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0장 13절 – 14절
지나간 역사를 신명기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역대기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역대기저자는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왕의 종말을 다루면서 사울왕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해서 신명기적인 관점에서 이를 다루는 것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블레셋군대에게 길보아산에서 사울왕 자신과 그 자식들이 죽임을 신명기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관점에서 자기방식대로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이 신명기적 관점인데 사울왕은 사무엘에 의해서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즉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하신 자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관점에서 자기방식대로 따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왕은 어제의 기름부음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무대는 있고 업적도 세우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람들을 어제의 기름부음이라고 말합니다. 어제의 기름부음은 이제는 기름부으심이 끊어진 자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제의 기름부으심에 해당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을 인해서 하나님이 여전히 축복하시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버리시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깨어지고 단지 옛날의 기름부음받았던 그 기름이 단지 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자들은 남들에게 자신이 여전히 기름부음을 받고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현상들을 조작하거나 업적을 세우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제의 기름부음은 내일의 기름부음받는 자를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끊어진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내일의 그 기름부음을 견디지 못해 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던 자가 자신과 같은 부분에 내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보면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역대기기자는 사울왕이 죽은 것은 하나님께 불신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원인을 역대기기자는 세가지로 뽑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되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을 따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관점에서 자기의 의도를 따라 선별적으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말렉을 치고서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들을 죽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사울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우양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양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풍성하게 예배를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왕을 질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선별적으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왕과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 아말렉에게 속한 것들을 죽이라고 하셨는데 사울왕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별적으로 복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울왕을 보시면서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른 사람을 사울왕 대신에 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회중들도 사울왕처럼 말씀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부분에만 말씀에 복종하는데 그런 자들을 설교자들이 칭찬하고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극히 미워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 째는 신접한 여인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울왕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사울왕자신의 방식대로 따라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경내에서 신접한 여인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인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금하신 것들을 열심히 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떠나고 또는 사울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을 전하는 그런 선지자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입바른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사울왕 자신이 그런 선지자들의 말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울왕으로 인해서 참선지자들은 숨거나 다윗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답답해 하였던 사울왕은 길보아산 전투를 앞에 두고서 접신한 여인을 찾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그러면서 사무엘의 영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접신한 여인이 보았다고 하는 그 사무엘의 영은 참된 사무엘의 영이 아닐 것입니다. 무당이 하나님의 사용하신 참 선지자의 영을 푸닥꺼리로 불려 올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당이 전하는 것조차 사울왕에는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의 문제에서 답답하다고 무당을 찾아 점괘를 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사울왕은 접신한 여인 즉 무당에게 도움을 구하기 보다 하나님앞에서 눈물로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선지자들이 전하여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익숙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왕 자신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낯설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닌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울왕의 죄의 가장 근본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묻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려고 할 때 조차도 먼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다윗과 사울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성도들은 하나님께 묻는 것에 낯설어 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묻는 자가 아니라 단지 일방적인 기도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묻는 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답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인데 계몽주의 영향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답을 듣는다고 하는 것을 낯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닌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고 신앙이 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