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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9일 오늘의 역사
2025년 베트남 하롱베이 유람선 전복 29명 사망 14명 실종
2024년 중국 산시성 폭우로 고속도로 교량 붕괴 11명 사망 30여명 실종
중국 북중부 지역인 산시성의 상뤄(商洛) 시의 한 고속도로에서 계속된 폭우로 인해 발생한 홍수로 교량 일부 구간이 내려앉으면서 차량 20여대와 30여명이 강물에 떠내려갔다. 이 사고고 1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실종 되었다
2022년 첫 국산 전투기 KF21 시험비행 성공 세계8번째 초음속 개발
방위사업청은 오늘 오후 4시 13분을 기해 첫 국산 전투기 KF-21 비행에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첫 비행의 조종간은 공군 제52시험평가전대 소속 안준현 소령이 잡았습니다. 오늘 KF-21 시제기는 오후 3시 40분쯤 이륙해 4시 13분 착륙했습니다.
방사청은 "이번 최초비행을 통해 한국형 전투기 개발은 비행시험 단계에 돌입하게 됐고 2천여 회에 달하는 비행시험을 통해 비행 영역을 확장하고, 각종 성능 확인 및 공대공 무장 적합성 등을 확인하면 2026년 체계개발이 종료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2022년 높이뛰기 우상혁 한국육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은메달
'2022 오리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 출전해 최종 2m35을 기록하며 2위를 기록, 은메달
2021년 세계에서 12번째로 높은 해발 8047m급 브로드피크 완등에 성공한 ‘열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57) 대장이 하산 도중 실종
김 대장은 지난 18일 오후 4시58분(한국 시각 오후 8시58분)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북동부 카라코람산맥 제3 고봉인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김 대장은 정상 등정 뒤 하산 과정에서 조난을 당했다.
김 대장은 해발 7900m 부근에서 조난된 뒤 현지시각으로 이날 오전 9시 58분 구조 요청을 보냈다. 당시 러시아 구조팀은 김 대장이 손을 흔들며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김홍빈 대장이 장애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했지만, 하산 도중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구조활동을 펼쳐 15m 정도를 끌어 올렸지만, 김 대장은 암벽 등강기(주마)를 이용해 올라오던 중 줄이 헐거워지면서 등선 아래쪽으로 추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김 대장은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단독 등반 과정에서 사고로 열 손가락을 잃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2006년 가셔브룸 2봉(8035m)을 시작으로 15년에 걸쳐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에 모두 올랐다.
김 대장은 현지시각 18일 오후 4시 58분(한국 시각 오후 8시 58분)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하면서 장애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2018년 서울중앙지법 민사30부(재판장 이상현) 세월호 참사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청해진해운에 희생자 1인당 2억원, 가족 1인당 500만-8천만원의 위자료와 희생자들의 예상수입 지급 판결, 국가의 구체적 법적 책임은 불인정
2017년 우루과이 세계에서 처음 마리화나 생산 판매 소비 합법화
2016년 북한 남쪽 향해 탄도미사일 3발 발사
2016년 스위스 마임배우 디미트리 야코프 뮐러 세상 떠남(80세)
2013년 유네스코 인천시를 세계 15번째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
2009년 7월 19일 독일 아우토반 259중 추돌사고
2009년 7월 19일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인 독일 아우토반에서 259대의 자동차가 연쇄 추돌하는 사상 최대 사고가 발생했다. 19일 오후 하노버에서 페이테 구간의 아우토반에서 259중 추돌 사고가 발생해 10명이 중상(重傷)을 입고 66명이 다쳤다.
이날 사고는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들이 폭우에 미끄러지면서 발생했다. 날도 어두워 운전자들이 앞서 추돌한 차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속도를 유지해 대형 사고가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백대의 자동차가 엉켜있는 사고 현장에는 300여대의 구급차와 소방차가 출동해 밤새 구조작업을 벌였다. ‘고속 운전자들의 최후 피난처’로 불리는 독일 아우토반의 너비는 18.5~20m이며, 총연장 1만2000㎞에 이른다.
2007년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 신도 23명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납치됨
분당 샘물교회 청년회 소속 봉사단 20명은 해외 봉사활동을 위해 7월14일 아프간 카불에 도착했다. 이들은 7월15~18일 마자리 샤리프 지역에서 의료봉사와 어린이 봉사활동을 했다.
7월19일 샘물교회 봉사단 20명과 안내자 3명 등 23명(남자 7명, 여자 16명)이 전세버스를 빌려 카불에서 남부 칸다하르로 가던 중 이들은 가즈니주 카라바크 인근 자불-칸다하르 고속도로 상에서 탈레반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됐다.
7월20일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7월21일 낮 12시까지 아프간 주둔 한국군이 철군하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한국 정부가 "연말에 철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탈레반은 새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탈레반은 7월22일 19시까지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포로)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탈레반은 석방을 요구하는 수감자 수를 23명에서 가즈니주에 수감된 탈레반 수감자 55명 전원으로 늘렸다.
한국 정부는 피랍자 23명 중 여성 18명을 우선 석방시키자고 제안했다. 탈레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7월25일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다. 탈레반은 하루 안에 수감자 8명이 석방되지 않으면 다른 인질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탈레반이 협상시한을 수시로 변경하고 인질·탈레반 수감자 맞교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7월31일 심성민씨가 살해됐다.
탈레반은 수감자 석방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없을 경우 나머지 인질을 살해하기 시작할 것이라 위협했다. 또 한국과 미국의 군사작전이 시작되면 인질을 살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은 8월13일 여성 인질 2명이 석방되고 8월29일 탈레반은 피랍자 19명 가운데 한국인 인질 12명을 3차례에 걸쳐 석방했다. 8월30일 남은 인질 7명이 석방됐다. 이로써 43일간의 피랍사태가 종결됐다.
2001년 헌법재판소, 전국구 선출방식 위헌 결정
헌법재판소(헌재)가 선거법의 비례대표(전국구) 의석 배분 방식(189조 1∼7항)과 기탁금 납부조항(56조 1항 등) 등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현행의 비례대표제가 유지되는 한, `1인 1표제`도 위헌이라는 한정(限定) 위헌 결정도 함께 내렸다. 따라서 일정 득표를 못하면 기탁금을 국고에 귀속하도록 한 조항(57조 1항 등)과 지역구 득표비율에 따라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토록 한 조항 등도 자동적으로 효력을 잃게 됐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조순형 의원 등은 이 같은 선거법 조항이 위헌이라며 2000년 2월 헌법소원을 냈었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라 앞으로 비례대표제를 유지하려면 지역구 의원과 정당에 대한 투표권을 함께 주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인 `1인 2표제`로 하거나, `1인 1표제`를 유지하려면 비례대표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선거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헌재가 현행 비례대표제 방식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은 방식이 유권자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때문이다. 유권자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자가 엇갈릴 경우, 어느 쪽을 기준해서 투표하든 절반의 선택권은 뺏길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1999년 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발표’(그룹해체 시작)
정주호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장병주 대우 사장이 1999년 7월 19일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을 발표해 이른바 대우그룹사태가 시작됐다. 발표는 대우그룹 해체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발표의 주요 골자는 1.김우중 회장은 그룹 구조조정을 조기 완결하고 자동차 부문을 정상화한 후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2.대우그룹은 자동차 중심의 전문그룹으로 재편하고 3.대우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 8조8천억원어치와 김우중 회장의 교보생명 지분 150만주 등 김회장 개인재산 1조3천억원어치를 합한 총10조원 규모의 추가담보를 채권단에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우그룹 채권단은 이날 채권단회의를 열어 대우그룹에 4조원의 신규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기업어음과 회사채 등 11조여원의 단기여신 만기를 6개월간 연장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채권단은 8월 16일 다시 재무구조개선 수정약정을 체결해 대우그룹은 본격적인 그룹해체 단계에 들어갔다. 25개 계열사, 8만여명의 종업원을 둔 제2의 재벌이 전망이 불투명한 자동차 소그룹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워크아웃 대상 계열사 사장단 14명과 함께 11월 1일 공식 사퇴했다.
1998년 미국 텍사스주 44℃ 기록, 5월말부터 고온으로 80명 사망 15억$ 피해
1995년 일본 대북제공 쌀 8천 톤 첫 출항
1993년 서울평화상 폐지
1992년 김달현 북한 부총리, 판문점 경유 서울도착
1989년 야루젤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선출
야루젤스키 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이 신설된 국가원수직인 대통령에 선출됐다. 폴란드 상하 양원 합동회의는 1989년 7월 19일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에서 공산당 지도자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를 당선에 필요한 표수보다 1표가 많은 아슬아슬한 표차로 선출했으며, 이어 야루젤스키는 의원들 앞에서 취임선서를 한 후 개혁의 계속을 다짐했다. 단일후보로 출마한 야루젤스키에 대한 이날 찬반투표결과는 찬성 2백70표, 반대 2백33표, 기권 34표였는데, 5백37표의 유효투표 가운데 당선에 필요한 표수는 2백69표여서 1표차의 아슬아슬한 당선이었다. 1981년 폴란드 자유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강권으로 폴란드를 통치해 온 그가 대통령에 선출되자 자유노조의 강경파 의원들은 야루젤스키를 지지하고 나선 온건파를 강력 비난해 자유노조도 내분에 휘말렸다.
1988년 납북-월북작가 1백여명의 해방전 문학작품 출판 허용(해금)
1985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개통 (동래구 청룡동∼부산진구 범7동 광장간)
1985년 美여교사 우주비행사 선발
30대 중반에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여교사. 이것이 크리스타 매콜리프 (1948~1986)의 자기소개서였다. 굳이 특별한 걸 찾으라면 학창 시절 아폴로 계획을 보며 유난히 감동을 받았다는 점과 매우 열정적이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인기 교사라는 점 정도였다.
어릴 적부터 여성으로선 드물게 우주에 관심이 많았다. 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지구상의 무엇이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 궤도에 올라가는 것에 매료됐다.
고교에서 미국사와 법,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는 1984년 교사를 우주왕복선에 태워 우주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우주에서 진행하는 강의를 지구상으로 중계한다는 게 미 항공우주국(NASA)의 계획이었다. 매콜리프는 지원했고, 1985년 7월 19일 첫 민간인 우주비행사로 선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경쟁률은 1만1000 대 1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86년 1월 28일. 그가 탑승한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이륙 후 75초 만에 폭발했다. 매콜리프는 9세 된 아들 스콧이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빌려 준 개구리 인형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그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후 미국 곳곳에 매콜리프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가 여럿 들어섰다.
1982년 한국-자메이카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킹스턴)
1981년 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전 우승
1980년 은행-보험-증권기관 임직원 431명 숙정
1980년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전해인 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 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철퇴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독 일본 등 스포츠 강국이 올림픽대회를 보이콧함으로써 스포츠제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만 것이다. 당초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대회 스타는 소련의 남자체조 선수 디디아틴이었다. 그는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얻어 가장 많은 메달 획득수를 기록했다. 이로써 소련은 6백30개의 메달 중 1백95개, 1백27개의 금메달 중 80개를 따내며 1위를 차지했다.
1979년 김진호(女),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60m 더블라운드 세계신기록 수립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1977년 등소평 복권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이듬해 1977년 7월 22일 `부도옹` 등소평이 세 번째로 부활하여 당 부주석으로 복권됐다. 등소평은 1976년 제1차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 세 번째 실각했었다. 첫 번째 실각은 1933년 왕명 등 좌파의 당 중앙에 의한 모택동 비판 때문이었고, 두 번째 실각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였다.
급진적인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파탄을 가져온 1960년대 초 등소평은 `백묘흑묘론`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주의적인 경제조정책을 중시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 다음가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제2의 실권파`로 지목되어 실각했었다.
연금과 노동으로 연명하다 1973년에 모택동의 배려로 국무원 부총리로 부활, 1975년에 중앙군사위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 당 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강청 등 `4인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제1차 천안문 사태 때 배후자로 지목되어,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1975년 세계최초 국제해양박람회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림
1967년 김도연 박사 별세
1967년 정읍 무장공비사건 발생
1965년 이승만 전(前)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귀국해 이상재 등과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 학교를 세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됐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 마우나라니병원에서 요양 중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62년 미국 나이키제우스 미사일, 가상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요격 성공
1962년 美 건물 13층 높이의 `맘모스`기구 발사에 성공
1957년 미국 네바다서 원자로케트탄 첫 실험
1956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한국 등의 유엔가입 촉구에 관해 언급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인구 36만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천m, 1만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역도·복싱·사이클·레슬링·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5명에 사형 판결 (8월13일 집행)
1950년 미국 국무성, 한국사태에 미국정책(한국백서) 발표
1949년 프랑스, 라오스 독립 승인
1947년 여운형 피살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 몽양 여운형이 탄 자동차가 혜화동 로타리를 돌던 순간 권총소리 3발이 울렸다. 한발은 여운형의 오른쪽 어깨, 또 한발은 후두부에 관통되어 몽양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현장에서 도주한 범인 한지근은 사건발생 77시간만인 7월 23일, 송진우 암살범으로 복역중에 있던 한현우 집에 숨어있다 경찰에 체포되어 배후를 더욱 궁금케 했다. 경찰발표에 의하면 범행 한달반 전, 평양에서 월남한 한지근은 평소 여운형을 국론분열자로 지목, 기회를 보던 중 이날 범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한지근은 1947년 10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법원은 11월 그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한지근은 개성소년원에 수감중 한국전쟁때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1945년 일본기독교조선교단 발족, 조선의 기독교가 일본기독교에 종속됨
1938년 최초의 우리말 사전(문세영) 발간
1933년 계초 방응모,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26년 상하이 교포 200여명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조직
1924년 조선일보, 편집방침을 변경(1면에 뉴스를 게재)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세계대회 개최
1907년 고종 강제퇴위(양위조칙 발표)
양위(讓位)의 핍(逼).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본은 한국 지배의 강화를 꾀하고자 황태자로 하여금 국정을 대리케 하는 황태자 국정대리(國政代理)의 조칙(詔勅)을 내렸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이토오는 대리는 곧 양위(讓位)라 주장, 마침내 광무11년 오늘 양위의 조칙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20일에는 고종이 재위43년만에 물러나고, 고종의 둘째 아들 척(坧)이 제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대한제국(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제 융희(순종)이었다.
* 칠적(七賊) : 조선26대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국권을 일본에 게 넘겨 주는 칠조약(七條約)을 맺게한 일곱 사람의 대신.
곧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탁지 부 대신 고영희(高永喜)・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법무 대신 조중응(趙重應)・학부 대신 이재곤(李載崑)・농상공부 대신 송병 준(宋秉畯)을 말한다.
1896년 영국 소설가 조셉 크로닌 태어남
1882(조선 고종 19) 임오군란 일어남,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1870년 7월 19일 독일제국을 형성하려는 비스마르크와 이를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 사이에 발생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인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 국왕 선출을 둘러싸고 양국간의 불화가 불거졌고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자극시킬 목적이었던 엠스전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5일 후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지휘한 프로이센은 북독일과 남독일제국의 지지를 얻어 4주 만에 바젠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무찔렀고 급기야 프랑스국내까지 쳐들어갔다. 그 후 프랑스는 나폴레옹 황제까지 직접 가담한 스당전투도 패하고, 마침내 9월 2일 프랑스 군대는 프로이센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후에도 프랑스국민들은 프로이센에게 완강히 저항했으나 10월 27일에는 메츠가 함락되고 1871년 1월 28일에는 파리마저 함락됐다.
보불전쟁의 결과로 2월 26일에는 평화조약이, 5월 10일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나 되는 전쟁배상금을 독일에게 지불해야했고, 알자스-로렌 지방도 넘겨줘야했다. 또, 1871년 1월 28일에는 프로이센의 빌헬름1세가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의 함락으로 태평천국의 난 종식
1859년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한 언더우드 선교사 출생
1848년 美 뉴욕주 세니카폴스서 `여성권리대회` 개막
1846년 최초의 광도성표인 하버드 광도측정법을 확립한 미국의 물리학자 피커링 출생
1840년 칠레의 대통령(1889-91) 발마세다 출생
1834년 프랑스 화가 드가 출생
1814년 권총 발명한 미국 발명가 콜트 태어남
1799년 로제타 스톤 발견
1799년 7월 19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나일강변 전략요충지 로제타에서 요새 터 파기를 하던 중, 한 장교가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가로 72㎝·세로 114㎝ 크기의 검은 현무암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돌에는 54행의 그리스 문자와 이를 번역한 이집트 상형문자, 서민들이 즐겨쓰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중요한 돌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건만 2년 뒤 영국군에 패배하는 바람에 돌은 영국으로 넘어가 대영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때까지도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은 터라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프랑스의 샹폴리옹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해독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상형문자가 `의미`를 표현하는 표의(表意)문자라고 생각한 데 반해 샹폴리옹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表音)문자일 수 있다며 주류와는 다른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돌에 쓰여진 그리스 문자는 돌이 기원전 196년에 제작됐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비임을 확인해주었다. 상형문자에도 반드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이 들어있을 것으로 믿은 샹폴리옹은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한 기호에 주목했다. 어렵게 해독한 결과 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제2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린 오벨리스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도 찾아냈다. 이로써 로마인의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이집트 역사에서도 생생하게 살아나게 됐다.
샹폴리옹의 발음기호 찾기는 1822년이 되어서야 27개 파라오(왕)의 이름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이집트 5000년의 신비가 풀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1455년 세조, 단종 폐위하고 즉위
이조 제4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제6대)을 지지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1455.7.19. 왕의 자리에 올라 세조(7대)가 되었다.
향후 13년 간 나라를 다스린 세조는 정치․군사․문화면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075(고려 문종 29) 요 나라 사신과 국경조사 획정
64년 네로 황제 때 6일간의 로마 화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