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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수도이자 최대도시. 유럽 대륙 전체를 따지면 단일로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영국의 런던, 러시아의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독일의 수도 베를린, 이탈리아의 로마에 이어 6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광역권으로 보면 모스크바 다음으로 큰 도시다. 영국 런던에 이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과 함께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금융 허브이기도 하다. 또 오랜 역사에서 비롯한 예술과 패션과 유행의 도시로서 첫 손에 꼽히는데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 등 유수의 명품 회사들의 본사들이 위치해 있다.
루브르, 에펠탑, 개선문 등 유럽 여행을 대표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관광명소가 있기도 하다. 파리인을 지칭하는 파리지앵이나 파리 신드롬같은 파생 단어도 꽤 유명한 수준. 별명은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
2019년부터 코뮌과 데파르트망의 성격을 가진 특별 집합체인 빌드파리(Ville de Paris)가 되었다. 코뮌이었다가 2019년에 데파르트망이 된 것은 아니고 이전에는 데파르트망 겸 코뮌이었다.
2. 발음
Paris의 's'는 묵음이다. 실제 프랑스어 발음은 '빠히' 또는 '빠리'에 가깝다. '히'와 '리'가 섞인 듯한 구개수 전동음이다.# 한국어식 연한 'ㅎ'이 아니라 거센 'ㅎ' 소리의 '빠히'이다. 'ㅋ' 또는 'ㄱ' 발음처럼 혀뿌리를 들어올리는 구개수 마찰음으로, 한국어 'ㅎ'과는 괴리가 있는 발음이다. 그래서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들은 파리가 아니라 빠히라고 불러달라는 이들도 있으며 드물게 '빻히'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발음은 한글로는 정확하게 쓸 수 없으며 된소리를 가급적 쓰지 않는다는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따라 '파리'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버스를 버스라 부르지 않고 다들 뻐스라 부르는 것처럼 정작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파리가 아니라 빠리라고 발음한다. 표준 발음을 사용해야 할 아나운서들도 파리가 아니라 빠리라고 발음할정도로 광범히하게 퍼져있다. 프랑스어의 'r' 발음은 대다수의 언어에서 'ㄹ'에 가까운 발음으로 옮긴다. 구개수음 소리가 나는 'х'를 쓰는 러시아어에서는 'Пахи'라고 할 것 같지만 'Париж(빠리즈)'로 쓰고 있다.
원래 영어식으로 발음하는 경우 미국식은 '패리스', 영국식은 '파리스'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속물들은 원래 발음인 '패리스'가 아닌 '패리'라고 발음한다고 하는 유머가 있다. MTV에 보면 그러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파리'도 아니고 '패리'래"하는 농담이 흔히 나온다. 웃음의 포인트는 프랑스어 특유의 마지막 자음의 묵음처리와 a의 발음이다.
3. 기후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며 낭만의 상징 같은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날씨 좋은 남부에 사는 프랑스인 중에는 파리를 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이는 파리가 북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전체적인 기후가 남프랑스에 비해 훨씬 칙칙한 편이기 때문. 런던,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등지와 비슷한 전형적인 서유럽의 기후를 보여준다. 여름에는 쾌적하나 겨울에는 런던처럼 안개가 짙게 끼고 음울한 풍경을 보여준다.
연 평균 기온은 12.8°C로 북위 37° 34'에 걸친 서울과 정확히 같으나 연교차는 북위 48° 51'이라는 높은 위도에 비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과 난류의 시너지 효과로 15.5°C에 불과하다. 최저기온 극값은 서울보다도 낮다. 1879년 12월 10일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한파가 닥쳐 -23.9°C 의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서울의 최저기온 극값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C. 그나마 서울은 12월 말~1월에 -20°C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여러 번 있지 파리는 그날 혼자서 달랑 -23.9°C이며 다른 날보다 9°C이상 낮아 신뢰성이 서울보다도 훨씬 더 떨어진다. 게다가 12월 말도 아닌 초반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는 건 거의 오류가 확실해 보인다. 20세기 이후 파리에서 기록한 최저기온은 -14.7°C이며 이 기록이 현실적으로 신빙성이 높다.
파리의 1월 평균 기온은 5.4°C, 최난월 7월 평균 기온은 20.9°C로 연교차가 작아서 겨울은 부산보다 따뜻하고 일본 도쿄와 비슷하며 여름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강원도 대관령과 비슷한 시원한 날씨로 살기 좋은 기후에 속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634.3mm이지만 계절 상관없이 비가 고르게 오며, 1월 평균습도가 83%에 달한다. 다만 최근에는 폭염도 나타난다고 하며 최고기온 극값은 40.4°C로 대구(40.0°C)보다도 높다.
서안 해양성 기후답게 겨울이 온화한 편이라 눈은 드물다. 그러나 한번 눈이 오면 폭설이 온다. 습하고 강수량이 많은 기후이기 때문이다.
연평균 총합 일조량은 1,717시간이다. 7월 일조시간은 222.4시간으로 1년중 가장 높으며, 반대로 12월 일조시간은 56.9시간에 불과하여 런던(55.0시간)과 큰 차이 없다.
6월 하지 즈음하여 전국적으로 음악 축제(Fête de la Musique)가 열리는데 이때는 서머타임까지 겹쳐 밤 10시에도 환하며 밤 10시 40분까지 상용박명이 지속된다.
4. 기원과 역사
파리라는 이름은 고대에 이 지역에 살았던 갈리아의 일족 파리시(Parisii)에서 유래되었다. 역시 여기서 유래하여 이탈리아어로는 파리를 파리지(Parigi)라고 부른다. 파리시족은 주로 센 강의 하중도인 시테(Cité) 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테는 라틴어 'civitas'에서 왔으며, 도시를 뜻하는 '시티(city)'의 어원이다.
이때 고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파리시 족이 살던 곳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 오늘날 파리의 기원이다. 로마 제국 당시에 이곳은 '루테티아', '루테티아 파리쇼룸(Lutetia Parisiorum; 파리시의 루테티아)'라고 불렸다. 현대 프랑스어로는 Lutèce(뤼떼쓰)라고 한다. 원소 이름 루테튬은 여기서 유래했다. 루테티아라는 이름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늪', '습지'를 뜻하는 고대 켈트어 'luteuo-'에서 왔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쥐'를 뜻하는 'luco-'에서 왔다는 설이다.
로마 제국 당시 루테티아는 시테 섬에서 시작해 센 강의 좌안 지역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나가며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파리 제5구역에는 루테티아 시절에 세워진 원형 극장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졌고, 결국 센 강의 좌안 지역을 포기하고 시테 섬을 요새화하게 되어 그 후 파리는 상당 기간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요새 도시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루테티아'라는 이름이 빠지고 '파리'라는 명칭으로만 불리기 시작했다.
5세기 말, 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점령했고 508년, 파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엔 아헨이 수도가 되었다. 885년에서 886년까지 파리에 바이킹족이 쳐들어왔는데 이때 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독일어로는 카를 3세)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바이킹과 강화를 맺어서 무마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 대신 파리 백작인 외드와 로베르 1세를 더 따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센강의 우안 쪽으로 파리가 확장되었다.
989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리프 2세 때에는 파리를 둘러싸는 성벽이 완성되어 파리는 강력한 요새 도시가 되었다. 11세기에 파리 대주교좌 부속 학교로 시작한 파리 대학교가 발전하여 스콜라 신학의 중심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독특하게 센 강 좌안은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발전했다. 대표적인 대학 지역으로 꺄르띠에 라땅이 있다. 센 강 우안은 시장이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대체적인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의 치열한 혈전으로 파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후에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측이 파리를 점령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가 붙잡혀서 마녀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를 처형한 건 잉글랜드군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었다. 그러한 탓에 오늘날 파리에는 커다란 잔 다르크 동상이 세워졌다. 파리 시민들의 잔 다르크에 대한 속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군이 파리를 다시 탈환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발루아 왕조의 왕들은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아르 강 유역(Val de Loire)에 세운 성을 더 좋아해서 파리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일례로 샤를 8세는 루아르 강 유역의 앙부아즈에서 태어나서 앙부아즈에서 죽었으며,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서 말년을 보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파리가 아닌 루아르 강 유역에 머물렀던 것이다.
위그노 전쟁 당시에 파리는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해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이후 등극한 앙리 4세는 파리를 프랑스 왕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부활시켰고 이후 파리에는 튈리르 궁, 루브르 궁, 폐병원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파리의 다른 별명인 '빛의 도시'는 루이 14세 때 붙여졌다. 당시 왕은 파리의 범죄를 줄이고자 한밤 중에도 거리를 환히 밝혔다. 이른바 가로등을 두기 시작한 것인데 이 덕분에 파리는 밤에도 밝았고 그로 인해 '빛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로등은 처음에는 촛불을, 이후에는 점차 가스등, 전기등으로 교체되었다. 한편 파리는 계몽사상의 중심지가 됐고 그때부터 '빛'은 말그대로의 빛과 계몽이라는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이 14세 때 사실상의 행정수도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파리 시민들의 불만거리였고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왕가에 내건 조건 중 하나(3번 조건)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환도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중요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으며 파리에서 혁명이 과격해진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정치적으로는 잇달아 일어난 혁명과 파리 코뮌 등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37년에 파리와 생 제르망 안 레이 사이에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에서 각처로 철도 노선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파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당시 센 현의 지사였던 조르주 오스만 남작(Georges-Eugène Haussmann,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다. 이 사람은 중세 이래 이어져 온 좁은 골목을 넓은 불바르(Boulevard)로 바꾼다. 불바르는 가로수가 놓인 넓은 도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오스만 남작의 개조 사업을 논할 때 꼭 등장하는 단어이다. 오스만 남작은 파리에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도심부를 재개발하고 사회 기반 시설들을 갖추는 파리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조르주 오스만에 의해 갖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전하면서 파리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제2제정이 붕괴하고 제3공화정이 탄생했지만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포위로 70여 일이 넘게 고립된 끝에 제3공화정의 보수파 정권은 프로이센 왕국에게 항복하게 된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에 저항하여 파리 코뮌을 결성하여 봉기하였지만 결국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이때 코뮈니스트들의 의도적인 방화로 튀를리 궁전, 서청, 정부, 법원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전까지 파리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차례의 엑스포가 개최되었는데 1889 파리 엑스포를 기념하여 에펠 탑이 건설되었고, 1900 파리 엑스포에는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으로 파리는 함락 일보직전까지 놓였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해 파리는 간신히 함락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파리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서 예술 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 당시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들은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베네룩스를 공격하는 척하며 강력한 기동 부대를 아르덴 산맥으로 보내 연합군의 옆구리를 두 동강 내버린 후 프랑스 북부를 휩쓸며 베네룩스의 연합군은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빠져나가 독일군의 정면 공세를 막아낼 정규군이 없어지게 된 프랑스는 6월 10일 파리를 무저항 도시로 선언, 독일군에게 6월 14일 저항 없이 내주게 된다. 샹젤리제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시민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겪었던 수모를 또 겪게 되어서 참담했다고 한다. 그중 압권이 히틀러가 에펠탑에서 찍은 사진. 아직까지도 히틀러의 에펠탑 사진은 2차 세계대전 프랑스의 굴욕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히틀러가 에펠탑을 온다는 소식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프랑스 측에서 에펠탑의 전기를 끊어버렸다는 것도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독일 점령 하 파리 시민들 중에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8월 15일에 파리는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파리가 함락당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들이 설치되어 콜티츠가 히틀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파리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콜티츠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라며 히틀러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이때, 콜티츠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당시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Is Paris Burning?)"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ule-t-il?)'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 제목이 되었으며 게임 코만도스 2의 마지막 미션 제목도 'Is Paris Burning?'다.
명령을 무시하고 항복한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은 그들을 지키면서 안전을 보장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롤 탕기에게 항복 조건으로 자신과 17,000명 파리 주둔 독일군 목숨을 보장했기 때문. 물론 롤 탕기는 나중에 회고하길, "파리를 지켜준 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설령 그런 조건이 없었다 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쟁포로로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풀려나게 되었고 파리 시를 무사하게 놔둔 것에 대한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콜티츠는 1956년에 파리를 조용히 방문했는데 바로 나치 독일군 지휘 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호텔 르 뫼리스’를 잠깐 들러갔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콜티츠는 아주 단정한 자세로, 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조금은 놀란 듯한 눈치로 호텔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호텔 매니저가 콜티츠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콜티츠는 사양한 채 몇 분을 둘러보다 호텔을 떠났다.
콜티츠가 1966년 숨을 거두자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콜티츠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2014년 7월 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Extreme Surprise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전후에 파리는 교외로 확장되어 원래부터 많은 인구를 가졌지만 계속 인구가 증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의 68운동은 파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패션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5. 경제
2012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조사한 일드프랑스의 경제 규모. GDP(국내총생산)가 6,692억 달러로 일본 수도권, 뉴욕, 로스앤젤레스, 한국 수도권, 그레이터런던에 이어 6위를 차지하였다.
2023년 달러 기준으로는 9,341억 달러로 도쿄, 뉴욕, 로스앤젤레스, 런던에 뒤이은 6위를 차지하였으며, 유럽연합 내에선 2위인 라인-루르 지역과 1.5배 차이로 압도적인 1위다. 루이 비통, 샤넬, 에르메스, 크리스챤 디올, 로저 비비에, 고야드, 발렌시아가, 셀린느, 생 로랑, 겐조 등의 프랑스의 대다수 명품 브랜드들의 본사와 LVMH, 케링, BNP 파리바, 토탈, 사노피, 다논, EDF 등 프랑스 굴지의 대기업 본사들은 거의 다 파리에 위치해 있다. 다만 파리시의 면적이 워낙 좁아 상당수의 대기업 본사들은 파리 근교 오드센 지방의 라데팡스에 많은 편.
6. 행정구역
파리는 20개의 구와 주변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흔히 "파리"라고 부르는 지역은 외곽 순환 고속도로 안쪽의 20개 구(아홍디스멍)를 말한다. 우편번호가 750(00)이면 파리 시내이다. 1구는 75001, 10구는 75010 등 시내 인구는 217만여 명, 외곽까지 합하면 1184만 명에 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행정 개편에서 파리는 센 현의 현청 소재지로 제1코뮌에 해당했고 시의 영역은 오늘날처럼 크지는 않아 파리 지하철 2호선, 6호선의 안쪽이 당시의 시 영역에 해당했다.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1860년 시 영역 확대 시행(시 옆에 있는 공원 두 개를 파리시로 편입) 때였다. 이후 1968년에 센 현을 폐지해 파리시는 현과 동격의 자치단체로 규정되었다가 1978년에 프랑스를 각각 레지옹(지역권)으로 나누면서 파리는 일 드 프랑스 레지옹의 수도로 속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특별시'보다는 '경기도 서울시'에 가까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20개 구는 파리를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센 강 서안(강 남쪽 지역)과 일부 동안 지역이 부유하면서도 치안이 좋은 편으로 1~9구, 그리고 16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북동쪽으로 갈수록 치안이 안좋고 소득 수준도 떨어지는 편.
프랑스의 행정구역 체계에서, 가장 작은 행정단위는 코뮌(Commune)으로 보통 한국의 구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그 상위를 구성하는 아홍디스멍(Arrondissement)은 일반적으로는 시에 해당하는 개념이나 마르세유와 같은 대도시는 여러 개의 아홍디스멍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상위가 한국의 도에 상응하는 데파르트망(Departments)이고 최상의 행정구역은 레지옹(Région)이라 부른다. 하지만 파리는 독특하게 파리 자체가 하나의 데파르트망이자 하나의 코뮌으로서 20개의 아홍디스멍을 거느리고 있는 체제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개의 코뮌이 모여 하나의 아홍디스멍을 이루고 그게 다시 모여 데파르트망을 이루는데 파리는 거꾸로 코뮌이 곧 데파르트망이고 그 아래에 여러 개의 아홍디스멍이 구성되어 있는 프랑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굉장히 독특한 구성이라 볼 수 있다.
베를린(1920년), 도쿄도 구부(1932년), 서울(1963년), 런던(1965년) 등이 20세기 들어서 수도 행정구역의 대규모 확장을 단행한 반면에 파리는 19세기에 획정된 시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를 서울에 비유하자면 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를 광주시, 과천시, 시흥시, 양천시, 고양시, 양주시 등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때문에 파리시 자체로 보면 인구도 세계구급 대도시 치곤 굉장히 작은 200만 정도에 불과해 독일 수도 베를린의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면적 또한 100km²남짓으로 베를린의 11%밖에 안되고 서초+강남+송파구를 합친 면적보다도 더 작다.
파리가 이렇게 행정구역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좌파 성향의 코뮌들과 우파 성향의 코뮌들 간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도시행정체계 때문인지 광역행정 상의 문제가 꽤 크다. (출처: 브리태니커 대백과)
그래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파리시의 외곽도시들을 편입하여 큰 도시를 형성하는 '그랑파리(grand paris)' 계획을 발표했고, 현재 외곽도시에서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지하철 15호선 등이 건설 중이며, 도시들은 정비사업 및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하지만 파리 대확장 계획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다. 파리 추가 확장 후 조직 개편을 염려하는 일드프랑스 레지옹 정부 소속 공무원들의 반발(한국으로 치자면, 도의 일부를 특별시나 광역시에 할양하는 것을 원치 않는 도청의 속내에 비유될 수 있음)과 파리 추가 확장을 원치 않는 파리시내 주민들의 반발 등.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단행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최근에는 그랑 파리 메트로폴이 출범했지만 느슨한 도시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2020년 7월 11일, 파리 1~4구가 파리 중앙구(프랑스어로는 Paris Centre)라는 이름으로 행정상 통합되었다. 굳이 행정상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구청장이나 구청사 등의 행정적인 부분들만 통합되었고, 명칭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행정동과 법정동의 관계와 똑같다.
7.1. 주요 명소
에투알 개선문(L'Arc de Triomphe de l'Étoile): 아우스터리츠 전투승리 기념으로 나폴레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다. 샹젤리제 거리의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리 경관을 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에펠탑보다 이곳이 훨씬 좋다. 그야 에펠탑에서 파리 경관을 보면 에펠탑이 보이지 않으니. 다만 엘리베이터 같은 거 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높이가 꽤 되는지라 다리가 아플 수도 있다. 가장 붐비는 시간대는 일몰 직후 시간대로 노을이 지는 파리 시내와 조명을 비추기 시작하는 에펠탑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La 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파리의 명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성당으로 화재이후 복원 공사 중이라 내부 출입이 현재는 불가능한 상태.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 : 중세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예술을 한대 모아놓은 박물관. 크기가 굉장히 크고 동선이 복잡하기 때문에 가이드를 대동하거나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루브르 지도를 참고해서 가는 것을 추천. 주말이나 무료입장일의 경우 사람에 치여 제대로 구경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날짜에 덜 구속되는 여행객들은 평일을 추천하는 편.
샹젤리제 거리(L'Avenue des Champs-Élysées): 프랑스 최대의 번화가. 온갖 명품 샵들과 극장, 카페 등이 밀집되어 있다. 양 끝에 개선문과 루브르가 위치해 있어 파리를 여행한다면 무조건 가게 되는 곳.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약 2km의 일직선 도로 주변은 세계에서 가장 멋지고 세련된 거리인 샹젤리제 거리이다. 여기에 루이뷔통의 본점이 있으며 패션의 중심지로서 또한 파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에펠 탑(La Tour Eiffel): 프랑스와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탑. 다만 에펠탑을 올라갈 경우 29유로라는 꽤나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고 올라가봤자 정작 에펠탑이 안 보이기 때문에 개선문에서 보는 에펠탑에 비해 뷰가 좀 심심한 편이다. 에펠탑 뒤편의 트로카데로 정원이나 비라켐 다리에서 바라보는 에펠탑 뷰가 굉장히 아름답기 때문에 정 돈이 아까우면 이곳에서 에펠탑을 바라봐도 된다.
오르세 미술관(Le Musée d'Orsay): 19세기 프랑스 미술을 총집합해 놓은 곳. 미술품도 미술품이지만 3층에 위치해 있는 시계탑이 굉장히 인기가 많다. 여기서 사진을 찍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고 기다린다.
오페라 가르니에(L'Opéra Garnier, ou Le Palais Garnier) : 유럽에서 화려함과 세련된 품격을 완벽하게 갖춘 예술의 전당을 꼽아보라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곳이 오페라 가르니에이다. 극장 천장에는 샤갈의 대작 ‘꿈의 꽃다발’이 그려져 있다. 오페라 가르니에 주변으로 위풍당당한 석조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19세기 같은 파리의 경관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팡테옹: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들을 모셔놓은 일종의 국립 묘지. 주위에는 프랑스 최고 대학 중 하나인 소르본 대학과 라탱지구가 위치해 있다.
상트르 퐁피두(Le Centre Pompidou, ou CNAC): 현대 미술을 모아놓은 미술관으로써 루브르-오르세-퐁피두를 거치면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미술의 흐름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다. 외관이 상당히 독특하다.
앵발리드 군사 박물관(Les Invalide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묘도 이곳에 있다. 에펠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며,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가면 중세시대 무기들부터 제2차 세계 대전시기 현대까지의 무기와 군사 장비들을 볼 수 있다. 밀리터리 동호인 겸 역사 동호인이라면 한번쯤 가볼 가치가 있다.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소르본 대학교(L'Université Paris-Sorbonne)
샤이요 궁전(Le Palais de Chaillot)
뤽상부르 궁전(프랑스 상원 의사당)(Le Palais du Luxembourg)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
바스티유 광장
생마르텡 운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러시아-프랑스 간 친교의 목적으로 러불동맹을 성사시킨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오른쪽으로는 그랑팔레와 쁘띠팔레, 왼쪽으로는 앵발리드와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다리에 비해 장식이 굉장히 화려하다.
보자르 다리
퐁뇌프(Pont neuf) 다리: 센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새 다리란 뜻.
비라켐(Bir Hakeim) 다리: 영화 인셉션의 로케지로 유명, 실제로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에펠탑을 배경으로 스냅샷을 찍고 있고 웨딩 포토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진 작가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몽마르트르: 파리 18구 일대.
몽마르트 언덕(몽마르트 묘지): 구글에서 검색할 때 조심해야 할 게 있는데 구글에서 몽마르트 언덕을 검색하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관광지인 몽마르트와 사크레쾨르 성당과는 떨어진 몽마르트 묘지로 안내하기 때문에 몽마르트를 가고 싶으면 사크레쾨르 성당을 검색하는 게 낫다.
사랑해벽(Le Mur des Je t'aime)
사크레쾨르 대성당(La Basilique du Sacré Coeur): 한국에서 몽마르트 성당이라고 알고 있는 곳.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 거리 미술가와 버스커들이 집합하는 장소. 한국의 대학로의 사실상 모델 같은 곳. 영화 《몽마르트 파파》의 장소이기도 하다.
페르 라셰즈 묘지
부르봉 궁전(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Le palais Bourbon)
뷔뜨 쇼몽 공원
방센 숲
불로뉴 숲
루이비통 박물관
스타드 롤랑 가로스: 프랑스 오픈의 개최지
롱샹 경마장: 개선문상의 개최지
오랑주리 미술관
로댕 미술관
피카소 미술관
튈르리 정원
샹드마르스 공원
콩코르드 광장
트로카데로 정원
파리 시청(Hôtel de Ville)
파스퇴르 연구소
콩시에주리
생트 샤펠
몽파르나스 타워
카타콤: 13개의 마경 중 하나.
파르크 데 프랭스: 파리 생제르맹의 홈구장.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성당(Église Saint Nicolas du Chardonnet)
케브랑리 박물관(Musée du Quai Branly)
항공 우주 박물관(Musée de l'air et de l'espace) : 르부르제 공항 시설 일부를 개조해 만든 곳. 보잉 747-100, 에어버스 A380, 콩코드 여객기가 이곳에 전시 중이니 항덕이라면 꼭 가보도록 하자. 또한 매 홀수년도 여름에는 파리 에어쇼가 열리는데 이때 간다면 볼거리와 방문객이 배가 된다.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 외곽, 베르사유(Versailles Ville)에 있다. 파리에서 RER을 타고 갈 수 있다.
이 중 많은 관광지가 파리 뮤지엄패스로 입장 가능하다. 심지어 뮤지엄패스만 있으면 줄을 안 서고 입장할 수 있는 관광지들도 있다.
8. 교육
원래 1150년경 세워진 파리 대학교 및 1257년경 파리 대학교의 칼리지로 세워진 콜레주 드 소르본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지만 68혁명 때 파리 제1~13대학교라는 이름의 13개의 대학으로 쪼개지고 대학 평준화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부터 국가적인 차원으로 대학 경쟁력을 끌어올리고자 숫자로 명명하는 13개의 대학 시스템을 폐지하고 각 대학들을 통합하거나 리브랜딩을 함으로써 대학 서열화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예로 파리 제4대학교와 파리 제6대학교가 2017년에 소르본 대학교로, 파리 제5대학교와 파리 제7대학교가 2019년에 새로운 파리 시테 대학교로 통합했다.
이 외에 국립고등 루이 뤼미에르 학교, 파리 경제학교, 파리 고등상업학교, 파리 정치대학, 파리-벨빌 국립고등건축학교 등 많은 그랑제콜이 위치해 있다. 이 중 국립장식미술학교,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보자르,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는 파리 제9대학교 등과 함께 PSL 대학교라는 이름의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다.
9. 치안 및 관광
9.1. 치안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치안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며, 특히 파리는 전 세계 관광 도시 중에서도 소매치기가 가장 많기로 정평 난 동네이다. 현지인도 소매치기에게 당하는 수준이며, 특히 들뜨고 긴장한 여행객들은 이들의 최우선 타깃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주로 조심할 곳은 지하철, 카페 테라스, 맥도날드. 특히 18 구역 내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에서는 소매치기 등을 막기 위한 경비원까지 세워놓고 있다. 절대 주머니에 귀중품 또는 핸드폰을 넣지 않도록 하자. 청바지 주머니도 훅 털어간다. 단순히 몰래 주머니를 터는 것을 넘어 손에 들린 스마트폰 채가기, 오토바이를 타고 가방 통째로 낚아채기, 택시 유리창 깨고 가방 뺏어가기 등 대담하다 못해 기상천외한 수준. 최근 들어 파리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한국말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면 얼마나 소매치기가 많은지, 공항 등에서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생기면 대충 쇼핑한 것처럼 장바구니에 넣고 잊어버린 척을 하면 소매치기가 가져가준다.
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또한 집시 차림의 유색인종 미성년자 강도단에 의한 피해가 심하다. 이들은 주로 대낮에 활동하며 주범을 잡아도 미성년자에 주거지가 불분명한 떠돌이인 데다, 이미 훔쳐낸 귀중품은 다른 운반책이 가지고 날라버리기 때문에 신고를 해도 해결도 안 될뿐더러 물건을 되찾을 확률도 낮다.
범행 수법은 여자아이들이 먼저 피해자를 낚는다. 관광객들에게 미소로 여자아이들이 접근해서 앙케트에 참여해 달라거나 길을 안내해준다고 한 뒤, 관광객이 호감을 보이거나 경청하면 주변에 흩어져 있던 집시들이 그 관광객 주변을 에워싼다. 단체로 표적을 정신없게 만든 뒤 지갑이나 스마트폰을 훔쳐가는데, 시선 교란을 맡는 여자아이들과 금품을 훔쳐서 달아나는 남자아이들이 4인~10인 1조로 행동한다고 한다.
아시아권 및 한국 관광객들은 현지에서 관광객 티를 매우 많이 내는 편인 데다 강도들이 노리는 거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서 피해 사례가 많다. 특히 한국인들은 고가의 DSLR 카메라, 100만 원 상당의 스마트폰, 다량의 현찰과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다니는 데다, 한국에선 소매치기를 당할 일이 잘 없다 보니 경계심도 적어 표적이 되기 쉽다. 가장 좋은 대처법은 여지를 주지 않는 것. 고가의 물품은 아예 안 들고 다니는 것이 가장 좋고, 지갑이나 휴대폰은 가방 깊숙한 곳에 넣거나 몸에 딱 달라붙은 주머니에 보관한 상태에서 언제나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고 노련한 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충분히 안전하기도 하다. 소매치기가 많을 뿐 중심가 근처에서의 물리적인 위협(강도 등)이 일어나는 빈도는 적다. 야간에 혼자 다녀도 크게 위험한 상황은 없다.
프랑스 마피아인 밀리유가 유명하다.
9.2. 위생
도시 전체적으로, 위생 상태는 매우 개판이다. 일정 거리마다 쓰레기통을 설치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쓰레기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쓰레기통 자체가 그냥 철제 링에 봉투를 걸어 놓은 매우 없어보이는 모양새인데다 길가에서 개똥을 주기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거기다 몇 백 년 된 도로이니만큼 꼭 오물 문제가 아니더라도 꽤 지저분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사 그나마 지상은 열심히 청소를 하는 편이지만, 파리 지하철은 안 그래도 더럽고 불편한 유럽 지하철 중에서 최악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
게다가 노상방뇨로 인해 거리에 오물도 많다. 일단 노숙자를 생각하겠지만 범인은 노숙자뿐만이 아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이나 잘 갖춰 입은 샐러리맨 혹은 노신사들은 설마 그러지 않겠지만, 화장실이 사실상 유료인 파리 특성상 낮에는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밤에는 아무데서나 노상방뇨하는 사람들은 정말 흔하다. 길거리나 역 근처에 유료 화장실이 있긴 한데 그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쇼핑몰 화장실인데 유료인 곳조차 있을 정도. 그래서 결국엔 지천에 깔린 카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냥 쓰려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고, 아예 공짜로는 못 쓴다고 대놓고 말하는 가게도 수두룩. 유료 화장실이 1~2유로인데 이게 유료 맞나 싶을 만큼 끔찍하게 더럽고 관리가 안 된다는 걸 감안하면 그냥 돈 조금 더 주고 커피 한 잔 시킨 후 화장실 쓰는 게 낫다 보니 결국 사실상 유료 화장실. 참고로 이건 관광객뿐만이 아니라 애초 현지인이 사는 방식이다.
9.3. 관광
몽마르트르 언덕이 두 개가 있기 때문에 말을 잘못하면 엉뚱한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갈 수 있으니 조심. 야경 본다고 절대 밤에 가지 마라. 신변을 보장하지 못한다. 18-19구는 오후 6시 이후엔 파리에 익숙하지 않은 관광객이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해가 길든 짧든 시간대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위험 할 수 있는 곳이다. 파렴치한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도보로 몽마르트르를 올라가는 것보다 몽마르트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도보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야트막한 곳이라고 도보로 올라가다가 이들을 만나면... 이들은 한국어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씨발같은 욕을 써서는 안 된다. 굳이 도보로 올라가겠다면 공원으로 올라가는 쉬운 길 말고 그 옆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나마 덜 위험하다. 다만 이쪽은 공원으로 손쉽게 올라가는 것과 비교되지 않게 힘들고 올라가는 동안 찌린내에 코가 고문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쪽도 팔찌단과 같은 이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의 코르티츠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파리에는 온갖 아름다운 건물들과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따라서 파리의 건물들은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건물 내부 리모델링은 자유롭지만 외부 리모델링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는 이제는 아예 쓰지 않는 굴뚝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고 있다. 이는 파리의 모습을 후손에게까지 온전히 남겨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에서 이 파리 시내를 부수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이런 특징 때문에 파리지앵들은 도시를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다룬다는 비웃음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하자. 즉, 사람이 사는 도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곧 도시의 발전이자 변화인데 '지금 이 순간의' 형태에 극단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포기해버렸다는 것. 이런 입장에서 보는 사람들은 파리는 사실상 현대 도시라기보다는 벨 에포크 시대의 도시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 대도시들의 공통점이긴 하다.
단적으로 체코의 프라하 같은 경우는 공산정권 시절을 거치며 실제로도 발전이 정체된 점을 감안해도 구 시가지 경관에 대한 집착이 파리보다 훨씬 더 심하다. 더구나 유럽은 다른 문화권의 대도시와 달리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편이고, 현재 기준으로도 멀쩡하게 리모델링만 해서 쓸 수 있는 건물들이 태반인데다 어지간한 전쟁이나 화재, 자연재해로 인해 도시 전체가 리셋되지 않는 이상 일부러 갈아엎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유럽에서 몇 안되는 현대식 도시들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네덜란드 로테르담, 폴란드 바르샤바는 모두 2차대전 당시 송두리째 박살난 곳들이다. 하지만 이 조차도 도시경관을 현대식으로 만든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도시구역을 빠르면 2차대전 종전 후 늦어도 냉전 종료 후에 전쟁 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편. 시간에 따라서 도시경관이 지나치게 변하는 아시아, 북미권 대도시와는 달리 좀 낙후된 느낌이 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보면 옛 것을 보존하며 그 개성을 지킨다고 볼 수 있다. 그냥 유럽에서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이 타 문화권과는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또한 실제로도 이런 노력이 관광산업과 브랜드가치 유지에 아주 큰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현대에 와서 서양 과학문명이 지구를 지배하게 되고 세계 각국의 수많은 도시들이 콘크리트, 철근, 유리커튼으로 대동단결 하게 되었기에 역으로 전통적인 건축양식은 주요한 관광 경쟁력이 되었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당신이 유럽 여행을 간다 생각해보자, 한국에서도 흔해 빠진 콘크리트 빌딩/유리 빌딩으로 범벅된 도시를 굳이 보고 싶은가? 그런건 그냥 서울특별시의 삼성역이나 잠실역 주위만 가도 흔해 빠졌다. 외국으로 여행 가는 이유는 결국 한국과는 다른, 그 나라 그 민족이 발전 시켜온 문명이나 삶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만약 세계 각국의 건축, 미술, 자연경관, 생활양식 등이 모두 다 비슷비슷 하다면? 사람들은 굳이 해외여행을 가지도 않을 것이다.
도시의 유명세만큼 사람들은 몰리고 도시와 건물은 확장되어야 하는데, 위의 이유들과 함께 지반의 특성상 옛 건물들을 유지한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의 지반이 그다지 단단한 땅이 되지 못한다. 늪지 위에 지어진 도시라 건물을 새로 높게 올리고 싶어도 골치가 아픈지라, 인구는 늘어나고 집은 한정되어 있고, 집값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파리 월세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 그 덕분에 유럽에선 영국 런던과 함께 주택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도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매매 가격은 서울과 큰 차이가 없다. 때문에 유학생들은 폭 1m가 안되는 나선 계단을 기어올라 6층 옛 하녀방에서 새우잠을 잔다.
상기된 이유로 파리의 마천루와 초현대식 건물들은 부도심인 라데팡스에 몰려 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웬만한 쇼핑몰 또한 거기에 다 있다.
그렇다고 파리 도심의 재개발과 현대적 건축물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단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파리 외곽 지역에 있어 잘 눈치를 못챌 뿐이다. 또한 이들 지역엔 고층만 아닐 뿐이지 현대적인 양식의 건축물로 재건축이 이뤄졌거나 옛날 주공 아파트 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도 있다. 또 철도 유휴부지에 고층의 현대적인 건물을 올리거나, 보존 가치가 떨어지고 낙후한 지역의 경우 옛날 조직을 허물고 재개발을 한다. 대표적으로 리브고슈로 불리는 파리 13구의 재개발이 있다.
프랑스 저작권법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파노라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 지적재산권법 122조 5항에 근거한다.(링크). 그러므로 루브르 유리피라미드, 퐁피두 센터처럼 저작권자가 생존해 있거나 사망 후 70년을 채우지 못한 건축물과 공공전시물의 촬영 및 상업적 이용은 엄격히 제한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에펠 탑 역시 낮에 찍은 사진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야경은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하다.에펠탑을 밤에 찍으면 안 되는 이유
혁명기념일마다 파리에서 열병식을 비롯한 큰 축제를 벌인다. 개선문 쪽에서 온갖 전투기와 군 수송기들이 곡예 비행을 벌이며 팡테온에서는 군악대 연주 공연이나 프랑스군의 전차나 장갑차등 전투 차량 체험 행사도 벌인다.(2014년 기준) 밤에는 에펠탑 아래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며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불꽃놀이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밤에 하는 행사는 당연지사 방송으로 나간다. 더욱이 2014년은 제1차 세계 대전 100주년이라 더더욱 크게 연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수도권 집중 문제 못지 않게 프랑스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물론 한국보단 훨씬 덜 한 편이지만 한국의 수도권 집중은 세계적으로도 봐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라서 여느 나라와 맞대어봐도 해당 국가가 더 양호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수준인지라 그리 적절한 비교대상이 못 된다. 서유럽에서는 프랑스만큼 수도에 많은 기능과 인구가 집중된 국가가 별로 없다. 표준어같이 중앙 집권적 행태가 서유럽에서 제일 강하다. 그리고 일드프랑스권을 제외한 다른 광역도시권이 크게 발달하지 않고 지방 전역에 인구가 고루 분포된 편에 가까워 수도권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한국보다 어찌보면 더 큰 면도 존재한다.
매년 여름 7~8월경, 파리해변이라는 뜻의 파리플라쥬(Paris plage)라는 볼거리가 생긴다. 센강을 중심으로 인공 해변을 만든다. 지방도시에서 백사장 모래를 가져와 미쳐 바캉스를 가지 못한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해변 느낌을 선사하고, 반대로 파리의 예술품들을 지방 도시에 보내 볼거리를 제공한다.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작가인 이원복 교수 때문에 생긴 오해 중 하나가 "프랑스인은 자국 문화 자부심이 높아서 영어를 사용하면 무시하고 지나간다?"인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애초에 이원복 교수 본인부터가 만화에서 저 편견이 오해라고 분명히 설명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21세기 들어서 젊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회화는 할 줄 알기 때문에, 영어로 물어본다고 문전박대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옆 동네 말이다 보니(?) 평균적 수준으로 보면 한국 사람 영어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역시 나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 영어도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워낙에 관광객이 많아선지 대중교통 기사나 파리 시내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영어는 하는 편이다. 파리를 벗어나 일드프랑스 같은 교외 지역으로 나가면 결과가 좋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간단한 관광 영어 수준이니 큰 기대는 말자. 특히 프랑스어 지명을 영어 독음으로 읽으면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길을 물어보려면 어설픈 영어보다는 지도나 정류장명이 나온 사진을 들이미는 게 낫다. 그럼 적어도 "위.(네.)"나 "농.(아뇨.)", 둘 중 한 대답은 들을 수 있으니.
그래도 길 가다 젊은 사람에게 어설픈 프랑스어로 길을 물어보면 영어로 답해주거나, 가게에서 어버버어버버 하고 있는 당신을 안타깝게 여겨 주인에게 "아저씨, 얘가 이것 좀 사고 싶대요." 정도로 거들어주는 경우는 흔하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영어 학습자가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영어실력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서 어설픈 프랑스어로 질문하면 거만한 표정과 함께 어설픈 영어로 답해주는 경우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식당이 열지 않거나 빨리 닫는 곳이 많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일부 열 뿐이다. 일요일 저녁에 도착하거나 했다면 식당 예약보다는 수퍼마켓. 중심가라면 Carrefour City 라고 하여 이마트 에브리데이 크기의 마트가 곳곳에 있으니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구입하면 된다.
10. 스포츠
지역 연고 스포츠 팀으로는 축구팀 파리 생제르맹 FC, 파리 FC, RC 파리가 있다.
파리는 총 세번의 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기록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파리(프랑스)/역대 올림픽 참고.
11. 기타
19세기 때부터 망명을 온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유명했다. 정치가, 사상가, 작가, 심지어 구 왕족 등 신분에 따라 다양했는데,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 호치민 등 매우 많다. 1979년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터키, 이라크 등을 떠돈 끝에 몇 개월 정도 파리에 머물다가 이란에서 혁명이 터지자 귀국한 바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71년 건축가 김중업이 서울의 도시계획 및 건축에 관한 정부 시책을 비판한 일 때문에 당국으로 부터 찍혀 추방된 적이 있었는대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설계한 공으로 프랑스로 부터 받은 훈장으로 인해 파리로 망명할 수 있었다. 1979년 홍세화 씨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자 파리로 망명하여 20여 년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가 지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그의 생애와 파리에서의 생활을 담은 책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유로 망명을 떠난 이예다는 그의 난민심사 기간에 파리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파리는 '테러의 도시'란 오명도 따라다닌다. 종교나 사상이 다른 망명객들끼리 총알과 폭탄 주고받는 일이 1970~80년대에도 빈번했다. 2015년 11월 13일, 무장괴한들에 의한 테러로 백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문서 참고. 이로 인해 프랑스 수도권에 황색경보, 그 외 지역에 남색경보가 발령됐다. 그래서 프랑스에는 대테러 임무를 전담하는 장관급 부서를 별도로 편성한다.
2017년 7월에 LA와 삼자합의가 이루어지면서 파리가 2024년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어, 1924년에 치러진 대회에 이어 무려 100년 만에 하계올림픽을 다시 열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개최된다면 영국의 런던의 뒤를 이어서 파리는 올림픽을 세 번 치르는 두 번째 도시가 된다. 원래 2012년 올림픽을 두고 영국의 런던과 경쟁을 했으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결정적인 실언으로 인해 결국 런던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파리시가 2022년까지 도시 내 차량 통행을 대폭 줄인다고 밝혔다. 그리고 8월 말까지 도시 내 도로에서 30km/h 속도 제한 정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임신부와 어린이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쥐약의 사용을 규제한 EU 정책으로 인해 최근 쥐 개체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동명의 곤충 때문에 언어유희의 표적이 간혹 되곤 한다. 한미르의 CF에도 이 내용이 나왔다.
12. 미디어에서
도시 경관이 아름답고 영화가 발달한 나라인 만큼 수많은 영화의 무대이다.
오랜 시간 서유럽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의 핵심지역인 만큼 2차대전 배경 대체역사물에서는 매우 고생을 하게 된다. 설령 프랑스 주역 대체역사물이어도 일단 두들겨맞고 시작한다면 파리에서 때이른 시가전이나 참호전을 벌이기 일쑤. 별명인 '빛의 도시'를 패러디하여 빛(물리)의 도시나 빚의 도시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극장판 하트캐치 프리큐어! 꽃의 도시에서 패션쇼...입니까!?
리듬 괴도 R 황제 나폴레옹의 유산: 메인 무대로 나온다.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에서는 주 무대로 등장하며, 빌런 호크모스가 무고한 시민을 세뇌시켜 슈퍼히어로와 혈투를 자주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작이고 오프닝은 제목대로 파리 시내를 담았는데 영상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 - 파리 포위전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1기에서 엘 콘도르 파사가 개선문상 원정 경기로 간 장소로 나온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외국인이 생각하는 파리에 대한 선입견으로 가득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 코미디, 로맨스 드라마. 시즌 4는 2024 파리 올림픽이 끝나고 2024 파리 패럴림픽 시작 전에 공개되기도 했다.
존 윅 4: 일본 오사카와 함께 주요 촬영지가 되었다. 에투알 개선문, 몽마르트르에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 성당으로 오르는 222계단, 케브랑리 박물관 등 파리의 다양한 관광지에서 촬영되었다.
파리의 아파트
파리의 우리동네: 메인 주무대로 나온다.
프롬 파리 위드 러브: 파리를 배경으로 미국인이 다 때려부수는 액션물이다.
포켓몬스터 XY: 칼로스지방 최대의 도시인 미르시티의 모티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