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에 대한 오해 (3) : 경건한 삶은 청빈이다.
III. 3번째 잘못된 생각은 “경건은 청빈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청빈한 사람을 존경합니다.
권력자가 가난하면 부정 부패와는 거리간 먼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경건한 삶을 청빈한 삶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청빈 사상은 유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청빈은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은 헬라어 “eusebeia”를 번역한 말인데 접두어 “eu”는 “good, 좋다”는 의미이고 “sebeia”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경건”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예배”의 삶을 말합니다.
“좋은 예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1> “청, 맑음”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령과 삶이 깨끗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2> 그러나 “빈, 가난”은 아닙니다. 가난한 것은 경건의 요소가 아니라 인간의 범죄로 이 땅에 임한 저주의 결과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지극히 정상적인 좋은 관계이고 툭 터져 있는 관계이고 아버지와 아들과 사이가 지극히 좋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가 부자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인 우리들이 가난한 것이 정상인가요? 부자인 것이 정상인가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부자가 정상입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부자가 정상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의 저주를 걷어 가셨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가난의 저주로부터 해방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단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뵵에 대하여 사단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욥)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10)
이 말은 욥이 동방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물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욥이 하는 일마다 복이 되게 하여 주셔서 욥의 사업을 창대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이렇게 축복하신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은 경건한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경건은 청빈이 아니라 청부가 약속된 삶입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유행어가 있었는데 “청빈 사상이 죽어야 성도가 살고 교회도 살고 국가도 살고 우리 DFI Korea도 삽니다.”
성경에는 경건한 삶을 산 신앙의 선배들 중에 부자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400명 가까운 종들을 거느린 거부였고 이삭과 야곱도 다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과 야고보, 마가, 루디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이오, 빌레몬등 모두가 다 부자였습니다.
바울의 집안도 예루살렘에 아들을 유학을 보낼만큼 재력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들은 “1> 예수님 믿으면 가난하게 된다, 2> 물질은 속된 것이다, 3> 경건한 삶은 청빈의 삶이다” 라는 주장들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정말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가 되어야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신 것에 대한 보답이 됩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신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어 세계의 경제가 크리스챤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깨끗하게 돈을 버십시오. 많이 버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특히 아이티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야 많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요하게 되는가?
다음 주에 나눌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나눈 3가지 말씀을 항상 명심하시고 청부의 삶을 누리는 우리 DFI Korea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