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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일
벧전 4:12-19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벧전 4:7-19 / 세상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8) 무엇보다 먼저 언제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ㄱ)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ㄱ. 잠10:12) 9) 허기지고 잠잘 데 없는 사람을 보거든 집으로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해 주십시오. 10)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을 주셨으니 그것을 서로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잘 관리하도록 하십시오. 11) 설교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거든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빠짐없이 설교하십시오. 남을 돕는 일에 부름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거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열성을 모두 쏟아서 남을 도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하소서. 아멘. 12)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시련이 여러분 앞에 옮겨 붙더라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치는 시련은 결코 이상한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닙니다. 13) 오히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이니 진정으로 기뻐하십시오.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 여러분은 그 영광을 함께 받고 한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저주와 모욕을 당하거든 행복해하십시오. ㄱ) 하나님의 영이 큰 영광으로 여러분을 감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ㄱ. 70인역 사11:2) 15)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말썽을 일으키거나 남의 일에 쓸데없는 간섭을 해서 벌을 받는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6)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통받는다면 그것은 조금도 수치스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한 식구가 되어 그리스도의 그 빛나는 이름으로 불리는 특권을 받았다는 증거이니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십시오. 17) 이미 심판의 때가 왔습니다. 그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까지도 심판을 받는다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18) 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도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도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ㄴ. 70인역 잠11:31)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모른 체 그냥 내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일입니다.
불 시험(12-13) 불 시험은 로마 제국 시대에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당한 박해를 말합니다. 실제로 순교자들이 말뚝에 결박당한 채 화형을 당하였고, 성도들의 몸을 횃불 삼아 네로 황제의 정원을 밝히기도 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불 시험이란 말은 성도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같은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불이 금속을 단련하듯 하나님께서 불같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을 연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이 고난으로 인해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불 시험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성도의 고난의 정도는 영광의 정도가 될 것이며, 따라서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복 있는 자로다(14-16) 베드로는 고난의 종류들을 나열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고난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고난을 구분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은 현행법을 어긴 죄입니다. 이런 고난은 마땅한 것이며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란 남의 일에 끼어들어 말을 부풀려 전달함으로써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입니다.
이런 고난 또한 부끄러워할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은 부끄러워할 고난이 아니라 복된 고난입니다. 성령의 사람만이 이런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그리스도(Christ)와 사람(ian)이 합친 단어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또는 닮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행 11:26; 행 26:28).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은 복된 고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난입니다.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7-19)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 교회에 임하는 심판과 마지막에 불신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대조합니다. 먼저 불 시험으로 거짓 신자들과 참된 신자들이 가려질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불 시험은 교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믿지 않는 죄인이 마지막 심판 날에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는 반면, 믿는 의인은 힘들게나마 겨우 시험을 견뎌냅니다. 이같이 견디기 힘든 불 시험이지만 베드로는 성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신뢰할만하며 따라서 고난 중에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의탁하라는 안전한 보관을 위해 맡기라는 뜻입니다.
적용: 부끄러워해야 할 고난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고난을 구분해 보세요.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조지 워싱턴-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있기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기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장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지금의 고난을 감사하며 통과하길 바랍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인과 고난
베드로전서 4:12-19 / 조정의 목사
오늘 말씀의 부제는 ‘고난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6가지 명령’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6가지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난을 기대하라(“이상히 여기지 말라”(12)), 고난을 기뻐하라(“즐거워하라”(13-14)), 고난을 기피하라(“고난을 받지 말라”(15)), 고난을 당당히 여기라(“부끄러워하지 말라”(16)), 고난을 기회로 삼으라(“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 고난 중 주님만 바라라(“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7-19))입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명령들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명령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명령들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앞서 당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앞부분에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지역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환란이 함께 한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 14장을 보면 바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9장을 보면 에베소 지역에서 복음을 박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받은 고난과 현재 우리의 고난이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의 고난을 그들의 고난과 비슷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들의 고난은 정말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했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경험해야 했으며 육체적인 핍박이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광기어린 핍박이 있었고 그러한 고난으로 순교 당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한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복음으로 인해 박해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곳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도 차별금지법 등의 법률이 통과될 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는 고난에는 질병으로 인한 것,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 직장 내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할 때 경험하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소아시아 지역 성도들과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한다면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아내의 질병이라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모든 성도님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겪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명령: 고난을 기대하라(12절)
말씀은 “사랑하는 자들아”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말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자 접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이론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 편지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사랑하는 자들, 그가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며 아끼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손을 붙잡아 주면서 따뜻하게 전해주는 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이 본문 말씀이 무엇인지 그저 알려주기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참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당한 시험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시험”에서 “불”이라는 말은 무섭고 파괴력이 강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가볍고 견디기 쉬운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뒤흔들만한 시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시험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에 대해 ‘그것은 별 것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불과 같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시험입니다. 시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목적입니다. 불의 목적은 태워버리는 것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는 불의 모습은 금을 제련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불로 달구면 광석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순수한 불만 남아있습니다. 불이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임한 불시험이 그들을 연단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온전한 모습, 부족함이 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의 시련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최근에 시험을 겪으면서 이 시험이 우리 부부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험은 인내심을 키워줍니다. 우리로 성숙한 거룩으로 이끌어주고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켜 줍니다. 그동안 의지하고 있었던 것들이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남아 그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영적인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그동안 어려움이 없을 때는 잘 몰랐던 나의 참 모습,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 외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들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시험은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는”의 더 정확한 해석은 “일어나는”입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영어로 ‘happen’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해프닝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그냥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처럼 느껴집니다.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험이 일어난다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모든 우리에게 허락된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통제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신실하게 돕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에 주어진 시험과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는 방향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나고, 때로는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일어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 자연재해 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하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신실하게 우리의 환경을 만들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토기장이가 섬세한 손으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명령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계속 이상하게 여기고 의문을 갖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놀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질병이 생겼을 때 태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의문을 갖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지?’라는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인하여 당하는 시험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예견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듯이 우리 역시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고난을 기대하십시오. 당연히 고난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2천 년 전에 예루살렘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법정에서 그의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모든 천지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었습니다. 그분이 피조물에 의해 고난을 당하신 것, 그것만큼 이상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그 일 조차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구원하시며, 예수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주사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고난과 환란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명령: 고난을 기뻐하라(13-14절)
13절은 “오히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고난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고 ‘대신’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아래 주어졌다, 모든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신다, 모든 시험을 하나님은 반드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모든 시험의 결과는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이다, 시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셨고 자기 권리를 내려놓으시고 섬기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여러분의 시험 중에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처럼 사는 것, 주님 가신 길 가는 것, 험한 그 길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갈길이죠’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시험과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감당하십시오. 그럴 때 참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여러분이 경건하게 살고 있다면 박해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너희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1장 6-7절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광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실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다면,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버린 돌처럼 여겼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로 여기셨습니다. 그 돌이 ‘거치는 돌’, ‘부딪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즉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했고 그분께 나아갔고 모퉁이 돌이신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지고 다시 그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이 됩니다. 현재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주님의 영광이 임했을 때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지금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이어받을 자라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좁은 길이지만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답게 살아감으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자는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경건치 않은 자와 죄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심판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의 집, 의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영원한 영광을 위해 고통도 함께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이 임했을 때 이 모든 사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고난이 나를 둘러 쌀 때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께 주무신다고 하거나 왜 나를 돌아보지 않느냐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존 스토트의 책에는 한 연극이 소개됩니다. ‘기나긴 침묵’(The Long Silence)이라는 제목의 연극입니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수십 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거대한 평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앞에 비취는 눈부신 빛으로부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맨 앞부분 가까이에 있는 몇몇 집단은 격하게 이야기했다. 수치에 움츠러든 것이 아니라 호전적인 태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어? 그가 고난에 대해 어떻게 안단 말이야?” 피부가 거무스름한 건방진 젊은 여자가 눈에 불을 켰다. 그녀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문신으로 새겨진 번호를 보여주기 위해 옷 소매를 잡아 뜯었다. “우리는 공포, 구타, 고문, 죽음을 참고 견뎠어!”
다른 집단에서는 한 흑인 소년이 옷깃을 내렸다. “이건 어때요?” 그는 흉한 실 모양의 화상 자국을 보이면서 물었다. “린치를 당했어요. 아무 죄도 없이 다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말이에요.”
다른 무리에서는 우울한 눈빛의 임신한 여학생이 있었다.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해요. 그넌 내 잘못이 아니예요” 그녀는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집단들은 각각 그들의 지도자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 한 명, 흑인 한 명,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 지독하게 불구가 된 관절염 환자, 탈리도마이드로 인한 기형아 등이었다. 평원 한 가운데서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그들의 제안을 제시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다소 재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기 전에 그분은 그들이 견뎠던 것을 견디셔야 했다. 그들의 결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의 출생의 합법성이 의심을 받게 하자. 그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을 주어서 그가 그 일을 하려 할 때 가족들조차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하자.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도록 하자. 잘못된 비난을 받고, 편견에 찬 배심원들에게 재판을 받고, 비겁한 재판관에게 선고를 받게 하자. 그가 고난을 당하게 하자”
“마지막에 혼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무섭게 맛보도록 하자. 그 다음에 그를 죽게 하자.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도저히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하자. 그것을 입증해 줄 많은 무리의 목격자들이 있게 하자.”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판결을 발표하는 것을 마쳤을 때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갑자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미 그 형벌을 다 당하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고통은 모르실 거야’, ‘높은 곳에 계시는데 내가 당하는 고통을 아실까’라는 생각이 오늘 본문 말씀을 잊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견디기 힘든 여러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고난을 말씀의 진리로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신실하게 통제하셔서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것으로 온전히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전서 4:12-19 / 이대은 목사
베드로전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고난입니다. 이 길지 않은 서신에 무려 21번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베드로전서를 통해 고난의 주제를 계속 다뤄왔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당했을 고난의 정도를 이해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각한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당시 그리스도인은 오해를 당하고 모욕을 받고 매를 맞았으며 갖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 역시 스스로 바벨론이라고 칭한 로마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고난을 다루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난이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가 감내해야 할 삶의 방식이자 목적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불교에서도 생즉고라고 하여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이러한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괴로움과 고난에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히브리서 2장 11절 말씀을 보면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조차도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 사도의 고난 이해와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 사도는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칭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불같은 성격에 투박하며 좌충우돌하던 옛 모습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양을 인도하는 소임을 다하고, 이제 노년에 접어든 대사도가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 이 한마디에 맘이 찡합니다. 마치 고난 가운데 어찌할지 몰라 웅숭그리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다소 의외입니다.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불타는 듯한 시험이 다가와도 놀라지 말라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일제 강점기 기간이 떠올랐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것처럼 로마는 유대와 지중해 지역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로 대표되는 군사력으로 이룬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주장은 기만이고 진정한 평화는 무력하게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일제의 점령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독립을 믿고 조선이 독립할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고난을 받았듯이, 로마의 점령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온갖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에게 불 시험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못박습니다. 고난의 상황에 계시다면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시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베드로 사도는 고난과 시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비록 그러한 어려움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리적인 귀결이기도 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박해하듯 악한 세력이 우리를 핍박하기 때문이지만, 고난 그 자체에도 우리를 연단하는 기능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아마도 불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수신자들은 네로의 정원을 밝히기 위해 산 채로 횃불이 되어 태워진 순교자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이라는 심상은 우리를 정련하고 제련하는 기능을 내포합니다. 즉 고난을 통해 우리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교제를 뜻하는 코이노니아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로서 예수님과 연합된 신분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음이 입증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온전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독립했을 때 그 기쁨을 누가 가장 크게 누렸겠습니까? 바로 일제 강점기 시절 핍박을 당하고, 치욕을 당하고, 갖은 수난을 당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나라를 잃기는 했지만 그 정신은 잃지 않고 독립을 꿈꾸며, 독립 운동이라는 고난에 참여한 사람들이 해방이라는 영광이 나타났을 때 즐거워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에 내가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친일행위를 하여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에게 독립 소식은 오히려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춘원 이광수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실 이광수는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쓰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정도로 애국자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견고하게 보이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벗어날 길이 없으니 어차피 해방이 되지 않는다면 조선인들도 일본인과 동일한 국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친일 행각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많은 친일파들이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이들이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영의 세력이 너무나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되고, 내 자신이 너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며 다시 오셔서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확실히 이루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영광의 시간을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버리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고난에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광복이 될 것을 믿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사처럼,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군인으로서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베드로전서 1장 7절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붙들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갖 모욕과 박해와 수치를 당했을 때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팔을 벌리고 남이 띠어준 띠를 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끌려가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언제나 대척점을 이룹니다. 이 세상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이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간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빼앗기고, 낮아져 죽는 것이 복이며, 우리는 의미 있는 존재로 태어나고 우리의 죽음도 의미가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러한 믿음의 주창자요 창시자요 모범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역설의 진리가 오늘날 많이 쇠퇴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치욕을 당해야 한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손사래를 치며 예수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면서 부유하고, 그리스도인이면서 우아하고, 그리스도인이면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그리스도인이면서 교양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꺼이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죽임까지 당했던 그리스도,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를 따라 죽어갔던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때로 나의 모습이 역겹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치욕을 당한 것들이 오히려 영광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독립 투사들이 당한 치욕 하나하나가 해방 후에는 모두 영광의 조건이 된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한 치욕거리는 모두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은 오히려 무가치하고, 무의미하여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된 이들 위에 계십니다. 광야를 떠돌던 초라해 보이는 성막에 불과 구름 기둥이 언제나 임재했듯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정처없이 방황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이미 함께 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물론 베드로 사도는 제약을 둡니다. 살인이나 도둑질, 악행 또는 남의 일에 문제를 일으키며 간섭함으로써 받는 고난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이 법률을 어기는 행위는 물론, 다른 사람을 해하는 도덕적인 악행뿐 아니라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로 받는 고난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특히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라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이 단어의 적절한 의미는 선동자, 분열을 야기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 율법 지식을 내세우며 남의 일에 마치 감독관처럼 끼어드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자신의 성경해석과 자신의 믿음생활만이 옳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간섭함으로써 교회와 공동체의 평화와 화합을 깨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말씀에 주의하여 남의 일을 주제넘게 간섭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최후 심판관이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범주의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고난은 세상에서 악한 행위와 죄의 결과임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피해를 당하시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서 남을 해하고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베드로 사도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에 비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가 내세우신 가치를 주장하고 실천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성경 전체에서 사도행전에 두 번, 그리고 베드로전서에 한 번만 나오는 단어인데 당시에는 예수쟁이와 같이 경멸적인 의미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선택한 생활 방식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나타내게 됩니다. 세상의 평판이나 금전적인 손해 때문에 그리스도인임을 숨기거나 밝히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히 11:25-26) 여기는 믿음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17-19) 임박한 심판
(17-18)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9장에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며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고 하신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말하는데, 심판의 시작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심판이라는 단어가 최후의 심판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심판은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현재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심판은 미래가 아닌 현재이며, 최후에 믿지 않는 자들이 당할 심판에 비해 훨씬 강도가 덜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심판을 통해 믿음의 배반자가 걸러지고, 참된 신자들은 정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판단하시고 벌하실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설 수 있겠느냐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정결하게 하는 심판을 받는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받을 진노의 불심판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겠습니까?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베드로 사도는 다시 핵심 주제로 돌아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 아무런 목적 없이 고난과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계신 분이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듯이,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의탁해야 합니다. 종종 이 세상의 부조리를 말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저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의식하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고난과 고통 앞에서 절대적으로 잠잠해야 합니다. 왜 이러느냐고 물을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물을 수 없는 무의미함이 더욱 큰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지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그 의미를 찾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더 큰 구원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절망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변덕이 죽 끓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신 미쁘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절망하면서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나님께 맡긴 예수님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고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몸부림치며 선을 행하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난이 아무 의미 없이 무작위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정결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방법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실히 바라보며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옹골진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가 남길 뒷모습을 항상 의식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고난의 의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2. 친일 부역자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에 순응하며 살았던 점은 없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3.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한 고난이 있었다면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가장 꺼리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가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베드로전서 4:12-19
베드로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의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죠.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교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 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포기하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면 지금 당하는 극심한 박해를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 말로 권면하였을까요?
고난은 기쁨의 이유
베드로는 고난이 기쁨의 이유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개인의 슬픔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대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고난이 찾아올 때 기쁨으로 모든 아픔과 슬픔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도 고난이 찾아올 때 슬프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 아픔으로 울부짖기도 하며 그 슬픔으로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픔과 슬픔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 순간에도 마음 한편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큰 슬픔의 날이 찾아와도 마음 한편에 흐르는 기쁨의 강줄기로 말미암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시련과 고난은 다른 한편으로 기쁨의 이유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이 두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첫번째 기쁨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쁨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누리게 될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심판의 때 그리스도인은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고난의 현장에서 아픔과 슬픔과 공존하는 기쁨이지만 그날에 누리는 기쁨은 아픔과 슬픔이 전혀 없는 온전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시다면 본문 16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왜 그렇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이유가 있으며, 마지막 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바로 그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크고 온전한 기쁨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베드로가 보내는 편지를 받아 보는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기에 더욱 큰 박해를 받았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와 고난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를 포기하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품어보았습니다. 이러한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어떠한 말로 권면하였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를 믿든, 유대교를 믿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에게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박해와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재앙의 날이 불신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약 성경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예레미야 25장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받고 불신자들은 평안한 듯 보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불신자로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교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자신에게 임한 고난을 피하고자 다시금 유대교로 개종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열방으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당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8절 말씀의 뜻입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나만 고난을 받는다'고, '나는 믿음을 지키지만 고난을 받고 저 친구는 믿음이 없지만 평안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저 우리가 불신자들보다 조금 먼저 심판대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이 평안하다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힘써 달리면 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찾아왔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고난이 비껴가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지도 질문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선을 행하십시오. 그렇게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여러분에게 찾아온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기쁨의 이유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최후의 승리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대비
벧전 4:12-19 / 박조준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 베드로전서 4장 1-11절 말씀을 통해서 고난이 올 때 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장에서 우리는,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을 것이지만 모두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가 스스로 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색깔이나 형태는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에게 핍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행할 때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양상이 불신자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생활 속에 아무런 핍박이 없다면 우리는 한 번쯤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버릴 때 세상은 우리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해 불신자들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지금까지 말한, 일반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은 고난이 아니라 “불시험에 의한 고난”을 대비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의 시험, 이 고난을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시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만간 이 시험이 우리의 삶의 문턱에 들이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미리 이 사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그때야말로 핍박이 몰려오고 있는 아주 중대한 시험의 시기였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주후 64년경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대대적인 박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서운 불시험이 다가오기 직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된 밤에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감동시켜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이 고난을 대비하는 메시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경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입니다. 로마의 디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앞에 두고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감동시켜서 그들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비하도록 소망의 편지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당할 것을 대비하세요. 여러분을 시련하려고 찾아오는 불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이 곧 찾아옵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1장의 요절인 7절에도 “불시험”을 암시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불이 어떤 도구로 쓰여졌습니까?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금이 어디서 연단됩니까? 용광로의 불 속에서 연단됩니다.
불 속에서 모든 금이 아닌 부분, 그러니까 찌꺼기는 녹아서 없어지고 순금이 구별되면서 얼마나 제련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련의 시간, 불시험의 어두운 시간은 순금과 찌꺼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시간입니다. 핍박이 올 때, 박해가 올 때, 고난이 닥쳐올 때 이 고난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순화시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점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고난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은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욥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우리의 삶과 믿음과 인격이 제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세요. 요한복음 15장을 흔히 ‘포도나무의 장’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삶을 독려하는 동시에, 17절 이하를 보게 되면 이 고난에 대한 대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7-19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우리가 세상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할 것이지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20, 2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이 고난에 대한 준비를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고난을 준비하라.” 우리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주님의 사랑받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시험을 주십니다. 때로 그 시험은 격렬한 불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시험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을 감수하며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현실의 길입니다. 이 길은 단련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 고난에 대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베드로전서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낱말 셋이 있습니다. ‘고난’이란 말과 ‘즐거워하라, 기뻐하라’는 말, 그리고 ‘소망’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고난과 기쁨, 그리고 소망이란 이 세 가지 낱말이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고 사도 베드로가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님 스스로 어떤 잘못이 있어서 그 대가로 받은 고난이 있습니까? 이미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자기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2장 19-2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에 대한 종류를 이야기하면서,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애매하게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없는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인데요? 2장 24절을 보세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주님은 고난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스펄젼 목사는 자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가 병중에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프지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제 고통보다도 주님이 제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고통받는 사람에게 주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격려를 고통받는 사람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생을 같이한 사람들끼리는 얼마나 친분이 두텁습니까? 기쁨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어도 고생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쉽게 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교제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영광의 날에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은 바라면서 고난은 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장차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 영광 속에 같이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세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난 속에서도 생동하는 발걸음으로 전진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 대신에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을 통과해야 영광이 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누구를 제일 가까이 하십니까? 고난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광스럽게 임재하십니다.
14절을 보세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의 위에는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리 텐 붐이 쓴「나의 피난처」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리가 어렸을 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잡혀가고 죽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 어린 소녀는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난 어떻게 하죠? 난 죽는 게 두려워요.”
그때 코리의 어머니는 자상하게 코리에게 타일렀습니다. “코리야, 우리가 기차를 타려면 먼저 뭐가 필요하지?” “정거장에서 기차표를 사야지요.” “언제 표를 사지?” “기차 타기 직전에 사야지요.” “그래,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주님이 우리가 죽음을 통과할 수 있도록 표를 주실 거야.”
여러분, 우리가 순교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주신 말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맞이할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우리를 어떻게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기로 약속하신 그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고난받는 우리 위에 함께 계시면서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울어 주시고, 힘을 주셔서, 이 고난을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있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낯익은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다,” 또는 “장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성막 위에 임재했던 불기둥을 보고 한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 빛의 아름다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 나고 생생하게 들렸겠습니까!
고난은 아픈 것이지만 고난 속의 위로는 정말 큰 것입니다.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을 생각해 보세요. 스데반이 죽을 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돌팔매질을 당하여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스데반을 능히 순교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천사의 아름다운 광경이 스데반의 얼굴을 통해서 빛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시선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향했습니다. 그 주님이 자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팔을 벌리고 서 계신 그 광경을 보았을 때 자기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 그들을 용서하며, 거룩한 순교에 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오면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세 번만 나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주어졌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이기만 하면 주님 이야기를 합니다. 또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몸에 밴 사람들이구나”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질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28절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는 장면에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이 선교할 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고난받는 주님의 자리에 설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18절까지의 말씀은 고난이 올 때를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남의 일을 간섭함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말은 홍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 할 일만 하라는 권면입니다. 자기의 일도 잘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난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16절을 보세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의 이유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중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합니까 아니면 영화롭게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 자신이 부끄러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 그래서 그는 뼈아픈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고난을 전도의 기회로 삼습니까? 17절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전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는 고난을 전도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까?
또한 고난의 때, 우리는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나에게 억울한 고난이 다가올 때, 그때에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왜요? 그들이 우리를 혹시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순교를 당하며 박해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선을 행하면서 혹시 육체가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네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한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고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우리도 죽을 때 “하나님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마음놓고 부탁해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헌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고난 속에서도 더욱 철저히 주님 앞에 드리십시다. 이 최후의 헌신은, 최후의 고난을 최후의 승리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 이길 수 있는 힘과 비전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영광이 되려면
베드로전서 4:12-19
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인한 곤고함 때문입니다. 당연히 원하지 않았고, 또 생각해보면 고난을 당할만한 잘못을 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인생은 왜 그리 곤고한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인생을 힘들어하고 또 이상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인생의 곤고함을 <연단하는 불 시험>이라고 말하면서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은 자신의 삶에서 겪는 각양의 곤고함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데(이것이 이상히 여기는 것) 베드로 사도는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전서를 이야기해가면서 언급하는 것이 이 서신의 수신자는 길 가는 나그네와 같은 불특정 다수인이 아닙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따라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이들, 곧 진정한 성도들이 바로 이 편지의 수신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지만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기 죄로 인한 고난이라고 앞서 이야기 했고, 성도들의 고난은 애매히 받는 고난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고난을 좀 다르게 표현해 본다면 인생을 사는 동안 받게 되는 저항과 같은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된다면 그것은 고난도 아니고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잘라서 말한다면 인생이 곤고하고, 사람들과의 갈등을 겪게 되는 이 모든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자기 맘대로 되기만 하면 힘들 것 없고, 사람이 입 안의 혀 같이 대해준다면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곤고한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려고 권력이나 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을 전하는 것도 권력과 돈이 있으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크게 지을 리가 없고, 유력한 사람이 교회의 장로인 것을 자랑할 일도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으로서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이유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세상을 실수 없이 경영하시는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 삶의 모든 사건과 요소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다 그 창조와 경영의 섭리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일들을 어떻게 느끼고 정의하더라도 그 이유와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기쁨이든, 또 흔히 말하는 생사화복에 속한 모든 일,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며 만질 수 있고 밟을 수 있는 모든 것 역시 그 창조 목적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불 시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바로 이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義) 안에 있다는 바로 그것.
우리에게는 곤고하게 느껴지는 일들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생, 특히 우리 자신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 것임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본질적 근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며 고난을 피할수록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지만, 인생은 제 아무리 노력해도 육신이 가진 한계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인간들과 어울려 있어 맺어진 인간관계 속의 주장들로 인하여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노력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는.
그런데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고, 사도들은 고난을 기쁘게 즐기라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이 지금의 인생들이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는 것과 같이 평안하고 세상이 부러워할 성공과 영광된 삶을 살았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이없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지 않나, 그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또 그 평안을 누린다는 사람들이 도망 다니고 옥에 갇히다 못해 잡혀서 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평안과 기쁨과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부인하지 않고 믿으려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이유는 알고 가야 합니다. 이런 의문은 접어두고 어떻게 인생이 평안할까만을 고민하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결정이 잘 추진되지 않는 이유만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고민의 차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있는지의 유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지하고 겪는 모든 일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그 인생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게 하신 목적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고 경영하시는 목적을 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그 생명으로 태어나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이해한다고 해도 여자로 나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생령을 불어 넣으신 것 또한 그 생령이 육신으로 표현되고자 함이지 저장하기 위함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는 순간순간 겪는 일들에서 겪는 이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를 발견하기에 그것을 찬양하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되고, 그 순종하는 이의 삶을 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고난>이라고 말하는 일들을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고 순종하는 이들에게 육신으로 살면서 인지하고 겪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인식과 순종이 있지 않으면 육신으로 인생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기쁨과 영광으로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고난에 대한 보상이나, 죽은 개는 발로 차지 않듯 자신이 고난을 받을 정도의 선택을 받았기에 영광이라고 여기는 정도지만, 그런 가치관과 고난의 참여는 굳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또한 세상을 지으신 목적을 알면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분명히 곤고함으로 느끼는 일들의 의미와 뜻이 또한 함께 느껴지므로 그것을 인하여 우리가 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에게나 열리는 것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만의 세계입니다. 즉 억지로 인생의 고난을 영광으로 여기려 노력하고 참고 견디는 자들, 고난을 견디면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일념으로 견디는 자들은 고난의 의미도, 영광의 의미도 모를 뿐 아니라 구원과 거듭남도 없는 자들로 모두 자기 죄를 인하여 인생의 곤고함을 겪는 이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했다면 삶이 아무리 선해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삶의 모든 순간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그 이름과 정체성을 나타내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고, 인생은 단지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뜻 안에서 사는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오나 신념으로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났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