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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5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마르코 6,53-56
주님 안에 머무는 방법: 뜻을 따를 것인가, 도움을 청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낫고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진리와 은총을 받음입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르침보다는 은총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붙어있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은총을 청함도 그분께 붙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음이
가능할까요? 사탄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다 보면 그 사람의 뜻도 따르게 됩니다.
윌 스미스가 지니 역을 맡은 2019년 실사 영화 ‘알라딘’은 일부 현대적인 업데이트를 가미한
오리지널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유사한 줄거리 선을 따릅니다.
알라딘: 이 영화는 아라비아의 도시 아그라바에 살고 있는 친절하지만 한 푼도 없는 길거리
알라딘을 소개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종종 도둑질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악하지는 않습니다.
술탄의 딸인 자스민 공주는 궁전 밖의 삶을 경험하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알라딘을 만나기 위해 몰래 도시로 나갑니다.
술탄의 권력에 굶주린 대재상 자파르는 불가사의의 동굴에 숨겨진 마법의 램프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거친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며, 그것은 알라딘으로 밝혀졌습니다.
알라딘은 자파르에게 속아 동굴에 들어가 램프를 찾습니다.
자파르는 램프만 빼앗고 알라딘을 동굴로 밀어 넣었지만, 알라딘은 램프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나옵니다.
알라딘은 왕자만이 자스민과 혼인할 수 있음을 알고는 지니에게 자신이 왕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파는 알라딘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고 램프를 훔쳐 술탄이자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사용합니다.
알라딘은 자스민, 애완 호랑이 라자, 지니의 도움을 받아 자파르와 맞서게 됩니다.
그는 자파르의 교만함을 자극하여 전능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전능한 자는 지니입니다.
지니는 그를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새로운 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자파르는 램프에 갇힙니다.
알라딘은 자신이 왕족으로 영구적으로 변신하는 대신 지니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마지막 소원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지니를 위해 그러한 소원을 빈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니는 램프의 저주에서 풀려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술탄은 자스민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자스민은 알라딘을 선택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이의 뜻을 묻지 않으면 사탄일 수밖에 없고 그 교만함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이의 뜻을 물어봅니다.
알라딘이 그런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주님과 머물기 위해 많은 것을 청합니다.
언제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이때의 소명이 진리이고 지팡이가 은총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통해 주님께 끊임없이 청하며
그 받는 은혜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욕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머문다는 말은 그 누군가의 은총과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가르침과 음식을 먹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를 거부합니다.
독립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부모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주님께 붙어있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매 순간 어떤 은총이 필요한지를 청하는 게 낫습니다.
그 청함을 통해 주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은총을 받은 사람들처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5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창세기 1,1-19
마르코 6,53-56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이자 야전 응급병원으로서의 교회!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분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즉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마을 이장님께서는 마이크 크게 틀고목이 터져라 외쳤겠지요.
“아아! 이장입니다.
오늘 우리 마을에 아주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전국민적 대 스타로 떠오르신 분, 손만 대면 불치병을 낳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리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불치병 환자들 모시고 계시는 가정에서는 단 한분도 빠지지 말고, 지금 당장 환자를 모시고 마을 회관 앞으로 모시고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기회는 다시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을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들은 가족들은 급한 마음에 대충 얼기설기 만든 들것에 환자를 눕혀 초스피드로 예수님을 향해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수가에는 그야말로 진풍경 펼쳐졌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몰려온 환자들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몰려온 군중들,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덩달아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몰려온 환자와 가족들에게 대기표를 나눠주며,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 한명 한명을 환한 얼굴로 기쁘게 환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격려해주셨을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하고 위로하며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있던 환자와 가족들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평생 소원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광경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나왔겠지요.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미하고 흠숭하는 탄성이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순식간에 야전 응급병원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마치도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그랬듯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 상처입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야전 응급병원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배적인 논리는 세상을 치유시키고 생명을 주는 논리라고 볼수 없을 듯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 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비인간적인 경제지상주의에 기초한 부의 극단적 불균등은 이 시대 수많은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미처 노후준비에 여력이 없었던 수많은 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그리고 저출산 풍조는 갓난아기들의 반가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새 생명이 주는 생기와 그로 인한 기쁨을 거두어가고 있습니다.
성공지상주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떼놓을 수 없는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 땅의 새싹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문화가 이 땅 위에 팽배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러한 암담한 현실을 좌시하지 않는 파수꾼으로 거듭 나야겠습니다.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로서의 교회로 재탄생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야전병원’같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강론>(2024. 2. 5. 월)(마르 6,53-56)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병고에 대한 묵상>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 자비는 ‘무조건, 무제한’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먼저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믿음도 없이 예수님께 은총을 청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는 믿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옷자락만) 믿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셨지만,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 믿은 사람은, 몸의 치유로 만족하면서 그냥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버립니다.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2)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믿음은, ‘결과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도 바로 그 믿음입니다.>
‘결과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은, 일의 결과를 보고 나서 믿는 믿음이라는 뜻이고, ‘희망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은, 일의 결과를 아직 모르지만,
희망하니까 희망만으로 믿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의 결과를 보고 나서 믿는 것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는 일이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아직 결과를 보기 전이라도, 결과가 달라도, 지금 나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희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로마 8,24).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입니다.
3) 사람들이 두루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데려오는 모습과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병자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은, 그들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에도 병자들과 병자들의 가족들의 간절함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그 간절함에서 비롯된 청원기도를 기복신앙이라고 함부로 비웃지 말아야 합니다.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그런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4-16).”
4) 이천 년 전에 비해서 인간의 의학과 의술이 대단히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에는 병의 치료에 대해서 종교와 신앙이 또는 주님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학과 의술의 발전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의사들과 약사들은 주님의 협력자들입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에도 훌륭한 신앙인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면서 병원 치료를 안 받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병원 치료를 잘 받고 있다면서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가 믿는 주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진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또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어났어도, 인간을 살리거나 죽이는 권한은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진리도 변함이 없습니다.
5)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가 분명히 많지만,
믿음을 가지고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치료도 열심히 받는데도, 끝내 치유되지 않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왜 누구는 치유의 은총을 받고, 누구는 그 은총을 못 받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치료해야 합니다.
어떻든 우리는 병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되고,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병에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건강하다면, 그것 또한 은총이니까 감사드려야 합니다.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고 있다면, 겸손하게 주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고, 기도하면서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병은 주님의 뜻이 아니고, 건강 회복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