법보다 높은 상위법은 없다. 또한 2008년 전통무예진흥법안(법률 6009호)이 만들어졌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도 헌법과 법률에 있는 조항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국궁은 전통문화로서 그리고 민족문화로서 지켜져야만 한다. 그리고 전통무예진흥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적 근거에따라서 예산 지원까지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남산르네상스계획에 의하면, 장충자락은 과거 남쪽에서 침입하는 왜군을 막았던 남쪽 방비의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영조 이래 남소영이 위치하던 곳으로 이곳을 ‘근대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교육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하였다63). 그런데 과연 무엇으로 이러한 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일까? 그저 성벽과 장충단을 더높이 쌓아야만 하겠는가? 장충자락이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석호정은 존치시켜야 마땅한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출생지가 있고 그의 유년시절을 보낸 중구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생기념행사를 하고 있는데, 석호정에서는 오래전부터 그 일환으로 어린이들에게 궁도체험을 시키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사다. 이런 경험을 석호정과 훈련원이 있던 중구 말고 어디에서 하는 것이 좋겠는가? 조선시대 말인 1800년에 서울에만 40여개의 사정이 있었고, 일제시대에도 서울의 사대문 안에 7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황학정과 석호정만이 사대문 안에 있고, 백운정이 폐쇄되어 이제 서울시내에는 겨우 8개가 있을 뿐이다. 은평구에도 활터가 생기는 것은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보고인 남산 석호정을 이전하는 것은 보물을 발로 차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남산르네상스 계획과 공존하면서 석호정이 보존되고 발전할 수 있는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어영청의 분원이었던 남소영과 그 터 위에 세워진 전통 활터를 하나의 역사무예문화 공간으로 조성하여 남산성곽을 연결하는 관광벨트로 만들고, 그동안 540회 이상 지속된 월례대회인 삭회(朔會)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특성화시키며, 석호정을 이층누각으로 만들어 전통양식의 전망대와 관람대를 설치함으로써 국내외의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문화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중구 건천동(현재의 인현동1가)에서 태어나 활 쏘고 놀며 유년시절을 보낸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이야기와 남소영에서 18기와 같은 우리의 전통무예를 수련하던 수많은 조선시대의 병사들의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형식의 궁도체험교실을 상설화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교육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서울시체육회 등과 같이 올림픽에서만 30개의 메달을 획득한 한국양궁의 찬란한 스포츠문화를 소개하면서, 석호정이 바로 한국양궁의 발상지라는 기념물을 조성하고, 우리 민족이 동이족(東夷族)의 후손으로 상무정신에 투철한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이념을 형상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장년층 스포츠인 국궁을 남산공원의 브랜드로 인식시키고,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에 적합한 한국형 건강운동으로서 국궁문화를 특수화시킴으로써 석호정을 남산공원의 자연과 사람이라는 생태환경과 어울리는 건강문화와 역사문화의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남산르네상스계획과 석호정의 보존과 발전은 서로 윈윈(Win Win)하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며 더 좋은 의견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주석문】 1) 남산르네상스계획: http://namsan.seoul.go.kr/business/state01.jsp. 이미 2008년부터 2010년까지 1,441억원을 집행하였고, 중기계획으로 2011년~2015년까지 884억원을 집행할 예정이다. | |||
기사제공 : 국궁신문 |
첫댓글 석호정을 없애거나 옮긴다는 생각 자체가 전통문화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이겠죠~~~ 머가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행정의 주도권을 갖고 있으니 제대로 되기가 어려운 게지요~~
대권 실적에 눈이 멀어서 발악하는 오나부랭이 보면.. 정말로 정치에 몸담으면 썩어버린다는 격언이 맞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