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 박태진
종일 편지를 씁니다.
첫 눈이 되지 못한 하루는
낮고 허망한 가슴 저 밑바닥까지
종일 비에 젖습니다.
당신을 적시지 못한 나는
당신에게 젖지 못한 나를
소리 없이 저려오는 미움에
정녕 미안 합니다.
잎을 모두 지운 겨울나무는
그저 마른 열매 몇 개 달고
새가 흔들고 날아간 가지 끝
잔잔한 흔들림 멎을 때까지
그냥 서 있을 뿐입니다
그대에게 쓰는 편지가
수직 행간으로 내려와
몸통을 적시고
돌덩이 껴안은 뿌리까지
적시는 하루는
종일 편지를 씁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더라./ 박태진
아픈 척
괴로운 척
슬픈 척
그렇게 사는 것이더라.
죽을 수 없는 이유 하나쯤 안고 살아가듯이
죽을 수 없기에 사는 것이더라.
눈 뜨고 있을 때는 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눈 감아보니 나만 없어도 된다. 는걸 알았다.
내가 불러들인 세상
미움하나 버리지 못하는데
섧어도 뒤를 돌아보지 마라
눈감고 눈뜨는 것이 순간이더라.
건강한 척
즐거운 척
행복한 척
그렇게 사는 것이더라.
낙동강에서/ 박태진
괭이밥 속에서 기어 나온 까만 일개미
낙동강 지는 해 한번 보고 집으로 가는데
술 빛 노을이 밤 낚시꾼 등에 업히어
물길마저 지우는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별빛을 덮고 자는 방죽에는
피라미 몇 마리 흩어져 있고
장대에 메 달린 지렁이 물별들을 잡는데
뿌연 강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긴 한숨만 허공에 뿌리며 흘러갑니다.
밤새 변명만 건져 올린 빈 망태에
한참을 투덜대던 갈대가
긴장을 버리고 새벽잠을 청하는데
부초 같은 초승달은
자꾸만 젖은 물길을 따라 갑니다.
노치원 / 박태진
“잘 놀고 와”
아파트 정문 앞에
50대 막내딸이 80대 어머니와 아침 이별을 합니다
그 옛날
막내딸이 유치원갈 때 그 어머니가 하던 대로
노란 버스 타고 유치원 가던 막내딸처럼
어머니도 노치원에 갑니다.
공부하고 율동하고 점심 먹고 낮잠 자고
막내딸이 하였던 것과 똑같이 합니다
저녁이 되면
노란 버스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침에 타고 갔던 그 자리로 돌아오면
50대 막내딸이 마중 나와
“오늘 잘 놀았어?” 라고 합니다
80대 어머니는 그 옛날 막내딸이 하던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는 노란 버스 꽁무니를 끝까지 쳐다봅니다
유치원 갔던 이쁜 딸이 이제야 돌아옵니다
멸치 꽃* / 박태진
봄 햇살에 은비늘이
벚꽃처럼 흩날리는데
죽을 때까지 그물에 매달렸던
멸치의 목숨을
털어야 하는 어부의 목숨이
죽을힘을 다한다
괭이 갈매기 날아들고
땀과 비늘을 덮어쓴 채, 얼굴만 빼꼼히
엳아홉이 줄을 서서, 일사불란하게
후리기 박자소린지 극한의 신음소린지
꺼칠한 뚝배기 소리가 끊어질듯 이어지고
한번은 오른팔에 한번은 왼팔에
그물은 파도처럼 요동을 치고
머리는 머리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천지사방 흩어지며 패대기치는데
삶도 죽음도 여기에 있다
아, 저놈의 멸치는
죽어서도 꽃을 피우는데
이내 팔자는 언제 한번 피려나
목줄 / 박태진
병원복도 사람들 사이로, 한 간호사가
노 환자 침상 하나를 끌고
바쁘게 가는데
주르르 가족들이 따라갑니다
침상 걸이에는 무슨 약인지
링겔 네댓 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 뒤로 목줄 한, 강아지 따라가듯
작은 산소통도 따라갑니다
끌려가는 침상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는 중년이 자식 같고
그 뒤를 따라가는 며느리와 손녀 둘
무슨 생각이 힘들게 지나갔는지
모두가 정신이 나간 사람 같습니다
목줄이 목숨 줄이 되어
혹시나 놓칠까봐, 산소통만큼이나
가족들도 따라 붙는데
긴 복도 저편이
멍- 하니 보고 있습니다
물의 무늬가 바람이다. / 박태진
흐르고
머무르는 것이
바람의 무늬다.
오늘도
젖은 물에는
바람이 머물고 흐르듯이
생겼다 지워졌다 한다.
그 많은 무늬들이
외로운 생애가
울다가 웃다가 밉다가 곱다가
돛단배로 흔들리듯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늬다.
바다 노점 / 박태진
바다 한 대야씩 끌어안고 옹기종기 줄을 지은 노점
뱃대지 까만 탈출광어, 끝까지 자연산이라 우기는 도다리
한 번씩 성질내고 물을 뿜는 오징어 데리고
세월에 찌든 물 장화 고무장갑이 흥정을 한다.
바다를 버리지 못한 평생이 고동같이 쪼그리고 앉아
차가운 도마 위에 광어 한 마리 빈대떡 뒤집듯 뒤집고는
손보다 만만한 회칼로 한칼 먹인다.
괭이 갈매기 먹이 쪼우 듯, 능숙하게 해치운다.
싸늘한 피와 내장은 아픈 기억처럼 짠물에 감추고
그렇게, 돈 받는 척 일어서며 허리 한번 펴는데
자식 같이 멀어져가는 수평선이 자꾸만 눈에 보인다.
멀리 일렁이다 다가오는 파랑 같이
벗하나 있었으면 / 박태진
초겨울 찬바람이 가슴에 파고들면
인생도 한해만 살다가는 들풀로 알고
귀뚜라미처럼 쓸쓸하게
나에게 기대어 주는
그런 벗 하나 있었으면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아픈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미움과 원망을 용서라고 우기며
어깨 토닥이며 곁에 있어줄
그런 벗 하나 있었으면
일출의 여명이 아름답지만
일몰의 석양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시작보다 끝이 더 소중하다고
고된 삶에 향기 나는
그런 벗 하나 있었으면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인 줄 알고
회포 가득 찬 술 한 잔 기울이며
저녁 강물처럼 같이 저물 수 있는
그런 벗 하나 있었으면
봄밤 / 박태진
추적추적 비 내리는 저녁, 글쟁이들 빠글빠글 찌개를 끓이고 벽에 붙은 화면에서는 세월호 추모를 하고 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소주가 마른도랑 속으로 사라지고 어설픈 문학, 탁자모퉁이에 밀치고 정치고 뭐고 해도 배부른 게 최고지 먹고 사는 것부터 해결하려 하는데 낮에 버린 시가 자꾸 목에 걸린다 옆자리에 누가, 벌이가 시원찮아 못 먹고 살겠다고 희망이 없다며 울부짖다, 배부르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주장이 강해진다 정치와 비슷하게 남의 이야기는 잘 듣지 않는다 그래, 정치는 거짓을 위해 참을 말하고 시인은 참을 위해 거짓을 말 한다고 했는데 술이 익으면서 슬그머니 타령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리움은 철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들판에 봄바람이 차별없이 불어와도 살아있는 가지만이 움을 틔운다는 봄이다 정치도 경제도 빗소리가 말아먹고 찌개 쫄듯 파장을 맞는데 또 한번 술에 속고 오답에 취한 글쟁이들, 다시 맹세를 하고 손을 흔든다
빙하 / 박태진
수천 년 밤낮없이
얼고 또 얼어도, 그 속은
얼음이 아니라 물이더라
세월 속으로
흐르고 마는 강물이더라
마냥 푸름이
차마, 냉가슴인 줄 알았더니
단 한 번의 눈길에
그냥 퍽 쏟아지고 말더라
못내 울다가
순간에 미치고 마는
사랑이더라
아내의 말 주머니 / 박태진
아내가 말이 없는 날
우연히 아내의 말 주머니 속을 보았다
끝내 하지 못한 말
무심코 날카로운 말, 가시 있는 말
지금까지 살면서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있었다
신혼 초 울음이 섞인 말도
새벽 초승달같이 밤을 새운 말도
말 주머니 한쪽 구석에는
화가 잔뜩 묻은 말과
미안해서 눈물로 대신한 말이
너무 오래되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밑바닥 깊이, 고이 접어 숨겨둔
아린 자식의 말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가만히
그 속을 들추어 밑을 보니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껌딱지같이 붙어 있다
말문이 막혀
나도 하지 못한 말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내 말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의 들판 / 박태진
아버지를 버린 적 있다
직장을 버리고 농부가 되신 아버지를
가난을 짊어지고 들판에 선 아버지를
그때는 몰랐다
농부는 찌들어도 냄새가 나지 않는 줄
농사에 철학이 숨어 있는 줄
들판은 언제나 바람이 불었고
폭풍이 지나가는 들판에서
점점 멀어지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들아 지금 니 아버지가 내 아버지의 아들이다
니가 아버지 아들이듯이 나도 아버지 아들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아버지 아들인줄
어머니 / 박태진
내 일찍 객지에 나와 십수년 흘러도
고향에서는 어머니 이름이 없다.
큰 아들인 내 이름이 어머니 이름이다.
어디서 내 이름 부르면 어머니가 대답한다.
부처님 오신 날 연등도 내 이름으로 단다.
자식이 자기인양
속을 다 자식에게 빨아 먹이고
쭈쭈바 빈껍데기 같이 쭈글쭈글하다.
달아나지도 않는 고향을 지키시는지
누구를 기다리시는지
밤이 깊어도 눈만 빠끔한 부엉이
이산 저산 둘러보지만 자리가 없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주 꿈에 찾아오신다.
어머니, 어머니 불러 보면 은
나는 괜찮다, 괜찮다 하신다.
진짜 괜찮은 놈은 난데.
왜가리 / 박태진
해거름 지는 수밭못둑 아래
왜가리 한 마리
모가지를 길게 빼고
못이 뚫어져라 보고 있다
머리에 검은 댕기는 둘렀지만
피죽도 한 번 못 얻어먹었는지
꼬쟁이다
한 끼 저녁을 얻기 위해
저렇게 깊은 삼매에 빠져
어둠살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꼼짝하지 않는다
목숨은 한 번쯤 휘청거릴 수도 없다
물속에 비치는
긴 부리 끝에 매달린
슬픈 눈동자가 흔들릴 때마다
개망초 곁에 달맞이가
노란 등을 달고 있다
이심이체 / 박태진
TV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낱말 맞추기 스피드 게임을 하고 있다 이것저것 잘 맞지는 않지만 겨우 체면치레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랑이라는 단어에 당황한 할머니가 다급하게 ‘아 영감이 나한테 하는 거 있잖아요’ 하니 할아버지 ‘하는 거 없는디’ 한다 마음이 급한 할머니, 열심히 설명하여도 할아버지는 자꾸만 비켜 간다 애가 탄 할머니가 다짜고짜 ‘아 거시기도 모르는교’ 해도 할아버지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만다
60년을 같이 살았다는데, 일심동체는 어디 갔을까
질경이 / 박태진
윤회병원 뒷마당
낙엽 사이로
나른한 햇살 쪼이고 있다.
집과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신까지 잃어버리고
물음 앞에 한참 말없이 머물다
보고 싶어 오래 바라보면
왠지 낯설어 진다.
잃어버린 세월이지만
가끔씩 자식이 눈물과 겹치어
앙상하게 마른 질경이
멍울 맺히고
다 버린 줄 알았던 입칠
아직 턱밑에 모질고
다 잊은 줄 알았던 막내자식
아직 손끝에 시리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상처 난 잎새 말라가고 있다.
풀 한포기 / 박태진
잡초라고
쓸모없다고
뽑아 버리려고
풀 한포기를 뽑아보지만
뽑히지 않는다, 힘껏 당겨도
땅을 붙들고 끝까지 놓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풀 한포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땅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을 보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가 보다
정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보다
풍화 / 박태진
세월이 길을 나섰다
풀들이 이슬을 털며 반겼다
따라오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들꽃이 손을 내미는 궁산에 올랐다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하고도 인사를 했다
멀리 구름이 왔다가 그냥 갔다
오랜 친구 같은 소나무 곁에 앉아
발아래 개미와 한참을 놀았다
키 낮은 풀과 강바람도 같이 놀았다
금호강에 석양이 흘렀다
나도 같이 흘렀다
해가 가고 달이 찾아왔다 별도 같이 왔다
담장 모퉁이 고양이와 잠시
눈을 맞추다 안부를 물었다
내 속에 작은 사랑이 다녀갔다
하루치 풍화가 사라졌다
히스테리시스 6 / 박태진
저 나무 저 자리서 저렇게 평생을 살겠구나
사람도 깃발 하나에 평생을 살아가지만
한순간 팔자를 던지며
너의, 뿌리를 본적 있다
칼바람에 깃발처럼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내 젊은 날처럼
목말라 발버둥친 검은 상처가 있고
땅위의 가지만큼 땅속에서도
악착같이 산 흔적이 실핏줄같이 뻗어 있다
얼마나 처절했는가는 뿌리를 보면 안다
그러나 불수의근不隨意筋
그 바람이 너의 뿌리인 것을
첫댓글 회장님 수고많으십니다
<겨울비> 하겠습니다
고생많으십니다.
회장님~☆
<히스테리시스 6> 하겠습니다.
김병철김지선
벗하나있었으면
하겠습니다
회장님 수고 많으십니다
김순희
<왜가리> 하겠습니다
수고많으십니다.
<어머니> 하겠습니다.
'노치원'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회장님
목줄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