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찬양대가 힘차게 찬양했듯이 우리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아주 고요한 독특한 유일한 존재이다.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여러분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맞게 사는 인생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지난주 말씀을 잠깐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또 함께 각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단순히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아니면 무슨 경기에서 꼭 1등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러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여러 루트를 통해서 나타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십시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사람의 말과 행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우리가 씨름하는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들을 다루고 해결하는 방식이 됩니다. 본문을 기록한 이 바울의 계고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많은 문제와 시험들을 만났고 그리고 그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어요. 일종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육신에 남아서 계속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볼 때는 첫 번째가 정말 더 좋고 바울도 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헬라어 원어로 보면 그 앞에 세상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러나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인데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라는 의미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교회를 위해서 남아 있는 것도 있는데 이것도 바울에게서는 바울에게 나쁘지 않는 것이죠. 결국 바울이 내리는 결정은 두 번째예요. 자신이 더 원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더 좋은 것을 미루고 교회에 더 유익하다 하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선택이고 또 하나님을 보여주는 결정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어요.
바울은 어떻게 또 무엇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가 씨름한 문제와 그가 내린 결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묻고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볼 것은 바울이 처한 상황과 그리고 그가 그 가운데서 보여준 확신입니다. 19절 말씀인데 우리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 거로,
19절 이 말씀에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유의 말이 있어요. 여기에서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할 줄 안다 이런 말씀 있죠. 욥기에 보면 우리말 성경 욥기에 보면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이 다른데 헬라어 성경이나 여러 영어 성경을 보면 같은 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보면 디스 윌터나우트 포 마이 딜리버리스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 옛날 욥이 처했던 상황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요 둘 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욥은 자식과 재산을 다 잃었어요. 몸에도 피부병이 생겨서 온통 고음으로 덮였고, 돌로 박박 긁을 정도로 가려움을 겪었어요. 위로하겠다고 온 친구들은 요 예민한 상처에 소금을 치는 말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욥이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복음을 전하는 것도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처형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거죠. 그러한 때에 그가 세우고 그가 돕는 교회들 가운데에는 그의 메임, 그의 갇침에 괴로움을 더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활동을 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하지만 욥이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을 확신했던 것처럼 바울 역시 어려운 때에 믿음을 잃지 않고 그의 구원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넓은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좀 더 좁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구원이 됩니다. 그래서 욥이 말하는 구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설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은 설 수 있고, 그리고 그 앞에서 의롭다, 옳다, 정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에요.
영어로 말하면 윈디케이션이라고 하는 겁니다. 법정에 가서 최종적으로 옳다 함을 인정을 받는 그것을 지금 욥은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럼 무엇일까?
바울도 구원을 말하고 있죠. 내가 구원에 이를 것을 안다 하는데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에요. 이거는 복음을 시작할 때 얻는 복음의 시작 때에 주어진 믿음의 시작할 때 주는 구원이 아니고 또 마지막 때에 얻을 구원도 아니고 좁은 의미에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또 몸이 아픈 사람이 질병에서 아니면 귀신에서 벗어남을 받듯이 이 작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바울도 구원을 말하고 있다.
지금 바울이 확신하고 있는 이 구원에는 두 가지 통로가 있어요. 본문에서 보이듯이 하나는 너희의 간구 교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에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사람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가 믿음과 이 기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믿음과 기도는 따로 가지 않고 또 반비례 하지 않고 비례적으로 같이 갑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에요.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으면 있는 만큼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상황에서 말하자면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니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야라고 믿고 말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매임을 당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그를 위해서 더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역사에서 일하신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래서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바울과 이 빌립보 교회처럼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나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외에 또 다른 확신이 있어요. 앞에서 말하는 확신은 뭐예요? 교회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가 반드시 풀려날 것이라는 확신인데,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다르게 번역해서 이해하면 바울은 앞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수치를 당하지 창피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온전히 담대하게 말하는 그를 통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앞에서 높이물 닦고 더 널리 전파될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갖는 풀려날 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신이죠. 이 바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하는 생각과 믿음이 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의 삶이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그리스도로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라는 뜻이에요. 영어로 하면 라이프 아니면 리빙 바이 스트 인 크라이스트 w 크라이스트 크라이스트 크라이스트, 론 크라이스트 o 이렇게 말할 정도가 됩니다.
그러한 삶은 분명히 영광스러운 삶이죠. 바울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삶입니다. 고난이 따라도 하지만 결코 쉬운 삶은 아니죠. 바울이 직접 경험을 했듯이 매임과 괴로움과 고난과 싸움이 동반되는 참으로 어려운 삶입니다. 단순히 쉽지 않다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유익하다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거죠.
모세도 이런 말을 했고, 엘리야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도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고 옛날에도 있고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나이 어린 사람들 중에도 있다는 것이오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교훈은 뭐냐 하면 바울도 그렇게 힘든 부분이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이 유익이다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죽는 것이 유익이라 하는 말 앞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말에는 단순히 죽음에 반하는 삶만이 아니고 죽음조차도 포함하는 삶이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이 말에는 죽음조차도 그리스도와 맺어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이 삶에서 그리스도를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는 죽음 죽는 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의 고난에서 벗어나는 이 땅의 힘든 일에서 벗어나는 모든 복잡한 관계에서 해방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아니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죠. 바로 그런 뜻으로 그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것도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 21절인데 22절 한번 읽어볼까요?
같이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하느니라 두 부문으로 나눠서 보면 무엇을 택해야 할지 알지 못하노라
이 부분은 조금 이해가 되지만 앞에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이 부분은 전문가들도 학자들도 좀 이해하기 어려워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잡하게 가지 않고 이해를 위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바울이 지금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이니라고 말한 다음에 바로 이 말을 하는 것이니까 지금 바울이 내가 죽지 않고 떠나지 않고 육신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복음의 열매를 더 맺을 수 있다면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돼요.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것과 남는 것이 둘 사이에 어떤 것을 택해야 될지 모르겠다. 좀 더 정확하게 하면 말할 수 없다 말하기 어렵다 이런 뜻으로 이해를 하면 됩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있어요. 또 다른 편에는 떠나지 않고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첫 번째가 더 좋고 그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에요. 바울로서는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두 번째도 이 둘 사이에 지금 끼어 있다. 바울이 무엇을 택해야 될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어지는 말씀을 볼 때 바울에게 선택한 것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알 것은 바울 혼자 내린 결정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무엇을 택해야 될지 모르는 바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결정이다. 바울은 앞에서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했죠.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는 그가 남을 것과 그리고 그들과 계속 함께할 것이라는 것을 말을 할 때 나는 그것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죠.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자신이 혼자 내린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지 않고 남는 목적도 중요해요. 여기서 세 가지가 표현되어 있는데 하나는 교회의 발전을 위함입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가 앞으로 나아감을 위해서 두 번째는 믿음의 기쁨을 누리는 것 믿음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것으로 의해서, 또 세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자랑이 바울로 말미암에서 더 충만해지기를 위해서 남는다고 하는 것이에요.
어느 것도 이 중에 어느 것도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데 아니고 모두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길이 있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우리가 바울의 딜레마는 어떤 면에서 행복한 딜레마였다라고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선택할 내용이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택해야 될지 모르는 것도 행복한 고민인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결정을 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선택해야 되는 것 인생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해야 할 경우도 다 이러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바울의 경우처럼 여러 옵션이 있으면 어떤 것도 다 좋고 그중에서도 더 좋은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본문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둘 중에 하나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고 둘 다 좋지 않은 것 가운데서 씨름하고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하는 것이죠.
어떤 경우가 그렇겠습니까? 가령 신앙을 버릴 것인가 지킬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기준이 중요하죠. 하나님이 기준이라면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면 교회를 떠날 수도 있고 신앙도 버릴 수가 있습니다. 버려도 되고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하는 잘못된 신앙도 있어요. 하나님이 보실 때 떠나야 할 교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경우는 전혀 다른 얘기지요. 제가 많이 들은 말 중에는 이번에 내 기도가 응답받지 않으면 하나님 떠나겠다 내가 원하는 거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내 취향이 내 기호에 맞게 하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는 교회 떠나겠다 이런 말들이 있죠. 다 이해가 되고 당연히 할 수도 있는 말들이에요. 하지만 알 것은 알아야 하는 것이죠. 지금 제가 앞에서 말한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자신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뜻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그런 것들이 앞에 나오는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그런 경우에는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떠나지 않고 남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떠난다면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도 있어요. 만약 바울처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곳으로 간다 하면 참 좋은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곳으로 그리스도와 멀어지는 곳으로 간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구원받기 이전에 세례받기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은혜 그것을 받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담임 목사의 자리에 있지요. 근데 이 자리에 있음으로써 우리 교회에 유익함이 없다면 저에게는 사실 고민할 게 없습니다. 제가 택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저를 떠나게 하실 겁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질문들이 있어요. 내가 믿음으로 내가 있으므로 이곳에 있으므로 우리 교회가 얻는 유익이 있는가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므로 여러분이 얻는 유익이 있는가 나는 이 교회를 세워가시는 성령의 도구가 성령의 통로가 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인가 교회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인가 중요한 질문이죠.
이 부분에 있어서 저는 정직해야 되고 저만 아니라 담임 목사의 자리에 있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 목회자는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목회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이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할 질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중요한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질문들이죠.
반대로 이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을 통해서 내가 얻는 유익은 있는가 내가 얻는 유익은 있는가 이 교회를 통해서 내가 얻는 이득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은 처음 믿기 시작하는 사람도 그가 정말로 제대로 회개함과 함께 시작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질문이에요.
그리고 회사들 이익 창출이 주 목적이죠.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기 이익만 최고로 내세우는 사람들은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교회의 직분자들은 어떠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복하자면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씨름하고 고민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유익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실 그 유익함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해 이런 질문을 하고 대답을 찾고 그에 맞추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교회에 유익한 일을 택하여 가는 사람은 바울처럼 행복한 딜레마에 빠질 수 있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해 주시는 결정을 볼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바로 거기에 자기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직도 밋밋한 분들이 있다면 이 부분에서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완전히 드릴 때, 그리스도 안의 교제에 완전히 빠질 때 그것은 결코 여러분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 이 땅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 사람이 그 길을 발견하고 또 즐겁게 그 길로 행할 수 있기를 또 그렇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