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외 4편
정영선
슬픔이 탈수된 난닝은
시들시들 마른다 방안 건조대에서
햇빛 없이
바람 없이
꿈 없이
홍콩 뒷골목 아파트
수건, 팬티가 창밖 내민 긴 막대에 매달려
아슬아슬 곡예한다
바람이 흔들고
햇빛이 잡아주고
먼지가 매만지고
에너지가 넘친다
키르키스탄 벌판, 유르트에
둘러진 밧줄에
꽁꽁 찡겨 있는
헌 내복
눈발에 적셔지다
낡은 햇살에 꾸들꾸들 말려지다
문명의 강풍이 데려가지 못하는
문명 무풍지대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 같은 거
합창
차가 지나가면
아스팔트에 우루루 쓸려가다 흩어지는
초가을 한 잎, 한 잎의 존재들
햇빛에 침윤당한
바람에 찢긴
연무 낀 공기에 무력한
한때 선명한 초록이었던
집합시킨 낙엽들이 버석버석 밟힌다
저 소리
땅 밑
고대로부터 울려오는
머나먼 시대에서부터 살다 간 얼굴들의
펼치지 못한 꿈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머나먼 데서 걸어오는 군인
기다리는 연인
재회하는 순간 격발되는 총성
재회의 순간이 죽음의 순간이 된 울음소리
귀를 기울이면
흘러가는 디아스포라의 목소리이기도
배제당하지만
한 잎은 한 인종이라는
비유를 끌고 이어가는
버석 밟히면서 울리는
난해한 합창
시간이 지휘자인
거대한 합주
활주로
날고 싶어
날 듯이 날 듯이
팔 벌리고 달리던 소년
슈웅 뜬다 뜬다, 못 뜬다 못 뜬다
홈런, 홈런
안타, 안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륙 못한 생을
글썽이는
깊은 골짜기 새긴 시간의 얼굴
너 만이겠니
예언의 책
정영선
가난해서 꿈은 꿈으로 흘러 갔다
몇 대의 가문이 흘러갔다
아랍터번을 두른 자칭 예언자가
의령과 함안 사이 남강에 떠있는
바위 솥을 두고 예언을 했다
철다리가 녹 슬기까지 이루어지리라는
잠속인 듯 자는 마을 반경에
나라를 다 먹이고도 남는
솥이 꾸는 꿈의 사람이 나올 거라는
낙엽송에는 둥지를 튼 검은 새가 보고 있었다 증언자처럼
공중을 흘러 다닌 그 말
예언은 예언을 실현시킬 사람을 찾아다닌 걸까
솥이 꾸는 꿈을 이룬 사람들이 나왔다
별이 점지한 걸까 효성금성삼성
노동을 무한대로 지불하고서 솥에서 국밥은 퍼 날라졌다
무명바지에서 청바지로 바꿔 입고
골목 사이 앞집 뒷집 옆집 옆집
집 위에 집들, 방위에 방들로 층층 높아졌다
보랏빛 자운영의 논은 잊었다
마음 속 행복의 은신처엔 거미들이 주인 행세
누구는 불가해한 미궁의 세계에 빠진 걸 늦게야 알았다
스스로 걸어 들어가거나 음모에 물렸다
보이는데 나갈 수 없는 유리벽
자유로운 데 강제된 느낌
아드리아네 실에 대한 예언은 없었다
환상 한잔을 마시며 마주 앉아서
스마트폰을 대마초처럼 흡입한다
공중의 계단에 떠있는 아슬아슬함
AI에 대한 꿈이 향수처럼 뿌려지고
낙천과 두려움이 혼종하는
신세계는 안개 속
의자의 외로움
너도 가지고 나도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의자
마음이란 의자
바깥에 내놓은 적 있네
바람의 호기심은 못 말려, 마구 흔들어대다 시시해진 걸까
그래도 바람이 좋았는데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바람의 변덕을 기다렸지만
기다리면 오지 않는다는 뾰족 지붕을 쳐다보기만 했는데
어떤 의자가 의자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가족의 비극이 그의 눈물에 떠있었다
바퀴가 어머니를 굴린 날 충격의 바퀴는 할머니까지
어린 날 기찻길이 아버지를 삼켰고
잔인한 신, 무능한 신이라고 악썼다는
슬픔은 무거워 의자는 압사당하는 느낌이었다
의자가 의자와 맞댄 침묵의 메아리는
음악이 되지 못했다
고독의 음화를 끌고 의자는 그 밤 떠났다
조용히 아침의 여명을 마셨다
친구를 기다렸다
은반지를 나누어 끼고 금 이야기를 해도 좋은
어둠 속에도 아침빛을 나누는
의자와 의자가 존중으로 기댈 수 있는
오래 비어 있는 의자
누구라도 앉아주기를 소원한 날
이런 의자를 선호한다는 군인이 다가왔다
커피를 내오고 그의 유머에 넋 빠지게 웃고
소문을 풀어 놓는 대로 믿으며
나도 몰래 그의 편이 되고
내 의견을 그의 의견대로 검증받는 노예가 되어
먼지를 먼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쌩하니 의자를 밀치고
말없이 가버렸다
이건 아니었어
왕이라는 자가 왔다 포대자루 같은 옷을 입은,
앉아도 되겠냐고
의자는 시든 채로 고개가 꺾여
먼 곳, 먼 바다, 먼 도시, 먼 사람을 연모하고 있을 때였다
먼 곳에서 침입해오는 안개
바닥의 흉터
매력의 음지를 가리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치켜세웠다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는 그
고요에 꿰뚫리는 느낌
왕 홀도 없는 그가 왕일 리가 없다고
그를 앉히고서 의자는 삐걱대지 않았다
장식을 걷어내어도 좋았다
밤의 조명이 기만으로 보였다
좋은 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눈을 마주한 순간
처음이듯 영원에 창문을 낸 느낌
구멍 난 누구 호주머니에라도 빵을 넣고픈 마음
근데 지배 권력을 배제한 왕이 있기나 할까
의심의 연기가 굴뚝에서 날 때
나를 안다는 듯
휘둘리는 의자를 잡아 준다
왕이 도래했다는 소문은
비밀 클럽에서 이전부터 전해오긴 했었는데
정영선 1995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시집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 [누군가의 꿈속으로 호출될 때 누구는 내 꿈을 꿀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