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복음” 真の福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를 그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강해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서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어떤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면
내가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왠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
말씀을 듣기는 하거든요.
한국의 경우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주일예배 외에도 매일 새벽예배가 있고, 수요예배, 금요철야가 있습니다.
구역예배에서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많이 듣게 되고 많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무슨 함정이냐 하면, 성경을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은 착각,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씀은 주일예배 때도
듣고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예배 때도 들었어요. 이제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휘발유를 안 넣어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귀로 듣는다 하더라도 듣기만 하면 소용이 없어요.
믿음이 성장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그분 들이 좋아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여러분, 이 말씀이 이상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듣기만 하다 보니 믿음이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하면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어요. 그러면 그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합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자기 생각.
이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가 다 아는 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기에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보면
어떻겠습니까.
자,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알고 있었어요.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하겠습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목사님 말씀, 3번 자기 생각.
물론 대다수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적힌 대로 말씀을 전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만, 그러나 100%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복음을 전하셨을 때에는, 이는 99%가 아니죠. 100%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어떻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항상 매순간 매순간 100%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제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아니면 제가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와 같이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주일 예배를 포함해서 말씀을 전해드렸는데, 좀 이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예, 당연히
물어봐야죠. 그렇다고 설교 중에 갑자기 손을 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좀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예배가 끝나고 나서 각 교회
목사님께 물어보신다거나, 아니면 교회에 다른 교역자 분들이 계실 경우에는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게 물으면 그건 목사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며 꾸짖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일인가요? 목사나 교역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에 대한 불순종?
여러분, 목사가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목사님한테 순종해야지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예수님이에요?
아니면 선지자예요?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순종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사나 교역자가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을 때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왜 모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성경강해를 시작하도록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첫 강해로서 창세기도 아니요 마태복음도 아닌 로마서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 믿음의 축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성경말씀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에 대한 내용이 확실하게 잡혀 있으면 성경 어디를 읽어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이와 같이 강해라고 한다면 이를 몇 주에 나누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로마서를 살펴봄으로 인해서 성경 전체를 함께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본문 말씀은 로마서입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사도행전 내용도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라고 해서 로마서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1년, 아니면 평생 동안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전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서론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만, 너무 길어지면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이는 신약성경에 있는 서신들 중에서 저자가 분명히 밝혀진 책 중 하나입니다. 이는 과거에는 사울이라고도 불렸던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유대인 베냐민 지파, 그 중에서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면서도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는 탄탄한 배경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훌륭한 교육도
받았다고 하니, 옛날 우리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 집에 태어나서, 성균관에서 배우고,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를
하고는 장래가 보장된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이른바 엄친아. 일등 신랑감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대까지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대요.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그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고는 부활을 했대요.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비웃었겠지요. 사이비 집단이
있는 것은 비단 요즘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스승인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37절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先ごろテウダが立ち上がって、自分を何か偉い者のように言い、彼に従った男の数が四百人ほどになりました。しかし彼は殺され、従った者たちはみな散らされて、
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
彼の後、住民登録の時に、ガリラヤ人のユダが立ち上がり、民をそそのかして反乱を起こしましたが、彼も滅び、彼に従った者たちもみな散らされてしまいました。
그러니까 옛날에도 이상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흔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교주가 죽거나 망하면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던 바울은, 역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남긴 성경에 그런 내용이 어디 있냐? 사기꾼 같으니라고. 하지만 뭐, 이미 죽었다고
하니까 어차피 저러다가 금방 또 없어지고 말겠지.
어쩌면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뭔지를 믿는
무리들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어쩌면 그는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는데, 오직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데, 무슨 이상한 사람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잖아.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청년 관리의 가슴은
뜨거워졌습니다.
안 되겠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이 무리들을 다 잡아서 일망탕진을 시켜버려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위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아래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9절~20절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そこで私は答えました。『主よ。この私が会堂ごとに、あなたを信じる者たちを牢に入れたり、むちで打ったりしていたのを、彼らは知っています。
また、あなたの証人ステパノの血が流されたとき、私自身もその場にいて、それに賛成し、彼を殺した者たちの上着の番をしていたのです。』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인지 하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가두고 때리고 온갖 학대를 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그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예수라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지역에까지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사도행전 9장 1절~2절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を脅かして殺害しようと息巻き、大祭司のところに行って、
ダマスコの諸会堂宛ての手紙を求めた。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出し、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누구는 이른바 공무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냥 일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기만 해도 월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 물론 이는
옛날에, 그것도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요. 요즘 공무원들을 보면 웬만한 일반 회사원들보다도 열심히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그저 자리만 지키는 관료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솔선수범해서 일을 하는, 그야말로 공무원의
모범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흠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그는 열심히 무슨 일을
했었느냐. 교회를 탄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는 물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어디 그 뿐입니까.
훗날 바울의 열정적인 전도사역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사도행전 9장 6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6절~9절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立ち上がって、町に入り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告げられる。」
同行していた人たちは、声は聞こえてもだれも見えないので、ものも言えずに立っていた。
サウロは地面から立ち上がった。しかし、目を開けていたものの、何も見えなかった。それで人々は彼の手を引いて、ダマスコに連れて行った。
彼は三日間、目が見えず、食べることも飲むこともしなかった。
참으로 사람 팔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그는 당당한 고위관료로서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다메섹에
입성한 후로는 곧바로 회당으로 찾아가서 제사장으로부터 교부 받은 공문을 보이고는 닥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말을 타고 위풍당당은 무슨, 지금 눈도 안 보이게 되어서 사람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같았으면 예루살렘에서 높은 분이 오셨다고 하니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그랬을지도 몰랐습니다만, 그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예, 앞도 못 보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문제들 내겠습니다. 자, 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를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다메섹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유다라는 사람의 집은 다메섹에 있는 어느 한 거리에 인접한 곳에 있었는데, 그 거리 이름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사도행전 9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1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すると、主はこう言われた。「立って、『まっすぐ』と呼ばれる通りに行き、ユダの家にいるサウロという名のタルソ人を訪ねなさい。彼はそこで祈っています。
(新共同訳)直線通り
예, 그 유다의 집이 있었던 곳은 직가라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곧게 뻗은 거리라는 뜻이지요.
직가, 직선거리라고 하는 거리, 말하자면 종로 1가 2가 하는 식의 길 이름이지요. 아직도 그 직가라고 하는 거리가
남아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계속되는 내전 때문에 어쩌면 많이 파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역시 주님의 명을 받고는 직가라고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가서 당시는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바울에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볼까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신약성경 총 27권 중에서 대체적으로 13권
정도를 바울이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를 읽을 때마다 적지 않게 궁금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라고는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한참 뒤의 인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만 맞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었지요. 또한 아직 복음서가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도들로부터 직접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듣고 배웠는가 하면,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바울은 어쩌면 상하 관계에 있어야
했었겠습니다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서로 대등하게 교제를 한적은 있었지만 상하관계나 사제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읽어보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그야말로 다른 사도들 못지않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유대교적인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던
인물 아니었습니까.
그랬던 그가 어쩌면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자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するとただちに、サウロの目から鱗のような物が落ちて、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
이를 두고 일본에는 흥미로운 관용 표현이 있지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입니다. 일본어를 공부하시거나 일본어 시험을
준비중이신 분들은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지금도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이
표현은 바로 이 성경에서 온 관용어입니다.
이 말은 어떨 때 사용하냐 하면,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알게 된다거나, 어떤 한 가지를 알게 됨으로 인해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깨닫게 된다고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바울은 당시 성경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의문이
있는 부분은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한테 아들이 있다는 말이 성경에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해결해준다는 내용이 어디 있느냐고 분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앞이 보이지 않은 채 그는 꼼짝없이 다메섹 직가에 있는 유다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마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었겠지요. 분명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랜 동안 어두움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눈이 안보였으니
얼마나 어두웠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지식과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그런 기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그러면서 그는 사흘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이 떠오르고 율법이 떠오릅니다. 이사야서와 같은 선지서가 떠오릅니다.
자신이 그 동안 배워왔던 성경이라고 하는 이름의 자물쇠 안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를 넣고 돌리니까,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새로운 말씀, 아니, 그야말로 완전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순식간에 성경의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그가 오늘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늘 말씀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아아, 그랬구나.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때로는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되어 오신 그대로 오셨던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비밀을 알게 되니까, 그 동안 꽉 막혔던 성경의 비밀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로 풀리게 되니까, 이제 진정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십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보통 올림픽 같은 장거리 마라톤을 보면, 출발점과 결승점이 똑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전해드리는 말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시작한 장거리 로마서 강해도,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결승점에는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장 1절~2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오르시고
우리를 위해서 장차 다시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 로마서 강해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복음, 진정한 복음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 참된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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