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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5
3월5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이 방에 함께하고 있는 대구교구 형제자매들을 위해 묵상글 읽기 전에 '코로나19' 잘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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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의 모델, 에스테르 왕비>
에스테르 왕비가 곤경 중에 바쳤던 기도는 참 기도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하느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에스테르기 4장 17절)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 안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담겨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녀가 올리는 기도의 분위기를 보십시오. 정말이지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극히 겸손한 태도가 돋보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기꺼이 들어주실 참 기도의 전형이고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 찬 기도,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는 풍성한 영적 결실을 맺게 합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주님을 향한 절박한 외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기도자는 기도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이 바치는 기도에 대한 주님 측의 즉각적인 응답 유무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참 기도는 한 인간과 주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솔직한 대화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꿈꿉니다. 오늘 내가 감내하기 힘든 이 참혹한 현실이 내가 바치는 기도를 통해 순식간에 변화되기를 말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무지막지한 고통이 단 3초 만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적을 꿈꿉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기도는 아직 갈 길이 먼 기도입니다. 참된 기도는 동전을 넣는 즉시 원하는 물건이 ‘투둥’하고 내 눈앞에 떨어지는 자동판매기가 절대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유년기 시절 자주 머릿속에 그렸던 요술방망이처럼 바닥에 한번 내리치면 꿈에 그리던 우리의 소원이 순식간에 성취되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긴 여정입니다. 참된 기도는 마음 내킬 때 오랜만에 한번 길게 바치고 나서 한 달 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할 때나 병들 때나 상관없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할 소통이요 대화입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요 바라봄, 경청이요 하소연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 옛날 에스테르 왕비가 보여준 모범입니다. 심심하니 소일꺼리 삼아 적당히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바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삶 전체를 바쳐 지극정성으로 바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지금 내 눈앞에라도 현존하시는 것처럼 생생하고 솔직하게 바치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감사하다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지금 너무 고통스러우면 너무 괴롭다고 주님 앞에 외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모두가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았을 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너무 외롭다고, 결국 주님 당신 밖에 없다고, 그러니 끝까지 나와 함께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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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웃에게 주려는 마음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 보니 여행을 못 했는데 세계 일주를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러자 천사가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아봤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는 당황하며 “그 동안 두 분이 열심히 살아서 드리는 혜택인데, 소원을 안 들어드릴 수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루어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참 이상한 소원도 다 있네요.”라면서 남편을 향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런데 젊고 예쁜 여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청할 수도 있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고 청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함께 여행 갈 것을 청했는데 남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청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청하는 것이 저주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고 임언기 신부가 간암 말기로 임종이 임박한 오랜 냉담 신자에게 종부성사를 주러 갔을 때, 그 환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 죄 없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냥 죄 없는 것 같아도 용서만 청하면 사제가 알아서 다 해 주는데도 끝까지 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평소에 남에게 무언가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여겨야 무언가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복음 바로 위에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이미 남에게 아무 것도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받을 자세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는 말로 끝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며 미운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성체와 같은 거룩한 것을 주어도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주지 않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마귀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 청하면 바로 용서받고 구원받는데도 아무것도 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까지 양심이 그 가책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양심은 “너도 안 주면서, 뭘 청하냐?”라고 말합니다. 청하면 다 받을 수 있는데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양심상 청하지 못하고 그러다 지옥까지 가면서도 구원을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시다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황금률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청하라고 하시며 남에게 해 주라고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하기 위해서는 나도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 이웃에게 나의 것을 주려는 마음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지옥문 앞에서 구원을 청할 수조차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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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7-12 :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간단히 요약하신다.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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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됩니다. 또한 “누구든지” 그렇게 청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청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청하고 유익한 것을 청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청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악한 것이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잘 알려진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은 당시 유명한 라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의 자세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이 전하는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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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고 찾는 그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고, 너희가 두드리는 그 문을 반드시 열어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것을 받으려면 청하고, 찾아라. 또 아버지께서 열어주시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문을 두드려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다.”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앞의 말씀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그것을 청하여라. 청하는 사람만 그것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그것을 찾아라. 찾는 사람만 그것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시는 그 문을 두드려라.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 그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청하지 않으면 주시는 것도 못 받게 됩니다.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일이 ‘먼저’이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이 ‘나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이 ‘먼저’이고, 우리가 청해서 받는 일이 ‘나중’입니다. 영성체가 좋은 예입니다. 사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성체를 들고 제단에서 내려갑니다. 그 성체를 받아먹으려면 사제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성체를 주는 일이 ‘먼저’이고, 성체를 받는 일이 ‘나중’입니다. 만일에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그것은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사제가 찾아가서 성체를 줍니다. 그 경우에도 영성체를 하겠다는 능동적인 의사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문’의 경우에는, 아버지께서는 이미 하늘나라 문의 자물쇠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잠긴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잠금 장치가 풀려 있는 그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예수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어떻든 ‘좁은 문’이라고 해도 ‘이미 열려 있는 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받고 있는가? 청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꾸준히 성실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혹시 혼자 있을 때는 기도하지 않고, 성당에서 미사 참례할 때만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심으로 하는 말과 습관적으로 하는 말은 분명히 다르고, 듣는 쪽에서 그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때와 습관적으로 할 때의 차이, 또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때와 습관적으로 할 때의 차이...... 우리는 자신이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아버지께 청하려면 ‘가장 좋은 것’을 청하여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이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이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도 하느님의 응답의 한 방식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을 못 받을 때,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간청이 올바른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때’가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받기를 바라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가 가장 좋은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법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이 “내가 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받고 싶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1) 우리는 ‘나에게만’ 좋은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안 되고, ‘모두에게’ 좋은 것을 청해야 합니다.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을 청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일이고, ‘죄’입니다.
2)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남에게 베푸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하나만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생활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을 받는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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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주홍 디모테오 신부님]
우리는 종종 길에서 가게에서 집에서 어떤 것을 해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부모님의 바지를 잡고 늘어지던지 아니면 땅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씁니다. 어떤 아이는 마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댑니다.
처음에는 그런 아이들을 보면 시끄럽고 그래서 짜증이 나기도 했고 그런 행동을 그냥 내버려 두는 부모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역시 그러한 시기를 거쳤고 이 시간 함께 하시는 애청자 여러분도 그런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어린 시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가 무언가를 매우 갖고 싶어서 떼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을 갖고 싶어서 떼를 쓰다가 심지어는 밥도 굶어가며 서럽게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울고 난 후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저 역시 그렇게 그것을 갖고 싶어서 떼를 썼지만 울음 뒤에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잠이 들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저도 그랬지만 어린 아이들이 떼를 쓰는 것은 아무에게나 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그 아이들이 떼를 쓰는 대상은 주로 그 아이들의 부모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란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고 가장 위대한 존재였기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우쳐 주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고, 해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리가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며 두드려야 하겠습니까? 나의 이익을 위한 돈, 명예, 권력, 출세입니까? 나를 위한 행복과 건강과 기쁨입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참되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힌트를 한 가지 주십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선 우리에게 건네주신,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 머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건네주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어떤 분은 율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법이란 것은 우리를 편하게 하기 보다는 우리를 속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우리를 속박하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랑에 대한 정신입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받기 위해서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야합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가 말하는 정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는데 더 매달리며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빵과 생선이 아니라 오히려 돌과 뱀을 달라고 하느님께 억지를 부리다 지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분명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쁨과 행복일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과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살아 숨 쉬는 분이십니다.
다른 곳에 정신을 쏟을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분께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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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해 요한보스코 신부님]
<염치불구하고>
수화기를 들었지만 번호를 누르기가 영 힘듭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호흡을 한 번 길게 해봅니다.
‘…내가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맞아 죽을 일도 아니고 까짓 전화 그거 한 통 못해! 안 된다고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끊으면 그만이지, 에잇 전화하자.’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고 번호를 확인합니다. 막상 번호를 누르려다가는 망설입니다. ‘과연 선배 신부님이 도와주실까?’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 전화를 겁니다.
“여보세요?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백남해 신붑니다. 건강하시지요?”
“어, 그래 웬일인가?”,
“저, 다름이 아니라 복지관 후원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 그래 언제든지 한번 와 도와줄게. 힘내고. 좋은 일 하기도 수월치 않은 거야. 뭐, 말 나온 김에 내일 와, 도와줄게”,
“예, 신부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냥 전화 한 통 하면 흔쾌히 도와주실 건데 망설이고 의심하고 불안해 하고….
장애인 복지관 일을 하다 보면 도움을 받을 일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교구 주소록을 펴놓고 신부님과 본당을 찬찬히 훑어봅니다.
‘어떤 신부님께 전화를 드려보나. 이분이 마음씨가 좋으실까? 저분이 괜찮으실라나….’ 한참을 훑어보다 몇 분이 물망에 오르면 주소록을 뚫어져라 노려봅니다. 그러다 한 분의 이름이 서서히 붕 떠오르면 수화기를 들고 호흡을 길게 가다듬은 후 번호를 누릅니다. 다시 내려놓기 다반사지만….
도와 달라고 전화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시골 교구에서는 본당에 도와 달라고 하기가 염치없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전화를 드리면 대부분 신부님들이 흔쾌히 도와주십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며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하구나 싶습니다.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올리기가 두렵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자꾸 달라고만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염치불고하고 또 기도드립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만 믿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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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길 안젤로 신부님]
“청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 그러면 받고, 얻고, 열릴 것이다.”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좋은 가르침도,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결핵 요양원에 “희망이 너를 구원하리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결핵 요양원에는 이젠 거의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간 머물다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병이 호전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결국은 죽어 없어지고 말 인생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 그와 반대로, “인생은 좋은 거다. 산다는 것은 좋은 거다.”
가수 김국환 씨의 “타타타” 노랫말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이 일어날까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쳤습니다. 희망하는 사람, 꿈을 이루려는 사람은 그런 희망과 꿈 때문에 그런 사람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두 사람이 사막에 떨어졌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그냥 거기서 주저앉아 절망 속에서 죽음을 기다렸습니다만, 다른 한 사람은 그냥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사막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쥐 두 마리가 각각 우유 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다가 죽어버렸고, 다른 한 마리는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유가 엉겨 버터가 되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마지막 까지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인생이 허무하고 짧고, 고통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웃고, 즐기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하느님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만일에 있다면 어떡할 겁니까? 있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없다면 그것으로 괜찮지만, 없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있으면 그땐 늦은 것입니다.
오늘을 아름답게 사십시오.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십시오. 숨을 쉴 수 을 때, 심장이 박동하고 있을 때, 인생을 아름답게 사십시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가난하다면 가난이 주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거저 그런 사람이라면 그저 그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최대한 누리십시오.
인생을 즐겁게 살며 행복을 찾으십시오. 언제 어디서든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경제학은 가장 적은 것으로 가장 큰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경제학입니다.
지난 가을엔 인근 산을 많이 누볐습니다. 작은 새는 낟알하나로 즐겁게 노래했고, 다람쥐는 도토리 한 알로 즐겁게 놀았습니다. 모든 자연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무언가 늘 더 가지려 하고 즐겁게 살 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청하라는 말씀은 무엇인가를 자꾸 채우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것이 올바른 청원입니다.
진인사대천명..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면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맡긴다는 것입니다. 빵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주 적다해도 그것을 가지고 나누려고 하면 아주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빵 수천 개를 가지고도 단 한 사람과도 나누지 않는 사람은 빵과 함께 썩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작은이들의 소망은 늘 채워집니다. 여러분, 늘 소망하십시오. 여러분이 작을수록 더 소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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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식점에 가면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옵니다. 메뉴를 보면서 가격도 보고, 음식의 종류도 보고, 함께 한 사람과 메뉴를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메뉴를 보고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격을 먼저 생각하고 음식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정하는 음식을 따라서 정합니다. 저는 꼼꼼하게 메뉴를 보고 결정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정한 걸 따라서 정하곤 합니다. 생각보다 맛있는 경우도 있고,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일하면서 평화신문이 영적인 메뉴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꼼꼼하게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관심 있는 부분만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쁘기 때문에 평화신문이라는 영적인 메뉴는 보지만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좀 더 좋은 메뉴를 준비해서 많은 분들에게 영적인 기쁨을 주고 싶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따끈따끈한 신문이 나옵니다. 2시간 정도면 신문의 모든 내용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목체험, 강론, 독자투고,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교황님 소식, 교회 소식, 영성 등 다양한 메뉴가 있습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읽는 메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입니다. 4월에 사도행전의 무대인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뉴욕에서 가브리엘 행전을 쓰고 싶어서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한 곳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이교도에게 끌려가기도 했고,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곳곳에서 천사들을 만났고, 협조자를 만났습니다. 이창훈 소장님의 사도행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2000년 전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입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저의 집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순교자들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뎌진 저의 신앙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형제가 순교하기도 했고, 아버지와 아들이 순교하기도 했고, 부부가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스스로 체포되기도 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도행전 이야기와 순교자들의 약전은 제게 용기를 주었고, 제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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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청원>
마태오 7,7-12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청원>
당신만을 바랍니다
오직 당신으로 말미암아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게
아무 것도 주지 마소서
당신께서 주신 것에
마음이 홀려
당신을 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나
당신께서 제게
주고픈 것이 있다면
마음껏 주소서
다만
제 안에 쌓여 썩지 않고
저를 통해서
벗들에게 나눠지도록
저를 나날이 허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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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누구나 그렇듯 저는 어린 시절 산타할아버지를 믿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울지 않으면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에 저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주시리라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께서는 제가 동생과 싸우거나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마다 자꾸 이러면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가 오지 않으리라는 협박을 하곤 하셨습니다.
착한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산타할아버지는 매해 성탄이 다가오면 제 머리맡에 선물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타 할아버지가 자꾸만 제가 원하지 않는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감 로봇도 갖고 싶고 좋은 자동차도, 멋있는 비비탄 총도 갖고 싶은데 이 할아버지는 도대체가 매년 책만 가져다 주었습니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책을 가져다주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다르겠지, 기대해 보지만 어김없이 놓여있는 선물은 책이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위인전 세트를 어떤 때에는 성인전 세트를 또 어떤 때에는 동화책 세트를 가져다주니 이러다 고학년이 되면 문제집 세트를 갖다 주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날, 소포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배달원 아저씨의 손에는 커다랗고 무거운 상자가 들려져 있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 문학 전집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배달된 소포에 당황하신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을 앉혀 놓고는, “이제는 고백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 산타할아버지는 세상에 없단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왜 그렇게 산타할아버지가 책만 갖다 줬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진 것처럼. 한때는 그러한 산타할아버지가 아니,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는데 사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어린 시절 그렇게 해서 읽게 된 다양한 책들이 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음을 날이 갈수록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받았던 세계 문학 전집과 동화 전집들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 책들은 저에게 많은 추억과 상상력을 남겨주었습니다. 더불어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글을 쓰는 습관도 들였으니 이 모든 게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때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래 어린 아이들은 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들을 원합니다. 한 끼의 따뜻한 밥보다 달콤한 초콜릿을 더 좋아하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게임이나 만화에 훨씬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러한 것들이 아이에게 해악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소개해 주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할지 애써 타이르곤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는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중심에는, “하느님이 정말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라는 질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치 우리가 원하는 기도가 즉각즉각 모두 이뤄질 것만 같은 이 말씀은 매번 주님께 간절한 청을 드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보충 설명을 해주십니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스 신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티토노스라는 멋진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가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신들의 왕 제우스가 에오스 여신에게, “네 애인에게 줄 선물을 무엇이든지 청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에오스는, “내 애인이 영생을 갖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티토노스는 병이 완치됩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뿐 그는 죽지만 않을 뿐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추하게 늙게 되었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즉, 티토노스에게 주어진 선물은 당장에는 좋은 것 같았으나 결국 저주가 된 셈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시지는 않으십니다. 한계가 있는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든 은혜를 내려준다면 그것은 되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간난 아이를 보면서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기의 입으로 엄마, 아빠라고 말을 하는 순간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배가 됩니다. 우리가 작고 어린 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이러한 사랑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밥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마음껏 그것을 먹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뜨거운 다리미를 신기해하는 아이가 손을 대도록 놔두는 부모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를 어르고 달래거나 심지어 야단을 치게 되는 데 이러한 마음에는 아이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이와 같이 자녀들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영원하신 주님에 비해 작디 작은 우리들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는 분, 우리의 합당한 기도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이 자명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전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모습을 감추고 계신 하느님,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문제를 내버려 두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 즉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며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실망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성실히 기도하십시오. 이 기도가 계속된다면 하느님께서는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비록 방법은 조금 많이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1독서의 에스테르 왕비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는 기도를 들려줍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의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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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
저는 사제 생활하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사제직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배신이 그렇게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지만, 더 힘들어지고 더 고통스러워졌습니다. 그 순간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너는 나에게 온전히 올 수 없는가?”
“왜, 너는 나에게 온전히 올 수 없는가?”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월요일 쉬는 날에, 도시락 하나 준비해 어느 공소든지 가서 온종일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1년 정도 월요일이 되면서, 도시락을 싸서 온종일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그 느낌, 그 기쁨, 그 행복은 나에게 주어진 사제 직무에서 잠시 벗어나 온전히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하느님의 자애였습니다.
“이제 너는 나에게 온전히 왔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청하는 것, 찾는 것, 두드리는 것은 고운님들이 할 일입니다. 그런데 받고, 얻고, 열리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 일입니다. 그 하느님의 일은 고운님들을 받고, 얻고, 열리도록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보면 야고보 사도가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개 중의 1개를 바치라는 ‘십일조의 정신(재물, 기도, 봉사 등등)’은 “고운님들의 변함없는 믿음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이들을 모른 척하고 눈 딱 감고 자기 배만 불리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십일조의 정신’을 가지고 변함없는 믿음을 지닌 고운님들에게 더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아무리 바빠도 조용한 시간에 우리 고운님들은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나서보는 시간을 만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애타시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못 받는 고운님들도 답답하지만, 은총을 주어도 받지 못하는 고운님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은 더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운님들에게 더 좋은 것을 채워 주시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고운님들에게 무엇인 필요한지를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입니다. 이제 고운님들이 말씀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에서 나오는 그 느낌, 그 기쁨, 그 행복을 언제나 맛볼 수 있도록 영적 일기를 하루도 빼지 않고 준비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고운님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았을 때 얻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 즉 그 느낌에, 그 기쁨에, 그 행복에, 그리고 영적으로 목말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운님들에게는 이미 약속된 복된 은총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11절)”
오늘도 저 두레박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를 느끼면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의 영적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 줄 물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변함없이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모시는 십일조의 정신으로 살아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가 충만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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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7)
♧♧ 시편 76편 10절…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구하시려 하느님께서 심판하러 일어나실 때." 셀라.
*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구하시려...
‘가난한 이’는 곤경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함 없이 겸손하게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계약(시편 37편 11절, 149편 4절. 참조)에 진실하신 분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아삽은 하느님이 유다 백성을 아시리아의 침략에서부터 구원해 주신 사실(열왕기 상권 19장 35-37절. 참조)에 입각해 그 같은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심판하러 일어나실 때...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쿰’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강력한 권능의 역사, 섭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이사야서 14장 22절. 참조) 이 구절은...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 중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미루시고 계시지만, 마침내 때가 되면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하시어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악인은 영원히 멸망할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베드로 2서 3장 9절. 참조)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 시편 76편 11절…
"사람의 분노마저 당신을 찬송하고 그 분노의 나머지로 당신께서는 띠 두르십니다."
* 사람의 분노마저 당신을 찬송하고...
‘사람의 분노’란 하느님과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행하는 악을 말합니다. 악인들의 세력이 비록 아무리 강할지라도 저들은 마침내 하느님께 굴복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 같은 광경을 바라보는 자들이 하느님의 강하고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 그 분노의 나머지로 당신께서는 띠 두르십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구절은 ‘주님의 적대자들이 아직 펴지 못한 분노를 주님께 살펴보시어 다시는 분노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아시리아 군대가 하느님의 진노의 손길에 빠져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 외의 다른 적대자들이 여전히 악한 행위를 하지만, 결국 그들도 하느님의 심판 날에 아시리아 군대와 같은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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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의 배우자, 자식 그리고 부모님 또 친한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황금률,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자매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최고의 선물이 그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시는 자매님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자신을 향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엄마는 다 가식적이야!!”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자녀를 위한 사랑, 남편을 향한 사랑, 또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 남들보다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식’이라는 딸의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딸의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모든 행동이 가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즉,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얼굴에 드러납니다. 기쁘지 않으니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가식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행복하게 또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아무리 나를 위해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도 얼굴에 싫은 표정이 드러난다면 상대방은 불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기쁘게 행동하면서 상대를 위해 신경 써준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행복하고 기쁘게 만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먼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다가가는 이에게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바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자신이 먼저임을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마음으로도 기쁘게 상대를 향해 최고의 선물인 사랑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지금 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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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벗어나기>
어느 마을에 한 형제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말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일을 할 수 없었고 식사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형제님마저 무슨 일을 겪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마을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형제님을 위로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고 영혼은 영원하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형제님은 이 지혜로운 사람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이 지혜로운 사람이 큰 슬픔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이 키우던 개가 죽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앞서 아들을 잃었던 형제님이 지혜롭다는 이 사람을 찾아가 말합니다.
“제게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고 영혼은 영원하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렇게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지혜로운 사람은 말합니다.
“그 죽음과 이 죽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죽은 아들은 당신 아들이지만, 이 개는 제 개이거든요.”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것은 늘 ‘나’입니다. 이 ‘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고통에서도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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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사람, 기도의 전사戰士>
-간절한, 항구한 기도-
계절로는 봄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코로나 19로인해 모진 겨울 추위의 계속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사순시기입니다. 밤에 일어나 가장 먼저 일별해보는 인터넷 뉴스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요즘은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함으로 본연의 인성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종파를 뛰어넘어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의 사람, 기도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성인 교황들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시성이 된 성인이고 제가 볼 때 살아 계신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성인입니다. 성인 교황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기도의 사람, 기도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성염 대사의 서울신문 인터뷰 기사중 일부를 나눕니다.
-“3인3색, 매력을 지닌 교황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연극인이다. 연설이나 표정이 연극인다운 제스처가 있다. 베네딕도 16세는 원칙주의적 학자다. 교황청내 검찰청격인 신앙교리성에서 수십년간 근무해온 분이라 표정이 딱딱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신부이자 교구장으로서 계속 사람을 상대하고 사귀어 온 분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눈을 쳐다 보면 경청하고 공감하는 공감능력자였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참 매력적이고 위대한 각자 고유의 향기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주님의 사람, 기도의 전사 성인 교황들입니다. 참으로 기도할수록 주님을 닮아 주님의 마음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몇가지 감동적인 일화를 더 소개합니다.
-“교황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다. ‘폰티’는 ‘다리’, ‘펙스’는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교황은 즉위 직후 바티칸 주재 외교관들을 만나 ‘제가 하는 일은 다리를 놓는 일이다. 사람을 만나게 하고 화해하게 하고 격려하게 하는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면 제가 한다.’고 했다.”-
얼마나 고귀한 의미의 폰티펙스 교황인지요. 하느님과 인간의 다리를 놓은 예수님이요 기도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도 다리를 놓는 평화와 화해의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인 비서가 들려준 일화다. 교황이 즉위한지 3일후 이 비서가 교황에게 구두를 닦아 주겠다며 달라고 하자 교황은 ‘평생 내 손으로 구두를 닦았는데, 평생 해온 내 직업을 뺏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윗트있게 거부했다고 한다.”-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상-하원 의장의 만찬 초대에 선약이 있다고 불참한 뒤 현지 교회에서 마련한 노숙자와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교황과의 만찬을 기대했던 정-재계 인사들은 ‘있는 놈들도 천국 가자’라고 비아냥댔지만, 교황은 ‘가난한 사람을 만져 보면 그리스도의 살결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모두가 기도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주님을 닮아 주님의 마음을 지닙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교황청 피정 첫날 주제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세,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모범-기도의 모델’, 말그대로 기도의 사람, 주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환경위기는 우리 인간의 공통적 뿌리, ‘3a’즉 1.arrogance(교만), 2.apathy(무감각), 2.avarice(탐욕)에 닿아있다 합니다. ‘무지(無知;ignorance)’에 뿌리를 둔 이 세 악에 대한 답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종파를 불문하고 사람됨에 필수 의무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기도의 사람, 바로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악마가, 괴물이, 흉물이, 야수가,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처럼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참으로 한결같아야 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런 이가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입니다. 참으로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있어 참 좋은 영적 감수성도, 영적 탄력도, 탄력 좋은 믿음의 삶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는지요!
물론 내 원하는 대로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해야 합니다. 기도에 간절하고 항구하다 보면 결국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하게 됩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모범은 제1독서의 에스텔입니다. 죽음의 위기가 임박했을 때 기도는 더욱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선종시 마지막 임종어의 기도는 무엇이겠는지요? 언젠가 갑자기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이 아니라 평상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할수 뿐이 없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에스텔의 기도가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참사람으로 살기위해 숨쉬듯이, 밥먹듯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깨끗한 마음이요 깨어 있는 삶에 깨달음입니다. 작금의 모두가 괴물들이 되어가는 혼란의 시대, 광기의 시대, 분열의 시대는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답도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이래야 자랑스런 주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로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주님의 황금률 명령도 저절로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죽어야 끝나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평생 영적전투에 ‘영원한 현역’의 영적 전사, 기도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간절하고 항구한 당신의 사람, 기도의 전사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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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강력한 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에둘러서 하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려들지 말고 그냥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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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청원 기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는 에스터르의 기도 일부분입니다. 성경 속 아름다운 기도들 중 하나로 꼽히지요. 당시 유다인들이 재상 하만의 음모로 모두 몰살될 위험에 처합니다. 유다인 혈통을 밝히지 않은 채 왕비 자리에 발탁된 에스테르는 양부 모르도카이의 요구로 목숨을 걸고 크세르크세스 임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이 기도는 임금의 허락 없이 어전에 드는 모험을 감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25)
사람은 때때로,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이고 더군다나 신앙 안에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조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에스 4,17-14)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25)
독실한 유다 처녀로 교육받으며 성장한 덕에, 유배지에서 이방인 임금의 왕비로 살아가면서도 에스테르의 신관은 이스라엘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일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그러한 "당신 자신을 알리시라고"(에스 4,17-23 참조) 요청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청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마태 7,7)
우리는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버지께 다가가야 합니다. 하지만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파악해야겠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그것을 주시려는 하느님과 우리의 주파수가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좋은 것을 더 많이"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우리의 행복이기에 무얼 더 챙겨 주고 도와주어야 할지 늘 살피십니다.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보고 아시지요.
문제는 우리가 그분이 주신 "좋은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줄곧 졸라대지요. 우리가 이기적이고 시야가 좁은데다 성급해서 그렇습니다.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고작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자기 영광이나 청한다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준비하고 계신 그분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에서 배웁시다. 그녀의 기도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절박함에서 나왔습니다. 기도는 나와 이웃이 서로 별개의 섬이 아니라 함께 연결된 유기체임을 아는 데서 더 절실해지고 진정성 넘칩니다.
청하는 내용의 수혜자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할 때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내게 좋은 것들은 이미 주님의 선물 보따리 속에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가 자기를 잊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주님 앞에 데려갈 적마다 아버지의 흡족한 축복과 함께 풀려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축복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축복해 주는 건 어떨까요? 그들과 함께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겁니다. 신앙, 성장, 건강, 행복, 평화, 일치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위해 빌어 주면 좋겠지요. 그들과 더불어 받을 겁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바가 주님 마음과 한결 가까워져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위한 바람에 묻혀버린 나의 바람을 용케 아시는 분이십니다.
벗님이 잘 하고 계시듯 서로를 위한 기도가 더욱 절실한 요즘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위해 더 열렬히 주님께 달아드는 하루를 엮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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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청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큰 관심을 가지고 열렬히 청하라고 하십니다. ’찾아라’는 말은 이런 뜻이기 때문입니다. 찾는 이들은 마음속에서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습니다.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금이나 잃어버린 종을 찾는 이들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찾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두드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할 운명의 존재들이여, 포기하지 마십시오. 덕보다 재물을 더 소망하지 마십시오. 재물은 여러분이 찾아 헤매어도 발견하지 못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재물을 발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찾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씁니다. 그런데 덕 의 경우에는 그것을 분명히 받게 된다는 약속이 있는데도, 재물에 대해 보이는 열망의 아주 작은 만큼도 미음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절망히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두드려랴” 고 하신 것은, 당신께서 곧비로 문을 열어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곳에 님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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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면, 십자가가 나를 짊어져 준다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져라! 당신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면 십자가는 당신을 대신 짊어지고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 (성 토마스 아 켐피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고 가는 것이 가볍다.” (아우구스티노 )
“사랑의 위대한 업적이로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이신 분이 죽으실 제 죽음이 죽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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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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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틀 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입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희망하고 열망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몸으로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몸을 바쳐 ‘찾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수도승의 다른 이름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 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가슴으로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를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자도, 열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처럼,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희망하는 바를 희망하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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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오 주님,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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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도리>
"남에게 해 주어라."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얻을 것이라는 말씀에
그 동안 얼마나 청하기만 했나요?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겁니다.
받는 데는 익숙하고 베푸는 데는
인색한 마음이라면 그 마음
고쳐야 축복이 들어 옵니다.
재난이 닦쳐서 모두 힘든 때
이웃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전만 위해 사들이기에 급급하다면
하늘을 앞당겨 사는 사람이
보통 사람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더 어려운 이에게 선뜻 내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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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하느님 없이는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이 시간입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생활의
실천이며 생명의
풍요로운
깊이입니다.
기도 안에서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넘치게 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
기도의 길이
됩니다.
살아계신 그분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신앙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이 어려움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시작도 마침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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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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