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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오동추
이 홍사
선생님 앞이라 거칠게 욕도 하지 못하고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정말이지 황당하다.
정치 얘기를 하려면 우선 욕부터 해야지 말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자식 이름으로 빚을 내서 쇠고기를 사 먹는 꼴이다. 나라가 왜 이 꼴이 되었나? 또 추경을 계획하고 있단다. 추경이 갑자기 왜 필요하냐? 추석을 앞두고 작은 정성이라는 말로 저소득층에 선심을 쓰기 위해서란다. 역사 이래 이런 적이 있었는가, 일 년 네 번이나 추가 경정을 할 정도로 근시안적인 예산을 편성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무리하게, 경쟁적으로 돈 쓰기를 하였단 말인가?
홍랑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후자이지 싶다.
추경을 편성해서 선심성 현금을 풀면 또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다.
정말이지 오로지 지지율에 목을 매고 있는 정부다.
유튜브를 보니 누구는 지금 정권을 잡은 무리를 보고, 저주받을 것이라는 막말을 했다. 저주?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저주받을 거라는 말을 할까. 이건 좌우 논리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문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능하다. 조목조목 따지면 공약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단 지켜진 공약이라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든다는 것, 하나에 불과했다. 정말이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 합당한 말이다. 홍랑은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보다가 난폭하게 접었다. 연일 좋은 소식은 없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기사만 올라온다. 환장, 정말이지 환장할 일이다.
추경을 편성하려면 또 나랏빚이다.
누가 갚아야 할 빚인지 모르겠다.
무조건 풀어서 생색을 내자는 무리가 정권을 잡고 있다. 이번 추경은 역병 때문이란다.
코로나라고 불리는 역병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참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
“선생님 참말로 황당한 공화국입니다.”
막걸리를 마신 홍랑이, 옆에 앉은 오동추 선생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말했다. 재래시장 골목의 허름한 돼지국밥집이었다. 편육이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난 집이었다.
편육이란 돼지머리를 푹 삶아 뼈를 발라내고 더 삶아 삼베로 싸서 맷돌로 눌러놓아 식히면 물이 빠지고 물렁뼈와 고기만 남는데, 그게 굳은 상태로 식혀서 잘라먹으면 식감과 맛이 그만이다. 홍랑은 가끔 그게 생각나면 재래시장 이 골목을 찾는다. 편육에는 소주보다 막걸리가 궁합이 더 잘 맞다. 옛날 상갓집이나 시골 잔칫집에서 직접 만들었으나 요즘은 시장의 돼지국밥집에나 와야지 맛을 볼 수가 있는 음식이다.
“황당한 공화국? 자네 표현이 적확하네. 선심성 현금 복지를 받아들이는 우리 국민의 수준도 고작 그 정도야. 국민의 눈높이를 우선으로 개선해야지.”
오동추 선생께선 말끝마다, 자네, 자네라고 지칭하셨다. 홍랑은 그게 듣기 거북하다고 너, 라고 부르시라고 했지만 이젠 같이 늙어가는 주제에 그 호칭이 마땅하고 선생께서 편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홍랑은 듣기에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있고 상당히 부담스럽다.
“전교조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홍랑은 기어이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 사람아! 난 이제 전교조 회원이 아니야. 은퇴했어.”
오동추 선생의 말은 단호했다. 오동추 선생과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정치판을 얘기하던 중이었다. 요즘은 정치 얘기가 아니면 할 말이 없다. 어디를 가나 정치판 얘기다.
오동추 선생은 홍랑과 약속을 해서 만난 게 아니다.
이 돼지국밥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순전히 우연이다. 선생의 근황은 아내를 통해서 듣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마주친 것이다. 물론 아내는 오동추 선생의 제자가 아니다. 그런데 근황을 더 잘 알고 있다.
무릇 군주가 덕을 지니면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하다고 했는데 군주가 덕이 없는지 나라에 역병이 돌며 사람 사이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날씨마저도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유래를 찾기 힘든 그렇게 긴 장마가 끝났는가 했더니 태풍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고 있다.
태풍이 올라오는 관계로 할 일이 없었다.
중장비 임대업이라지만 노가다가 주업인 홍랑은 비와는 상극이다. 오죽하고 하늘과 동업을 한다고 하겠는가? 미얀마에 벌여놓은 일도 걱정이지만 역병 때문에 하늘길도 다 막혔고 어떻게 들어가더라도 호텔이나 집으로 보내지 않고 무조건 삼 주간 격리라고 해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으니 모든 게 스톱이다.
현장마다 다른 일은 중단하고 태풍의 대비를 하고 있다.
집에만 있으면서 기상예보에 귀를 기울이다, 무료하고 따분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오랜만에 재래시장을 찾은 것이다. 아내가 청국장을 사러 재래시장에 간다고 하기에 따라나선 것이다. 아내는 집 앞 대형 슈퍼에서 장을 보지만 그런 곳에는 청국장이나 젓갈을 팔지 않는다. 홍랑이 그렇게 따라나선 것은 출출한 시간에 편육과 막걸리가 생각나서 따라나섰는데 뜻밖의 오동추 선생을 만난 것이다.
오동추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홍랑의 고등학교 은사다. 옛날에는 그림자도 밟지 못했지만 홍랑이 오십이 넘고 보니 같이 늙어가는 세대다. 홍랑이 고등학교 다닐 적에 갓 부임해 온 총각 선생님이었고 홍랑의 담임을 이년이나 하셨다.
본명은 오동출 선생인데 소풍이나 가서, 노래를 하면 십팔 번이, 오동추야 달이 밝아, 그다음 구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 노래를 하도 불러서 학생들 사이에서 오동추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친구들은 한 번도 오동출 선생이라고 본명을 부르지 않았다. 선생님의 별명은 사시사철 다르게 불리었다. 봄이면 오동춘이라고 부르고, 여름이면 오동하, 가을이면 오동추, 겨울이면 오동동으로 아이들은 계절에 맞게 별명을 불렀다. 별명이 많은 선생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반증이다.
시장 골목에서 아내를 따라다니며 청국장을 사고 홍랑이 좋아하는 젓갈을 좀 사고 돼지국밥집에 들르니 오동추 선생께서 사모님과 장을 보러 나오셨는지 자리를 잡고 편육을 자시고 계셨다.
“아이구 선생님!”
홍랑이 인사를 꾸벅하자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셨다. 지방의 소도시, 구미에 살면 이렇게도 마주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도 가끔 뜻하지 않게 아는 인물을 마주치는 정도의 작은 도시다. 국밥집에는 손님이 많은 게 아니었다. 테이블이 겨우 세 개뿐인 좁은 가게 안에 오동추 선생 내외만 앉아 있었다. 오동추 선생께선 하얀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운동화 차림이었다. 아마도 운동 삼아 나오신 모양이다.
“국밥을 자시러 오셨는가? 이리와 같이 앉지.”
선생은 옆자리 의자를 빼주며 자리를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홍랑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선생의 곁에 앉았다. 아내는 인사를 시킬 필요는 없었다. 오동추 선생의 사모님을 아내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강 건너 인동에 있는 같은 암자에 다니면서 만난 사이다. 신심이 깊은 사모님이라 절 살림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아내도 절에 일이라면 열 일을 제쳐두고 다니는 편이라 오동추 선생의 근황을 홍랑은 아내를 통해서 듣고 있었다.
오동추 선생이 전교조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한 번 해고 되고 삼 년을 쉬다가 복직해서 평교사로 정년 퇴임을 했다는 소리도 아내에게 들었다. 홍랑이 학교에 다닐 적에는 전교조라는 게 없었다. 그 이후에 생겨난 조직이다. 홍랑이 자리에 앉자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아내가 사모님 옆에 앉았다.
“뭘 자시겠는가?”
“저도 편육에 막걸리가 생각이 나서 나왔습니다. 제가 한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자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었다.
요즘은 누구를 만나면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조마조마하다. 사람들은 흑백논리와 좌우로 정확하게 이분화되어 있다. 혹, 상반된 견해를 가진 사람이 걸려 말을 잘못 꺼내면 자리가 상당히 껄끄럽고 불편해진다. 그렇다고 정치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으면 공동화제가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견해만 피력하면 곤란하다. 특히나 전교조 출신인 오동추 선생 앞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여태 조심을 하던 중이었다.
“자네, 해외에까지 사업을 벌였다면서, 그래 사업은 잘되고 있는가?”
인사차 묻는 말일 터이지만, 사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동추 선생이었다. 아내가 사모님과 친하니 홍랑이 미얀마에 주택 사업에 손을 댔다가 고전하는 이야기까지 들으신 모양이다. 사업 이야기가 나오면 정치 이야기가 따라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미얀마에 벌여놓은 사업도 그쪽 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말을 하자니, 난처하고 곤란했다.
정치에 관해서 욕부터 하고 시작할 말인데 선생 앞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전교조 출신의 선생님이라 정도는 더 심했다. 그리고 더 심한 것은 오동추 선생은 정치와 경제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셨다는 점인데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논해야 하니 난감했다.
“요즘은 워낙 불경기라 잘되는 사업이 있습니까?”
홍랑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불경기가 아니라 불경기를 자초한 정권 탓이겠지?”
얼레? 이게 무슨 말씀이야?
선생님께서 슬쩍 떠보는 것인가?
“선생님 입에서 정권을 탓하는 말씀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이게 나라입니까?”
그 말에는 대답 없이 오동추 선생은 홍랑의 노란색 양은 술잔에 술을 채워주셨다. 홍랑은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술잔을 채워주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극단적으로 얘기하는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옛날을 들먹이시다니?
오동추 선생께선 홍랑을 온전히 기억하시는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생님 옛날의 저를 확실히 기억하고 계십니까?”
“다른 학교는 몰라도 자네가 다닌 학교의 일이삼 회로 졸업한 학생들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수없이 많은 제자가 있을 터인데 온전히 기억하신단다. 오동추 선생의 말씀으로는 구미를 중심으로 여러 학교를 전전했지만 홍랑 다닌 학교로 처음 부임 받았을 때 학생들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신설이고 미달 고등학교라 홍랑이 입학하니 삼학년이 없었다. 홍랑은 그 신설 미달 학교의 2회 졸업생인데 이학년에 올라가자 오동추 선생이 부임해 오셔서 담임을 맡으셨고 그대로 따라 올라가 삼학년 때도 담임을 했다.
당시에 신설 학교는 얼마나 유명한 대학을 얼마나 많이 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학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담임을 그대로 이년씩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홍랑의 이학년과 삼학년 담임이 오동추 선생이셨다. 당시에는 젊은 교사답게 대단한 열정으로 북채를 들고 다니셨다. 오동추 선생의 북채는 상당히 매웠다. 그 북채 맞아보지 않은 놈이 없을 정도로 열정이었다. 홍랑이 졸업하고 일 년인가 더 그 학교에 계시다가 구미 인근의 여고로 전근을 하셨다는 것인데 여학교에 가니 열정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식었다는 것이다.
“마당은 기울어도 장구는 바로 치고,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네. 경기를 이렇게 만든 건 무모한 정권 탓이야. 그건 어떤 논리로도 부인할 수가 없어.”
“전교조 출신인 선생님께 그런 말씀을 들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전교조라는 말은 그만하시게. 이젠 듣기가 여간 거북하지 않네. 그리고 전교조 출신은 인간이 아닌가? 인간의 생각과 견해는 상황에 따라, 시류에 따라 변하는 법이네. 전후, 좌우를 둘러보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지 인간이지.”
선생께선 전교조를 훈장처럼 여기는 게 분명히 아니다.
술자리에 같이 앉기는 했지만, 아내는 선생님과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모님과 청국장에 관해서, 전혀 다른 주제를 놓고 사모님과 둘이 얘기하다가, 청국장을 어디에서 샀다면서 사모님께서 사겠다고 했는지 같이 청국장을 사다 드리겠다면서 일어섰다. 사모님도 같이 가자면서 따라 일어났다.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말은 없어. 존재하지도 않는 말이거니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야. 그런 경제용어는 없어.”
오동추 선생님은 정치와 경제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셨다. 정치와 경제에 관해서라면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해석하면 소비 주도 성장이라는 말인데 그걸로 낙수효과를 기대해서 경제를 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씀을 부연 설명으로 달았다.
“이 정부가 들어서고 앞뒤가 맞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원래 맞는 퍼즐이 아니었어. 여기를 맞추면 저기가 어긋나고 저기를 맞추는 여기가 어긋나는 불량 퍼즐이었던 거야.”
거기까지 듣고 보니 선생님께서 단순히 홍랑은 떠보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할 말이 많다.
“선생님께선 언제 전향하셨습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좀 당돌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몹시 궁금했다.
“전향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고 생각이 좀 바뀐 것이지.”
“무슨 사건이나 계기가 있어 그것을 보고 마음이 바꾸셨을 것 같은데요?”
“국군의 뿌리가 김원봉이라고 말했을 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어. 억지도 이런 억지는 없는 거야. 세계관이 다르다는 걸 느꼈지. 자네 김원봉을 아는가?”
“누군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어. 그걸 인정하면 내가 가르친 것은 다 거짓말이 되는 거야.”
홍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오동추 선생께 김원봉에 대해서 배운 적은 없었다. 배운 것이 있다면 신용과 건강은 남이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용과 건강, 이 두 가지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살아가는데 신용과 건강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 지론을 선생님께선 누누이 강조하셨다. 그리고 더 있다면 공부의 목적은 자신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데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 배웠던 정치 경제에 대해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지만 선생의 그 말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역사의 인물을 그렇게 왜곡하면 곤란하지.”
“그걸 받아들이는 국민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입니다.”
“국민의 수준? 맞아, 그게 문제야.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만들 수도 없고.”
그렇게 주고받는 사이 막걸리 주전자도 비었고 편육 접시도 바닥을 드러냈다. 홍랑은 주인장 할머니를 불러 편육과 술을 더 시키려고 하자 오동추 선생께서 손을 흔들며 만류하셨다.
“그만하시겠습니까?”
“낮술 많이 마셔서 좋을 건 없지. 자네 지금 시간이 어떤가?”
“어딜 가시게요? 저는 시간이 괜찮습니다만.”
“우리 그러면 상모동 생가와 새로 짓고 있다는 박정희 기념관에 한번 가보세. 내가 그분에게 지은 죄가 상당하거든. 혼자 가기가 겁이 나고 무섭네. 지은 죄가 있어서, 자네가 한번 데려다주시게.”
그 말씀을 하시는 선생의 눈빛은 애절했다. 홍랑은 그 눈빛을 금세 읽을 수가 있었다. 진정성이 어린 눈빛이었다.
홍랑이 신혼 초에 그 동네에서 사글세를 살 적에는 자주 갔었는데 그 동네에서 이사를 나오고 거의 삼십 년이 넘도록 지나다니기만 했지,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홍랑도 불쑥 가보고 싶었다.
그때 마침 청국장을 다 샀는지 사모님과 아내가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홍랑은 사모님과 아내에게 선생님을 모시고 어디를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먼저 집으로 들어가시라고 했다. 홍랑은 아내는 직접 운전을 해서 차는 시장 주차장에 있었다. 홍랑이 막걸리를 한잔 걸치면 아내 차를 이용해서 돌아갈 생각으로 아내의 차를 이용해서 장에 나온 것이었다.
홍랑이 그렇게 제의하자 아내는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알겠다면서 주인장 할머니에게 편육과 막걸리 세 병값을 계산했다. 사모님은 선생님과 걸어서 나오셨다고 했으니 아내가 들어가는 길에 태워다 드릴 것이다.
오랜만에 은사님을 모시고 산책 삼아 다녀오면 되는 일이다. 선생님과 함께라 흡연 욕구를 참는 게 힘들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더라도 기분은 상큼할 것이다.
“선생님! 잠깐만요.”
홍랑은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가게 뒷문을 열고 나갔다. 가게 뒷문으로 나가면 화장실이 있고 작은 마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랑은 소변을 보며 담배를 급하게 한 대 피워 갈증을 달래고 돌아 나왔다. 술잔을 기울이면 흡연 욕구가 더 강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가게 앞에는 이미 아내와 사모님은 사라지고 없고 선생님 혼자서 머뭇거리고 계셨다.
홍랑이 나오자 오동추 선생은 제의하셨다.
지척에 있는 구미초등학교를 들러서 가자는 것이었다.
“거기는 왜요?”
“거기에 그분의 동상이 있지 않은가? 그것부터 보고 가도록 하지.”
그것까지는 홍랑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 동상을 철거해야 마땅하다고 참여 정부 때 좌파에서 난리를 떨었다.
무슨 근거로 학교 안에 설치한 동상을?
국비가 아니라 동창회에서 기부를 받아 설치한 것을?
홍랑이 생각해도 그건 뜬금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회 회원들과 졸업생들이 워낙 강력히, 그야말로 사수를 해서 없앤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재래시장에서 구미초등학교까지는 오 분 거리다.
2번가로 질러서 가면 바로 지척에 있다. 2번가는 보행자 전용도로이지만 역병 때문인지 한산했다. 2번가의 점포도 임대 현수막이 띄엄띄엄 걸려 있을 정도로 불경기다.
그 한산한 도로를 선생님과 나란히 걸으면서 홍랑은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께선 독재와 산업화, 아니 민주와 근대화,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어. 한 가지에 만족해야지.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 남의 떡이 크게 보이는 법이야.”
선생께선 걸으시면서 생각이 깊으신지 말을 아꼈다. 그런가? 오동추 선생은 한참을 걷다가 초등학교에 거의 다다라 생각이 나신 듯이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역사를 뒤지면 누구나 공과 과가 있는 법이지. 어느 위인이든 다 있어. 어느 것을 크게 쳐주느냐가 문제야. 그건 역사를 보는 사람 마음이고 평가하기 나름이지. 세상이 바뀌면 그분의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어.”
대답을 기다리는 말은 아니지만, 그럼, 선생님께선 여태 그분의 과를 우선으로 여기셨군요, 홍랑의 입에서 그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후문으로 들어서니 학교는 조용했다. 아이들은 역병으로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 옛날에는 참으로 큰 학교였으나 지금은 도회 변두리 주택 밀집 지역의 아이들이 많고 상업지역에 있는 구미초등학교 학생 수는 급격히 줄었다. 폐교 위기에 처했지만, 대통령을 배출한 학교라서 폐교가 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그분의 동상은 학교 앞에 있는 게 아니다. 후문으로 들어서자 교사 뒤 좁은 터, 온실 앞에 아담하게 서 있는 동상인데 안으로 들어서니 한 쌍의 젊은 연인이 동상 앞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빨며 밀애를 즐기고 있다가 홍랑과 오동추 선생이 다가가자 일어나 팔짱을 끼고 후문 밖으로 사라졌다.
오동추 선생은 동상 앞에서, 기우는 오후 햇살에 눈이 부신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동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말이 없었다. 선생께선 변했다.
변했다?
최소한 홍랑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홍랑은 핸드폰을 꺼내 몇 걸은 물러서서 오동추 선생의 옆모습과 동상이 나오도록 앵글을 잡고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쓸데없이 소녀상만 자꾸 만들어 세울 일이 아닌데.”
혼잣말이었다. 홍랑이 들으라고 하신 소리는 아닌데 홍랑은 또렷이 들었다.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홍랑의 얼굴이 후끈거릴 지경이었다. 구미초등학교에서 대통령 생가까지는 이십 리다. 소년 박정희는 책보를 끼고 그 길을 걸어 다녔다. 당시에 지름길이라고 산길로 다녔는데 그 길은 이제 육 차선 도로가 반듯하게 놓여있다.
“택시를 부를까요? 카카오 택시를 부르면 바로 옵니다.”
말없이 동상을 한 바퀴 돌고 후문을 나와 홍랑이 핸드폰을 꺼내 들며 뱉은 말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지.”
“선생님! 택시비가 고작 몇천 원 나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을 매일 걸어서 다닌 분도 있어.”
오동추 선생의 말은 단호했다. 순간 홍랑은 뜨끔했다. 무슨 말이지 감을 잡은 홍랑은 뒤통수를 긁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상모동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자주 있다. 지금은 번화가가 되어버린 그쪽으로 가는 버스는 갈아탈 일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나오는 동안 오동추 선생은 말이 없었다.
시내버스는 한산했다.
선생께선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으시고 홍랑은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동상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는가?”
역시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다.
이럴 땐 침묵으로 귀를 기울이는 게 예의다.
“무릇 인간은 홀로 걸을 적에 제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거늘, 동상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를 비교하니 내 그림자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네.”
“그런 말씀 하시지 마셔요. 선생님께서도 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뛰셨는데.”
홍랑은 할 말이 궁했다. 그 말을 하면서 홍랑은 자신의 그림자를 생각했다. 그 동상 앞에서 홍랑은 제 그림자를 볼 겨를이 없었다. 그림자?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이다. 역시 한번 선생은 영원한 선생이다. 그 말을 통감했다. 오동추 선생은 홍랑의 말을 들었는지 대답이 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동추 선생께서 다음 말을 꺼낸 것은 한참을 가서 신평동 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할 즈음이었다.
“집사람에게 대충 들었네만, 자네는 미얀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는가?”
“일테면 집 장사죠. 집을 지어서 팔고 있습니다.”
“땅을 사서 짓는 것인가?”
“땅을 사서 지은 것도 있고, 지주와 공동개발한 것도 있습니다.”
“땅을 산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게 가능한가?”
선생께선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미얀마의 땅은 두 종류가 있다. 개인 소유가 있고 BOT라고 국가에서 백 년 임차를 한 땅도 있다. 임차한 땅도 거래가 되고 팔리기도 하는 것인데 임차권만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땅을 잘 알아보고 사야 한다.
그 사실을 선생님께 간략하게 설명했다.
홍랑은 땅에는 속지 않았다.
그러나 거품처럼 피어나는 경기에 속았다.
초기에 주택 붐이 일어날 적에 빚을 끌어다가 계약이 되는 대로 왕창 지었는데 거품이 빠지자 팔리지 않고 있다. 생각하면 속이 쓰린 홍랑이다.
“그래. 사업성은 있고 잘 팔리는가?”
“미얀마 투자는 제 인생에 있어서 티눈 같은 존재입니다.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입니다.”
“티눈? 티눈이라 재미있는 표현이구먼! 미얀마 나가기 전에는 몽골에서도 사업을 했다고 얘기를 들었네만 몽골에서도 주택 사업을 했던가?”
선생께선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절에 여자들끼리 모이면 별의별 얘기를 다 하는 모양이다. 사모님께 들었는지 오동추 선생은 홍랑에 대해서 거의 다 알고 계신다.
“몽골에서는 중기 임대업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중고 장비를 사다가 임대업을 하다가 임자가 나타나면 현지인에게 팔곤 했지요.”
“장비라면 어떤 중장비를 말하는가?”
“예, 굴착기와 덤프트럭이었습니다”
“재미가 있었겠구만, 몽골 사업은 인생의 티눈이 아니었나?”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물으셨다.
“몽골에서는 약간 벌었습니다.”
“자네는 그분의 특별 수혜자라고 할 수가 있겠구만.”
특별 수혜자? 그분? 그분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가? 좀 의아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까 동상으로 보신 분, 그분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에서 후진국을 상대로 개인이 해외사업을 하리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네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해외사업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겼겠지. 자네가 직접 하리라고는 생각이나 했겠는가? 내가 알기로는 그때는 미얀마 쌀을 원조받아서 먹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나라에 가서 주택 사업을 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 이렇게 역전이 된 건 다 그분 덕분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럴 수도 있다.
그분이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했다면 해외사업은 언감생심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분 혼자서 이렇게 경제 대국을 만들었단 말인가? 선생께선 민주, 아니 독재라는 과보다는 조국 근대화라는 공에 역점을 두고 크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니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선생의 뒤통수에 대고 홍랑이 그렇게 대답한 건 한참 후였다. 그때는 시내버스가 이미 수출탑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버스 정류장마다 차는 정차를 했지만, 더 탄 사람도 없었고 내린 승객도 없었다. 홍랑은 한산한 버스 뒤를 돌아다 보았다. 기사까지 포함해서 일곱 명의 승객이 고작이다.
수출탑을 보니 생각이 난 것인데 당시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속했었고 수출 100만 불 돌파 기념식도 했었다. 100만 불? 당시에는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작금에 와서 홍랑이 미얀마에 투자한 현금이 100만 불이 훨씬 넘는다. 인플레는 상당히 있다고 하지만 100만 불 수출! 그 기념식, 그 기억은 흑백사진처럼 뿌옇지만 그런 기념식도 분명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근대사 자료를 뒤지면 분명 그런 사진은 쉽게 찾을 것이다. 세계사를 뒤져도 이 나라만큼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는 없다. 억지로 주장을 하면 그분의 공이다. 그러나 홍랑은 해외로 다니며 단 한 번도 그분의 덕으로 이렇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홍랑이 가만히 생각하니 선생께선 변해도 너무 변했다. 전교조 출신의 선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너무 변하신 것 아닌가?
선생님은 말씀하시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홍랑은 선생의 뒤통수를 보고 대화를 했다.
선생의 목덜미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있다. 홍랑은 선생의 목덜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주 고집이 센 노인네의 목덜미같이 보였다. 어쩌면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이쪽 면에서 생각할 땐 그것을 철저히 믿고, 반대쪽에서 보고 생각을 바꾸자 그 점을 굳건히 사수하는 노인네의 아집,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생의 연세가 올해 얼마인지 모르겠다. 많아 봐야 홍랑 자신보다 열 살 안일 게다. 그러나 생각에 너무 차이가 난다.
아집이 센 노인네의 목덜미!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며 눈앞에 어른거리는 선생의 쇠잔한 목덜미에 이름 모를 연민이 일었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노래 가사가 입에 맴도는데 버스는 출렁거리며 상모동 굴다리 신호를 건너고 있었다. 그 출렁거림에 맞추어 시내버스 천정에 달린 손잡이가 군무처럼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이 노인네가 북채를 들고 다니던 그 오동추 선생이 맞나 의심이 들며 그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뭇, 궁금했고, 동동주 술타령에, 오동동이야. 홍랑의 입에서는 그 가락이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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