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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문학06 8 1 계간평/수필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미학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인간사 중에서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사랑과 죽음이다. 대부분의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탄생과 소멸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사에 공존하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계간『지구문학』여름호에 실린 수필 중에는 ‘삶에 대한 비극적 확산의 극복과 인정 그리고 사랑’을 다룬 수필이 많았다. 왜 많은 작가들이 무엇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까. 현대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을 평자는 이쯤에서 상기해 본다. 지올로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어느 누구에게서도 어느 곳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이오순의 <우지마라, 쑥국새야>, 김장호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 최장수의 <금싸라기 쌀>, 남근영의 <애견과의 이별 2>등의 죽음과 관련된 글들은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가, 또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절실한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반면에 홍재숙의 <느티 선생님>, 임융태의 <우렁이 각시 ‘숙’에게 띄우는 편지>, 손계숙의 <비 오는 날 생각나는 사람>, 설원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한강에 가야 한다>는 인정과 관련된 글이다. 이오순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을, 김장호는 위기에서 살아난 이후의 삶을, 최장수는 부모의 죽음이 주는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남근영은 애견과 이별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홍재숙의 수필은 아이 담임 선생님을 칭송하는 글이다. 임융태의 글은 사랑스런 며느리에게 보내는 시아버지의 인정이 담긴 편지다. 손계숙은 비를 좋아했던 인생의 선배를 그리워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수필 작품들은 인식과 표현에 있어서 참신성은 없지만 우리 삶의 양면을 그리고 있어 작은 감동을 준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II.
이오순의 <우지마라 쑥국새야>는 전에 살던 집 마당 한쪽의 빈터 남새밭에 앉아서 ‘시원할 때 풀을 한 줌이라도 메야 한다며, 동이 트자마자 밭으로 나가곤 했던 저 세상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사모곡이다. 어머니 살아 생전의 모습을 상상의 기법으로 써서 수필의 맛을 잘 살려 내었다. 죽음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잡풀을 뽑으며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인생의 이치가 담긴 이야기와 노래들을 나이가 들어서야 이해하게 되면서 더욱 슬픈 어머니의 삶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수필은 누구나 그렇듯이 살아 있을 때는 어려서 또는 인생을 잘 몰라서 부모와 자식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준다. 전개부 삽화로 들어있는 시집간 딸 이야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비극적 사랑이 구체화되고 되고 있는 주제의 종속제재로서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당대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말해준다. 이 수필을 읽는 묘미는 왜 작가의 어머니가 타령을 하다 말고 자주 훌쩍거렸는가의 내적 의미를 추적해 보는 데 있다. 이 수필이 주는 가치는 비극적 삶이 녹아 있는 한국적 여인의 운명적 삶의 한 모습이다. 눈물과 한으로 상징되는 한국 여인의 삶에 투영되어 있는 체념과 숙명의 그늘을 한 여인이 자연스럽게 승계하고 있음을 잘 드러냄으로써 한국적 정조를 수필로 잘 승화시키고 있다. 이 수필의 강점은 마지막 결말 단락에 놓인 아이러니와 역설의 표현이다. “그랬다. 어머니는 타령을 하다 말고 자주 훌쩍거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머니의 타령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곡조도 가사도 마음대로인 타령을 어머니처럼 흥얼거리며 역시 나도 울고 있다”는 대목이다. 주제의식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의미화하는 솜씨에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빛난다. 이 작품은 비극적 운명의 미학을 사모곡으로 승화시켜, 유유한 멋을 내었다고 하겠다. 주어진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든든한 생활인의 체취를 실감하게 되어 다행스럽다.
김장호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인식을 보여주는 수필이다. 지하철 계단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병상에 누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쓴 글이기도 하다. 이 수필은 작가의 인생관이 드러난 작품으로 발단부에 주제의식이 놓여 있어 전달성이 강한 작품이다. 작가는 ‘사람의 한 살이는 희비쌍곡선이요, 사람은 환희와 고통의 연속선상에서 희로애락으로 쓴 맛, 단 맛, 맛보며 행복이라는 고지를 향해 달리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보는 까닭에, 사고를 당하고서도 감사와 다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했다. 예를 들면 ‘뇌를 다쳤으면 죽었거나 살았어도 식물인간이 되어 지옥을 헤매며 삶을 저주했으련만 외상만으로 일 주일 입원 가료 끝에 목숨을 부지케 된 데’ 대하여 감사함을 느낀다는 부분이다. 전개부는 뇌를 다치지 않아 다행스럽다는 것과 아울러 삶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성찰적 자세가 바로 사고를 당하고,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고 난 이후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이 주는 읽는 묘미는 작가가 삶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풀어내어 그 속에 내재한 가치를 찾아내는 데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특색은 반성적 성찰이 각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전개부 각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는 어구를 살펴보자. ‘아무 것도 남길 것이 없으니 지금까지 헛산 것 같아 입맛이 씁쓰름하고 후회막급이었다’, 바로 다음 단락, ‘무엇인가 사회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이 또한 낙제생이 된 것 같아 자괴할 따름이다’에 이어지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 못난이는 내세울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니 실패작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응분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이다’, ‘물거품이 된 것 같아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노령의 기력은 마음뿐이라 또한 서글퍼진다’, 등등 문단의 마지막 종결부 어미는 전부 반성 일색이다. 결말부는 아우벨리우스의 명상록을 음미하며, 세 가지 다짐으로 끝내고 있다. 생활의 반성적 성찰이 고도의 세련된 지적 성찰로까지 나아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홍재숙의 <느티 선생님>은 화자가 총각시인인 막내딸 담임 선생님의 교직 생활을 호의적으로 그린 인물 수필이다. 작가는 외고 다니는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의 특별한 아이들 사랑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입시라는 차원에서 선생님의 덕성을 바라보지 않고 인성교육이라는 차원에서 담임의 느슨한 학급 경영 철학을 이해해 줄 뿐만 아니라 그런 인성 교육에 대해 칭송하는 내용으로 수필을 꾸미고 있어, 교권이 붕괴되어 가고, 스승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시점이라 이러한 수필이 주는 가치는 크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체로 된 수필이지만, 느티 선생님을 딸아이의 말을 빌려와 작가가 ‘봄바람 같다’고 표현한 것은 주제의 간접화를 위한 전략으로 바람직했다고 하겠다. 이는 작가가 문예적 미학을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수필의 발단은 화자가 느티 선생님을 만나게 된 동기를 적고 있고, 전개부는 느티 선생님의 특징을 나열하고 있다. ‘가정통신문 늦게 주고 늦게 걷어서 맨날 꼴찌 반을 도맡아하기, 종례시간에 돌아가면서 앞에 나가 3초 동안 말하기, 황사바람 몹시 부는 노는 토요일에 아이들 나오라 하여 운동장에서 펄펄 뛰며 서로 친해지기 놀이하기, 크게 화냈다가도 마음이 여려서 금방 웃으며 안아주기, 핸드폰 진동 소리만 들려도 뺏는 다른 선생님과는 달리 ’야, 하지마‘ 하며 살짝 눈 감아주기, 딸아이가 감기로 호되게 아팠을 때 어떻게 하니 하며 양호실까지 데려다 주고 불켜주기, 반 아이들에게 너희들 날 아빠라고 생각하고 다 털어 놓으렴 하고 씩 웃기, 너희들 주말에 왜 공부하니 푹 쉬었다 와 그런데 시험은 잘 보고, 하며 아이들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등이 느티 선생님의 영상이다. 이런 나열만 가지고 독자를 설득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작가는 느티 선생님의 교육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일화를 한 페이지 분량으로 들려준다. 그리고는 결말부에 가서 오월을 닮은 느티 선생님에게 내 아이를 맡겨서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아무래도 문학적인 맛을 풍겨주는 대목은, 아이들이 ‘느티나무’로 잘 자랄 것으로 믿는 작가의 담임 교사에 대한 신뢰가 놓여 있는 글의 마지막 결말부 문장일 것이다.
임융태의 <우렁이 각시 ‘숙’에게 띄우는 편지>는 작가가 시아버지 된 입장에서 며느리에게 쓰는 서간 형태의 글이다. 이 수필의 주요한 특성은 ‘정의 미학’이 글 행간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가치는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하여 매우 자상하고 인정스러운 한국의 시아버지 상을 만나게 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간문 자체가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서간수필은 서간문과 다른 것으로 수필을 서간이란 용기에 담은 글이다. 서간체 수필은 주로 여성들이 많이 애용하는 편이나, 이번 글은 남성이 여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선 며느리 사랑은 사아버지란 말이 있긴 하나, 요즘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편지는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삶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언어가 바로 편지의 언어라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수신자를 며느리로 설정했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수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발단에 출산율 저조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서 아이 셋을 둔 며느리를 칭송하고, 전개부 전반에서는 인생의 선배로서 부부론에 대한 설교를 하고, 중반쯤에 가서 평탄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사를 밝히며, 그 와중에서 ‘이혼불가, 재혼 절대불가’라는 지론을 갖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후반에는 손자 이야기를 토대로 며느리를 칭찬하고, 결말부에 가서 며느리 집안에 대한 칭송을 통해 며느리의 환심을 사고자 한다. 사실을 토대로 한다는 수필 형식의 진실성에 서간 형식이라는 특성의 사실성을 보태기 때문에 서간체 수필의 언술은 전달성이나 소통성의 측면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는 편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심정과 처지를 며느리에게 이해시키려는 욕망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편지 쓰기 자체가 인식이나 경험의 중개자 구실을 함과 동시에 자기 표출성을 많이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 식구가 된 며느리를 감싸 안는 모습이 대인답다.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드러내어 자기 이해의 발판으로 삼는 용기도 높게 평가될 부분이다.
III.
수필은 현실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수필이 체험적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수필과 현실은 상호 밀착되면서 수필적 화자를 자기 속에 밀어 넣는다. 수필은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연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해명이면서 새로운 삶과 역사 진전의 지평을 가시화시켜 인간과 삶과 역사를 상승시킴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전개함을 말한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나 역사성의 수용에 의한 전파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죽음이나 사랑의 문제를 화소로 수필을 풀어내고 있는 작가들은 일차적으로 모두 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 수필에 나타난 것처럼 이렇게 우리도 죽음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죽음을 인생의 한 과정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노인이 되어 병들고 노쇠하게 되어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가는 죽음의 유형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천수를 누리고 가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 돌연사나 사고사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도 있다. 이상과 같은 죽음의 현상들이 빈번히 목도되는 이때, 우리 수필가들이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을 버리고 삶에 대한 비극적인 감각을 반성적 성찰로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아무튼 우리 수필가들의 고령화에 따라 우리 수필들이 죽음의 중력에 많이 이끌리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더욱 심화되고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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