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48) 이수명<나무는 도끼를 삼켰다〉사람은 누구나 벼랑 하나쯤 안고 산다 / 도끼 삼킨 나무처럼…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자신을 찍으려는 도끼가 왔을 때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도끼로부터 도망가다가 도끼를 삼켰다.
폭풍우 몰아치던 밤
나무는 번개를 삼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깊이 찔리는 번개를 삼켰다.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는 불과 6행으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시다. 나무/도끼의 대립에서 펼쳐지는 이 시의 전언을 해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 철학자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두 독재자 밑에서 생을 꾸린다. 그 두 독재자의 이름을 들으면 당신은 아하, 하고 반응할 것이다. ‘우연’과 ‘시간’이 그 독재자들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우연은 밤길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강도고, 시간은 생이라는 급전이 필요해 빌린 고리대금업자다. 먼저 우연에 대해서. 많은 생이 보편적 이성의 선택보다는 우연에 의해 길러지고 만들어진다. 우연이란 도덕적 준칙도 아니고 당위적 명제도 아니다. 우연은 의도나 생각의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있을 수 없는 것, 그러나 지나서 돌아보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의 범주에서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것의 돌연한 끼어듦이다. 우연은 기대의 지평선에는 보이지 않다가 느닷없이 얼굴을 드러내면서 아는 척을 하고 태연하게 제 몫을 챙긴다. 그런 맥락에서 우연은 생의 새로운 범주로서, 새로 발견되어야만 하는 범주다. 그다음 시간에 대해서. 시간은 탐욕스럽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젊음, 꿈, 기억, 생명, 기회들, 승리와 영광의 아우라들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고 스러진다. 시간의 파괴력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 안에서 사물은 시들고 깨지고 부스러지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피로는 시간이 생에 개입한 물증이다. 보드리야르는 피로를 가리켜 “육체에 깊이 파고드는 이의 주장”이라고 했는데, 이때 시간은 피로와 한몸으로 묻어온다. 그러니까 육체에 파고드는 피로는 곧 육체에 파고드는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의 항구성 앞에서 우리는 탄생과 쇠락이라는 생의 사건을 겪고 죽음에 이른다.
이수명은 우리 생을 지배하는 두 독재자를 ‘도끼’라는 은유에 쓸어 담는다. 나무는 주체고, 도끼는 나무를 찍는 객체다. 나무는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도구적 존재인 도끼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약한 형질의 나무가 돌연 강한 형질의 도끼를 삼킨다. 나무를 존재론적인 주체로 끌어당긴다면 도끼를 당위론적인 법-정의-질서로 끌어당기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나무와 도끼의 어긋남 ‘사이’에 삶이 있다. 나무와 도끼의 ‘사이’는 우연과 시간이 소용돌이치는 중간지대다. 이 ‘사이’는 나무와 도끼가 연루된 찍고 찍히는 상호관계의 이행과 변이의 지대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 ‘사이’를 “정의되지 않은 방향 전환의 거처”라고 말한다. 나무는 자신을 찍어내려고 덤벼드는 도끼를 삼켰다. 도끼로부터 “도망가다가” 도끼를 삼킴으로써 나무는 도끼-나무가 되었다. 나무에게는 나무의 길이 있고, 도끼에게는 도끼의 길이 있는데,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진다. 나무와 도끼의 사이에서 모종의 형질 전환이 일어난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탈영토화로서의 탈주다. 이것으로 나무와 도끼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깊은 대립과 모순은 내면으로 숨고 관계의 파국에서 슬쩍 비껴간다.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는 감동을 주는 시는 아니다. 감동 대신에 충분히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자, 다시 사유의 길을 따라가보자. 도끼를 삼킨 나무는 다시 한 번 번개를 삼킨다.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나무는 번개를 삼킴으로써 번개-나무라는 존재론적 변화에 이른다. 이것 역시 탈영토화로서의 탈주다. 6행으로 된 시에서 4행이 “삼켰다”라는 과거완료시제 동사로 끝난다. “삼켰다”라는 동사에는 “씹지 않고 먹다”의 뜻이 스민다. 말 그대로의 해석을 따라가면, 삼켜진 자는 삼킨 자와 일체가 된다. 포식자에게 먹힘으로써 피식자는 포식자의 일부로 존재가 편입되는 것이다. 도끼를 삼키고 번개를 삼키는 나무는 포식자다. 본디는 도끼와 번개가 포식자고, 나무는 피식자일 텐데, 이 시에서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피식자의 계열에 속하는 나무가 포식자[도끼·번개]를 삼킴으로써 자기를 구원한다.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에서 피동성의 주체인 나무를 도끼조차 삼켜버리는 포식자로 상상한 발상법은 평이하지 않다.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 드라마로 읽힌다. 나무는 도끼·번개라는 타자를 자기 속에 포용해냄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대립 구도를 무너뜨린다. 피해자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도끼·번개가 가진 파괴의 에너지를 생성의 에너지로 바꿈으로써 상생의 꿈을 오롯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가슴에 벼랑을 하나쯤 품고 산다. 어떤 나무가 제 속에 도끼를 품고 번개를 품고 살듯이. 벼랑을 품은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낫냐는 단순비교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잘 살아내는 것이다. “지상의 그늘들이 포개지는 저녁이 와도 내 산책은 저물지 못했는데. 나는 계속 덧나기만 했어요. 덧난 자리마다 부끄러운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른 길로 무수히 갈라졌어요. 갈라져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이제 남아 있는 나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어요.”(〈생의 다른 가지〉,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계속 덧나기만 하는 생. 부끄러운 그것마저도 차츰 줄어든다. 생은 줄어듦으로 우연과 시간 앞에서 우글거린다. 우연에 뺏기고 시간에 자발적으로 넘겨준 것, 그리고 남은 것이 남들과 인사말을 나누고 농담을 건네는 현재의 생이다. 그 생으로 길을 만들며 꾸역꾸역 간다. 그 길은 수많은 길로 갈라지는데, 갈라진 그것들 위로 우리는 벼랑을 품은 생을 밀고 간다. 저를 찍으려던 도끼를 품고 저리도 늠름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보니 아, 이 생은 기쁘고 숭고하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고 남은 게 그저 흘러가는 일뿐이라도. 생의 안쪽은 텅 비고, 애초의 출발점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할지라도.
이수명(1965~ )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의 유년기는 퍽이나 평탄했나 보다. 메마른 삶과 사소한 죽음들로 바글대는 서울을 존재의 거푸집으로 삼고 굴곡 없이 잘 자랐나 보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지금까지 시집 네 권과 번역서 몇 권을 펴냈다.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세계사, 1995),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세계사, 1998), 《붉은 커브의 담장》(민음사, 2001),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문학과지성사, 2004)가 그것이다. 이수명의 시는 명료하면서도 모호하다. 이 모순어법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시인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생은 굴러보지 못한 귓바퀴를 가졌고, 삼켜버리기만 하는 목구멍을 가졌고, 얼빠지게 긴 식도를 가졌다.(〈전화〉,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귓바퀴와 목구멍과 긴 식도는 자명하다. 듣고 삼키고 넘기는 몸은 자명하지만 이 자명한 몸으로 영위하는 생은 저절로 자명함에 귀속되지는 않는다. “나는 사정없이 엎질러져간다. 내가 가는 길, 또는 가지 않았던 길로.”(〈깨어진 화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이 엎질러짐 때문에 생은 돌연 낯설다. 이 낯설음은 사소한 불행의 기미들이 일으킨 질병이다. 아무리 평탄한 생이라도 그 안쪽에는 질병들이 있다. 날마다 엎질러져가는 이 대도시의 범속한 생활은 사소한 불행의 기미들로 그 체적을 채운다. 그래서 생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수명은 바로 생의 이 지점을 응시한다.
사진 : 김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