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숨만 걷어가세요
지연
까마귀가 뛰어요 손을 폅니다 손금에 운명이 있다고 했어요
운명을 매일 비누칠 해서 흘려보내는데 남아있는 운명이 있네요 물 빠짐이 좋은가 봐요 밭을 경작할 때
물길이 선행돼야 해요
물길을 열어줘야 나머지가 자랍니다 나는 물길의 나머지에요
낮에는 금줄을 비비다가 밤마다 검은 숯을 들고 나를 측량하는 할매가 있어요 사람들은 삼신할매라 부
르는 것 같아요 그 할매가 나에게 와서 아가 이만큼 오느라 애썼네 모래가 쏠렸어 개울을 만들어줄 게 호
미로 내 손바닥을 긁어요
내 사주는 물이 많다고 했어요 물 가까운 곳에 살면 빠져 죽는다고요 그래서 아파트에 사는 건 아니지만
요 손바닥을 보면 하루가 다르게 잔주름이 많아져요
손에 박힌 돌을 빼서 할매는 울타리를 만들어요 내 손에서 할매 등이 굽었어요 나는 손등을 보며 아휴
이게 뭐예요 그러면 이게 내 운명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덕분에 내 밭에는 바다가 열립니다 파도가 솟구칠 때 너울마다 물외가 열려요 물외가 노각이 될 때까지
빠져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서 살아요
스스럼없이 오랜 어둠 속에서 물을 먹은지라 나는 어디서든 자랍니다
오늘 마른 숨만 걷어가세요
지연
1971년 전북 임실 출생. 2013년 시산맥신인문학상, 2016년 무등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건너와 빈칸으로』(2018, 실천문학사) 『내일은 어떻게 생겼을까』(2022, 실천문학사). 『마른 숨만 걷어가세요 』(2025년 창비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