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 22:36~40
제목: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
● 기독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적당히 형식적으로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마22: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목사나 신학자 중에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가 있고, 명목상의 신자들 중에 겨우 술∙담배도 못 끊어서 중독자가 되어도 그 문제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고 엉터리 위로를 해주는, 그런 졸렬한 세태가 기독교계에 왜 있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적당히 형식적으로 믿는 믿음, 성도가 아닌 귀신정도 조차도 믿는 그런 얕은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
성경이 믿음을 강조하니까, 믿음 믿음 구호를 말로만 외치며 적당히 형식적으로 믿는다고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믿음이라는 단어에 만능의 권능을 부여하면 안 됩니다. 위 말씀은 그 자체가 죽은 행함이 없는 믿음, 귀신들도 믿고 떠는 정도 따위의 믿음, 행함이 없는 헛것인 믿음이 있다고 말씀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 참 믿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소유한 자는 계명을 지킵니다. 여러 계명들 중에 가장 큰 계명은 마22:37입니다. 가장 큰 계명(마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마22:38), 둘째로 큰 계명은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입니다. 마22:36~40은 한 문단인데요. 혹시나 크고 첫째 되는 계명(마22:37,38)과 둘째로 큰 계명(마22:39)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큰 계명은 둘째로 큰 계명이 될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나머지로 표현된 계명들보다 크므로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으로 보면 가장 큰 계명은 십계명 중 1~4 계명을 핵심 요약한 것이고, 둘째로 큰 계명은 십계명 중 5~10 계명을 핵심 요약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예언자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요.
새번역) 마22: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
강령은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입니다. 강령과 ‘본 뜻’은 골자(骨子, 말이나 특정한 내용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라고도 합니다.
공동번역) 마22: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
계명과 율법이 나오니까 혹시 구약성경으로 오해하실 수 있는데, 마22:36~40은 신약성경에 나오고 복음과 진리의 화신이며 종결자인 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복음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기도문(마6:9~12)은 십계명의 두 돌 판을 요약한 것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기도문은 여섯 가지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세 가지의 간구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점을 꼭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의 간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이 두 개의 돌 판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첫 번째 돌 판은 경건의 의무들(pietatis officia)을 담고 있고, 두 번째 돌 판은 사랑의 의무들(caritatis officia)을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기도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하고 구하라고 명하심과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유익들을 구하는 것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우선시하는 마음이 되어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상태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데만 마음이 팔려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외시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정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
모든 율법과 예언서 및 신∙구약 성경을 요약하고 압축하면 마22:36~40 한 문단(가장 큰 계명)이고 기도의 형식으로 요약하면 주기도문(마6:9~12)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 신약성경에서 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셔서 벽돌색으로 표시된 마22:36~40 중 마22:37 말씀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마22:39 말씀도 구약성경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레19:18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성경을 보면 ‘00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식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렘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인애, 헤세드)과 정의(공평, 미쉬파트)와 공의(정직, 체다카)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괄호 안은 개역한글판) |
이웃을 사랑하는 원동력은 이웃 그 자체가 사랑스럽기 때문이라서 보다는 ①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명령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② 그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인애, 공평과 정직을 행하시는 하나님)를 깨닫고 하나님을 압니다(NIV, understands and knows). 렘9:24 말씀에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 세 가지, 인애(헤세드)∙공평(미쉬파트)∙정직(체다카)이 나옵니다. 헤세드는 ‘진실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충실함’, ‘자비’ 등으로 번역되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진실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미쉬파트는 의를 행하는 자를 격려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징계하는 ‘공의’, ‘정의’를 의미합니다. ‘체다카’는 ‘하나님의 의(義)’가 성도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 중에 편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이 묵상을 시작하며 기독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고 적당히 형식적으로 믿는 정도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체다카)를 구합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믿는다고 자처하는 우리 믿음의 최우선 순위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성도라고 자부하는 우리 기도의 최우선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이고 그 최우선 목표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가장 큰 것, 최고의 존재를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혹시 더 깊고 다양한 이해를 원하실 분들은 아래래 첨부된 주석과 첨부된 추가 설명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 계명의 본질 (마태복음 22:34-40)
(전략)
Ⅲ.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그에게 이러한 질문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좋은 일이다. 명백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위대한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은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인 것이 가장 큰 계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포괄적인 것이 가장 큰 계명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이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것인가?(37 - 29절) 사법적인 율법은 아니었다. 이 법이 가장 큰 계명이 될 수 없는 것은 이에 해당되는 유대 백성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율법들도 아니었다. 이 법이 가장 큰 계명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이 법들이 오래 되었으며 폐기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어떤 특별한 도덕 규범도 가장 큰 계명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모든 나머지 계명들의 셈과 근원이 되며, 그 밖의 것들은 자연히 이에 뒤따르게 된다.
(1) 모든 율법은 "사랑"이란 한 단어로 완성되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라.
모든 순종은 애정에서 비롯되며, 사랑이 맨 처음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종교적으로 어떤 것도 올바르게 행해질 수 없다. 사랑은 주요한 애정으로써, 나머지 것에 대해 법을 제시하며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요한 요새(fort)로써 하나님을 위해 맨 먼저 굳게 지켜져야 하며 수비되어야만 한다. 사람은 사랑은 위해 준비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법"은 마음에 기록된 법이다. 사랑은 짧으면서도 달콤한 단어이다. 만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정녕 계명의 멍에는 매우 쉬운 것이다. 사랑은 영혼의 휴식이며 만족이다. 만일 우리가 이 좋은 옛길로 걸어간다면 우리는 휴식을 찾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계명들 중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며, 첫 돌비의 모든 계명들의 총합이다. 사랑의 적절한 행동은 만족을 주기 때문에 선(善)은 그것의 적절한 대상이 된다. 무한히, 근원적으로, 영원히 선하신 하나님은 맨 처음으로 사랑을 받으셔야만 하며,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만을 사랑하여야만 한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크고 첫째 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가 그에게 드려야 할 크고 첫째 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고 있다.
[1]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할 것. "네 주 하나님"을 네 자신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라." 제 일 계명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사랑을 그에게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해와 달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은 자들은 그들을 사랑하였다(렘 8:2; 삿 18:24).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창조자, 소유자, 지배자가 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에게 순종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화목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이 곧 "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의 근거이다.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어떤 사람은 이것이 동일한 한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각각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은 의지와 감정과 지식을 말한다
또는 생동적이고 민감하고 지적인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그에게서 먼 자와 같이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성실한 사랑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강한 사랑이어야만 하며, 우리는 그를 최고로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그를 "찬양"해야 하는 것처럼(시 103:1), 또한 그와 같이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최상의 사랑이 되어야만 하며, 우리는 그를 그 어느 것보다 더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의 사랑의 샘은 이와 같이 온전히 흘러가야만 한다.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누인 마음의 정반대인 연합된 마음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에게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온 힘을 그에게 기울여야만 하며 그를 향해 드려져야만 한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순종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순종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순종은 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올 때에만 받으실만한 것이 된다.
(3) "우리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둘째 되는" 가장 큰 계명이다(39절).
"둘째는 그(첫째)와 같으니라." 그것은 첫째 계명과 같이 둘째 돌비에 새긴 모든 계명들을 총괄한 것이다. 둘째가 그와 같은 첫째 것에 근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이는 형제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본보기와 증거가 된다(요일 4:20).
[1]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부패하고 또한 가장 큰 죄의 뿌리가 되는 이기적인 사랑(자기사랑)이 있다. 이러한 사랑은 마땅히 제거되고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연적이고 또한 가장 큰 의무의 규칙이 되는 자기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보존되고 성화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즉 우리 자신의 본성의 고상함에 대한 당연한 배려와 또한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몸의 부요 함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2]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명령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하여야 하며, 누구든지 그릇되게 하거나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져야 하며, 선한 소원을 가져야만 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만 한다. 즉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랑하듯이 참되고 성실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아니, 여러 경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부인해야만 하며, 다른 사람들이 참된 부요함을 이해 우리 자신을 종으로 만들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을 위해 쓰며 쓰여지기를" 즐거워하며 "형제를 위해 우리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
2. 이 계명의 중요성과 위대성은 무엇인가?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즉, 이것이 본래부터 사람의 마음에 기록되고 모세에 의해 재현되고 선지자들의 말과 기록에 의해 지지되고 강요된 실제적인 종교와 연관된 모든 규칙들의 총합이요 본질이다.
모든 것은 사랑의 법에 연결된다. 이것을 제거해 버리면 모든 것은 땅에 떨어져 버리게 되며 만사는 허사가 되고 만다. 의식과 예식은 모든 영적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사랑에 대해 자리를 내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것들보다 더 탁월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으로써 그것을 생기 있게 해주며 율법의 시멘트로써 그것을 연결시켜 준다. 사랑은 다른 모든 의무들의 뿌리요 원천이며,
모든 성경, 즉 율법과 선지자와 역시 복음의 요약이며, 또한 이 사랑은 신앙의 열매로 간주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두 계명에 걸려있는데 그 결과는 모든 것으로 하여금 유효하게 하고 궁극적인 근거가 되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며, "율법의 마침"(딤 1:5)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법은 못이다. 즉 "회중의 스승에 잘 박힌 못"(전 12:11)으로써 이 못에 "율법과 선지자의 영광"(사 22:24)이 걸려 있다. 사랑은 결코 뽑아 낼 수 없는 못이다. 왜냐하면 이 못에 새 예루살렘의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걸려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에다 우리의 마음을 마치 틀 속에 집어넣듯이 집어넣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매달려 있는 위대한 일들로 알고 그 개념이나 명칭에 대해 열심히 논란할 것이 아니라 이를 변호하고 증거 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한 사랑이 그것들에게 희생되어져야만 한다.
모든 것들로 하여금 사랑의 명령하는 힘에 굴복하도록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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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문장: 사랑은 다른 모든 의무들의 뿌리요 원천이며, /// 모든 성경 ///, 즉 율법과 선지자와 역시 복음의 요약이며, 또한 이 사랑은 신앙의 열매로 간주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코뱅 일부만 발췌해도 저런 정도의 양으로 풍성하군요. 대충 보았고, 시간을 두고 읽어 보겠습니다.
<칼빈주석>
마 22:37.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 본문에는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주시라"는 서론적인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음법의 권위를 두 가지로 밑받침하신다. 첫째, 우리가 천지의 창조주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함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의심하거나 모른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무관심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값이 거져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유쾌한 유인(誘因)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 삶의 규범을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임을 알게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서먹서먹하게 여겨서 뒷걸음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가셔서 그가 그들과 맺은 은혜의 언약을 상기시키신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그를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직 그만을 순전하게 섬기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와 모든 우상들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자들이 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려서 비참하게도 우상들을 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쨋든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을 들은 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그들에게 더 이상 무슨 변명할 말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율법을 요약해서 제시하시는데, 이것은 모세의 글에도 나온다(신 6:5). 왜냐하면, 율법은 두 개의 돌판으로 나뉘어 있어서,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두 번째 돌판은 이웃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모세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각각의 계명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지혜롭고 적절하게도 율법 전체를 이런 식으로 요약해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람보다 훨씬 더 사랑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나 마땅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나 존귀를 돌리는 것 대신에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육신의 악하고 죄된 성향들(camis affectus)이 우리를 이 끝이서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지각들(sensus)을 주관하게 될 때까지는 우리의 삶이 올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그를 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경건의 시작이라는 것, 하나님에 대한 사랑 속에는 하나님께 합당한 경외심을 갖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세는 오직 "마음"(corclis)과 "목숨"과 "힘"만을 언급하고, "뜻"(mens)은 언급하지 않는다. 현재의 본문처럼 네 개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 더 자세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변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모세는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사람에게 있는 모든 능력들이 이 일에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가르치고자 할 때에,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데에 먼저 "목숨"과 "마음"을 언급하고, 거기에 "힘"을 덧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히브리어로 '마음"은 종종 "뜻"을 포함하고, 특히 "목숨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 본문과 마태복음에서 "뜻"과 "마음"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더 깊이 연구해 볼 생각이 없고, 다만 ""은 사람의 온갖 생각과 의도들이 흘러나오는 좀 더 고상한 이성의 본거지를 가리킨다는 것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율법의 "강령"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보면, 하나님이 율법의 계명들을 사람들에게 주실 때에 사람이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만을 염두에 두셨다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Carnis infirmitas)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지각을 주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각이 헛된 것(vanitas)에 얼마나 강하게 이끌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선한 뿌리에서
선한 열매들이 맺힐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들에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중심(interior affectum)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코뱅 네임 밸류에 의한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칼빈의 설명은 묵직하고 정확해 보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칼빈주석>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순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첫 번째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은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좇아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참된 형제애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모세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였을 때에,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르본느(Sorbonne)의 궤변론자들은 척도(尺度)가 먼저 있어야 측량을 할 수 있는 법이라는 궤변을 내세워서,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런 후에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모세는 그러한 결함을 고치기 위하여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동일한 반열에 둠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신경을 쓰느라고 이웃을 도외시하는 것을 금하였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사람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모세는 사람들을 찢어 놓는 자기애 (己愛)를 고쳐서, 모든 사람이 서로를 껴안음으로써 하나가 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바울이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골 3:14)라고 말하고, 또 다른 구절에서는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 말한 것은 옳다는 결론을 얻는다. 왜냐하면, 두 번째 돌판의 모든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코뱅 순서 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첫 번째라는 지극히 당연한 서술에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과 소재로 발명해서 드리는 예배에 신물이 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주일 전 뭔가 묵직한 주제의 묵상을 읽고 통찰과 은혜를 공급받는 좋은 포스팅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한 주가 또 오기를 기대합니다.
아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겸손하게 이 말씀을 새겨서 들었더라면 그들이 들어 왔던 말씀과 계명이 '아, 이것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쳤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나님의 아들, 창조주께서 오시니 수 천년에 걸쳐 말씀하셨던 것을 모두 보여주시고 설명해주실 수가 있었네요. 직접 해석까지 해주시니 얼마나 정확한지요.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묵상의 본문인 마 22:36~40이군요.
구약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대충이나 외관상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선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네요.
렘 9:24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자랑하려면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임을 깨달은 것을 자랑하라는 것인데요.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심을 깨달은 자들은 자기들도 이렇게 행하기 위해 힘쓸 수밖에 없는 치열한 삶을 살 것 같습니다.
요즘 교회 안에 나일론 신자들이 많고, 목사들도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의 문제가 바로 제일 큰 계명을 간과하고 무시한 것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네요.
성경 본문의 배경을 짚은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확실하게, 첫째로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서도 자기 몸 처럼 여기며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잘 새겨 듣습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영혼을 치유하는 묵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묵상을 하면서 참고하지는 않았지만 권위자 매튜 헨리 목사님도, 마22장 본문의 2 계명이 "모든 성경"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셔서 안심이 되고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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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헨리 주석>
* 핵심 문장: 사랑은 다른 모든 의무들의 뿌리요 원천이며, /// 모든 성경 ///, 즉 율법과 선지자와 역시 복음의 요약이며, 또한 이 사랑은 신앙의 열매로 간주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코뱅 네. 저도 이 주석을 보고 기뻤습니다.
@장코뱅 네, 명심하고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