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와 차별 없게... 섬으로 섬 다스리던 '섬의 수도'
[섬여행] 신안 지도...구한말 서남해의 섬 120여 개 관할하던, 오늘날 신안군의 모태(母胎)
양진형
▲ 지도 최고봉 삼암봉에서 바라본 신안 서남부의 섬들 ⓒ 양진형
칠산바다로 둘러싸인 영광 안마도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수평선을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길게 뻗어 나간 산줄기가 있다.
무안 해제반도에서 신안군 지도(智島)와 임자도로 이어지는 이 줄기는 칠산바다의 남행을 성벽처럼 막아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한 줄기인데 실상 그 사이에는 2개의 수로가 관통했다.
무안 해제와 지도 사이의 임치수로와 지도와 임자도를 가르는 수도수로가 그것이다.
한양으로 가던 서해 뱃길의 중요한 길목, 숙종 때 지도진 설치
▲ 영광 안마도에서 바라본 해제반도와 지도. 바닥이 모래로 형성된 칠산바다에는 젓새우, 민어, 병어 등 어족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다. ⓒ 양진형
수억 년 동안 쉴 새 없이 북서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칠산바다의 파도와 바람은 반도의 등허리를 조금씩 허물어뜨리며
북쪽에는 모래밭을 남쪽에는 질펀한 갯벌을 형성해 놓았다.
지도 서북쪽 재원도와 임자도, 낙월도, 안마도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젓새우와 민어, 병어, 조기 등은 이 모래바닥에서 서식한다.
▲ 목포에서 지도 선창으로 여객선이 다니던 옛 뱃길. 태천리 풍력발전소와 선도가 보인다. ⓒ 양진형
지도 남쪽 선도와 병풍도, 증도, 매화도는 어떤가?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드넓게 펼쳐진 갯벌과 그 사이를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수로는
농게와 칠게, 낚지, 짱뚱어, 염전과 김 서식지의 보고이다.
무안군 해제면과 지도읍 자동리, 내양리 사이를 흐르던 임치수로는
옛날 나주평야에서 거둔 세곡을 실어 한양으로 나르던 중요한 길목이자, 고대 중국으로 가는 국제선의 경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제면 임수리에 이 일대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진인 임치진이 일찍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1975년 2월 목포 태원여객이 주도한 연륙 공사로 옛 비밀을 간직한 이 수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 지도읍 자동리와 해제면 양월리를 잇는 연륙교. 1975년 2월 완공되면서 지도는 사실상 육지가 되었다. ⓒ 양진형
또한, 지도에서 임자도 사이로 흐르던 수도수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목포에서 출발한 정기여객선이 지도, 임자도, 전장포를 거쳐 낙월도로 향하던 뱃길이었다.
이때 배에는 사람보다 새우젓을 가득 채운 드럼통이 더 많았다고 한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이 고군산도로 향할 때 이 항로를 통해 어의도(於義島)에 도착하기도 했다.
이 수로 위로는 지도~수도~임자를 연결하는 연도교가 2021년 완공되었다.
이름에 지혜로울 '지(智)' 자를 쓰는 섬... 그 이유는
▲ 지도와 임자도 사이로 흐르는 수도수로. 2021년 완공된 임자1·2대교 너머로 임자도가 보인다. ⓒ 양진형
이렇듯 서해항로의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한 지도에는 1682년(숙종 8) 수군진이 설치된다.
이어 임자도에도 1711년(숙종 37)이 진이 설치되었다.
그 후 두 섬은 유배지로도 활용됐는데 지도로 유배 온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학자 중암 김평묵(金平默)과 문신 김윤식(金允植)이다.
▲ 지도읍 두류산 중턱에 있는 두류단. ⓒ 양진형
조선 말기 유림(儒林)의 거장인 김평묵은 경기 포천 출신으로 화서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했고,
최익현과 함께 위정척사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는 상소로 인해 1881년 10월 지도로 유배되어 1884년까지 백련마을에 머물렀다.
이때 호남 유림과 지도 사람들이 중암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이는 호남 유림과 지도 유림의 유교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지도에 향교가 생기면서 이러한 유교적 기풍은 지도향교를 중심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 지도군이 설군되면서 1987년 설립된 지도향교 ⓒ 양진형
두류단(頭流檀)은 김평묵 사후 문도들과 호남 유림들이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1901년 두류산 중턱에 조성한 제단이다.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 정신적 지주였던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김평묵 세 분을 모시고,
후에 최익현(崔益鉉), 중암의 제자였던 지도출신 나유영(羅有英)을 함께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도의 이름에 지혜로울 '지(智)' 자를 쓰는 이유는 이러한 문화유산이 배경이 아닌가 싶다.
백련마을 입구에서 두류단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 지도읍 비석거리 모습. 지도진 설치 이후 부임한 만호들과 암행어사, 지도군수 등의 행적을 기록한 총 27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 양진형
한편 1901~1907년까지 지도에 유배되어 둔곡에 터를 잡았던 김윤식은 후학을 양성하지는 않았다.
지도 유배지에서의 일상과 당시 시국을 논하는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속음청사(續陰晴史)'라는 책을 남겼는데
20세기 초 격동의 한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한다.
1896년 고종의 섬 정책에 따라 탄생한 지도군(智島郡)과 오횡묵 군수
육지에 부속된 변방의 개념으로만 인식되던 섬에 독립된 군을 설치해야 한다는 논의는 조선 영조 대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구한말(1896년 2월 3일) 고종의 칙령 제13호에 의해 현실화되어 돌산군, 완도군과 함께 지도군이 창설된다.
'섬으로 섬을 다스리는 시대'가 열린 것으로, 지도군은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등 5군의 98개 큰 섬과 19개 작은 섬을 관할했다.
▲ 선도 큰딱지산에서 바라본 지도 태천리 모습 ⓒ 양진형
고종으로부터 지도군 초대군수에 임명된 오횡묵(1834~1906)은 육로로 부임한 것이 아니라,
한강을 출발해 강화-남양-태안-안면도-서천-고군산도-위도-안마도-칠산도-각씨도-수도를 거쳐 지도에 도착했다.
꼬박 6박 7일 동안의 여정이었다.
그는 섬사람들이 물길을 왕래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과연 어떠한가를 몸소 시험해 보고 싶어, 해로(海路)를 택했다고 밝혔다.
지도군수로 역임하는 동안 그는 정무와 일상사를 기록한 일지 '지도군총쇄록'을 남겼다.
이 책은 오늘날의 신안군과 서남해 섬 해양사를 연구하는데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도 군수를 마친 오횡묵은 돌산군수(여수군수)로 부임하는데
여수의 명소 지명경관을 읊은 106수의 연작시 '여수잡영(麗水 雜詠)'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지도는 소금 굽는 고장으로 유명했다.
지금처럼 태양열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화렴(火塩) 방식이었다.
오횡묵은 '지도군총쇄록'에서 화렴 방식의 소금 생산 방법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해 두었는데
현재에도 이 방식으로 전통 소금을 재현해 낼 수 있다.
▲ 지도 관황묘 터로 추정되는 일심사. 읍사무소 뒷편에 위치해 있다 ⓒ 양진형
지도에는 우리나라 섬에서는 보기 드문 관황묘(官皇廟)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 군수는 책에서 관황묘의 제사 절차를 소상히 기록해 두었다.
관황묘는 중국 삼국시대 장수인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이다.
지도에 관황묘가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원정 왔던 명나라 군대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현재 관황묘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읍사무소 뒤 '일심사' 자리가 그 터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다.
6월이면 '섬 병어 축제' 열려… 오일장과 신안젓갈타운도 가볼 만
섬을 다스려 육지와 차별 없이 만들겠다는 고종의 섬 정책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실을 채 맺기도 전에 지도군과 돌산군은 해체되고 완도군만 남기에 이른다.
지도는 무안군 지도면으로 강등되었다가 1980년 지도읍으로 승격했다.
현재는 11개 법정리와 36개의 행정리, 60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 신안군 유일의 재래시장인 지도 전통시장 ⓒ 양진형
1955년 형성된 지도읍 장은 신안군 유일의 재래시장이다.
지금도 매월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에 오일장이 열린다.
옛날의 추억도 살릴 겸 장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다.
▲ 지도 젓갈타운 ⓒ 양진형
옛 지도 선창가 옆에 조성된 신안젓갈타운에서는 매년 6월이면 신안군이 주최하는 '섬 병어 축제'가 열린다.
젓갈타운 건너편 갯벌 위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거북섬은 데크로 연결된다.
왕복 1.8km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거북섬 옆으로 흐르는 갯골은 예전 목포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지도 선창으로 오던 뱃길이었다.
하지만 지도와 송도 사이에 연륙교가 놓이면서 개벌이 차올라 지금은 뱃길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 쇠락한 지도 옛 선창의 모습 ⓒ 양진형
신안 북부의 다도해 사방으로 볼 수 있는 최고봉 '삼안봉'
지도 등산로는 읍사무소 뒤에서 점암 선착장까지 100~200m 봉우리 사이를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등산로 주요 지점마다 현재의 위치와 진행 방향이 입체감 있게 표기되어 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마을로 내려가는 길들이 있어 힘들면 탈출로로 삼아도 좋다.
산행은 일심사를 지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등산로는 전형적인 육산 사이로 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읍사무소 직원에 의하면 1년에 두 차례 풀베기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난이도는 초중급 정도인데 바닷바람도 잘 통하고 나무 그늘이 좋아 여름 산행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 화봉정 포토존 아래서 본 지도읍(좌측)과 송도, 사옥도, 증도 등 아름다운 다도해 모습 ⓒ 양진형
첫 번째 쉼터 화봉정(花峰亭) 포토존에서는 지도 남쪽의 조망이 시원스럽다.
선도와 매화도는 물론 증도, 송도, 사옥도 등과 멀리 자은도, 암태도가 조망된다.
하지만 그 후부터는 숲이 너무 우거져 지도의 북쪽 사면인 장동, 둔곡, 내양리와 봉리, 그 너머 칠산바다를 볼 수 없음이 조금 아쉽다.
▲ 봄 야생화 선씀바귀. ⓒ 양진형
화봉정~삼암봉 등산로는 소나무와 소사나무, 후박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다.
등산로 옆으로는 옥녀꽃대, 골무꽃, 쥐오줌풀, 선씀바귀, 들꿩나무꽃 등 야생화들이 길손을 반긴다.
특히 삼안봉 근방에 이르러서는 야생 달래가 지천이다.
한뿌리를 뽑아 코끝에 대보니, 진한 그 향기가 폐부까지 깊이 스며든다.
▲ 삼암봉에서 바라본 지도 북쪽의 섬들. 멀리 우측으로 어의도와 대·소포작도(가운데)가 보인다. ⓒ 양진형
급기야 지도 최고봉 삼안봉(해발 197m)에 이르니,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인다.
북쪽으로는 어의도와 대·소포작도, 그리고 그 너머로 낙월도와 송이도 안마도도 보인다.
서쪽으로는 수도와 임자도가, 남쪽으로는 사옥도, 증도 너머로 수많은 다도해가 군무를 펼쳐진다.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옛 염전 지대의 상당 부분은 태양광 발전시설로 변모해 있다.
산행을 마친 후 택시를 불렀다.
한 택시 기사는 "태양광 수익금 중 일부는 햇빛연금이라는 이름으로 신안군에서 배당되는데,
많게는 인당 50만 원도 지급되어 주민들이 매우 흡족해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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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등산 안내도 ⓒ 양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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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