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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장 24-25절. 복음 사역을 위한 고난 Ⅱ. 요약설교
1. 지난 시간에는, <바울 사도가 복음 사역을 위해서 고난당한 내용의 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랑하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복음 사역을 위한 고난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하고, 매 맞고, 옥에 갇힌 일을 총론적으로 말씀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복음 사역을 위해서 고난당한 구체적인 목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바울의 고난 목록은 27가지가 됩니다.
그중에, 오늘 24절과 25절에는, 네 가지의 고난 목록이 나와 있습니다.
24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 유대인들은 매를 때릴 때, 사십 대 이상 때리면 안 된다는 법률을 정해놓았습니다.
성경 신명기 25장 2-3절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때리라. 사십까지는 때리되, 그 이상은 넘기지 못할지니라. 만일 사십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즉, 범죄의 경중에 따라서, 열 대 때릴 사람, 스무 대 때릴 사람, 삼십 대 때릴 사람이 있으되, 아무리 큰 범죄라도 태형을 가할 경우에 사십 대 이상을 때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사십 대 이상을 때리면, 아무리 죄수라도 사람 취급이 아니고, 짐승 취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혹시 실수하여 사십을 넘길까 봐서 하나를 감한 39대를 때리게 했습니다.
2. 이 매는 사실상 채찍형으로서, 가죽끈에 날카로운 쇠나 뼈 조각을 박아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하는 매우 무서운 매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전 집인 미쉬나에는, 먼저 가슴을 열 세대, 다음에 어께를 열세 대씩 두 번을 때린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매를 맞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주님도 십자형을 받기 직전에 이 가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마 27: 26).
3. 지금도 중동에서는 회교도인들이 비슷한 풍습을 집행한다고 합니다.
즉, 사십 대를 때리는데, 첫날에는 사십 대, 둘째 날에는 39대, 계속해서 하나씩 감한 매를 맞고, 39일째는 한 대를 맞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교권 사람들이 구약 유전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4. 문제는 바울 사도가 이렇게 무서운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끈질기게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매를 맞지 않게 하실 수도 있지만, 위대한 바울 사도가 그 매를 맞으면서도 감당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매를 맞지 않는 것이 복일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 매를 허용하시고, 그런 악조건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복음의 위대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5.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과 복음이 얼마나 좋으면, 이런 매를 다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을까요?
과거에 처녀가 총각에게 바람이 나서 한번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부모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도, 총각을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거에 담양 어느 시골 교회에 장로님 딸(배*애)이 총각(최*문)과 바람이 났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야단을 하니까, 총각이 자취하는 방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이 다 학교 선생님이 되어 잘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남자는 장로님이고, 여자는 권사님입니다.
그 자녀들도 두 사람이나 의사가 되고 잘 되었습니다.
또한 근래에 들은 이야기인데, 화순에서 처녀의 아버지는 면장님인데, 그 처녀가 한 동네 총각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총각은 보험회사 사원으로 전주로 발령이 나서 갔습니다.
그런데, 총각 회사에 보험사원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총각이 하루는 처녀에게 어떤 여사원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처녀가 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바로 사표를 내고, 전주 총각 자취방으로 가방을 싸 들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했는데, 지금 그 남자는 광주에서 큰 음식점을 세 군데나 하는 부자로 잘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녀가 총각을 정말 좋아하면, 아무리 가족과 사람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짐을 싸 가지고 총각에게로 가버립니다.
6. 이와 같이 바울도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리 매를 맞더라도, 오직 예수님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체험한 구원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매를 때리고 핍박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숨 내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7.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또한 나는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혀 죽어버렸고,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그래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6:24. 베스도가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정말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다 못해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 내가 미쳤어도 주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
그렇게 예수님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찬송가 작사자인 <파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도 “나와 세상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의 찌꺼기와 벌레와 막대기만도 못한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13-15.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것은 주님이 너무도 좋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 성 춘향(成春香)이가 이 도령(李道令)이 너무도 좋기 때문에 변 사또(卞使道)가 수절을 들라고 해도 안 들고, 감옥에 가두어도 이 도령에 대한 일편 단심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8. 이처럼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일편단심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그만큼 더욱 가까이하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창세기 22장 11-12절에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급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마태복음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과 자손에게 큰 상을 베풀어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바울 사도를 본받아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환난과 핍박이 있더라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므로 큰 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5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
1. 이 태장은 로마의 형벌로서, 사도행전 16장 22-23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이 형벌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태장’이란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로마식 태형으로 길고 큰 몽둥이(rods, clubs)로 치는 무서운 형벌이며, 이 태장을 맞는 중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행 16:22, 37).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선교적 목적을 위해 로마시민의 권리를 포기하기도 했고, 로마 관리들이 죄수 된 자의 신분을 먼저 물어보는 법 절차를 무시하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행 16:37, 38).
2. 예컨대, 사도행전 16장 22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전도시에, 귀신 들려 점치는 여성을 낫게 해주었다가, 이 태장을 맞았는데, 이때, 빕립보 관원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모르고, 태장을 때렸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재판 없이 고문하거나 때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관원들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재판도 없이 마구 때렸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얼마든지 로마 시민권을 내놓고 매를 안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교할 목적으로 이 시민권을 당분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우리는 여기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함부로 세상 권력을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일을 하면서, 세상 권력을 남용하여, 안 믿는 공직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담당직원이 할 수 없이 상관의 압력에 의해서 일을 해주긴 해주는데, 뒤에서는 교인이 그런다고 흉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어떤 신자는 교통법규 등 국가 법률을 위반해놓고도, 권력기관의 신분증을 내놓고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정말 복음 사역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신분증을 사용하고, 신분증을 잘못 사용하여, 복음과 전도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한 번은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어떤 목사님(오*록)이 경목 기자증을 가지고, 저에게도 경목 기자증을 가지면, 교통법규를 어겨도 경찰들이 봐주고, 일반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경찰 취재기자 신분이라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면서 경목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가 교통법규를 어기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경찰들이 욕할 것을 생각해서, 경목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5. 바울 사도는 귀신을 쫓아내는 선한 일을 해놓고 매를 맞으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도하여 믿게 된 성도들, 즉 교회의 명예를 위해서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여, 상관들이 바울에게 용서를 구하게 하고, 빌립보 성도들이 떳떳하게 교회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행 16:37-40)
이처럼 바울 사도가 적절한 기회에 로마 시민권을 사용함으로써, 교회 성도들도 보호하고, 또 바울을 때린 관원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모든 권리를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돌로 맞고 >
1. 이것은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기록입니다(행 14:5, 19).
즉, 바울은 루스드라 전도 시에,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능력있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와서 바울을 장례 지내려고 할 때, 바울 사도는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면서, 루스드라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때 믿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행 16:2)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1.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이 탄 배가 파선한 내용이 자세히 나옵니다.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될 때,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서 14일간 표류하다가 배가 파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큰 풍랑 속에 표류하게 되니, 살 소망이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행 27:20).
그러나, 사도행전 27장의 사건은 AD 59년의 일이고, 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때는 그로부터 3년 전인 56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7장의 파선 사건은 본문을 작성하기 이전의 일입니다.
2. 세 번 파선하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일찍이 세 번이나 파선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굽히지 않고, 꿋꿋이 복음 전도의 사명을 다해나갔던 것입니다.
3.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네, 죽을 고비를 넘기는 어려운 핍박과 고난을 당했어도, 낙심 좌절하지 않고, 다시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여전히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바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철저했다는 것과, 바울은 복음이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복음임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가면서도 전하는 복음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평양 대동강변의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 1866년 9월 5일) 선교사도 죽어가면서 성경을 주고 복음을 전하자, 그 죽음을 보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을 넘어서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이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어버리자 모두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에도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고,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찾아오려고 했습니다. (요 20:1)
보통 사람들은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긴 곳에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군대에서 죽을 고생을 한 사람들도 그 부대 있는 곳을 향해서는 오줌도 싸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도, 다시 살아나면 다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조강지처는 남편이 한때 바람을 피워서 집을 나갔지만, 그 남편이 병신이 되어 돌아와도 맞아들입니다.
그러나 첩(妾)은 남편이 거지가 되고 병신이 되어 돌아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과 거짓 사랑의 차이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모든 복이 굴러오는 줄만 압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이 오고, 성경 말씀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지면, 당장에 욕을 하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체험을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나 하나님 말씀 때문에 박해를 당해도, 변함없이 충성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하여 핍박이나 환난이 일어날 때, 신앙을 버린 사람은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20-21.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받을 때, 배반하고 신앙을 버린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그러나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러기 때문에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뒤로 쓱 물러 가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뒤로 물러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바울 사도를 본받아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환난과 핍박이 있더라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므로 큰 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