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몸짓 예술이다. 동래학춤은 동래지방에서 학의 동작을 표현한 예술이다. 옛날 동래의 풍류객들이 갓 쓰고 도포 입고 대보름이나 명절에 덧배기춤을 추었다. 이 모습이 마치 학이 춤추는 것과 비슷하여 동래학춤이라 부른다. 굿거리장단에 고 유금순 선생의 유장(悠長)한 구음이 합쳐지면서 고아한 예술로 승화했다. 지금은 울산학춤과 통도사 학춤까지 있는데 그 원류는 모두, 동래학춤이다.
지난날 친구들과 금정산을 등산한 후 동래 금강원에 있는 동래 민속예술원 옆길로 하산했다. 마침 그날 동래 민속예술전수관 마당에서 동래학춤을 공연하고 있었다. 흥겹고 유연한 무수(手舞)들의 춤사위가 학들이 모여들어 노니는 광경을 연상시켰다. 불현듯 학춤을 배우고 싶어졌다.
나는 춤에 트라우마가 있다.
현직에 있을 때였다. 별로 취미가 없는 꽁생원 같은 동료 몇 사람이 모여 사교춤을 배워보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합류했다. 두어 달 교습을 했다. 우리를 가르치는 춤 선생은 공짜 술 생각만 나면 실습을 하자고 했다. 카바레 실습현장에서 좌석을 잡으면 기본으로 맥주 몇 병은 시켜야 한다. 다른 친구들은 홀(hall)로 나갔다. 숫기가 없는 나는 좌석을 지키고 있는데 웨이터가 파터너를 데리고 와서 실습하라고 했다. 쩔쩔매면서 얼마간 홀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 같은데 슬며시 누가 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아내였다.
아내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기에 상상 이상으로 안면이 넓었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고자질한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동안 승용차를 운전하는 아내는 사법경찰이었고 나는 연행당하는 피의자가 되었다.
집이 아닌 취조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핸드폰을 사들여 시작한 첫 사업이 춤바람이냐고 쏘아붙였다. 상습범도 아니고 초범이니 경고 정도로 끝낼 줄 알았다. 난데없이 핸드폰을 부숴버리라고 했다. 처음 출시한 핸드폰이라 당시에는 제법 거금이었고 사들인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부숴버리기엔 아까웠다. 큰아이는 분가했으나 작은아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다. 가구주이자 남자라는 프리미엄도 버린 채 아이들 때문에, 인내로 묵묵히 버텼다. 결국, 핸드폰은 장도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등산하거나 친구들과 회합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핸드폰을 빌리곤 했다. 친구들은 세계공처가연합회장 자격을 갖추었으니 유엔사무총장보다 명성이 더 높을 것이라 놀렸다. 가정평화를 위한 선택이라 그 명칭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초등학생인 손자를 어학 연수차 뉴질랜드로 보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들이 동의를 구해왔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 어학연수 2년간 며느리도 같이 보내라고 했다. 며느리 핸드폰을 내가 사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허락했다. 며느리가 맡긴 핸드폰을 2년간 잘 사용했으나 손자와 며느리가 귀국하면서 돌려주어야 했다. 그때 아버지의 핸드폰 사건을 아는 아들이 자기가 사서 드릴 테니 어머니는 잔소리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아들 둔 덕을 처음으로 톡톡히 보았다. 이때 산,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지금까지 무사히 잘 사용하고 있다.
동래학춤을 배워야겠다는 말을 아내에게 할 차례가 되었다. 아내는 남녀가 손을 잡는 춤에는 유난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동래학춤 명상을 보여주면서 손목과 무릎관절에 더없이 좋은 운동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관절염 예방을 위해 배워보겠다는 뜻을 비쳤다. 영감의 건강에는 심약한 편이라 배워보라고 허락했다. 민속예술이라 안도감이 생긴 모양이다. 드디어 ‘춤’ 트라우마가 치유됐다.
동래 민속예술원을 찾아갔다. 동래학춤의 예능 보유자를 찾아 사사를 원하니 쾌히 승낙하여 몇 명이 동래학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 유금순 선생의 굿거리장단 구음에 따라 보여준 명인의 시범은 학이 모이를 찾고 비상하는 춤사위였다. 우리가 굴신(屈伸)하는 걸음은 얼마 동안 군대의 제식훈련 같았다. 뻣뻣한 손놀림과 굼뜬 몸짓을 서로 쳐다보며, 한동안 웃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무대 공연을 할 정도에 이르렀다. 시민회관을 비롯한 큰 무대에서 공연했다. 즐겁고 보람 있었다. 평소 열심히 수련한 덕으로 지난 7월 말에는 한・일 문화교류 공연단에 합류하였다. 일본 기타큐슈의 왓쇼이예술회관에서 첫 해외공연을 했다. 명징하고 선연한 백색 도복이 학의 날갯짓으로 펄럭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동래학춤을 배운 보람을 만끽하고 돌아왔다.
학춤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릎과 손목 관절에 통증을 느껴 침을 맞고 물리치료도 했다. 손가락 관절염으로 악수를 할 때마다 통증이 심했다. 학춤을 배운 지 2년쯤 되니 손목과 무릎 통증이 사라졌다. 5년이 지난 지금은 몸이 한결 유연해졌다. 춤이라는 몸짓 예술이 건강을 덤으로 주었다. 공연 복장인 한복과 버선, 짚신 모양의 가죽신과 고가의 비단 도복은 인생 은퇴 후 수의(壽衣)로 하기로 가족들의 동의를 얻었다. 동래학춤으로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본 셈이다.
이제는 젊음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앞만 보고 살던 짐을 다 내려놓고 매주 문우들과 수필 문학의 언저리에서 혜안을 넓히고 동래학춤으로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노후의 삶에 보람과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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