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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을 주옵소서(1)
2023년 2월 일 / 행 3:1-10
행 3:1-10 /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 어느 날 오후 베드로와 요한은 3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2)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였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하나가 실려 왔다. 그는 날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살았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 구걸하였다. 4)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눈여겨보았다. 이윽고 베드로가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하자 5) 그는 무엇을 얻으려니 생각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6)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9)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걸어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10) 그가 바로 그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날마다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알자 너무도 놀라 말을 잃었다.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 기적을 베푼 사건이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구약 율법의 전통을 따라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중이었다. 성전 미문 앞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장애인 하나가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인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하니 거지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볼 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고 일어나 뛰며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는 걸인과 이미 얻은 은혜를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다.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눈은 언제나 무엇을 받을까 하여 바라보는 눈이었다면, 베드로와 요한의 눈은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은혜의 눈이다. 결국 받으려고 내민 손이 주려고 내민 손에 붙잡혔다. 앉은뱅이의 손은 유한한 물질을 구하는 손이요 베드로와 요한의 손은 영원한 생명을 주려는 손이다. 이것은 인간의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전도, 복음, 사랑이다. 전도는 무엇인가를 주려는 마음이요 손길이요 행동이다. 앉은뱅이에게는 돈이 전부요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물질이 결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본문에서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주는 전도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라고 하지 않다. ‘내게 있는 것을 주라’고 하셨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고, 섬김을 받으려고 다투었으며,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능력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크리스천이 이렇게 변화가 되었으면 한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길인 좁은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쓰고, 기도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어져 갈 것이다.
눅 6:38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1. 베드로와 요한도 쓰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3:1-10을 만들어 낸 베드로와 요한이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례가 되고 있다. 요엘 2:28-29의 말씀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120여 명의 성도들에게 임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행 2:17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18) 또 그날이 오면 너희의 남녀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나의 영을 부어 주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바라보며, 저들을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저들의 잘못을 나의 모습과 연계해 보고, 저들의 장점을 배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될 것이다.
마태복음 19:30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20:1에서 ‘하늘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아침 일찍이 나갔다.’라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우리 시간으로 9시쯤에 품꾼들이 대기하는 곳을 지나다가 보니 몇 사람이 일거리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보내며 그날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하였다. 정오와 오후 3시쯤에도 주인은 나가서 이처럼 하였다. 그날 저녁 5시쯤 다시 마을에 나갔다가 몇 사람이 더 서 있는 것을 본 주인은 ‘왜 자네들은 하루 종일 일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그들이 대답하자 주인은 ‘그러면 내 포도원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게.’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20:16에서 또다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참고 마 8:11-12, 누가복음 18:13-14, 롬 9:30-33, 히 4:1>
예수님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마태복음 21:28-32을 말씀하셨다.
마 21:28-32 / [두 아들의 비유]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오후 5시(이스라엘 시간 오전11시)에라도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감사할 일이다. 지금까지 작은아들은 덜렁덜렁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앞으로는 남은 시간(한 시간)이라도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봉사충성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3년 동안 제자로서의 수업을 받았지만 덜렁덜렁 받았다. 솔직한 표현이라면 제자로서의 수업은 가룟 유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 수업과는 전혀 다른 정말 높은 수준의 교육이었다. 그러기에 가룟 유다를 뺀 11제자의 수준에 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이제부터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가운데 배움이 아닌 실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1-15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고전 3:11-15 /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기초를 놓았으니 그외의 다른 어떤 기초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12) 그러나 그 기초 위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건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은 보석을 사용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 또는 짚을 사용할 것입니다. 13) 그리스도의 심판날이 오면 모든 사람들이 세운 건축물은 불의 시험을 받아 건축자가 각각 어떤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그 건물이 존속될 것인가, 참으로 완벽한 건물인가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14) 그리하여 그 기초 위에 적절한 재료로 건물을 지음으로써 그가 지은 건물이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사람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15) 그가 세운 건물이 불타버린 사람은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자신은 화염 속을 빠져 나와 겨우 목숨만은 구하듯 그렇게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쓰실 수 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닌 각자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비록 7번 넘어졌을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면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이다.
히 10:35-39 /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장차 여러분이 받을 보상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36)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그다지 많이 지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38)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 대한 믿음과 신뢰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뒷걸음질 쳐 물러서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39)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거나 비참한 운명에 처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말 1:2-5 /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사랑]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설명하여 주셨다. `에서와 야곱은 본래 형제가 아니냐? 그런데도 나는 너희의 조상 야곱만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 나는 야곱의 형인 에서마저도 거절해버렸다. 내가 에서의 후손들이 살던 땅, 곧 에돔의 산지를 황무지로 만들고 자자손손에게 물려주던 농경지를 허허벌판으로 뒤엎어 놓았다.' 4) 에서의 자손들은 `우리가 비록 파괴를 당하였으나 이 폐허에 다시 건설하면 된다!'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시 건설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다시 무너뜨리겠다. 그때에 사람들은 에돔 땅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역'이라고 부르며 에돔 족속을 언제까지나 주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없는 백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5) 너희 자신도 그런 일을 직접 체험할 것이고, 저절로 이같이 선언할 것이다. `진실로 여호와의 크신 권능은 이스라엘에서 먼 밖에까지 뻗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의 삶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고 새로운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을 후회함 없는 그야말로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살아가야 한다.
마 24:42-47 / 그러니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 주인이 언제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리라. 43) 만일 집주인이 밤에 도둑이 드는 시간을 알았다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을 지킬 것이다. 44) 그러니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 인자는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고도 없이 올 것이다. 45)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종은 과연 어떤 사람이겠느냐? 주인이 맡긴 집을 잘 관리하고 주인의 자녀들에게 때맞춰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46)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종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47)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주인은 이런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맡길 것이다.
♬ <당나귀 턱뼈> 유재헌 목사 작사 / 천봉화 작곡
1. 보리떡과 같은 나를 잡아주시사(이몸 축복하시사) 하늘생명떡이 되어 복음으로 우리 동포 먹여 살리게 말씀 내려 주옵소서 <후렴> 나는 지금 당나귀턱뼈 같은 몸이나 주님 손에 맡기고 복종하고 가오니 주여 잡아주시사(잡아가지고) 죄악세상(블레셋을) 치소서 영광돌립니다 아멘
2. 양각 나팔불며 성을 돌고 또 돌 때 여리고성 무너졌다 주여 나를 복음나팔 만드으시사 크게 불어 주옵소서
3. 지팡이가 능력있어 행함 아니요 잡은 손에 능력 있네 마른 막대같은 나를 잡아주시사 역사하여 주옵소서
4. 시냇가의 작은 돌로 골리앗 대장 쳐서 넘어뜨림같이 나와 같은 작은 돌을 취해 가지고 사탄이를 치옵소서
5. 폐물 이용 잘하시는 우리 하나님 지금 믿고 바칩니다 약한 자로 강한 자를 물리치시는 그 능력을 믿습니다
6. 상한갈대 꺾지않는 하나님께서 생명 약동시키시며 꺼져가는 등불마져(까지) 끄지않고서 기름쳐서 피우시네
7. 저주받아 죽을 인생 살려주시니 아까울 것 무엇이며 무용지물 선택하사 사명주시니 안 바치고 견딜소냐
사사 삼손의 실례를 보면서 <사도행전 3:1-10을 주옵소서(1)> 설교를 마치려 한다.
삼손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태어났다. 큰 힘을 부여받았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다. ‘하나님의 기운이 삼손을 휘감자 그가 으르렁거리는 사자 새끼에게 달려들어 마치 양 새끼라도 찢어 버리듯 맨손으로 그 사자 새끼를 갈기갈기 찢었다’(삿 14:6).
그렇다면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마땅할까?
‘ ᠁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공했고, 축복받았으며, 승리했다. 원수와 싸워 이기는 영웅적인 삶을 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자연스럽고 당연한데 삼손 스토리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말았다. 실패와 상처투성이의 인생이었다. 넘어지고 흔들리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들릴라’라는 여인의 무릎에 누워 머리가 빡빡 깎기는 모습, 원수들에게 붙잡혀 눈까지 뽑힌 뒤 짐승처럼 맷돌을 갈고 있는 모습,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는 보습 …. 이런 스토리로 인해, 삼손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자식에게 ‘삼손’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를 본 적이 있는가? 부모들은 자식에게 ‘아브라함, 베드로, 바울, 스데반, 다니엘, 다윗’하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 이유는 그 이름들이 존경받는 이름이고, 닮고 싶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손이란 이름은 지어주지 않는다. 그만큼 삼손이란 이름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선입견을 잠시 뒤로 미뤄놓고, 성경은 삼손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살펴보자. 다른
히브리서 11:32-33 / 이제 얼마나 더 말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 밖에 다른 예언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자기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해를 받지 않았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다. 거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위시한 믿음의 영웅들이 소개되고, 그들이 얼마나 치열한 신앙적인 삶을 살았는지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반열에 삼손도 버젓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삼손을 평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신다. 왜 하나님은 삼손을 믿음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으셨는지?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는 삼손의 실패와 연약함이 먼저 들어온다. ‘나실인인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삼손 스토리는 한 인간의 실패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삼손 스토리는 삼손과 같은 그런 실패자까지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룬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나실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각별한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최고의 힘을 가진 삼손이 아무런 실패 없이 완벽하게 영웅적인 삶을 살다 갔다면 그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줄 수 있겠는가?
실패하여 좌절하고, 작은 유혹에도 걸려 넘어져 절망하는 우리에게 그런 성공적인 삼손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주겠느냐는 말이다.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떤 도전이나 용기를 주지는 못한다. ‘아, 참 대단하다!’ 이 한마디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실패했다. 그것도 많은 실패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패한 사사 삼손’을 끝까지 용서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고, 덮어주시며, 나중에는 그의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다.
삿 16:28-30 /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주 여호와여, 이번만 저를 돌보아 주십시오. 한 번만 더 제게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주께 빕니다. 멀쩡한 제 눈을 빼어 버린 블레셋 놈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해주십시오.' 29) 그러고는 지붕을 버티고 있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또 하나는 오른손으로 부여잡고 30) `내가 오늘 블레셋 놈들과 함께 죽으련다!' 하고 소리 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굽혀 기둥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집이 무너져 내리면서 집안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왕들을 내리덮쳤다. 이렇게 하여 삼손도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이때 죽인 블레셋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래서 삼손 이야기가 우리와 상관있는 것이다. 성경은 완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완벽한 의인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 들어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만은 아니다. 제자로서 부름을 받았던 베드로와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이기도 하였지만, 마태는 세리였다. 그리고 제자로 부르시고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하시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회를 열기까지 하였다.
성경은 실패하여 쓰러진 사람들이라도 회복시켜 베드로와 요한처럼 많은 연단을 통해 귀한 일꾼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즉 실패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큰 도전과 용기를 얻게 된다.
‘완벽한 사람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도 없구나! 누구든지 연약하여 쓰러질 수 있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실패자를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덮어주시고, 참아 주시는구나! 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사용하시는 분이시구나!’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 사사기 15장은 “얼마 후 밀 거둘 때에(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그 꼬리와 꼬리를 묶고, 묶은 부분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논밭에 풀어버렸다. 꼬리에 불이 붙어 미쳐 날뛰는 여우들에 의해서 그 해 농사를 망치게 하였다.
삿 15:4-5 / 여우 300마리를 잡아 꼬리와 꼬리를 서로 붙잡아 매고는 준비해 두었던 홰를 꼬리 사이에 매단 다음 5) 거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들이 농사짓는 밭에 그 여우들을 풀어 놓았다. 결국 아직 베지도 않은 곡식뿐만 아니라 빼어 놓은 곡식단과 포도덩굴과 올리브나무까지 몽땅 태워 버렸다.
이 일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에 쳐들어왔고, 이에 대항하여 삼손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쳐 죽였다.
이제 그 의미를 살펴본다.
우리에게도 나귀의 턱뼈가 있다. 15절에 보면,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라는 말씀이 있다. 사실, 14절부터 본문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나귀의 턱뼈’이다. 이 사건은 턱뼈로 시작해서 턱뼈로 끝난다.
14절을 보면, ‘레히’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뜻은 ‘턱뼈’다.
15절에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16절에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17절에는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라맛 레히’는 ‘턱뼈의 무더기’란 뜻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의도적으로 턱뼈를 강조하셨다.
그렇다면 ‘나귀의 턱뼈’가 무엇일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나귀란 좋은 운송수단이긴 하였지만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되어 그 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는 나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나귀가 죽으면, 땅을 파고 묻어버렸다. 이러한 이유로 나귀 뼈는 사람의 눈에 쉽게 띄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눈에 띈다할지라도 부정한 짐승의 뼈였기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나귀의 턱뼈는 무기로 사용하기에도 보잘것없다. 나귀의 턱뼈는 창도 아니고, 칼도 아니다. 따라서 ‘나귀의 턱뼈’는 변변치 못하고, 대수롭지 않고, 가치 없는 어떤 것을 상징한다.
삼손의 고백은 아주 흥미롭다.
삿 15:16 /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당나귀 턱뼈로 한 무더기, 두 무더기! 당나귀 턱뼈로 원수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이 몸이 때려잡았네.'
‘나귀’라는 단어와 ‘한 더미, 두 더미’의 ‘더미’는 발음이 같은 단어이다.
그러니까 운율을 염두에 둔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나귀’와 ‘더미’는 ‘하모르’이라고 발음되는데 아랍어로는 ‘호마르’라고 부른다. 자음이 같다. 같은 셈족어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호마르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하는데, ‘미련하고 바보스럽다’라는 뜻이다. 아무튼 삼손의 고백은, ‘하하모르 하모르 하모라타임’이 된다. ‘하, 하’하니까 웃음이 연상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단어가 가진 뜻을 넘어 그 소리만 들어도 만면에 웃음을 띤 승리자의 기쁨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이 나귀의 턱뼈로 위대한 일을 이룬다.
삿 15:14 / 삼손이 묶인 채 레히에 다다르자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그를 잡아들인 블레셋 진영에서는 `우리가 이겼다!' 는 탄성이 온 진영을 뒤흔들었다. 그때 하나님의 기운이 삼손을 휘감자 그를 옭아매고 있던 동아줄이 마치 불에 타다 남은 실오라기같이 끊어졌다.
현대어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운이 삼손을 휘감자’라는 개역 개정에는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다른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세차게 덮치매’라고 번역되어 있다.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을 때 그를 옭아매고 있던 동아줄이 마치 불에 타다 남은 실오라기(불탄 삼)같이 끊어졌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줄이 어떤 줄이든지 마치 불탄 삼과 같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가난이라는 굴레가 풀어진다. 병이라는 굴레가 풀어진다. 패배자라는 굴레도 풀어진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아니 쓸모없던 나귀 턱뼈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순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찮고 별 볼 일 없던 것이 귀하게 쓰인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제까지 대단치 않게 보이던 남편, 아내, 자식, 교회, 목회자, 교우들, 직장, 이웃도 정말 소중하게 여겨진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간여하신 것을 알게되며 평생토록 감사하게 된다.
삼손을 통해 주어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귀턱뼈와 같은 하찮게 보이는 것, 작게 느껴지는 것들이 사실은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사소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 꼽추 처녀가 목사님께 와서 ‘기도 한 번만 해 주시면 제 병이 꼭 나을 것만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눈을 떠보니까 여전히 꼽추였다. 목사님은 미안하기도 하고 낙심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그 처녀는 대단히 밝은 얼굴로 ‘목사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나를 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꼽추가 아닙니다. 나를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라고 감사하였다. 그런 생활을 두 달째 계속하며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야!’ 하는 소리가 들려서 마루를 닦던 그녀가 ‘예!’하고 일어서는 순간에 우두둑하고 허리가 빠지면서 꼽추가 펴졌다. 이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이 체험하는 기적이고 믿음의 열매이기도 하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 (마 17:14-20) 그들이 산 아래에 있는 군중에게 돌아오자 한 사람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15) `선생님, 간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아이는 가끔 불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가보았지만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예수께서 `이 완고하고 믿음이 없는 백성들아,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느냐?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너라.' 18) 하시고 귀신을 꾸짖자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떠나고 그 순간 아이가 나았다. 19)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물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2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