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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이희원(經齋 李羲遠)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유계 經齋儒稧
1. 유래 본 경재유계는 고종 계미(1883)년에 출생하여 1968년에 향년 86세로 타계한 경재 이희원(經齋 李羲遠)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유계이다. 계의 결성은 선생이 재세시(在世時)인 계묘(1963)년 정월에 일가인 영천 이씨(永川李氏)들과 선생의 사위 등이 참여하여 계안을 만들고 각자가 약간의 돈을 추렴하여 출발하였는데, 병오(1966)년부터는 안동지역의 타성들도 참여하는 유계로 확대되었다. 경재 이희원선생은 본관이 영천으로 자(字)는 경도(敬道)이다. 농암(聾巖, 李賢輔)의 13세손으로 안동 분천리에서 용강(龍崗, 昌淵)공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대대로 문행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약관에 7서(七書)를 통독하여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평생을 저술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91년에 선생이 남긴 시(詩)․서(書)․서(序)․기(記)․발(跋)․찬(贊)․전(傳)․송(頌)․고유문(告由文)․상량문(上樑文)․애사(哀詞)․제문(祭文)․명(銘)․행장(行狀)․유사(遺事)․묘표(墓表)․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 등을 모아『經齋集』3책을 발간하였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계첩인『경재유계첩(經齋儒稧帖)』에는 진성인(眞城人) 이원영(李源榮)이 찬(撰)한 서문과 함께 모두 230인의 좌목이 등재되었다. 계의 입안(立案)은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오천)에 거주하는 간재 이덕홍의 후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계원들의 대부분은 안동시 녹전면을 중심으로 인근의 면리(面里)에 거주하던 이들이다. 계첩의 전반부에는 영천인(永川人) 이희욱(李羲頊)을 비롯하여 53인이 등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1963년 입안시에 참여한 분들이며 나머지 계원은 그 이후에 입계(入稧)한 이들이다. 입안시에 참여한 성씨는 영천 이씨와 순천 김씨 등 2개 성씨인데 영천 이씨는 52인이고 순천 김씨가 1인다. 영천 이씨의 경우 녹전면 오천 22인, 충청도 천안(天安) 7인, 안동시 와룡면 명계(明溪) 5인, 안동시 예안면 대곡(大谷) 3인․귀단(歸團) 1인․인계(仁溪) 1인의 순으로 참여하였고, 순천 김씨는 녹전면 모란(沙川)에 사는 김석호(金錫浩)계원이 선생의 사위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경재유계의 경우 계원의 가입은 추입(追入)계원과 습입(襲入)계원으로 구분되는데, 추입은 일가나 타성이 신입계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습입은 기존 계원이었던 부친이 타계함에 따라 그 뒤를 이어 아들이 계원의 자격을 승계하는 것을 말한다. 계원의 추입은 1966년에 안동인(安東人) 권오건(權五建)을 비롯한 7인의 입계를 시작으로 선생이 타계한 1968년 이후에도 추입이 꾸준히 늘어 2006년까지 모두 170인에 이르렀고, 습입계원은 지금까지 7인이 승계되었다. 전체 계원을 성씨별로 살펴보면 모두 28개 성씨가 계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를 중심으로 한 영천 이씨가 158인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다음으로는 진성 이씨 17인, 안동 권씨 10인이며 그 나머지 성씨는 5인 이하로 참여하였다. 현재 창계시에 참여했던 63인 가운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인이 타계함에 따라 계의 운영은 그 이후에 추입․습입된 분들을 중심으로 취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四書인 논어․맹자․중용․대학과 三經인 주역․시경․서경을 말함 나.李有昌․李在冕․李有吉․李有定․李起龍․李在島․李性源 등.
2) 운영 양대 수갈고유시
계금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창계 4년 뒤인 1967년부터 유사를 선임하여 계무를 보게 하였는데 초대 유사로는 이유춘(李有春)과 이근연(李根淵)계원이 선정되었다. 계금의 조성은 1963년 창계시에 모인 이들이 1,730원을 추렴하고 본가에서 700원을 찬조하여 총 2,430원으로 출발하였다. 모인 계금은 계원들에게 이식하여 규모를 불려나갔는데 추입계원이 낸 입계비와 본가에서 찬조금 명목으로 주는 돈도 계의 수입원이다. 계의 사업으로는 선생의 문집인『경재집(經齋集)』발간․배포와 선생묘소의 수갈(竪碣)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미 1991년과 1996년에 사업을 완료하여 현재 추진되는 것은 없다. 지금까지 계금의 지출을 보면 선생의 문집 발간시에 약 6,500,000원이 지출되었고, 용강․경재 양대(兩代) 분의 수갈고유시에 1,000,000원이 부조금으로 사용되었다. 또 선생의 기일(忌日)에는 봉포비(奉脯費) 명목으로 약간의 돈이 지출되고 계취 때의 식비(食費) 등에도 적지 않은 돈이 지출된다. 대체로 계의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편이며 현재 2,300,000원 정도의 계금이 남아있다.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보니 현재 본가에서는 계금의 보존차원에서 식대비 등의 경비일체를 익년 결산시에 찬조비 명목으로 보태고 있다. 계취는 창계 이후 매년 음력 10월 중 한가한 틈을 내어 가져왔는데, 계의 재정 형편상 2006년부터는 격년으로 양력 12월 첫 번째 일요일을 정일(定日)로 하여 모임을 갖고 있다. 계취 때는 안동시내의 조용한 식당에서 20~30인이 모여 결산보고를 하고 계의 안건을 논의하며 식사를 한 후 담소로 친목을 도모한다.
3. 기타 1) 經齋儒稧序 吾鄕之汾川永川氏世庄也宿儒碩德聯世迭興允矣一方之矜式近故經齋李公以聰穎之資生賢父之庭造詣孔夙聲藝籍蔚孝悌行於家而忠信著于鄕足以需世其用而滄桑家國棲屑南北不能展布所蘊則無奈固守東岡以獎進後學爲己任村秀聞風坌集隨其才而各充其量守舊謨而開來學以至成器成人者多至二百四十有餘員矣諸子報師門之德修契而成案出資而拮据以爲後日刊稿之費者間經三十有餘年之久而目今西潮潏蕩文敎變而弁髦六經人文滅絶不知綱常之重而棄若巴籬邊物當此板蕩之日僉君子積年勞貰辦得此鉅役刊行斯文於斯世其有助於世敎者當何如哉摩挲遺篇自不禁宿昔之感而其在平日尊慕之地亦有所欽仰者乎迺者賢孫在輅君領帙於窮鄕無聞之人可以知先誼之勤而求余契案序不可以昏聵無文辭略書前後事實先頌僉賢之誠而以副賢孫之請而爲契案序如右云爾 歲戊寅 仲春 上澣 眞城 李源榮 敍
경재유계서 우리 마을의 분천은 영천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이다. 숙유 석덕이 세대를 이어 번갈아 일어나니 진실로 한 방면의 본보기가 된다. 근래에 경재 이공이 총명한 자질로 현부의 가정에서 태어나 학문의 조예가 일찍부터 깊었다. 명성과 재주가 자자하였고, 효제는 가정에서 행하여 졌으며, 충과 신의는 고을에서 드러나 족히 세상을 구하는데 쓰일만 했으나, 세상이 크게 변해 나라는 망하고, 남북에서 편안하지 못하여, 쌓은 바를 펼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굳게 동강을 지키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시골의 수재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드니 그 재주에 따라 각기 역량을 채웠다. 옛 것을 지켜 배움을 여니 훌륭한 인재가 이르고, 뛰어난 사람이 많아 이백사십여명에 이르렀다. 여러 제자들이 사문의 덕을 갚고자 계를 맺어 문서를 작성하고 출자하여 후일에 원고를 간행하는 비용으로 삼았으나, 시간이 삼 십 여년이나 오래 경과하였다. 목금에는 서구의 풍조가 만연하고 문교가 변하여 쓸모없이 되었고, 육경 인문이 멸절되어 강상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니, 울타리 가에 물건을 버리는 것 같다. 이 혼란하고 불안한 날에 여러 군자들이 여러 해 동안 수고로이 애써 이 같은 큰일을 담당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다.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는 것이 이것보다 큰 것이 무엇이겠는가? 남긴 저작을 어루만지니 절로 지난날의 감회를 금할 수가 없으니, 평소에 존모하던 처지에 또한 흠앙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에 현손 재로군이 외진 시골에서 알아주지 않는 나에게 책을 보내오니 가히 근실했던 선대의 세의를 알만한데 나에게 계안의 서를 요구하였다. 혼미하고 정신이 어둡고 문채가 없어 불가하다고 사양하다가 간략히 전후의 사실을 적기에 앞서 여러 현인들의 성의를 칭송하고 현손의 청에 부응하였고 계안의 서는 위와 같다.
무인년 중춘 상한에 진성 이원영 짓다.
2) 경재유계첩 연대:1963년(癸卯正月 日) 형식:標題․序․座目 표제:「經齋儒稧」 서 :李源榮 좌목:李羲頊 이하 230人 형태:成冊本(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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