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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51
여호와 앞에서 / 김진철 목사
오늘은 4이레 작정 새벽기도회를 시작한지 19일째 되는 날입니다.
지난 3주간은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이 새벽을 함께 깨우며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신 우리 성도님들과 청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의 뒤를 따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를 목격했습니다.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여리고 성을 함락시켜버린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여리고 성을 향해 커다란 함성을 외침으로 승리를 얻은 것처럼 우리 역시 기도의 함성으로 우리의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도 목격했습니다. 저들의 방심이, 저들의 틈새시장이 패배의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안타까움에 우리의 가슴을 쓸어 내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가나안 땅을 종횡무진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계속되는 땅 분배의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땅 분배가 대망의 막을 내리는 날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가나안 땅 분배에 소극적인 대응을 보이는 일곱 지파를 만나보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저들은 그 동안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 늘 가지고 있던 긴장감에서 나사가 풀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앞에 대업의 완성이 다가와 있는데 머뭇머뭇거립니다. 여호수아는 실로로 회막을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그 회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독려하고, 남은 가나안 땅 정복에 박차를 가하게 했습니다. 결국 남은 일곱 지파는 다시금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그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선봉에 서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 동안 우리가 나눈 말씀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베냐민 지파에 이어 남은 여섯 지파들이 자신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 그 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19장 1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보세요. 남은 여섯 지파 가운데 시므온 지파가 자신들의 기업인 땅을 제비뽑아 그 땅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시므온 지파에 이어, 10절 말씀에는 스불론 지파가 뒤를 따릅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잇사갈 지파가, 24절 말씀에는 아셀 지파가, 32절 말씀에는 납달리 지파가, 40절 말씀에는 단 지파가 각각 자신의 땅을 분배받아 그곳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동안 지지부진하던 땅 분배가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49절과 50절 말씀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
제일 마지막으로 성읍을 할당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 개인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모든 분배가 마쳐진 다음에서야 '딤낫세라'라고 하는 성읍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여호수아의 멋진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다시금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정말 대장다운 대장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해나가는 그 대여정에서 자신을 위한 일보다는 백성들을 위한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둔 사람입니다.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애쓰기 전에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많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사람입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취하겠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상황에서 대장이 원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시시하고 쩨쩨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여기서 '쩨쩨하다'라는 단어를 쓰다보니 제가 생각나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은 신당중앙교회의 장학일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먼저 있던 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 가운데 교회 지도자들이 절대로 쩨쩨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께서 교회 내에서 쩨쩨하게 구는 지도자들을 보면 그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신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쩨쩨, 김쩨쩨, 너무너무 쩨쩨, 박쩨쩨, 유쩨쩨, 이제그만 쩨쩨' 이 목사님께서 개척 때부터 이렇게 훈련을 시켜놓아서 이 노래만 나오면 성도들이 "아이구! 목사님, 알았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제 쩨쩨하게 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리더십 가운데 으뜸은 자신보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지도자였습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에 우선적인 관심을 둘 줄 알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지도자입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이런 지도자를 그리워하고, 이런 지도자상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와 같은 삶의 자세가 여호수아의 삶을 좌우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본문에 국한해서 한 번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 51절 말씀에 그 답이 들어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가 지도자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궁극적인 이유를 한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앞에서'라는 삶의 원리입니다. 여호수아가 여기에 오기까지 그의 삶은 항상 '여호와 앞에서'라는 삶의 원리가 지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되어지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관심은 자신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더 올곧은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이 바로 오늘의 여호수아를 만들어준 삶의 원동력임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이것을 기억하세요. 여호수아만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인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많은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기울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만큼 누군가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중요한 삶의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연인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가 한 번은 까페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한 쌍의 연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손님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데 옆자리다 보니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턱까지 괴고 앉아서 듣고 있는 아가씨의 목소리가 아주 재미있게 들려왔습니다.
이 아가씨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래서! 어머! 그 다음에는 어떻게! 와! 정말!" 등등의 감탄사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든지! 도대체 무슨 얘긴가 싶어서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정말이지 별 것 아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정말 그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자기의 애인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분명한 신앙적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그때에는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구나"라고 느끼고 그 나머지 요일은 아니올시다로 지내는 삶은 아닙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여호수아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임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도 마지못해,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사는 삶임을 고백하고 그 속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99장 작사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습니다. 이 기쁨, 이 행복은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세요. 그 기쁨, 그 행복이 보이십니까? 우리 모두의 눈 속에,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그와 같은 은혜가 풍성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요, 안타깝게도 이렇게 행복한 삶을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1절 이하에 기록된 시므온 지파입니다. 앞서 1절 말씀을 봉독해 보셨지만 시므온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과정을 보면 다른 지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땅의 일부를 물려받게 됐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본문 9절에서는 그 이유를 유다 자손의 분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외에도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입니다. 민수기의 말씀은 그 당시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수기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행했던 두 차례의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차례의 인구조사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 1 차 인구조사에서 시므온 지파는 59,300명으로 당시 인구조사에서 세 번째로 큰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제 2 차 인구조사 때에는 22,200명으로 그 인구수가 절반 이상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에 세월이 흐르면 인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줄기보다 느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므온 지파의 일은 분명 예사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예사롭지 못한 일을 민수기 25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은 보통 '바알 브올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은 모압 왕 발락이 예언자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주문한 사건과 연계됩니다. 발람의 나귀가 입을 열어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가끔 들어 보셨을 겁니다. 바로 그 발람 말입니다. 발람이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세 차례 저주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이를 금하셔서 오히려 축복하게 됩니다. 그후에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을 섬기는 쪽으로 유혹하도록 시키고 떠나버렸습니다.
발락은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에게 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에는 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알 브올 사건'입니다. 이 때 이 사건에 가장 깊숙이 연루된 지파가 있습니다. 어느 지파일까요? 이 정도면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시므온 지파입니다. 시므온 지파에게는 이렇게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오늘에 와서는 다른 지파들처럼 자신들만을 위한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일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이미 유다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의 일부를 재분배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므온 지파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앞에서'라고 하는 삶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분명한 신앙적 인식이 있었다면 시므온 지파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삶을 살았던 많은 믿음의 위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다니엘을 만나게 됩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관리들이 계략을 세웁니다. 다니엘이 평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앞으로 삼십 일 동안 다리오 왕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구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공포합니다. 그때 성경은 다니엘의 삶을 어떻게 기록합니까?
다니엘서 6장 10절 말씀입니다(p. 1243). 함께 봉독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할렐루야! 보세요. 다니엘의 삶을 보세요. 다니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라는 삶의 원리, 삶의 원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상황, 어떠한 여건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로 작정한 그의 삶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 역시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앙적 인식을 지닌 인물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여호수아와 다니엘의 삶을 지배했던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라는 삶의 원리로 가득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