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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여부는 아직까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채
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중으로 알고 있으며 개인적 선호도에 따라 이를 조심스럽게 수용하거나
아니면 위서로 단정하여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그동안 느꼈던 화랑세기 필사본의 흥미로움에 있어서 그내용적 가치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을 발췌하여 몇자 적어봅니다.
첫째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김춘추)의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이찬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海干)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長耳)이며,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다. 딸은 넷이다. 서자(庶子)로는 아찬 군승(軍勝)이 있는데, 그 어머니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유신이 죽은) 뒤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삼광 이하 원망까지 아들 다섯과 이름이 전하지 않는 딸 넷을 모두 지소부인이 낳은 것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어머니가 지소부인이 될 수 있는지 맏이 삼광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재위 6년(666) 기록에 의하면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은 모두 나마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케 했다."고 나옵니다.
숙위란 당나라 인접국의 왕자나 고위 관리의 자제가 당나라 황실에 머물면서 황제를 호위하는 직을 말하는데.
김유신이 지소와 결혼한 때가 655년 12월이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맏아들 삼광이 아무리 빨라도 삼광은 656년 이전에 태어날 수
가 없지요.
넉넉잡아 삼광이 656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불과 11살짜리 어린애가 나마(11등) 관위에 있으면서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했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이보다 2년 뒤인 같은 문무왕 8년(668)조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고구려를 정벌하는 내용에 있어서
여름 6월 12일조에
"6월 12일...(중략)..유인궤가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위하던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當項津)에 도착했다.
왕이 각간 김인문에게 성대한 예식으로 맞게 했다."라는 기사 내용입니다.
2년 전 17관위(官位) 중 11번째인 나마로 떠났던 삼광이 3계단 뛰어오른 제8등 사찬으로 진급한 채 귀국한 것인데
삼광이 정말로 지소의 아들이라면 이 때쯤 아무리 나이가 많아야 불과 13살인데 당나라 황제의 칙사를 모시고 신라로 귀국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기사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신문왕 재위 3년(683) 이해 봄 2월조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먼저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했는데..하략
사찬 삼광이 15년 뒤에는 다시 4단계를 뛰어 17관위 중 진골 4관등인 파진찬이 되었있는데. 그가 지소의 아들이라면
이 때 아무리 많아 봐야 나이 27세를 넘지 않는데 이런 나이에 기라성 같은 나이 많은 다른 진골들을 제치고 파진찬이
되었다는 것도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기록인 것입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유신공은 18세 풍월주가 될때 이미 영모와 혼인한 화랑세기의 기록으로 이러한 의문이
해소되기 때문에 아마도 화랑세기의 필사본의 내용이 더욱 매력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삼국사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김유신의 친동생 김흠순의 경우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가 599년에 태어나 19대 풍월주를 역임했으며
문무왕 재위 20년째인 680년 2월에 82세(만 81세)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김유신보다 네 살 어린 것으로
비교적 자세합니다.
구태어 화랑세기가 없어도 김흠순이 당대 신라 조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활약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흠순이 언제 죽었는지, 그 때 그의 직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데 워낙 불세출의 형 때문에
억울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입니다.
그가 삼국통일 전쟁과 나당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당대 영웅인 김유신의 친동생이자 문무왕비의 친오빠 인점을
감안하면 그가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열전조차 끼이지 못해 그내막이 베일에 가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매우 놀라운 기록이 보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재위 20년째인 680년 봄 2월에 이찬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처럼 이찬 김군관에 대한 상대등 임명 기사가 나온는데 673년 7월1일 상대등 김유신이 죽고 난뒤에 7여년간의 공백이 있고
뒤를 이어 김군관이 상대등 임명기사가 나옵니다. 따라서 673년 이후 김군관이 임명되는 680년까지 7년 동안은 상대등이
누구였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군관이 상대등에 임명된 된 때와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김흠순이 죽었다고 하는 680년 2월과 맞추어 보면
이것은 퍼즐이 완전하게 끼워 맞추어진 것처럼 맞아 떨어집니다.
삼국사기가 빠뜨린 김유신과 김군관의 사이에 취임된 상대등은 김흠순이며 이는 상식적이든 사실적이든
매우 설득력을 나타내는 내용이라 진위여부를 떠나 화랑세기 필사본 내용의 매력이 발휘되는 그러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본기(本紀) 내용이 대단히 체계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지만 또한 헛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왕 재위 몇 년째 어느 달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구성된 기전체 본기 내용중.
뜬금없는 구칠과 대세는 난데없이 튀어나와 난데없이 사라지는 본기와 상관없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이들에 얽힌 사연이 진평왕 당대 신라와 또는 왕의 치적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삼국사기로서는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구칠과 대세가 삼국사기에서는 속세에 뜻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뜬금없는 기록을 전하는데
그것이 신라본기에서 그들이 떠났던 말았던 왕의 치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뚱단지 같은
내용이지만.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대세라는 인물이 9대 풍월주 비보랑전에 동대공(冬臺公)의 아들로 화랑도의 권력 투쟁과
분열 사건의 중심에 선 일물로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됨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지왕의 죽음에서.
이 곳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진흥왕의 아들 금륜인 진지왕은 재위 4년째인 579년 가을 7월 17일에 죽으니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라는 절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어떻든 「삼국사기」든 「삼국유사」든 진지왕은 재위 4년째에 죽었다고 했지요. 한데 두 기록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삼국사기」는 진지가 왕으로 있다가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하는데 비해 「삼국유사」는 진지가 쫓겨난 뒤
죽었다고 하는 점이 그것이지요.
화랑세기」필사본에는「삼국유사」처럼 진지가 쫓겨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필사본에는「삼국유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첫째, 진지를 쫓아낸 주축이 미실을 비롯한 궁중 여인들이라는 점이요,
둘째, 진지는 축출된 뒤 유궁(幽宮)에 3년 동안이나 유폐돼 있다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화랑세기」에는 도화녀라는 여인은 물론이고 그와 진지에 얽힌 설화도 없습니다.
다만 비형랑이라는 인물만 등장하고 있으니 13대 풍월주 용춘공전에 "(용춘이)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랑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라고 삼국유사 처럼 황당하지 않은 비교적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형랑 또한 진지왕의 아들이니 김용춘에게는 서제, 즉 서출 동생이 되는 것으로.
진지왕이 3년 동안 유폐 생활을 했다는 필사본 기록이야말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화녀-비형랑 설화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진평왕 44년(622) 대목을 보면 이 해 2월에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아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의 3궁을 모두 관장하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용수라는 인물이「삼국사기」에서 가장 먼저, 그것도 단독으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용춘이라는 이름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지요.
그런데 이보다 7년 뒤인 같은 진평왕 재위 51년(629) 기록에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 서현(舒玄)과 부장군(副將軍)
유신(庾信)을 파견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게 했던 기록으로." 서현은 (김)유신의 아버지며 부자가 함께 낭비성 전투에
출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전쟁에서 신라군을 이끈 대장군으로 김서현과 함께 용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6년이 더 지난 뒤인 선덕왕 재위 4년(635)조의 다음 기록으로 발길을 옮기면 상황이 아주 달라진다.
"10월에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현(州縣)을 돌며 (백성을) 위로하게 했다.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용수, 혹은 용춘이라고도 한다'(龍樹, 一云 龍春)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사정은 서기 654년 태종무열왕 즉위년조 기록에 가면 비슷하게 반복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왕은 생전 이름이 춘추이니 진지왕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 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4월, 돌아가신 왕의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라 했다."
선덕여왕조 기록과 무열왕 기록 사이에는 용수와 용춘이 서로 자리바꿈하는 이상한 기록이 보입니다
또한 만일 같은 인물이라면 별다른 실책이 보이지 않는데도 관등이 갑자기 낮아지는 기이한 현상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622년 ---- 용수(龍樹)
629년 ---- 용춘(龍春)
635년 ---- 용수 혹은 용춘(龍樹 一云 龍春)
654년 ---- 용춘 혹은 용수(龍春 一云 龍樹)
삼국유사 역시 헷갈리는 순서가 뒤바뀌는 똑같은 현상을 볼수 있습니다.
왕력편에서는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이름이 김춘추로서 용춘(龍春), 즉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의 아들이다.
용춘은 용수(龍樹)라고도 한다(龍春 一作 龍樹)
하지만 기이편에서는 제29대 태종대왕은 이름이 김춘추로서 용수(龍樹.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 즉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또한 탑상편에서는 정관(貞觀) 17년(643)...백제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돌과 나무를 재단했는데
이간(伊干) 용춘(龍春. 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그 일을 주관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동일인물로 묘사되는 용춘과 용수의 순서가 서로 바뀌는 이해못할 일관성없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 처럼 서로 다른 사람일 경우는 위의 기록들이 전혀 문제가 안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삼국사기 본기내용에서 선덕왕 김양상에 대한 기록은 그의 족보가 참으로 헷갈리는 왕으로
즉위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양상(良相)이다.
내물왕 10세손인데 아버지는 해찬(=파진찬) 효방(孝芳)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으로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 양품(良品)의 딸이다.
아버지를 개성대왕(開成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追尊)했으며 처를 왕비로 삼았다."
선덕왕(김양상) 즉위년 기록을 보면 김양상은 내물왕 10세손이라 하고, 그다음의 왕인 원성왕 김경신을 내물왕 12세손이라 하고
있으면서 (원성왕 즉위년 조)에서는 원성왕이 선덕왕의 동생이라고 하는 근친혼으로 이루어진 형제가 아닌데도 종잡을 수없는
족보의 모순을 삼국사기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직계의 조상이라면 원성왕이 구태어 성덕왕과 선덕왕의 아버지인 개성대왕의 사당을 헐고 자신의 조상의 사당으로
대체했던 사항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화랑세기 필사본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왕력편으로 이들의 족보관계가 매우 설득력있게
드러남에 따라
화랑세기의 필사본 내용의 매력이 바로 이런 상식적 납득의 보충을 해주는 것으로써 매우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물론 풍월주라는 용어가 조선시대 삼국사절요에서만 보이는 후대의 용어라는 점을 들어서 위서라고 반론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이미 삼국사기에 풍월의 도라는 내용이 나오며 삼국사절요의 풍월주 라는 용어가 이전의 삼국시대 고기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자체도 밝혀내지 못했기에 이러한 주장또한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박창화의 창작품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는 분들도 더러 보이는데 그것은 박창화가 달랑 화랑세기 필사본이나 몇권 정도의
유고를 내어 놓았다면 그엄청난 내용을 창작한 참으로 천재적인 인물이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중 일부분 몇권의 소설적 창작품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인간의 능력으로 30여권이나 되는 유고집을 창작했을 수도 없는 것
으로써 어쨌던 많은 의문과 기이한 박창화의 유고집들은 매우 흥미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뜻으로 본내용을 작성한 것은 아니며 그러한 진위여부를 판단할만한 내공도
갖추지 못했기에 다만 이러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 근대적인 지명이나 용어 또한 거의 발견 되질 않기에
아직까지 진위여부의 논란이 어느쪽으로 확실시 되는 것도 없이 10년이상의 세월속에 혹독한 사료비판을 겪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환단고기 처럼 근대적 지명용어인 백두산이라든지 하는 단어나 용어가 더러 보이면 아마도 가차없이 위서로 낙인될 수
밖에 없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가지는 비교적 사실성과 상식성이 돋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첫댓글 오~~잘보고 갑니다 화랑세기에 "신국의 도"라는 대목이 혹시 나오는지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나온다면 어떤 상황에서 말한건지 알수 있을까요?^^
고구려무사님 제22세 풍월주 양도공편에 나오는데 아래 미주가효님께서 워낙 빈틈없이 자세하게 설명되었기에 제가 중복되게 사족을 달수가 없어서 생략합니다...아래 미주가효님의 댓글을 참조하십시요...^^*
이 게시판에 소호금천님이 올리신 글 <神國의 婚道-新羅의 近親婚> 을 참고하세요. 그 구절이 나오는 상황은 이렇습니다. // 공은 본디 동기(同氣)간에 서로 결합(相合)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공의 누이인)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 (공의 어미인) 공주가 성을 내어 책망을 하니 공이 부득이 말하기를,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오랑캐(夷狄)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中夏)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하였다. 공주는 이에 …
공을 감싸 안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서 하겠느냐" 하였다. 이에 보량을 처로 삼아 아들 양효(良孝)를 낳았다. /
이 상황은 결혼과 관련하여 근친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이야기이지만, 근본적인 취지는 '중국적 외래적 풍습 혹은 도덕관념' 에 대비되는 '신라 전통적 풍습 혹은 도덕관념' 이라는 의미겠지요.
오~~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 역사에서 저렇게 膽大한 글은 본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神國에는 신국의 道가 있으니 어찌 중국의 道로써 하겠느냐" 다시 보니 感懷가 새롭네요^^
음...좋은 글이군요....아주 합리적인 분석력이 돋보이는 글이네요....카오스가 이 싸이트를 떠나지 않고 종종 헷갈리는(?) 글 몇자 적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좋은 글들이 종종 올라오고 있어서 이 사이트가 앞으로 큰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일단, 좋은 글을 쓰신 소호금천씨님 계속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1. 그런데 화랑세기 등 남당유고에 대한 평가가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여러분들께서 '큰 맥락'을 놓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그 맥락만 파악하게 되면 남당유고의 원본이 왜, 언제, 어떻게 쓰여진 것이고 또 그 목적과 변모 및 활용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그래서 모두들 그 '맥락'이 도데체 무엇이었겠는가?를 진지하게 심사숙고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한가지 조언드릴 수 있는 것은...일단, 이 남당유고들이 현재는 실전된 '古記의 원전'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남당유고들은 '史實'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각색'된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는 '창작'된 부분도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기들이 몇번의 개작을 거쳐서 김부식에게 전해지고, 김부식은 그 내용이 황당하다고 매도하고서 마구 칼질해서 나름대로 뼈다귀만 재정리한 것이 바로 삼국사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손을 댄 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요.
3. 그래서 삼국사기의 빠진 부분을 이 남당유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이런 측면에서 이 유고들은 그 기록이 모두 史實이 아니라 하더라도 김부식이 감추어 버린 實史를 복원해 내는데 참으로 귀중한 자료들이 되는 것입니다. 김부식은 왜 개작된 내용을 후세에 전하려고 했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당유고를 박창화의 창작으로 보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그룹의 사람들이라고 할수있을 것입니다. 실제 남당유고를 한번 보면 '어떤 인간도 이러한 방대한 창작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금방알 수 있을 것입니다. 眞實은 눈을 감는다고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박남수(국사편찬위원회) 선생은 자신의 논문에서 “따라서 花郞世紀 의 진위는 결국 박창화 본인이 기술한 각종 전적류에서 판별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그의 遺稿가운데 새로이 발견한 화랑세기 잔본의 내용을 검토하고, 이를 기존에 발견된 두 본의 화랑세기 와 비교함으로써 그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유효하다고 판단된다. 연구자들에게도 주요한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의문시 됩니다.
본인은 花郞世紀의 진위는 형식적으로는 일본 궁내성 서릉고에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남당 박창화 선생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문의 존재여부와 이것이 조선 규장각에서 유출된 판본인지, 또는 민간에서 보관중이던 판본인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나, 그렇지 못한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남당유고 신라사초라고 제가 임시로 이름 지은 5권의 유고본과 위화진경초라 불리는 유고본을 해석하고 비교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또 신라사초를 검증하기 위하여 백제왕기, 고구려사초(략), 추모경을 모두 비교 검토(검증)하고, 중국정사 조선전의 기록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비교 검토(검증)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 남당유고가 창작인지 필사인지 내용적인 검토는 이루어 질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지금 주류학계에서 내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판본 존재여부의 불확실성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있다는 것은 증명이 가능하지만 없다고 증명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만약 일본 궁내성 서릉고에 남당유고의 원본이 있다면 조선 왕실도서관인 규장각본일까? 아니면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던 판본일까? 여러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남당이 쓴 강역고라는 책을 보면 이씨 조선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이 보인다. 남당은 적어도 자신이 본 서책들이 규장각에서 유출된 것인지, 민간의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남당은 자신이 규장각본을 필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하였을 것이다. 화랑세기 등 각종 전적류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 황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차라리 남당이 희대의 사기꾼이고 나는 남당의 낚시에 걸린 한마리의 물고기인 것이기를 바란다.
ㅋㅋㅋ화랑세기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네요
예전 역사스페셜 방송에선 궁내성에 화랑세기 원본이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형태로 있지는 않다. 그걸 부분 조각 내서 전부 따로 보관하거나 다른 곳에 붙이고 했다고 박창화 제자가 나와서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일본이 우리의 식민지가 되지 않는 이상 화랑세기 원본은 영원히 찾기 힘들겁니다. 궁내성을 뒤지도록 일본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죠. 접근도 못하게 하는데, 그걸 쑥대밭처럼 뒤지는 건 ....화랑세기에 대한 미스터리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거 같네요. 고대 금석문이나 목간에 박미실!!! 이런 자료가 출토가 된다면 흥미진진해지겠죠 ㅋㅋ..그러나 제 생각엔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을 거 같군.
내가 남당유고를 해석하여 세상밖으로 내어 놓으려고 하는 이유는 원본을 되찾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남당유고가 책으로 나오면 그동안에 풀리지 않던 불합리한 일본의 기년이 풀리게 된다. 남당유고에는 일본의 왕들의 시호조차 언급되지 않지만, 신공여왕(우로살해 - 근초고왕과 칠지도), 광개토대왕과 인덕천황은 거의 확실하니 일본천황릉 발굴과 비교해 보면 일본의 기년도 풀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내부정리가 끝난 이후일 터이니 내가 그 결과까지 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우리와 같이 자료를 공유하면 빠르고,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다 보면 늦을 것이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음...일본이 일본서기를 자국의 시조역사로 주장할 수 있는 상황하에서는...절대로 '남당유고의 원본'은 공개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일본서기의 왜곡성이 완전히 규명되거나 혹은 심각하게 일본서기의 신뢰성이 의심받는 상황이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일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공개하여 '일본서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로 삼을 것입니다...즉, 이말은 지금 우리에게 공개된 '남당유고의 원전' 보다 더 자세한 '동아시아의 초기역사에 대한 언급'이 기록된 '古記類'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공개된 남당유고는 현재 알려진 내용으로부터 추론해 보면 '초기 古記類'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존 남당유고에 일본에 관한 사항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박창화가 한국사와 관련된 기록만을 필사해서 그렇지 실제는 일본사에 관해서도 이와같은 '초기 古記類'가 존재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즉, '초기 古記類'의 집필 목적이 한국사(신라사)와 일본사를 가능하면 구분짓기 위해서 집필된 것이기 때문에 '초기 古記類'에서는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불명확하거나 생략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남당이 본 기록들은 아마 일제가 가져간 기록들이 아니라 조선의 규장각에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진 기록이었을 것으로 봅니다..한반도에서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삼국사기와 다른 古記類는 철저하게 인멸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스트님과 카오스님 말처럼 일본이 남당유고의 원본을 공개하거나 확인시켜 주는 일은 없겠지요. 그걸 공개하면 조선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에서 도둑질한 일이 들통나게 되고, 국제외교상 결국 돌려주어야 하는 일이 발생하니까요. 또 정치적으로 돌려 줄때는 자신들에게 그만큼 자신의 이익과 합치될 때 입니다. 남당유고의 원본을 일본이 돌려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일이며, 지금 저는 열리지 않을 철문을 두드려보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남당 유고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일본의 건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과 맞물려 있습니다. 현재의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도래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일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한반도와 만주의 도래인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싫을 것입니다. 또 국내에서는 일본과 우리가 같은 조상의 나라라고 하면 일제의 '내선일체'사상과 같은 것이고, 본인을 친일파로 몰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결국 현실의 정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두 나라가 싫어하는 관계로 결론을 이끌어 가는 제가 부담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