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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늘 접하는 도로나 길 이름이 서울의 경우 14,190개나 된다 한다.
오늘은 그 가운데 우리가 알아둘만한 가치가 있는 주요도로의 유래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을지로. 충무로.
1945.8월에 해방된 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종전의 일본식 도로명을 계속 쓰고 있었다.
서울시의 경우 1946년 10월에 서울시장 주관하에 우리식으로 도로명을 변경하기 위한 T/F가
구성이 되었다. 여기서 제일 먼저 개편에 착수한 도로명이 을지로와 충무로였다.
을지로는 당시 중국인들의 상가가 주로 이어져 있었고, 그 흔적으로 지금도 중국인들이 직접
경영하는 안동장, 동화반점, 태화루, 오구반점 등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에 T/F에서는 중국인들의 색채를 빼내기 위해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을지문덕 장군을
모셔와서 을지로로 이름지었다.
이어 충무로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2살까지 머문 생가가
3가역과 충무로역 중간(명보아트홀 앞)이었기에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충무공을 모셔와서
충무로로 이름지었다.
2. 퇴계로. 율곡로.
한편 T/F에서는 나라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文과 武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먼저 을지로와
충무로가 무인 중심으로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다른 도로들은 문인 중심으로 이름 짓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인인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이 이야기 되었으며, 이율곡
선생이 관직에 있을 때 주 거주지가 율곡로 인근인 인사동이었기에 현재의 율곡로로 이름지었고,
퇴계로는 비록 퇴계 선생이 서울에서 거주한 사실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인이었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3. 세종로. 태평로. 원효로.
세종로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종로구 옥인동이 세종로 인근에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지었고,
중국 황제의 칙명을 가지고 오는 칙사가 머무는 태평관이 남대문과 시청역 사이에 있었기에
태평로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원효로는 정말 이상하게 그 이름이 정해졌다.
당시 T/F팀장이던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이라는 사람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그가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인 원효대사를 기린다는 차원에서 다른 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여
원효로란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4. 테헤란로.
잘 아시다시피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이다. 그런데 어떻게 강남 한복판에 이러한 테헤란로가
있을까이다. 때는 1973년 오일쇼크로 우리나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석유는 배급받고 공장조업은 단축되었으며 물가는 급등하여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이러한 형국에 우리나라를 유일하게 도와서 석유를 지속적으로 공급했던 고마운 나라가 바로
이란이었다. 이에 감사표시와 그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서울시와 테헤란시의 자매결연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물의 하나로 1977년에 강남의 삼릉로를 테헤란로로 이름을 변경하고, 테헤란에는
그 반대로 서울로라는 거리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런저런 사유로 현재는 양국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어 있으나, 그래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5. 영동대로(永東大路)
지금의 강남이 본격개발되기 이전에 현 강남지역은 경기도 시흥군과 광주군의 일부였다.
그리하다 1963년도에 이 지역이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도에 성동구
영동출장소가 생겼다.
그리고 그 시절(1960~70년대)에 한강 이남에서 제대로 도시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은
1936년도에 시흥군에서 경성부(서울)로 편입된 영등포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남지역을
永登浦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永東이라 하였다.
이에 강남개발을 영동개발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영동이란 이름이 남아있는 곳이 1976.6월에
이름이 붙여진 이 영동대로 외에도 주현미가 부른 ‘비내리는 영동교’의 영동대교, 영동시장,
영동고등학교 등이 있으며, 얼마전에 강남세브란스로 바뀐 영동세브란스 병원, 70~80년대 각
은행의 영동지점 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하튼 우리들이 별 생각없이 부르고 지나치는 거리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스토리가 있고 의미가
있다.
요즘 시대를 스토리텔링 시대이라 한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도로에 얽힌 이야기도 알아두면 유익하고 쓰임새가 있을 것 같아서 이를
이야기해 보았다.
‘서울’ 지명의 유래
우리나라 도시의 이름을 살펴보면 대개가 한자漢字를 사용합니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제일 먼저 궁과 성을 건축했는데 정도전과 무학은 종교적 사고와
유교적 바탕을 앞세워 서로 강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태도는 성역城役을 정하는 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현재 청와대 옆산 인왕산 북쪽에 선바위가 있는데 이 선바위를 성 안쪽으로 하자는
무학의 주장과 성 밖으로 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은 이 태조가 민망스러워 하리 만큼
팽팽했습니다.
그 바람에 다른 도성은 다 쌓았는데 인왕산 선바위 부근만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 대립으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아침,
밤새 첫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한양 땅이 모두 하얀 빛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눈 구경을 하던 태조는 낙산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성 안쪽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고 바깥쪽에만 눈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별감들을 보내서 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녀온 별감들이 아뢰기를 성곽 밖으로만 눈이 쌓였고 안쪽은 맨땅이 드러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도 기이한 일이라 태조는 하늘이 한양의 경계를 알려주려고 그러는가 보다 여기며
별감들에게 다시 궁궐 옆산 인왕산 선바위 주변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녀온 별감들은 선바위를 중심으로 안쪽은 눈이 없고 바위를 포함한 바깥쪽은
눈이 쌓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정도전과 무학을 입궐케 하여 이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이로써 선바위 안쪽으로 성곽을 쌓게 되었는데 이날 내린 눈이 성곽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를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다 하여 눈설, 울타리울, 눈과 울타리란 뜻으로
설울(雪鬱)이라고 해서 1945년 해방 이후 설울을 서울이란 세련된 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이형표 철학박사
-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