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마하연 화상'과 인도불교 '까말라씰라(蓮華戒)' 스님의 주장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옛날 티베트의 대표적인 큰 사찰 쌈예사에서
벌어졌던 ‘성불의 방법상 견해’를 놓고 중국 선종(禪宗)의 주장과
인도 대승불교가 주장하는 그 양쪽의 주장을 엄격하게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
평가를 하고자 합니다.
시간관계상 우선 중국 선승의 주장을 엄밀히 요약했습니다.
중국 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 화상'의 주장을 요약했습니다.
‘일체를 사유하지도 말고 분별하지도 말고 오직 화두일념으로 화두를 들고 나가면 마음자리, 곧 자성을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
이게 종지(宗旨)이지요. 이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타파하면 곧 부처된다 하고.
부처라는 법위하고 견성하고를 같이 봅니다. 그런 등식이 고수되고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교가(敎家)․교종의 점수(漸修)의 방식, 그 교학을 배격합니다. 또한 방편과 차제(次第)를 배제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도(道)를 이루려면,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은 경전의 말씀은
방편과 차제를 이야기합니다. 공부해서 지혜도 구해야 하지만,
지혜만 구하는 일방적인 수행은 보살이 되고 성불을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한편으로 방편․차제․공덕, 쉽게 말해서 보살도를 행해야 된다.
보살행을 해야 된다 그거예요.
‘지혜와 복덕을 함께 닦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대승의 정설입니다. 이건 맞습니다.
우리 현지사에서도 이걸 강조합니다.
지혜를 구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칭명염불 하고, 칭명염불만 한다고 해서
부처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덕을 지어야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선근공덕을 이야기하고 보현행원을 이야기합니다.
육바라밀, 보현행원을 이야기하지요. 새는 날개가 둘이 있어야 하늘을 납니다.
이건 모든 대승경전의 골수올시다. 또 이건 내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禪)에서는 안 그럽니다.
오로지 자성(自性)만, 이 뭣고~ 이뭣고~...
면벽하고 공부해서 사무쳐 깨달으면 곧 성불이다 그거예요.
이것을 돈오견성법(頓悟見性法)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소승이 되었건 대승이 되었건 간에 그 핵심은 사성제 팔정도를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사성제 팔정도를 오늘 자세히 해설할 수 없습니다만 이걸 잘 공부해야 됩니다.
사유를 깊이 해야 됩니다. 사유를 깊이 하면 ‘아! 이게 불교이구나.
아! 기독교, 이거 아니구나!’ 하고 알지요.
단순히 마음을 깨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나는 견성이, 마음을 깨치는 것은 부처가 되는 머나먼 여정의 출발․시작이라고
내 책에 선언했습니다. 감히 선언했습니다. 견성은 이제 시작이다 그거예요.
자, 선승(禪僧)인 '마하연'은 그렇게 주장을 했고,
인도불교를 대표한 '까말라씰라(蓮華戒)' 스님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반드시 한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삼현(三賢)의 위(位)를 넘어서 보살의 초지를 얻는 것만 해도 지극히 어려운데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되요), 부처님 가르침대로 계율을 지키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삼법인 사성제의 진리를 알아야 되고 육바라밀 보현행원이라는 이 보살도,
이것을 전혀 행함이 없이 실천행이 없이 성불을 주장한다고 하는 이것은
경전의 말씀과 크게 위배된다. 어떻게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하느냐?
‘문사수(聞思修)’의 세 지혜(三慧)에 의해서 법의 뜻을 전도됨이 없이
바르게 이해한 뒤-문사수(聞思修)라는 것은,
▸지혜는 큰스님의 법문, 부처님 같은 대선지식의 경전 강의 법문,
이것을 문(聞)이라고 그래. 문(聞). 들어야 된다는 말이어. 들어야 돼.
▸사(思), 사유(思惟)해야 되는 거예요. 사유해야 돼.
▸수(修), 그 말씀대로 수행해야 돼.
이렇게 함으로서 지혜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경전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없이 막바로 강원(講院)을 가고, 동국대학을 가고 해서
경전을․학자들의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위험한 거예요.
이것은 공부를 많이 하고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교학도 하고, 한편으로 수행도 해야 되는 거예요.
수행도 해야 돼. 무섭게 수행해야 돼. 한 달 혹은 100일씩... 수행을 해야 돼.
그러면서도 또 교학도 하고, 그러면서 수행을 하고...
그래서 지혜를 증장시킨 후에 경전을 보면 또 달라.
1년 전에 본 것하고 더 달라. 견성을 해놓고 보면 이제 정말 달라.
자력으로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어가지고 보면 정말로 달라.
불과를 증해놓고 보면 정말로 달라.
하기 때문에 교학을 하면서 수행을 겸수해야 된다.
십법행(十法行), 십법행은 서사(書寫)-경전을 서사(書寫)하는 것,
간경(看經)-경전을 보는 것, 독송하는 것, 법문을 듣는 청법, 예불, 기도, 공양, 포교,
사유(思惟), 수습(修習), 이것을 십법행이라고 그래.
이 십법행을 배우고 닦아서 보살의 초지에 들어간다 그거예요.
정성(正性, 깨달음 혹은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 다음, 청정한 반야의 지혜로서 나머지 9지(2지에서부터 10지까지),
지금 9지들을 차례로 수습하여 10바라밀을 수학(修學), 의식의 흐름을 정화하고,
복과 혜-앞에서 이야기한 복덕과 지혜․복혜(福慧)의 두 자량을 온전히 구족한 뒤
비로소 성불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어요.
이 것이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까말라씰라' 스님의 주장입니다.
면벽하고 이뭣고~ 이뭣고~만 해서 너희들은 깨닫는다고 하는데... 자, 이제 내 말입니다.
‘깨달을 수는 있어. 깨달을 수는 있어. 전생에 선근이 있으면 깨달을 수는 있어.
그러나 그 깨달음이 곧 불지가 아니야.’
이것을 지적했어야 되는데 여기서는 지적을 못했더라고.
'까말라씰라'의 말입니다.
‘당신네들 선승처럼 두 자량도 쌓지 않고-복혜(福慧, 복덕과 지혜)를 말이어.
자량이라고 그래. 불지에 이르는데 필요한 두 가지 양식.
두 자량도 쌓지 않고, 의식의 흐름도 정화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생각 생각 생각의 그 생각들을 정화하지도 않고 그 말이어.
세간사(世間事)도 또한 알지 못하고, 세간사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일체종지를 성취한단 말이오?
단지 공성 하나만 깨닫는 것은 자리(自利)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이타(利他)의 의리를 완수할 수 있겠소.
당신들처럼 경과 론, 경론의 전고도 없으며 방편과 반야가 함께 하지 않는 법은
곧 부처님을 훼손하고 기만하는 것이오.’
이렇게 논박을 합니다. 요약을 하면 그래요.
인도 대승불교를 정설로 보는 당시 티베트 불교 교단의 몇몇 큰스님들도
'까말라씰라'의 주장에 가세합니다.
선불교는 부처님의 교설이 아닌, 배격해야 할 이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인 대론 중국 선승의 패배로 끝납니다.
끝나는데, 국왕이 충분히 경청한 후에 명을 합니다. 명을 해요.
당시 1200년 전의 국왕의 말 한마디는 법 이상입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단박에 깨쳐들어 간다고 주장하는 중국 화상의 돈오선법(頓悟禪法)은
십법행을 훼멸하는 법이므로 행하지 말라.
이제부터 티베트 불교는 마땅히 나가르쥬나(부처님 다음가는 위대한 스님이라고 일컫는
인도의 용수보살)의 법을 따르고, 도행은 육바라밀과 십법행을 실천하며,
수행은 삼밀(三密-신구의 삼업을 밀교식으로 표현한 말)을 통해서 마음을 닦고
방편과 반야를 겸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도록 하라.’
이렇게 명령을 내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것을 듣고 선불교 측에서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자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티베트 불교의 흐름은 이제 완전히 달랐습니다.
중국의 선종(禪宗)은 발붙일 수가 없어서 다 철수한 거예요.
그래서 1200년 동안 티베트 불교는 밀교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놓은 거예요.
지금 티베트 밀교의 지도자들은 내가 알기로
‘1200년 전에 쌈예의 논쟁에서 우리가 패했더라면 아이쿠! 생각만 해도 오싹 하구나!
우리 티베트 불교가 어찌 될 뻔 했나!’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출처:2011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