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조미숙
올 4월부터 광주 보건대 평생 교육원에서 산림 치유 지도사를 공부하고 있다. 코로나로 중간중간 비대면 수업을 하거나 연기가 되면서 수료가 예정됐던 10월보다 3주나 미뤄져 ,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가 끝나면서 부족한 이수 시간을 채우러 가느라 주말을 반납하고 있다. 가뜩이나 내용도 생소하고 어려운 보건학이나 인체 생리학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강의 내용이나 실습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표준 교재는 내용도 너무 간략하게 되어 있고 오타나 오류도 있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다행히 내년에 바뀐다고는 했다. 거기에 관리자도 수없이 바뀌고 수업 일정이라든가 여러 안내 사항들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되어 수강생들을 홀대한다고 생각해 여러 가지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비싼 수업료와 그동안 투자한 시간을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그런데다 마스크를 쓰기도 했지만 또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수료하게 되어 누가 누구인지 잘 몰라 동기라는 연대감도 생기지 않았다. 여러모로 공부를 시작한 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목포에서 숲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다섯 명과 해남에서 오는 한 명이 한 팀처럼 어울렸다. 북항에서 두 사람을 태우고 남악으로 가 두 사람과 합류해서 한 차로 움직인다. 해남에서 사는 사람은 광주에 집이 있어 금요일이면 미리 광주로 간다. 나이도 비슷해서 돌아서면 깜빡하는 머리를 자랑삼아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한다. 십시일반으로 싸온 도시락 반찬들을 내 놓고 밥 먹는 즐거움은 먼 길을 온 수고로움도, 졸립기만 한 수업의 고통도 잊게 한다. 그럭저럭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수료를 앞두고 있다. 알든 모르든 치뤄야 하는 시험도 바투 다가와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정신없던 시간들이 지나고 좀 한가해져 공부하려고 책을 펼치면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 내용을 읽노라면 어느덧 해야 할 집안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평소 집안 일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게으른 사람이 왜 그리 할 일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거기에 같이 공부하는 동생이 맨날 꼬득인다. 감성이 풍부한 그이는 "가을은 왜 이리 이쁜 거야?" 하며 오전 일 끝나면 자꾸 어디를 가자고 한다. 소풍 가기 좋은 장소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동생 덕분에 눈 호강을 많이 한다.
며칠 전에도 오후에 한가해서 간만에 마음 잡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가까운 단풍나무 숲에 가서 도시락이나 먹고 오자고 했다. 공부보다는 노는 게 더 좋은 난 또 좋아라 따라 나섰다. 어쩌다 보니 모인 네 사람은 모두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하는 언니가 "이 사람들이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공부 안 하고 이러기야?" 한다. "와따! 이런 날도 있어야제. 공부는 나중에 열심히 하면 되제." 하며 너스레를 떨며 떨어지면 ㅇ탓이고 붙으면 내 덕이라며 웃었다. 아는 커피집 사장님이 소풍 잘 다녀오라며 챙겨준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호수를 한 바퀴 걸었다. 수북히 쌓인 상수리나무 잎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는 숲에는 가을에 취한 우리들 뿐이었다.
호수 앞 너른 터엔 수령이 제법 된듯한 애기단풍나무 숲이다. 오후 햇살이 비치자 단풍잎은 영롱하게 빛났다.파란 하늘과 알록달록 물든 잎이 가을 햇살로 더욱 화사해졌다. 이틈을 놓칠세라 너도 나도 휴대폰을 들이밀기도 하고 모델 뺨치는 포즈를 취하기도 하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외진 시골 마을 뒷산인데도 이미 단풍으로 알려졌는지 커다란 사진기를 든 사람, 잠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지금은 아늑하고 조용하지만 유명세를 타면 난개발로 훼손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돌아왔다. 이 좋은 계절에 공부만 하고 있을 순 없다는 동생은 웃고 있지만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 보였다.
이수 시간도 다 채웠고 그 고생하면서 남은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찾지 못하겠다고 이번 토요일을 끝으로 더는 가지 말자고 결정했다. 마지막 수업이라 내가 찰밥으로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다. 지난 번에 무 김치를 담아 넉넉하게 가져 가 나눠 줬더니 맛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미 맛이 검증된 배추 김치와 무 김치에 반찬을 하려고 사 두었던 박나물과 호박고지나물을 준비하면 반찬은 넉넉할 것이고 팥과 콩을 듬뿍 넣어 찰밥을 지으면 맛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창 맛있을 강낭콩을 사러 마트에 갔더니 없어서 팥을 사려고 봤더니 1킬로그램에 19800원이나 했다. 너무 비싸서 망설이다가 그래도 찰밥엔 팥이 들어가야 제맛이라 한 봉지 사고 또 팥만 넣으면 섭섭해서 서리태까지 한 봉지 더 샀다. 나물에 넣을 들깨가루도 하나 사서 집에 돌아와 팥과 콩은 물에 담그고 나물은 삶아 두었다. 미리 만들어 둔 육수를 넣고 들기름에 마늘과 조선 간장으로 양념을 해서 들깨가루로 마무리한 박나물을 야들야들 만나게 됐다. 호박고지나물도 같은 방법으로 만들고 김치는 넉넉하게 담아 준비했다. 아침잠이 많으니 미리미리 준비해야 다음날 수월하게 외출 준비를 할 수 있다. 다섯 명 분 외에 또 숲해설가 동기인 광주 사람들에게도 조금이지만 나눠 먹으라고 따로 담았다.
공부 좀 하고 나서 준비하느라 밤이 늦었다. 손목이 자주 아파 전날에도 파스를 붙이고 있었는데, 이것저것 하고 나니 통증이 심했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줄 친구들 생각에 아픈 줄도 몰랐다. 점심 준비 해 간다는 카톡에 다들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기에,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또 맛있게 먹어 주면 나도 행복하다고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도란도란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교정의 유난히 새빨갛고 샛노란 단풍나무 두 그루와 노랗게 불타는 백합나무 한 그루가 가을의 운치를 더하는 가운데 맛있게 먹는 친구들 덕분에 나도 덩달아 배부르게 먹으니 오후 수업이 걱정이 되었다. 노곤하니 졸릴 게 뻔했다.
졸음과의 사투를 끝내고 쉬는 시간을 틈타 우리는 작당하고 땡땡이를 쳤다. 간만에 훤한 대낮에 돌아오는 길은 억새가 춤추고 노란 은행잎들이 팔랑이며 반겼다. 아침엔 보지 못한 풍경들이었다. 땡땡이를 친 즐거움과 이젠 광주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는, 끝났다는 해방감에 기분은 날 듯했다. 그 기분의 여세를 몰아 동생이 커피를 사겠다고 해 까페가 나오면 들리자고 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가까운 곳에 갔는데 간판을 보니 시골 다방 같다고 그냥 돌아섰다. 다시 예쁜 까페를 찾아가 커피를 마시고 근처 숲을 거닐었다. 이 좋은 가을 날 하루가 붉은 노을로 물들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기도 했고 때론 강의 내용에 짜증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마치게 되어 다행이었다. 비록 지금은 국가고시라는 시험의 무게가 두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르기는 하지만 이 공부때문에 오늘처럼 일탈하여 가을의 한나절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더더욱 함께하는 친구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또 시험까지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지만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첫댓글 멋진 순간들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와~~
하룻밤새 그 많은 음식을 했군요.
주부 9단이시네요.
한 사람의 수고로움으로 여러 사람이 행복한 나들이였겠어요.
저도 그 팀에 끼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밥 한끼 대접할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보니 저도 작년 겨울 한국어교육과정을 공부하던 중 실습 과정이 잠시 떠올라 살포시 웃습니다. 45시간을 이수해야 했는데 토요일마다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들과 수업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공부는 뒷전이고 만남에 충실했었지요.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죠. 하하!
숲 전문가 조 선생님! 교육청 옆 찻집 생각나네요. 올해 가기 전에 한번 뵈요.
목포 오면 연락하세요. 짬뽕에 미치다 가서 짬뽕 먹고 찻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 하시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