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모란시장과 모란역에 ‘모란’이 들어간 사연
모란이라는 지명을 낳은 ‘모란개척단’의 황무지 개간 사업
대형 부동산 사기 사건으로 기억되는 ‘모란단지 개발 계획’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모든 지명(地名)에는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지난 기사에서 다룬 ‘성남’만 하더라도 남한산성의 남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남에서도 수진동(壽進洞)은 세종대왕이 일찍 죽은 아들의 묘를 돌보기 위해 ‘수진궁(壽進宮)’을
지은 데서 유래를 찾고, 복정동(福井洞)은 마을에 복스러운 우물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를 찾는다.
이렇듯 한 지역의 이름에는 주로 그 지역의 역사나 특징과 관련한 지명이 붙는다.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성남시는 1973년에 광주군에서 독립할 때 일부 지역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중 신흥동(新興洞)은 ‘새롭게 부흥시키자’는 의미를 담았고, 태평동(太平洞)은 ‘근심 걱정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았다.
그런데 성남에는 예로부터 부르거나 행정적으로 정하지 않았는데도 지명으로 자리 잡은 곳이 있다.
‘모란시장’과 ‘모란역’이 있는 ‘모란’ 지역이 그렇다. 아마도 성남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고 차량도
가장 많이 지나는 지역일 것이다. 그런 곳이 정식 동(洞) 이름도 아닌 ‘모란’으로 불리는 유래는 어디서 비롯될까.
모란시장. 날짜에 4와 9가 들어간 날에 열리는 오일장이다. (출처: 성남문화원 '성남학 연구소' 제공)
모란개척단, 성남 모란 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다
성남시 역사에 ‘모란’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60년이다.
당시 수십 명의 제대군인이 지금의 모란역 네거리 인근에서 ‘모란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모란역 네거리와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산성대로’는 원래 남한산성 남문 아래 계곡에서 발원한 ‘단대천’이
흐르던 곳이었다. 인근 ‘둔천대로’에는 ‘대원천’이 흘렀다. 두 하천은 ‘탄천’까지 흘러갔는데 현재는 모두 위를
덮어 도로가 되었다. 모란개척단은 1960년대 초 ‘단대천’과 ‘대원천’ 인근의 하천부지와 황무지를 개간해
협동농장을 만들었다.
1961년 즈음의 모란개척단 모습. 현 풍생중고 근처에서 시멘트 작업 중이다. (출처: 성남시 제공)
이들을 이끈 사람은 예비역 대령인 김창숙(金昌淑, 1926~1991)이었다.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 1879~1962)과는 동명이인이다. ‘모란’이라는 이름은 김창숙의 고향인
평양 ‘모란봉’에서 따왔다고 한다. 김창숙은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1년에
경기도 광주군 군수가 되지만 구호양곡 횡령 사건으로 3개월 만에 퇴임한다.
제대군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를 만드는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많이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당시 제대군인과 상이군경을 위한 일자리 정책으로 장려했기 때문이다. 자료에 의하면 1950년대 말
제대군인 숫자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이들의 사회 정착은 국가적 관심 사안이었다.
제대군인을 활용한 귀농 정책이 나온 배경이다.
정부는 전국의 황무지와 하천부지를 개간하는 농경지 확대 정책을 펼쳤고, 여기에 제대군인을 투입하는
‘협동농장' 설립을 장려했다. 1962년에는 ‘군사원호대상자 정착대부법’을 제정했는데 제대군인의 농장
개간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였다.
그 결과, 전국에 많은 ‘화랑농장’이 들어섰다. 지금도 그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모란개척단의 ‘모란농장’ 혹은 ‘모란마을’도 그 사업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모란우체국. 모란 지역에 통신 수요가 많아지자 생긴 별정우체국.
나중에 성남우체국과 합쳐진다. (출처: 성남문화원 '성남학 연구소' 제공)
모란개척단에는 제대군인과 실향민들이 몰려들었다. 1965년에는 약 100가구 500명에 육박했다.
인구가 늘자 자녀 교육을 위해 ‘풍생중학교’의 모태가 된 ‘모란학원’을 세웠고, 통신 수요가 늘어
별정우체국인 ‘모란우체국’도 세웠다. 그리고 ‘모란시장’도 이즈음에 열렸다고 한다.
모란단지 개발 계획, 대형 부동산 사기 사건으로 기록되다
활기를 띠던 모란 지역은 1960년대 중반이 되자 성장을 멈춘다.
모란개척단에 들어오면 집과 땅을 준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개척단 단원이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하기 어려운 데다 협동농장 방식으로는 수입에 한계가 있었다.
당시 법은 토지 소유주에게 모든 권리가 있었다. 아무리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를 만들어도
지주나 (국유지인 경우) 국가가 그 권리를 주장한다면 단원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모란을
떠나는 단원들이 생겼다. 개척단을 이끌었던 김창숙도 광주군수에서 물러난 후 그 행적이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에 정부는 ‘광주대단지 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모란마을과 멀지 않은 지역에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이때 김창숙이 다시 등장한다. 그는 1970년에 ‘모란단지 개발 계획’이라는 부동산 개발사업을 벌인다.
물론 정부가 세운 ‘광주대단지 개발 계획’과 관련 없는 민간 주도 사업이었다.
그 내용은, 당시 광주군 (지금의 성남시 중원구와 수정구인) 중부면과 대왕면, (지금의 분당구인) 돌마면,
(지금의 판교인) 낙생면 등 4개 면 4,200만 평의 면적에 약 250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대규모 택지를
개발해 분양한다는 거였다.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광주대단지’와 비교해 개발 면적은 12배, 수용 인구는 7배, 총 투자액은 5배의 계획이었다.
여기에 해외의 회사와 공장을 유치한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당시 신문 기사들을 보면 ‘모란직할시’라는 표현도 나온다.
결국, 이 계획은 사기로 드러난다. 관계 부처와 지방 기관에 허가를 받지 않고 벌였기 때문이다.
물론 공사 중이었던 땅도 개발 후 이익을 나눠주겠다며 지주에게 외상으로 매입한 것이었고,
대규모 외부 투자도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1971년 3월 정부는 김창숙 측을 ‘불법 택지 조성 및 사기’로 건설부와 사정 당국에 고발한다.
김창숙은 부도를 내고 잠적한다.
김창숙 검거 기사. 동아일보 1971년 7월 6일 기사. (출처: 동아일보)
이 사건으로 이익을 본 계층이 있었지만 피해를 본 사람들도 많았다.
우선 광주대단지 개발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의 맛을 본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모란단지 분양권은 프리미엄이 붙고, 프리미엄에 또 프리미엄이 붙어
다른 사람들에게 매각되곤 했다. 동일한 택지 분양권이 여러 사람에게 중복으로 발급되기도 했다.
분양권을 매입한 사람은 폭탄을 안은 것과 다름없었다. 모란 지역 개발과 분양은 불법이었으니까.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모란단지 분양권 피해자는 6,500여 명이었다.
1971년의 ‘광주대단지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져 정부로서는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수습하는 게 중요했다.
도피했던 김창숙은 검거되어 재판을 받는다. 법원은 1971년 11월 김창숙에게 사기, 산림법 위반, 국유재산법 위반,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분양권 피해자들은 광주대단지에 입주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모란시장과 모란역, ‘모란’이 고유명사가 되다
1970년대 초반에 벌어진 모란단지 개발 계획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부동산 사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모란'은 이 지역 지명으로 살아남았고 오늘날 성남에서 가장 활기를 띠는 지역이 되었다.
사람들과 차들로 붐빈다.
(2021. 06. 29) 모란민속오일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01) 모란시장의 기름가게 골목.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01) 모란시장 앞 성남대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모란개척단 초기에 자그맣게 들어선 모란시장은 수도권의 대표적 오일장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상설시장도 있다. 참기름 짜는 가게가 몰려 있는 골목과 각종 가축 고기를 파는 거리가 유명하다.
모란시장과 인근 식당가는 온갖 지역 이름을 딴 간판들로 즐비하다. 전국에서 흘러든 상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모란 지역은 성남과 인근 도시들을 이어주는 플랫폼 역할을 맡기도 한다. 버스터미널이 야탑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모란에 터미널이 있었다. 모란시장 앞 성남대로에는 서울은 물론 광주시와 하남시, 그리고 용인시를 잇는 버스
노선들이 지난다. 모란역에는 ‘수인분당선’과 서울지하철 ‘8호선’이 지난다.
모란 지역은 행정적으로 ‘성남동’이다. 성남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상징적인 곳이라 붙인 지명이다.
하지만 ‘성남동’보다 ‘모란’이라는 지명이 더욱 유명한 ‘고유명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모란'에는 척박한 땅을 개간한 제대군인, 그 시대 청년들의 땀방울이 서려 있다. 집과 땅을 갖고 싶었던 서민들의 눈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