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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오늘은 가나안 여인의 놀랍고도 큰 믿음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마가복음 7장 31절부터 37절까지 귀머거리와 벙어리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에 대해서 나오고 있는데요. 이 마가복음은 주님께서 하늘에 속한 생명의 본질인 참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어떤 교리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주님께서 3년 반 동안의 수고하시고
봉사하시고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이렇게 일하시면서 움직이시는 그 행적을 따라 이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과정의 한 단계 한 단계가 우리를 치료해 나가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점진적인 단계를 보여주고자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을 믿게 되어 구원의 길에 들어섬으로 말미암아 교회 생활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구원의 폭넓은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가복음 6장에 53절부터 56절까지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생명의 갈망을 갖고 자신을 접촉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일반적인 치료를 해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할 때 주님을 처음 믿게 되는
순간부터 주님을 쫓는 일이 생기는데 그 주님을 쫓을 때 외형적으로 크게 일반적인 주님으로부터 느껴지는 큰 은혜 처음에
만지고 그분을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치유함을 받게 되는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치료함이 일반적인 상태에서 주님을 처음 믿을 때 그러한 이런 영적인 체험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특별히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을 통해서 나오는 그 소극적이고도 부정적인 그러한 것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상태인 마음속에 있음을 들추어내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최고의 유능한 수술을 집도하시는 분으로서 마음 상태를 열어 드러내시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끄집어내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6장 53절부터 56절까지 게네사렛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장면 후에 마가복음 7장 21절, 22절에 마음속에
는 모든 더러운 것들이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신 다음에 개복 수술을 통해서 깨끗하게 제거해 주시고 그리고 나서 마가복음 7장 26절 27, 28절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떡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애완용 개들과 떡부스러기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떡이요 생명 공급이신 주님께서 떡을 주어서 허기진 그들에게 배부르게 하는 사건을 주신 다음에 그 뒤에 나오는 단계의 일들이 마가복음 7장 31절부터 37절까지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점진적인 어떤 순서를 따라 어떤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3년 반 동안의 행적을 따라 일하시고 수고하시고
봉사하시고 움직이시는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안배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런 일들이 우연치 않게 그냥 뒤죽박죽으로
벌어지고 마치 성경 말씀을 짜집기 하듯이 성경 기자들이 그것을 이렇게 앞뒤로 맞춘 것이 아니라 이것은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점진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체험에 있어서 이런 과정의 단계가 반드시 순서를 따라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네사렛 지방에서의 보편적인 주님께 다가온 모든 자들을 생명의 갈망을 갖고 만지고 접촉하는 자들도 다 고쳐주시고, 그리고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적 상태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나 더러운 것들이 있음을 알게 하신 후에 그것을 복음으로 깨끗하게 처리해 주신 다음에 생명의 떡이신 주님 자신을 바로 이 가나안 여인에게 생명 음식으로 먹여주시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떡이시고 생명의 공급 요소이신 예수님 자신을 그 가나안 여인 안에 넣어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날 때 병자들을 만나거나 가나안 여인을 만나거나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거나
귀머거리나 문둥병자를 만나거나 모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사실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공급 요소이신 자신을
바로 그들 존재 안으로 부어 넣어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떡을 통해서 생명의 음식을 통해서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명 공급이신 주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생명의 음식인 생명 공급 요소를 먹게 해준 다음에 그 여인이 배가 부름으로 인하여 누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개개인에게 부족하고 단점으로 보여지는 그러한 일들을 치유해 줌으로 말미암아 마가복음 7장 31절부터 37절까지의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지금까지는 하나의 보편적인 일반적인 치료가 다 있었습니다.
게네사렛에서 그냥 병자가 오면 고쳐주시고 그리고 예를 들자면 마가복음 1장 29절부터 31절까지 베드로의 장모가 뜨거운
열병에 의하여 앓아누웠을 때 주님을 섬길 수가 없었죠. 주님을 위해서 수종들거나 봉사하거나 헌신할 마음은 있었어도 실제로 그 열병이라는 것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거동하지 못하는 그를 온전히 고쳐주신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온몸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거동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열병 그 자체를 온전히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치료가 된 것이며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이고 문둥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거역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격리된 그가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도 갖지 못한 채 멀리 외떨어져서 홀로
고립되어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 때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온전한 한 사람으로
치유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7장 31절부터 37절까지 귀먹고 말 못하는 이 사람은 아니 한 사람인데 열병 하나도 아니고 중풍병자 처럼 온몸이
마비된 것도 아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둥병에 걸린 것이 아닌 귀도 먹고 말도 더듬는자라면 거의 뭐 벙어리 수준이죠.
예 귀먹고 말을 더듬는 그러한 벙어리 된 그 사람을 7장 32절에서 32절 그분께 데려왔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의
그 기관이 한 가지가 전체로 퍼져 있는 어떤 그런 특별한 병들이 아니라 하나의 병과 또 하나의 병을 가지고 있는 그런 두 개
이상의 치유받고 고침받아야 되는 일들을 가진 특별한 어떤 질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일반적인 치료를 받고 마음의 상태를 주님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더럽고 악한 생각들 추한 것들, 부정한 것들, 땅에 속한 것들, 옛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있음을
알려주시고 깨끗게 하여 주시는 주님의 사역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러한 사역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먹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 자신이 그 사람 존재 안에 들어가서 생명과 본질로 이렇게 성장시켜
주시고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주님 자신으로 대치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대치물이 되어 주시고
대치자가 되어 주셔서 그 사람 안에 주님 자신이 살아계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니라고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 공급이신 이 주님을 통하여 생명의 떡을 먹게 됨으로 말미암아 만족함을 가지고 있는 그 자들에게 뭔가 치유해야
될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예를 들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 귀가 먹어서 주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긴
들려지는데 그 들려지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영적으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말 못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찬양을 할 수도 없고 입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도 고백도 할 수 없는 그런 자들에게
특별한 개인적인 어떤 만남과 개인적인 접촉함을 통하여 그들을 특별한 치료 방법을 통하여 특별하게 치료를 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보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일반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반적인 주님의 그 따뜻한 사랑과 은혜와 놀라운 일들을 체험한
후에는 우리들의 마음 상태가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찼음을 말씀으로 보여주신 다음에 그것들을 깨끗하게 제거해 주신 후에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고 생명 공급 요소가 되시는 양육해 주시는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어 만족되어져서 누리게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끝났느냐 끝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과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취하였다라고 해서 우리가 이 모든 상황이 종결되어져서 이제는 온전하고도 완전한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구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개체적인 하나하나의 부분들 말을 못할 수도 있고 귀가 먹을 수도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더욱더 다가서는 어떤 그러한 일들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그 듣지 못하는 귀와 말하지 못하는 혀와 그리고 나서 마가복음 8장 22절부터 26절까지 보면은
소경의 눈을 주님께서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심으로 말미암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8:22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시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8: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렇게 듣지 못하는 귀, 말하지 못하는 혀, 보지 못하는 눈, 이런 것들이 개별적으로 주님께서 특별한 치료 방법을 통하여
그들을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생명 안에서 생명의 성장과 변화를 가져 온전한 주님께서 원하는 왕국 백성들,
천국의 출현이 있을 때 천국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그런 사역하는 모든 일들,
봉사하는 일들, 수고하는 일들 사람을 만나는 모든 일들이 주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바로 먹여주시기 위하여 그들 존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역의 봉사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 32절에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그랬죠.
귀가 먹고 말을 더듬거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는 뭐라고 얘기하지만서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이 귀가 먹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는 그러한 존재가 귀먹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더듬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영광을 돌리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찬양을 드리지 못한다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35장 6절 말씀이죠.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래서 자신을 위해 그분의 음성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이사야서 56장 10절 그리고 말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고 찬양드릴 수도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이 귀먹은 자요
벙어리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귀 먹은 것이 먼저 순서적으로 나오는 것은 귀가 먹음으로 말미암아 말을 더듬고 말을 못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벙어리가 된 것은 1차적으로 귀가 먼저 먹게 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는 일로 말미암아 이게 입으로도
말을 더듬고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불능의 상태로 이렇게 처하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치료하는 이 구원의 과정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그 귀를 먼저 다뤄주시고,
그리고 말을 더듬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혀에 직접적인 접촉함과 손대심을 통하여 바로 그 혀에 침을 바름으로 말미암아
귀 먹은 자를 고쳐주시고 벙어리 된 자를 말하게 하여서 완전히 고쳐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귀머거리와 이 벙어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그분을 위해 찬양도 드릴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이렇게 주님 앞에 서 있지만 아무 어떤 그런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생명공급이신
주님을 먼저 취하게 하여서 누리게 한 다음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각자에게 고장이 나서 불능의 상태에 빠진 그런 특별한
기관들을 주님께서 아주 특별히 개인적으로 직접 접촉하고 마주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치료해 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3절과 34절에 보면 따로 데리고 왔어요.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7: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전에 게네사렛 사람들의 병자들을 고치시거나 중품병자를 고치시거나, 시몬 베드로의 열병에 걸린 장모를 고칠 때는
모든 사람이 있는 가운데서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그들을 치료해 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께서 특별히 무리에게서 떼어내어서 단둘이 예수님께서 마치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때 학원에서
가르칠때도 있지만 1 대 1로 개인과외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그 사람만이 이렇게 예수님 앞에 마주 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손가락 전체를 그의 두 귀에 넣었다라고 써져 있습니다.
그 두 귀에 자신의 그 손가락들을 손가락이니까 이게 엄지가 됐든 중지가 됐든 그 하나가 아니라 손가락 들이라고
분명히 써 있습니다. 손가락들을 그 두 귀에 넣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라고 말씀함으로
말미암아 그 귀에 넣었다라는 이 말과 함께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열려라라는 뜻이죠 에바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귀가 즉시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분명하게 말을
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귀가 먹어서 듣지 못하는 그의 귀에 자신의 손가락들을 그 귀에 넣었다라는 얘기는 두
손가락들을 찔렀다라는 얘기입니다. 한 손가락을 깊숙하게 귀지를 파는 것처럼 쑥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이신 그리스도께서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하여 손가락들을 찔러 뚫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떤 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그 생명의 본질이신 생명 그 자체이신 그분이 마음을 다해 성품을 다해 뜻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생명의 본질로서 찌름으로 말미암아 그 손가락을 귀먹은 자의 귓속으로 찔러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귀가
막혀져서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기능이 고장이 난 그 기관을 완전히 찌르심으로 말미암아 뚫어버려서
그것을 열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귀도 열리고 혀도 열리는 이것이 바로 에바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정성을 다해 생명을 다해 자신의 그 손가락들을 귀먹은 자의 귓속으로 찔러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듣지 못하는 막혀져 있던 고장난 기관을 뚫어버려서 완전히 열려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바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열려라 이런 뜻입니다. 이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또 친히 33절에 보면 두 귀에 손가락들을 넣고 그리고 말을 더듬는 벙어리의 혀에 손에다
침을 뱉어서 그 혀에 손을 대셨다라고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이게 좀 헷갈릴 수 있는데 주님께서 침을 뱉어서
그냥 땅바닥에 뱉었다는 것이 아니라 침을 뱉어서 그 사람의 침을 자신의 손에 댔다라는 얘기입니다.
7: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자신의 손에 생명의 본질인 그분께서 바로 혀의 침을 통해서 그를 고쳐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로암에 있었던 어떤 소경 된 자에게는 진흙을 침에다 이겨가지고 소경의 눈에 갖다 댄 장면도 우리가 볼 수가 있죠.
여기서는 침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왜 침을 말을 더듬는 병자의 혀에 대셨습니까?
여러분들 생각에는 만약에 공개적으로 이런 일을 하였다면 트집 잡고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더러운 침을 어디 사람의 혀에 갖다 대는냐고 들고 일어났을 것이며 큰 소란이 일어날 수 있었겠죠.
주님께서 자신의 침을 친히 말 더듬는 그 사람의 혀에 대신 것은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그 생명의 본질의 말씀으로
벙어리 된 자의 말하는 기관에 기름을 바르는 것을 상징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토바이를 오래 타거나 자동차를 오래 타게 되면 기름이 묻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엔진 소리가 굉장히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 말 더듬는 혀에 기름칠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온전히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말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 곧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 나오는 그 말씀은 생명의 본질 그 자체인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인 그 말씀을 벙어리 된 자의 그 혀에 침을 묻힘으로 말미암아 기름을 발랐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그 혀에 묻혔다 라는 얘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도 없는 그 더러운 악한 생각들이 있음을 알고
주님의 그 복음으로 인하여 정말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의 영적인 상태까지도 깨끗하게 제거가 되어서 가나안 여인처럼 생명의
공급이신 생명의 떡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으로 이렇게 귀가 막혀 있고 혀가 둔하고 그리고 눈이 감겨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위하여 말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는 이러한 기가 막힌 운명의 존재자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자들은 다름 아닌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요, 그 성도들 하나하나는 개체적인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일반적으로 치료해 주시고 그리고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시고 생명 공급이신 생명의 떡 부스러기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또 만족함을 주신
다음에는 귀와 혀와 눈과 같은 그런 개별적인 어떤 특별한 기관들이 고장나고 상실이 됐기 때문에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특별한 치료 방법으로 이렇게 치료해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귀먹은 자 말을 더듬음으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된 자들 마가복음 8장 21절부터
26절까지 뱃세다에 있는 그런 눈이 먼 자 이 눈이 감겨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보고 싶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러한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되고 소경된 사람은 모두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필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귀먹고 벙어리 된 사람을 만났을 때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노예로 오신 구주이시며 성육신 되신
주님 자신을 그 사람 안에 생명의 떡으로 넣어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치료해 주시고 치유해 주신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벳세다에서 눈먼 소경을 만난 것도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 그 사람 존재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 존재 안에 주님께서
생명으로 바로 그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통해서 완전히 바로 대치물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자신께서 대치자가 되고자 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사역을 함에 있어서 사역하는 모든 것들은 주님 자신이신 생명을
그 사람들 안으로 집어넣어주시기 위한 행동이셨고 봉사이셨고 수고하셨고 움직이심 이셨다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도 생명을 그들에게 던져준 것입니다.
그 복음 전파를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칠 때도 생명의 씨를 뿌려줬고 사람을 만나서 치료하실 때도 생명의 씨를 뿌려서
그 사람 존재 안으로 집어넣어줬고 귀신을 쫓아낼 때도 하여튼 뭐 여러 유형의 방면 속에서 나온 모든 것들이 주님 자신을
그 사람 안에 생명의 씨 생명의 떡으로 집어 넣어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떡에 대한 얘기를 이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이 떡에 대한 얘기와 부스러기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보면은 귀 먹은 자가 먼저 나오고 말 못하는 벙어리가 그 뒤에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 들음에서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더듬게 된 것은 듣지 못하는 일이 고장이 남으로 말미암아 그 귀가 막히는 일 때문에 말을 배우지 못해서
더듬게 되어서 벙어리로 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없는 자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학교에 전혀 다닌 적이 없는 그 두 살짜리 세살짜리 네살짜리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유치원에 간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엄마라는 얘기를 하고 아빠라는 얘기를 하고 밥 줘라고 얘기하고 엄마 나 아파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성장할 때부터 말하는 것은 들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아이들이 들음으로써 말하기를 배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음이 말함이 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머거리는 저절로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게 되면 혀가 굳게 되는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잘 듣기를 주의하고
집중하고 관심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잘 들으면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그 조그만 1살, 2살, 3살짜리 4살짜리 아이들이 엄마 밥 줘 그렇게 하는 것은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어지는 말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기억하고 입으로 혀를 통해서 말을 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 말씀하심을 아주 집중하여 잘 듣기를 잘 경청하기를 아주 주의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잘 집중하여 주의함으로 말미암아 경청할 때 우리 존재 안으로 생명의
말씀이 스며들어서 그 말씀의 본질인 생명의 본질이 우리 혀에 기름으로 묻혀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님의 말씀을
잘 청종하는 자들은 그 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자로 그렇게 바뀌어진 삶을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은 그것은 합당하게 주님의 말씀을 잘 주의하고 집중하여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합당하게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잘 듣는다면 이 들음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 혀에 잘 묻혀져서
저절로 말하게 된다라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침은 뭡니까? 그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생명의 말씀, 그 생명의 말씀 가운데서도 말씀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생명의 빛으로 비춰주는 그 말씀의 본질이 주님의 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에서 주님의 말씀을 목회자를 통해서 경청한다거나 또 말씀을 혼자 개인적으로
집에서 정말 되새김을 통하여 자기 것으로 생명의 양식을 취하기 위해서 묵상을 할 때 잘 경청하게 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혀에 묻혀짐으로 말미암아 기름이 칠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있는 자들로
될 수가 있다라는 것을 성경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문제는 우리가 먼저 말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아요 아~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말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여러분의 혀가 문제가 아니라 듣는 자세가 잘못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듣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말을 할 수가 없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듣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고 선제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경청하여 주의하고 집중하여 잘 듣게 되면 그 생명의 본질이 침으로 우리 혀에 묻혀짐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귀먹고 이 말을 더듬는 벙어리가 된 사람이 듣게 되는 것은 이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자녀들의 떡이신
생명 공급 요소의 실체가 되시는 주님에 관한 기록 뒤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24절부터 30절까지가 가나안 여인에 대한 이 생명의 떡에 대한 얘기가 있다면 그다음에 31절부터 37절까지는
귀먹은 자 벙어리 된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얘기가 나오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신앙생활의 어떤 과정의 단계들을
통하여 먼저 우리를 일반적으로 치료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신 다음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청소를 시켜주신 다음에 자녀들의 떡이신 생명의 떡을 취하게 한 다음에 그리고 주님의 생명의 떡을 가나안
여인이 먹고 누린 후에 그여인의 딸도 귀신이 쫓겨 나갔죠. 그다음에 개체적인 고장난 부분에 온전하고도 완전한 특별한
기관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이러한 치료의 과정이 있다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먼저 먹이셔서 우리가 허기진 배를 채우고 누린 다음에 더욱더 발전된 단계인 그 특별한 기관의 고장난
것을 주님께서 고쳐주시겠다라는 얘기입니다. 이 치료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복음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행하시고 봉사하시고 수고하시고 일하시고 움직이는 단계에 따라서 이 치료가 점진적인 단계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더
세부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넓은 길로 들어가게 했다가 마치 좁은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 완전하게 그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는
완전히 진짜만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마치 밀가루가 반죽되어져서 꽈배기 기계 틀에 넣어서 누르면 그것이 나올때 꽈베기로 꼬아져서 나오는 그런 형틀처럼 바로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이러한 치료의 진보적이고도
하나하나의 한 단계 한 단계의 이러한 과정인 이 마가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구원에 대한 치료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반적인 치료가 있었고 보편적인 치료죠.
그다음에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셔서 청소를 해 주신 다음에 가나안 여인 이방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는 그 여인에게
생명 공급이시며 생명 공급의 요소이신 생명의 떡 자신을 먹게 한 다음에 특별한 기관이 고장난 그 귀와 그리고 입과
그리고 눈을 고쳐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전체적인 병에 걸린 사람도 치유받고 개별적으로 고장난 한 부분 부분도 완전히 치유 받고 고침 받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고도 온전한 구원의 과정 안에 들어가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와 같이 주님께서 사역을 행하심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생명의 떡으로 나타난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취하게 해서 주님 자신을 먹게 할 수 있도록 행동을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신 노예로오신
구주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만났을 때도 주님 자신을 먹이신 것이고, 시몬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고 만져주심을 통해서 치유해
주신 것도 주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본질로 바로 이렇게 접촉하여 줘서 먹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게네사렛 사람들에게도 찾아온 자들에게 병을 고쳐주신것도 마찬가지 이고요 그 뒤에 가나안 여인에게도 이 생명의
떡을 주어서 먹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딸의 귀신을 고쳐주시고, 또 여기에 귀 먹고 말 못한 사람도 두 귀를 손가락을 찔러 넣어서
막혀 있고 아주 굳은 이 여리고성의 문처럼 막혀져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들을 수 없는 그를 주님께서
정성과 힘과 마음과 성품과 생명과 온몸을 다해 손가락들을 집어넣어서 뚫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열려라 라는 뜻의 에바다 라고 하시고 그리고 그것이 연관되어져서 귀머거리가 선제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잘 합당하게 경청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말을 더듬게 됐기 때문에 그분이 생명의 본질을 또한 침을 뱉어서
자신의 생명 그 자체를 그 사람의 혀에 묻치시고 막혀져 있는 귀를 손가락을 밀어 찔러넣으심으로 막혀 있는 청각기관을
뚫어버리시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말을 더듬는 그의 혀에 침을 대신 무침으로 말미암아 침으로 상징되어진 그 주님의
입에서 친히 나오는 생명의 말씀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혀에 기름칠을 함으로 말미암아 부드럽게 하시고 그것을
원활하게 하여줘서 바로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있는 에바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특별한
치료 방법이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를 하나님의 안배와 주권 속에서 만나게 했을 때
그런 기회를 선용하여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점진적이고도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서 이러한 단계들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히 치유함을 받게 됨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라는 그 한 인격이 우리라는 존재 안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 움직이는 삶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방식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께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병자를 치료할 때는 공개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말씀으로 하실 수도 있으셨고요.
또는 베드로 시몬의 장모 같은 경우에는 만지심을 통해서 할 수도 있었고요. 가나안 여인에게는 말씀으로 자신의 인격을
취하게 하는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점점 마지막 천국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한 그러한 한 단계 한 단계 높이 올라가는
그 단계의 삶을 갖기 위해서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우리를 만져주시고 접촉해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 33절에 예수님께서 그들 무리에서 떼어서 따로 데리고 나가서 자신의 손가락들을 그의 두귀에 대고
침을 뱉고 그의 손을 대셨다라는 이러한 특별한 치료 방법과 특별한 만남과 특별한 접촉함이 그 사람에게 있었다라는 것이
영적인 체험의 단계가 지날수록 공개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에서 조금 더 중한 가운데에서 아주 개별적인 상태로 점점
들어가는 영적인 기쁨에 대해서 주님께서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12년 동안 혈루병에 걸린 피가 유출되는 그 생명의 본질이 유실되는 그러한 죽음의 질병을 가지고 있는
그런 여인에게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참 신기하죠. 그리고 열병에 걸린 시몬 베드로의 장모는 주님께서 그 몸에 손을 대심으로 말미암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짐을 통하여 죽음의 질병이 치료된 자들도 있고 가나안 여인처럼 말씀으로 치료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6:53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마 14:34-36〕〕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6: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6: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그러한 여러 유형의 고침을 받은 장면을 우리가 볼수가 있었는데
이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은 따로 우리에게서 특별히 분별시켜주시고 구분시켜주신 다음에 그 주님의 손가락들을 그의 귀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다한 온몸과 온 힘과 생명과 뜻을 다해 손가락들을 찔러 넣어서 그 막혀있던 귀를 뚫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손에 묻혀진 침을 통하여 혀를 만지심으로 말미암아 발성 기관인 혀를 치료받게 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구원의 단계 과정에서는 따로 데리고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안배 속에서
특별한 주님의 주권 아래 이러한 일들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이고도 공개적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우리들을 점점점점 개별적이고도 아주 개인적으로 우리를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친히 주님 자신의 그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 넣어주시기 위하여 마치 청각기관인 막혀진 귀를 뚫고 또 발성기관인
고장 난 그 혀에 침을 뱉어서 그 혀에 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을 친히 우리 안에 집어넣어주시고 계신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우리가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를 통해서 완전히 달라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야만 그분이 대치물이 되시고 대치자가 되셔야만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 자신이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
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닌 주님께서 살아계셔야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주님 자신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귀먹은자의 치료는 주님께서 자신의 손가락들을 그 사람의 청각기관인 그 귀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 특별히
요구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말씀으로도 그냥 고쳐 주셔도 됩니다.
그냥 에바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왜 손가락들을 그 귀에 쩔러 넣고 마치 그냥 막혀 있는 것을 막 뚫어버리는 것처럼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온힘을 다해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성품을 다해 목숨을 다해 자신의 생명을
그 안으로 집어넣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귀가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혀가 치료받기 위해서는 이 발성 기관인 혀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생명의 말씀
생명의 본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생명의 본질이 그냥 너 입아 좀 열려라 에바다 해서 벙어리를 말하게 할 수도 있어요.
근데 왜 혀에 특별히 침을 묻혔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 생명의 본질인 그 침을 바름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의 본질이 그 사람의 고장난 발성기관인
한 부분을 치유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의 본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 고장난 청각 기관이나 고장난 발성 기관이나 고장난 시각 기관이 전혀 고쳐질
수 없습니다. 귀먹은 자가 고쳐지기 위해서는 이 말 못하는 자가 고쳐져서 입을 열기 위해서는 눈 먼 자가 눈을 뜨기 위해서는
그분의 입으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인 생명의 본질이 우리들의 그 고장난 부분에 와서 아담으로 인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고장난 부분들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문둥병자처럼 다 고장이 났는데 주님께서 하나하나 고쳐주십니다.
그 문둥병자를 고치니까 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지 않나요? 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또 고치니까 그전에 중풍병자
온몸이 마비된 자가 있지 않나요? 그 온몸이 마비된 중병자를 고치니까 또 열병에 걸린 자도 있네요.
열병에 걸린 그걸 고치니까 또 한쪽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네요. 또 고쳐주니까 또 이게 손은 고쳤는데 귀가 먹은 자가 있네요. 또 귀 먹은 자를 고쳐주니까 말 못하는 자가 있네요. 말 못하는 자를 고치니까 또 눈이 먼 자가 있네요. 하나하나의 부분에 개체적인 특별기관이 고장 남으로 말미암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들을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그 듣는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요. 말하는 기관은 하나님을 위해서 말하지도 못해요. 보는 기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어요. 그런 기관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다루어서 수술하는 유능한 집도의 의사처럼 기름을 바르는 것을 통하여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생명의 말씀 곧 생명의 본질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묻혀짐으로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치료가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를 접촉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되는 일이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생명의 떡이신 바로 생명의 씨 자체로 오시고 그 씨를 뿌리는 자로 오신 그분을
소유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귀가 먹고 말을 못하고 눈이 감길 뿐만 아니라 이런 바로 불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구자 일
수밖에 없는 예 다른 모든 신체적인 기능이 정상적으로 활발히 작동한다 하여도 시력이 안 좋으면 시력의 장애자가 되는 것이고청각 기관이 고장나면 청각 장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에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선포하시는
인성 안에 계신 바로 성육신 되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그 생명의 말씀으로 생명의 본질로 우리 고장 난 기관에 묻혀질 때
접촉할 때 그분이 생명의 본질로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곧 기름 발라질 때 치료가 된다라는 것입니다.할렐루야~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그 말씀 자체이시며 생명의 본질이신 주님의 침이 필요로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그 생명의 본질인 주님의 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이렇게 침을 뱉었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침은 바로 생명의 말씀의 본질인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본질이
주님의 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침이 묻혀질 때 막혀졌던 귀가 뚫리고 굳었던 그 혀가 제 기능을 회복하고 고장난
시각기관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영이신 그분께서 생명의 떡이 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 침으로 나타난 기름 바름을 통하여 우리의 고장 난
모든 부분을 치유하고 접촉하고 만짐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우리를 만지고 접촉하는 일을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만지기 때문에 우리의 혀가 근본적으로 이 생명의 본질인 주님의 말씀의 본질을 우리 또한 주님께서 만지기 전에 만질 필요의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 우리의 귀가 고장났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의 본질을 우리가 먼저 귀에 묻혀야 됩니다. 그러니까 집중해서 경청해야 된다는 얘기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집중해서 경청할 때 들음을 통하여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고장이 나면 말하는 것도 저절로 연쇄적으로 고장이 나게 돼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의 본질로 우리의 귀에 기름이 묻혀지고 우리의 발성기관인 혀에 기름이 쳐지는
이 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침 그 자체는 뭡니까? 여러분 돈을 셀 때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세어 본적 있으시죠.
여러분 그런 거 생각해 보세요. 손가락이 건조해서 비닐 봉투나 이런 접혀진것을 벌릴려고 할때 잘 펴지지가 않죠.
그럴때 우리는 침을 바릅니다. 바로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그런것 처럼 그 침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생명의 본질인
그 침은 우리들의 고장난 기관인 귀나 혀나 눈에 그 기름칠을 통하여 어떤 관유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장 난 본질을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의 본질로 인하여 다 소생시켜 주시고 기능을 회복하여 주시고 고쳐주시고 치유해 주신다
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그 말씀의 본질로 대표적으로 우리 혀에 기름 묻혀짐이 있었죠.
침을 통해서 기름 바름이 있었죠. 침이 발라질 때 우리 혀에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의 본질인 침인 관유가
우리 혀에 묻혀지게 되면 어눌했던 그 혀가 주님을 향해 유창하게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주님을 합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바로 4천 명을 먹이시는 그 전에는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해서 5천 명을 먹인 사건이 있었는데
8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12 제자를 통해서 이 4천 명을 먹이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날짜가 사흘이나 지났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하루 이틀 사흘 3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3일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생명의 떡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부활을 통하여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로 인하여 생명의 떡이 여러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진 영의 몸이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를 통해서 바로 생명 주시는 영이 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떡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흘이라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분이 관유로서 생명의 말씀의 본질로서 바로 침처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의 본질이 이후부터는 부활 안에서 바로 혀에 묻혀지는 관유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의 본질인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이 되신 생명 주신 영을 통하여 이제 곳곳에 고장 난
그 기관에 혀면 혀에 기름을 바를 수 있도록 바로 영의 몸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잘못된 기관들이 온전한 상태로
소생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더불어 이제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통하여 이제는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치료를 받은 자들이 주님으로 인하여 사람의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상태가 더러운 것임을 악한 생각들만 있다
라는 것을 들춰내신 다음에 가나안 여인에게 생명의 떡이신 떡 부스러기를 먹고 취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배부르게
먹게 한 다음에 치료를 받아서 듣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천 명을 먹이신 사례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는 개인적으로 생명의 떡을 취하게 하셨지만 이제 공개적으로 4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4 곱하기 천이라는 피조물의 숫자를 상징하고 있는 4천 명을 먹이심을 통하여 누가 4천 명에게 음식을 제공하죠?
마가복음:8:1 〔사천 명을 먹이시다〔마 15:32-39〕〕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8: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8: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①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헬, 기대어 누워 (유대인의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
8: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8: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6절에서 떡 7개를 가지시고 축사하신 후에 떼시어서 누구에게 줬어요? 제자들에게 나눠준 이 떡 7개가
여러분 4천 명이라는 거대한 피조물을 나타내고 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어줌으로 말미암아 치료를 받고 듣지 못했던 자가
듣게 되고 말하지 못한 자가 말하게 된 후에는 12 제자들처럼 이제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먹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합당하게 경청함으로 말미암아 말을 하게 될 수가 있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본질의 말씀인 침이
묻혀짐으로 말미암아 관유가 돼서 우리 혀에 기름이 묻혀짐으로 말미암아 혀가 유창하게 말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서도 말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양식을 먹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 것이
4천 명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4천 명에 대한 사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귀머거리가 치료를 받았죠.
벙어리가 된 사람이 특별한 치료 방법으로 치료받았죠.
그전에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귀머거리되고 벙어리 된 자가 이제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본질인
그 기름이 혀에 묻혀짐으로 말미암아 듣게 되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을 이제 먹일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다. 그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남에 있어서 이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저 사람들 안으로 공급해 줄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과정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전히 청각 기관이 치료받고 발성기관이 치료받아서 온전히 고침 받아야 되는데 아직도 귀머거리이고 아직도
벙어리인 것은 주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경청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입까지 더듬거리게 되었고 이 귀머거리가 된 것은
개인적으로 이 가나안 여인처럼 떡 부스러기이신 생명의 본질이신 그분을 개인적인 어떤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가져야 되는데
그런 단계의 과정들을 거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허기지고 기진해 생명의 어떤 핍절함과 배고픔과 갈급함과 갈증과 그런
공허함으로 인하여 점점점 기능이 손실되어지고 상실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바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합당하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합당한 방법으로 경청하지 않고 주의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경청하지 않게 되면 혀까지 말라붙게 됨으로 말미암아 말을 더듬거리게 되어서 결국은 말을 못하게 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할 수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말을 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없게 됨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배고파 하실 때 하나님이 배고프심이 무엇인지 알고
이렇게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까지도 온전하게 먹일 수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러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면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바로 이 귀머거리와 이 벙어리가 된 자들을 고치기 위해서 무리들에게서 따로 선별하여서
특별한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치료를 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특별한 주님과의 영적인 체험이 있어서
그런 영적인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에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생명의 떡인 자신을
그 사람에게 먹이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는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홀로 그 여인이 취할 수 있도록 그 여인이 떡 부스러기를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홀로 먹이는 일을 하였는데 이와 같이 귀머거리가 치료가 되고 벙어리가 치료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을 때는 이제 제자들이 친히 먹이는 자격을 갖게 됨으로 말미암아 4천 명을
먹이는 일들이 발생된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 한사람만을 먹였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이방 열국 가운데 이방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죠.
결국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단계적으로 이것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방 열국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을
바로 이 제자들처럼 주님을 쫓고 주님을 섬기는 그런 자들에 의하여 바로 생명의 떡이신 주님 자신을 그들에게 먹이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가나안 여인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분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개별적으로 고장난 부분인 청각 기관과
발성 기관이 고장이 난 것을 바로 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 생명의 본질을 통해서 치료됨을 체험한 후에 4천명을
제자들이 먹일 수 있는 자들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렇게 고장난 기관이 온전하게 치료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는 자들이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갈망이고 주님의 소원이고 주님의 경륜 안에 있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합당한 방법으로 주님의 말씀을 주의하고 집중하여서 듣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가 참 생명의 말씀임을 알고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사람들이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생기겠구나 하고 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하고 소홀히 하여 잘 듣질 않아요. 잘 듣는 사람은 10명 중에 1,2명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명 두 명의 사람, 그 사람들이 또 이렇게 발전되어지고 이렇게 공급되어져서 더 많은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이 있을까하여 제가 열심히 끊임없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을 합당한 방법으로 경청하여서 정말 이 말하는 발성 기관인 혀가
생명의 말씀의 본질인 그 관유가 되시고,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그분을 우리가 만짐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도
개인적으로 우리를 만지시고 접촉하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치료해 주시는 일들을 통하여 특별한 고침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막혀 있는 귀와 그리고 둔해진 혀와 보지 못하는 그러한 눈들이 온전히 치료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위해서 말하고 주님을 친히 봄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하나 되어 움직이는 삶을 가질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마가복음 8장 12절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 안에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신 다음에 바로 바리새인들에게 표적을 절대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이렇게 시험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하기 위해서 온 그들에게 바로 주님께서는 표적을 주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심으로 말미암아 위선적으로 외식하는 마치 자신들이 주님께 하늘에서 내려온 표적을 구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까지도 주님을 쫓는 사람처럼 외형적으로 그렇게 보이게 하는 그러한 위선자들에게 영적인 사람인척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마음속으로 아주 영 안에서 탄식하시고 표적 주기를 노골적으로
거절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8장 14절부터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관하여 경고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5장 6절, 5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누룩은 뭡니까?
부패하게 하는 아주 나쁘게 해서 전염시킴으로 말미암아 온통 모든 것을 썩게 만드는 것이 누룩입니다.
누룩은 악한 것들입니다.
누룩은 악한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라고 마태복음 16장 6절에 이 누룩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7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②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혹 이는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음이로다〕
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16: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6:10 떡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너희 제자들은 반드시 주의하라 명심하라라고 얘기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부패케 하는 나쁜 악하게 하는 것들은 뭐죠?그들의 외식인 것입니다.
외식적인 행위 아주 이 가짜가 진짜인것처럼 행하는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 말씀이죠. 12:1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경계하다〔마 10:26-33; 12:32; 10:19-20〕〕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12: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그리고 정치가이며 로마 정부의 대리자인 헤롯의 누룩은 바로 부정과 부패와 공의롭지 못한 불의가
헤롯의 누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외식의 누룩과 그리고 이 헤롯의 정치적인 어떤 공정치 못한 불의와 부패를
조심하라고 경고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삶에서 완전히 떠나 성별된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렇게 얘기하실 때 누룩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잘 이해가 안 되어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다니면 이게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3일이 될지 모르는데 그 비축할 남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왔어야 되는데
우리가 몇 개 안 갖고 와서 혹시 이게 충분한 양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경책하는 말씀인가라고 이렇게
주님의 말씀의 의도를 잘 알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바로 온전히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을 살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역시 정확하게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하나 되어 사는 삶을 가지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해요.
주님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다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마가복음 8장 22절부터 26절까지 베세다에서 바로 이 눈먼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이 이렇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귀가 먹고 말을 더듬는 이 벙어리를 고쳐주신 분께서 이제는 주님을 올바르게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정확한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여서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많은 충분한 어떤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우리를 아마 경책하는가 보다라고 잘못 생각한 그들에게 눈 먼 사람의 치료를 통해서 영적인 암시를 이렇게 계시해 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눈 먼 사람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제자들의 모습이었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의 모습이고 나 자신의 모습이에요. 영적으로 주님을 볼 수 없는 자, 내적인 시각을 잃은 자, 영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그 풀어헤치시는 모든 그러한
것들을 통찰력을 가지고 직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장님된 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눈먼 소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소경의 눈을 8장 23절에 보면은 그분께서 눈 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또 귀가 막히고 말을 더듬고 말을 못하게 하는 그 사람을 무리들 가운데서
따로 떼어서 데리고 나간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눈 먼 사람을 고치시기 위하여 그를 마을 밖으로 따로 분별된 곳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또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또 침 뱉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침이 굉장히 더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 소경된 자들이나 그 전에 귀머거리 벙어리 된 자에게는 이 침이 생명의 특효약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온전치 못한 기관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놀라운 그러한 바로 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본질인 침이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의 손을 잡고 소경이니까 잘 보이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배려하셔서 지금까지 앞을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 가운데 살았던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하게 보시고 동정심을 가지고 자비한 마음으로
정말 사랑스럽고도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아주 친밀하고도 돌보시는 마음으로 인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깊은 신격의
마음으로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 안에 감춰진 그 하나님 마음으로 그를 붙잡으셔서 눈 먼 사람의
손을 붙잡고 바로 그동안에 고통당하고 정말 어려움 가운데 살았던 그를 바로 이 사랑과 자비하심과 돌보심을 통하여
그를 이끌고 나오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소경이 주님께서 침을 묻혀서 그 사람의 눈에 대고 아까 전에는 침을 묻혀서
그 발성 기관인 고장 난 그의 혀에 댔던 것처럼 이제는 그 시각 기관이 고장이 난 그 사람 두 눈에 손에 침을 발라
그 두 눈에 댐으로 말미암아 고쳐지는 것을 무리들이 보고 그가 치료받은 것을 알기를 원치 않으셨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26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그를 그의 집으로 보내며 이르시되 마을에 들어가지도 말고 또 마을의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입니다.
만약에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의 두 눈에 주님께서 친히 침을 뱉어서 그 두 눈을 고쳐주신다면 그 현장을
목격한 수많은 구름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그 소경은 눈코 뜰 새 없이 그들에 의하여 시달림 당하고 주님께서 손을
대주셨을 때 너 느낌이 어땠느냐? 주님께서 손을 대셨을 때 너에게 또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
눈이 떠졌을 때 무엇이 보이느냐 ?눈이 떠진 다음에는 갑작스럽게 보였느냐? 아니면 일부분 만 보였는냐?
이런 여러 가지 아주 부산하고도 분주한 것들을 물어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눈 먼 사람을 따로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그에게 자기 자신의 침을 뱉어 그 손으로 그 소경의 눈에 대시고 몸을 다해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성품을 다해
힘을 다해 온 정성을 다해 그 두 눈을 침을 통해서 생명의 본질인 자신을 그 사람 눈속에 집어넣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할 시간을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그 친교의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 많은 무리가
있었던 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체험한 이 놀라운 사실 개인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만져짐을 통하여 정말 눈이 회복되어져서 씨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 때의 그 짧은 시간이지만 긴 여운을 가진 그것을 아주
길게 치료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 치료함을 통하여 나타난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은 영원하다라는 것을 그가 크게
깨닫고 생각할 수 있도록 주님과 친밀한 은혜의 교제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왔던 곳으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얘기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장님된 우리들은 구주로 오신 그분께서 고쳐줌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과의 개인적이고도
나를 만져주시고 나를 접촉하심을 통하여 내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을 실제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는 것은
그분과의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교제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이런 일로 분주하고 저런 일로 분주하고 그들의 질문과 그들의 물음에 답하다 보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보게 되는 일이 삭감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로 그에게
이렇게 특별 당부를 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특별 기관을 치료하기 위해서 주님은 바로 이 귀가 막히고 말을 더듬는 벙어리 된 사람들의 혀의
그 발성 기관에 침을 발랐던 것처럼 이 장님의 두 눈에도 침을 바르고 그에게 특별히 안수를 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잘 바라보지 못하는 이런 것은 소경된 자가 어둠 가운데 속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6장 18절 말씀이에요.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 눈이 먼 것은 소경이 된 것은 어두움과 관계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과 관계된 것은 보통 사탄의 왕국이 깜깜한 어둠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빛을 상징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오신 왕국의 씨이시고 왕국의 주인이시고 왕국의 왕이신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 바로 빛을
가지고 옴으로 말미암아 보기 위해서는 생명의 큰 빛이 와야만 어둠이 물러가고 눈 멀었던 자가 눈이 뜨게 되는 일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로 오신 구주의 그 침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에요.
그 생명의 말씀 생명의 본질을 아까는 발성기관이 고장난 그 사람의 벙어리 된 자의 혀에 그 침을 묻혀서 기름칠을 했다면
이번에는 이 보지 못하는 이 소경된 자에게 바로 이 침을 묻혀주심을 통하여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 곧 영접하는 자에게
그 시각을 회복할 수 있는 생명의 신성한 생명의 큰 빛이 와야만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신성한 생명의 빛을 전달해 주는
그 말씀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침이라는 것입니다.
침은 관유와 같아요.
신성한 생명의 빛을 전달해 주는 그 말씀만이 그 생명의 빛을 전달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달해 주는 통로는 말씀이에요. 그 말씀이 신성한 생명의 빛을 전달해 주셔서 그 소경의 눈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감겨져 있던 시각의 기관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침을 바르고 난 후에 안수를 더함으로 말미암아 안수를 하는 것이 뭐죠?
만지고 접촉하는 것보다도 더 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만진다라는 의미는 어떠한 의미가 있냐면
여러분 이 사람들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사람이 있었죠? 예 어떤 사람은 주님을 접촉하기 위해서 옷술을 만진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고 있던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자기가 옷을 만지기만 해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그런 예수님의 옷술을 접촉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지는 것보다 더한 것이 접촉하는 것이고 접촉하는 것보다도
더한 것이 안수하는 것인데 안수의 깊은 뜻은 품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만지는 것은 뭔가 외형적이에요.
접촉한다는 것은 뭔가 외형적인 그를 자신의 품 가까이로 다가오게 하는 것입니다.
안수는 자신의 품 안에 이끄는 것이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먼 사람을 도와주시려고 하는 주님께서는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손대심을 통하여서 치료받기를 구했고
그 12해 동안 혈루 생명의 본질이 유실됨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질병을 가지고 있었던 그 여인은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접촉하면 만지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눈 먼 사람에 대한 주님께서 스스로 자의적으로 자발적으로 의도적으로 안수하신 것은 바로 그분께서 치료하는
요소인 생명의 본질 신성한 생명의 빛을 전달해 주는 말씀 그 생명 그 자체를 그 사람 안으로 주입하기 위한 바로 그 소경의
양 눈에 침을 뱉어서 손을 대신 주님과 하나 되어 아까 뭐라고 그랬죠? 마주하는 것보다는 접촉하는 것이 더 가까운 것이고,
이 접촉하는 것은 주님의 품 안으로 이끌어들이기 위한 삶의 단계라면 안수하는 것은 그분의 품으로 완전히 끌어당겨
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그 소경이 하나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하나가 되었다. 동일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주님 자신은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바름으로 말미암아 그 말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장난 발성 기관인 혀에 침을
묻침으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의 생명과 그 소경의 생명과 하나로 동일시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의 이 감겨진 눈과 예수님의 떠진 눈과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에요.
이게 그런 뜻이 있어요. 대치물, 대치자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인류의 모두 필요로 하는 자들의 대치자가 되시고
대치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치물인 것입니다.
소경의 두 눈을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의 본질을 그 치료하는 요소인 그 생명을 친히 그 사람 안에 넣어주시기 위하여
그 병자인 소경과 주님께서 하나가 되어 동일시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 생명과 그 사람에게 죽어 있는 생명과 바꿔치기
하는 대치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눈이 떠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주님이 장애인이 되었다는 얘기죠.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바꿔치기 한 대치물이 되었다라고 성경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수로 그 사람 소경된 눈 안에 자신의 그 치유하는 그 생명의 요소인 그 생명을 친히 전달해 주기위해 이 침투시키기 위하여
친히 주입시키기 위하여 그 소경된 사람과 예수님 자신이 동일시하여 눈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고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눈 먼 사람에게 뭐라고 물어보죠? 예수님께서 23절 말씀을 통해서 이르되 무엇이 보이느냐?
예수님께서 두 눈에 침을 뱉으 시고 여기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셨다고 그랬어요.
여러분 그 자신의 침으로 상징되고 있는 그 생명의 본질을 눈에 뱉으셨다.
그러면 자신의 생명의 본질을 그 안에 침투시켜주기 위해서 뱉었고 그것이 침투되어 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안수하심으로
말미암아 동일시되어 주님과 그 사람이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물어보기를 무엇이 보이느냐 했을 때 그가 처음에 나무
처럼 생긴 채 걷는 것이 좀 보입니다.
이 말씀은 희미하게 뭔가 보이긴 보이는데 온전치 않고 완전치 않은 보이긴 보이는데 뭔가 분명하게 보이지 아니하는
시각에 온전하지 않은 상태의 그것이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말씀을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하지 못해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지? 나무 같은 것들이 왜 보일까? 주님께서 고쳐주시면
한꺼번에 완전하게 고쳐주실 것이지 왜 희미하게 보이게 했을까? 이 말씀은 이 영적인 시각을 회복함에 있어서 점진적인
관계 한꺼번에 확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이 초기 단계 때에는 주님의 그러한 생명의 본질이 그 주님과 동일시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생명이 주입 되면은 뭔가 변화가 생기고 회복이 되고 소생이 되는데 회복과 소생과 이러한 구원의 초기 단계에서는 바로 이 장님이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은 영적인 것들을 보기는 보는데 완전히 회복된 후라 할지라도
주님의 생명이 주입되어서 영적인 것들을 보기는 보지만 마치 영적인 어떤 그런 체험들이 처음에 회복의 초기 단계에서는 환상 같은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상을 봐도 분명하게 내가 무언가 봤는데 말이야 꿈에 환상을 봤는데 이게 실제적인 일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내가 분명히 모르겠어라고 무언가 분명히 보긴 봤는데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희미한 것처럼 알게 되는 그러나 이 사람이 25절에 말씀을 통해서 그분께서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시고 다시 동일시되어 자신의 그 생명을 그 사람 생명 안으로 침투시킴으로 말미암아 그가 쳐다보게 하시니 그가 회복되어 모든 사람을 또렷하게 보았다라고 했어요. 이것이 뭡니까? 예 처음에 이 회복의 초기 단계에는 영적인 희미함이 있어서 분명히 보긴 봤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잘 확실하여 구분하여 볼 수 없는 것처럼 환상 같은 것들을 봤을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소경의 눈에 다시 한 번 안수하심으로 말미암아 회복의 초기 단계에 걸쳐서 또 하나의 어떤 과정의 영적 체험을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밝혀 보게 됐던 것은 그제서야 환상을 통하여 어떤 영적인 것을 희미하게 분명히 봤는데 무슨 뜻인지 잘 확실하게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깨닫지 못하는 그 사람이 어떤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이상을 보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이상을 통해서 바로 경륜 안의 이상을 들여다봄으로 말미암아 경륜의 중심의 주제이시고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무 같은 것들이 보입니다 라는 것은 영적인 환상들을 통해서 분명한 것을 보았지만 불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이라면 나중에는 이상 같은 것을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건 이사야 선지자나 다른 신언자들에게 준 그런 이상을
통하여 분명한 어떤 것을 통해서 막 두려워서 떨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것처럼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요
주재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이 떠지는 것은 뭐예요?
주님을 바로 직시하여 볼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일이 소경의 눈을 치유하는 주님의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분명한 영적인 어떤 일들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으로 사람을 본 것처럼
헷갈리게 하는 것은 회복된 후에 영적인 어떤 환상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보지만 바로 분명하고도 확실한 이상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직시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다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는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고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하심으로 말미암아 노예로 오신 구주께서는 공개적으로
일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렇게 특별히 어떤 고장난 것을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켜주시고 소생 시켜주시고 고쳐주시고 치유하시는 것을 점진된 또 하나의 다음 단계 또 하나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갖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특별히 영적이고도 어떤 교제 안에서 친밀한 시간 가짐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주님과 아주 밀접하고도 두터운 어떤 믿음의 단계 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이렇게 사람들이 있는 그런 곳으로 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자신과 접촉하고 교제를 나누고 친밀한 어떤 주님을 통하여 받은 그 은혜와 그 사랑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한 주님의 이러한 배려 깊은 행동을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오늘 여기까지 여러분들과 교제 나누고 또 이어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