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조선시대를 살다 간 기생, 아직도 내 안에서 사무치는 그 이름 황진이 (1506~1567)ᆢ.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 것 같다. 그에 대해 어떻게도 써지지 않으나 이토록 쓰고 싶은 연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과거의 기생으로만 취급할 수 없는 까닭이다. 21세기의 시선으로 볼 때 황진이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지배했던 엄격한 가부장제에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도전한 여인이다. 열여섯 살에 스스로 기생의 길을 택한 황진이, 그 여자는 분명 평범한 노류장화路柳墻花만은 아니다.
북한소설 중 최초로 남한에서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홍석종의 장편 소설 <황진이>의 주제는 거짓과 위선에 저항하는 황진이다.
하늘이 만들어낸 음양의 이치대로 보면 사내가 계집을 좋아하고 계집이 사내를 좋아하는 것은 극히 응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로 되는것은 '성인'이나 '성인군자' 노라고 자처하는 무리들이 이 자연의 이치를 역행해서 마치나 계집을 멀리하고 애정을 부정하는 것이 높은 도를 이루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떠벌이는데,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오히려 계집이라면 생으로 회를 처 먹지 못해서 몸살을 앓는다는 사실이었다. ㅡ홍석중, r황진이 2편), 대훈, 2004, 94쪽
홍석중은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관계도 남한 작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그녀가 파계시킨 것은 30년 면벽 수도한 지족선사가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과 위선이다. 그는 황진이를 통해 세상의 가장 큰 불행과 부조리는 정도가 지나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지나친 것을 감추려는 위선에서 오는 것이라고 파헤쳤다. 그의 소설 <황진이>가 남한에서 큰 반응을 일으킬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에서는 황진이가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시에 능했던 여성이라 기보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서경덕을 유혹했던 '요부'로 기술되지만, 북한 소설에 등장하는 황진이는 양반 계층의 타락과 위선을 공격하고 또 이를 조롱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다.
이태준은 소설 <황진이>에서 그녀가 기생이라는 자유로운 신분을 통해 그 당시의 남존여비 사상과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제를 통렬히 비판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서자녀를 천히 여김은 남의 시앗되기를 즐기지 말라는데 일리 있다 하려니와 오륙이 멀쩡한 자식들을 그 부모나 선조들이 비천하게 살았다 해서 대대손손이 똑같은 운명에 쓰러 넣으려는 건 권병權柄을 잡은 놈들의 횡포다!
이목구비가 똑같은 사람에게 인력으로 귀천의 운명을 붙여버리는 것이 횡포가 아니고 무어냐? 아니 천리天理에 반역이 아니고 무어냐? 양반? 홍! 이놈들 별놈들인가. 얼마나 도저한가 어디 보자" 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는 여성의 활동이 전면적의로 부정된 시대에 천민인 황진이를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유교적 인습의 모순을 타파하며 인간 본연의 애정을 갈구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의 소설 (황진이)는 후에 계속 발표되는 작가들의 <황진이>류 소설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