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99
5월24일 [성령 강림 대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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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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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1ynOgLQpNM
[원주교구 김대중 베드로(의림동성당 주입)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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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으로 인한 참 생명, 영적 생명, 종말론적 생명!>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세상 그 어떤 진귀한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을 선사하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건네는 과정이 특별합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요한 20,22)
여기서 ‘숨을 불어 넣는다.’는 표현은 아주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창세기에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생명을 주셨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냥 생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입니다. 생명 유지의 본능에 따른 아무런 의식 없이 호흡하는 생명을 넘어, 죄로부터 해방된 인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랑의 숨, 영혼의 숨을 쉬는 새로운 생명 말입니다.
하느님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성령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그저 한 생명체로서의 숨만을 쉬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엄청난 특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작 한번 밖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이나 거듭 태어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세례를 통해 우리는 두 번째로 태어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죽음의 순간, 또다시 영적으로 새출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인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명의 숨, 성령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참 생명, 영적 생명, 종말론적 생명을 수여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장,22)
생명의 수여는 유다교 전통 안에서 죄의 용서와 늘 연결되었습니다. 죄는 죽음을 상징했으니까요. 죄의 용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사다리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말끔한 청산, 부서진 인생의 완전한 복구, 새 출발의 기점을 의미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숨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정 생명의 숨결, 성령의 숨결, 사랑의 숨결을 호흡하고 계신가요? 혹시라고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거친 동물적 호흡만 숨 가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하루 우리들의 숨결, 호흡을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호흡을 좀 더 길게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 순간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호흡을 좀 더 의식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이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십시다. 그리고 잠시 멈춘 다음 날숨을 내쉴 때는, 우리 내면의 죄와 죽음을 몰아낸다고 생각하며 호흡합시다. 내 안의 분노, 상처, 용서못하고 있는 사람들, 복수심, 중오심을 말끔히 몰아낸다고 생각하고 호흡합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대한 성인들의 기도방법이었습니다. 호흡만 길게 가져가며 잘 살펴도 아주 좋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당 15분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진지하게 한번 반복해보시기 바랍니다. 보호자요 인도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삶, 새 생명을 다시 한번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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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MyMqhrs9PQ?si=3-endzI9e4Y01g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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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해야 해”, 그리스도의 “할 수 있어”, 성령의 “어 되네?”>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과 성령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벽에 부딪힙니다. 성경은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해?' 라는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오늘 요한 복음의 첫머리는 이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놀라운 구원 공식을 선포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 명령을 들을수록 우리는 더 작아지고, '나는 할 수 없어'라며 기가 죽습니다. 율법은 길을 알려주지만, 그 길을 갈 힘은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진리'와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 이동의 4단계 공식과 같습니다.
첫째, 율법의 "해야 한다"는 강박을 만납니다. 둘째,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습니다. 셋째, 내 힘으로는 안 됨을 고백하고 성령의 '은총'을 청하여 마침내 "어, 되네?"라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넷째, 그때 내 영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어릴 적 '두 발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의 경험 속에 아주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면 쓰러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넘어지지 말고 똑바로 타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해야 한다"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내 힘으로는 자꾸만 옆으로 쓰러집니다. 할 수 없다는 절망이 밀려옵니다. 그때 아빠가 뒤에서 자전거 안장을 꽉 잡아줍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아빠가 잡고 있어. 너는 아빠 아들이니까 혼자서도 달릴 수 있어.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할 수 있다"는 '진리(정체성)'입니다. 아빠의 말(진리)을 믿고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페달을 밟아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어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아빠의 헌신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아빠의 밀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페달을 밟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아빠는 저 멀리 서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아빠가 손을 놓았는데도 자전거가 쌩쌩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아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막힌 탄성이 무엇입니까?
"어? 되네! 내가 혼자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네!" 이 "어, 되네?"의 순간, 걷기만 하던 아이의 세상은 두 바퀴로 세상을 가르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쓰러질까 두려웠던 공포는 사라지고, 바람을 가르는 짜릿한 '평화와 기쁨'만이 남습니다. 자전거 타기라는 율법(해야 한다)이 아빠의 진리(할 수 있다)와 은총(밀어주는 힘)을 만나 기쁨의 춤이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퀀텀 점프(Quantum Leap)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지옥 속에서 생생하게 겪어낸 한 여인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였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과 그녀의 언니 벳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코리는 언니 벳시가 잔인한 간수들의 학대로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코리는 뮌헨의 한 예배당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났을 때, 그녀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바로 그 옛 나치 간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제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 그녀는 침묵 속에서 간절히 성령의 힘을 청했습니다. "주님, 저는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없으니,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어 당신의 사랑으로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코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움(은총)을 청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내 어깨에서부터 팔을 타고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 같은 것이 흘러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내 손이 기계처럼 움직여 간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나의 형제여,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어, 이게 되네? 내가 원수의 손을 잡고 있네!"라는 영적인 탄성이 터져 나온 순간입니다. 두 손이 맞잡힌 순간, 내 영혼을 짓누르던 증오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압도적인 평화가 밀려왔습니다.(출처: 코리 텐 붐, 『주는 나의 피난처』).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면 아직 예수님(진리)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것이고, 용서해야 함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해 괴롭다면 아직 성령님(은총)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코리는 진리와 은총이 결합되어 차원을 이동하는 기쁨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38장에는 이 위대한 차원 이동과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기막힌 알레고리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깊은 진흙 우물 속에 던져집니다. 물은 없고 진창만 있는 그 깊고 어두운 똥통 같은 구덩이에서 예레미야는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에벳멜렉이라는 내시가 임금의 허락을 받고 우물 위로 나타납니다. 에벳멜렉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지만 구원자가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똥통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 차원 이동을 위한 절대적인 두 가지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에벳멜렉은 예레미야에게 밧줄을 던져줍니다. 그리고 낡은 헝겊과 헌 옷 조각들을 밧줄에 묶어 던지며 이렇게 외칩니다. "이 낡은 헝겊과 옷 조각들을 겨드랑이와 밧줄 사이에 대십시오." (예레 38,12).
왜 헝겊을 먼저 대라고 했을까요? 예레미야는 진흙탕 속에서 무거운 뻘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까끌까끌한 밧줄만 겨드랑이에 끼우고 위에서 당기면, 피부가 다 찢어져 고통스러워 밧줄을 놓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는 이 밧줄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너는 똥통에 있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용서하며 하늘로 올라갈 존재다" 라는 정체성의 믿음, 즉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줍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진리(밧줄)만으로는 찢어지는 고통(분노와 억울함) 때문에 원수를 끝까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낡은 헝겊입니다. 헝겊은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너덜너덜하게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즉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내 마음에 부드러운 보호막이 되어 끝까지 밧줄을 놓지 않게 만들고 마침내 "어, 되네?" 하며 위로 솟구치게 만듭니다. 예수님(에벳멜렉)을 만났어도, 진리의 밧줄(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과 은총의 헝겊(성령의 평화)을 만나지 못하면 결코 차원 이동은 완료되지 않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예레미야서 38장)
저 육중한 비행기가 하늘로 날 수 있을까요? 비행기니까 날아야만 합니다. 우리도 용서해야만 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조종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달리게 되고 정말 그 큰 쇳덩어리가 뜨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연료가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연료가 성령님입니다.
하늘을 날 때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어, 되네?!” 이 기쁨으로 사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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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브루클린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보통 주일미사에 80명 정도 나왔습니다. 미사에 100명이 넘으면 아이스크림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1년에 두 번 정도 100명이 넘었습니다. 성탄 때와 부활 때입니다. 저는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렸습니다. 2024년 2월 11일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주일미사에 700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저는 1,000명이 넘으면 점심을 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0명이 넘게 더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작년에 곧잘 800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900명이 넘을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부활 미사 때입니다. 성당은 물론 성당 밖의 복도에도 의자를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했을 때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고기가 그물에 가득 잡혔습니다. 그물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정도였고, 나중에 확인하니 153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이번 부활 미사에 1,155명이 왔습니다. 저도 놀랐고, 교우들도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약속대로 점심을 사드렸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름대로 미사에 1,155명이 참례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입니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이주를 많이 오는 주가 되었습니다. 날씨가 좋고, 세금 혜택이 있고, 상대적으로 뉴욕이나 LA 보다는 물가가 저렴한 편입니다. 타주나 한국에서 전입해 오는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둘째는 성당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9년 전인 2017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서 신축했습니다. 다운타운에 있을 때는 성당이 작았고, 주차 공간이 협소했습니다. 벨리 뷰에 있을 때는 물류창고를 매입해서 사용했습니다. 교우들도 당시 성당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어빙에 새로 지은 성당은 넓은 주차 공간, 다양한 용도의 교리실과 친교실, 농구장, 어린이 놀이터, 야외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성당도 밝은 분위로 아름답습니다. 공동체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당은 아름답고, 쾌척합니다. 고속도로 옆이라 교통이 편리합니다.
셋째는 ‘새 신자 분과’입니다. 성전이 신축되면서 전임 신부님은 ‘새 신자 분과’를 만들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미사 때마다 매의 눈으로 새로 온 교우들을 파악합니다. 새로 온 교우들의 정보를 컴퓨터에 정리해 놓습니다. 구역장에게 연락해 주고, 1달 동안은 미사 후에 함께 식사하면서 본당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택 마련, 자녀 교육, 직업 안내, 취미 활동까지 도움을 줍니다. 2 달에 한 번은 새 신자들을 교중 미사 때 소개하고, 선물을 줍니다. 1년에 한 번은 새 신자를 위한 ‘친교 모임’을 갖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본당의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새 신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새 신자 분과 위원들은 전입해 온 새 신자들을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넷째는 본당의 분위기입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설립 초기 교우들은 씨를 뿌렸습니다. 사제를 모셔 왔고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사랑의 물을 주었고, 영성의 거름을 주었습니다. 몇 번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령의 이끄심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듯이, 공동체는 신앙 안에서 친교와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한인 공동체는 고령화되는 추세인데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젊은 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허리가 두꺼운 성당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학교’도 전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글과 한국 문화를 배우려고 성당에 옵니다. 본당 교우의 자녀도 있지만, 지역의 주민 자녀도 옵니다. 자연스럽게 성당을 접한 아이들과 부모는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3년 전에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부주임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 미사를 담당하고, 청소년 사목을 전담합니다. 신부님은 청소년들에게 영적인 거름을 듬뿍 주고 있습니다. 다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듯이, 저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하나씩 뽑았습니다. 저는 ‘굳셈’을 뽑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뽑은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 맺어 언젠가 2,000명이 미사 참례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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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그들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은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세 2,7 참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을 잠그고 숨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하셨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과 같이, 성령과 함께하면 사랑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같은 언어를 써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성령의 언어는 분열을 넘어 일치로, 두려움을 넘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 우리 모두 성령의 손길을 느낍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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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오늘은 부활 시기의 절정이자 완성인 성령 강림 대축일이다.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수난·죽음·부활)가 성령 안에서 완전하게 열매 맺었음을 선포한다. 성령은 단순히 부활 사건의 부속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오늘 우리 안에 현존케 하시는 분이다.
1. 성령, 새 계약의 율법
사도행전은 오순절 사건을 구약의 시나이 계약과 연결하여 묘사한다.(탈출 19,16-20) 모세 시대에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주어졌다면, 이제는 “살리는 영”(2코린 3,6)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새로운 율법이 되셨다. 성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예레 31,33) 이제 이 약속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완성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시다. 성령께서 교회의 지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교회를 하나로 모으시며, 교회의 사명과 은사들을 인도하신다.”(797항) 따라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 이상의 기준, 곧 내적 인도자가 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고 실행할 능력을 주신다.
2. 성령, 하나 됨의 원리
오순절의 언어 기적은 인간의 분열을 극복하는 성령의 힘을 드러낸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은 언어의 혼란으로 인류가 흩어진 비극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 민족을 초월하여 복음 안에서 하나로 모으신다.
성 바실리오는 성령을 이렇게 묘사한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조화롭게 엮어 하나로 만들고, 흩어져 있는 이들을 모아 일치시키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이들이 하나 되게 하시는 원리이시다.”(De Spiritu Sancto, 16,38) 바오로 사도도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4.12) 즉, 성령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3. 성령, 죄 용서의 은사
요한 복음은 오순절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전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여기서 성령의 첫 열매는 곧 용서의 은사이다. 죄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형제애를 파괴한다. 따라서 공동체가 살아남고 참된 교회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 안에서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헌장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성령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인도하시며, 그 안에서 은총과 봉사의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시며, 사랑으로 교회를 인도하시어 놀라운 일치를 이룩하신다.”(4항)
4. 성령, 삼위일체의 사랑
교회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유대”라고 고백한다.(교리서 733항 참조) 성령은 인격적 ‘관계’이며, 바로 그 관계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단순히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들어가는 은총을 받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은 곧 성령이시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친교 자체이시다.”(De Trinitate, XV,17,27) 따라서 성령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5. 삶의 적용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율법이 되어, 양심을 빛으로 비추고 선과 악을 분별할 힘을 주신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원리이다. 성령은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고 화해시키시는 힘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사랑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며, 우리 삶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매일의 기도 안에서 “성령께 자기 자신을 맡기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성령께 내어 맡길 때 개인과 교회, 그리고 세상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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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양심을 잃고 죽은 듯 살아가는
먼지 같은 삶에 새 생명 불어넣는
거센 바람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사그라지는 검은 재 가득한
어둠 같은 삶을 환히 밝히는
찬란한 불꽃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벗들의 심장을 겨눈 비수 같은
독을 머금은 말들을 흩어버리는
생명의 말씀 품은 혀들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하느님과 갈림 없이 하나 되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온 누리에 드러내는
슬기(지혜)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발 딛고 선 지금여기 깊이 스며든
시공을 초월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아
‘이미’와 ‘아직’ 사이의 하느님 나라를 사는
깨달음(통찰)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교묘히 본색을 숨긴 악의 민낯을 밝혀내고
악에 짓눌린 가녀린 선을 들어 높이는
일깨움(식견)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불의에 무릎 꿇어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사랑과 정의의 제단에 기꺼이 몸 바치는
굳셈(용기)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순간의 달콤함으로 유혹하는 헛된 거짓 물리쳐
이제로부터 영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보듬는
앎(지식)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는
받듦(공경)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하느님의 자녀요 벗으로서
하느님과의 단절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헌신케 하는
두려워함(경외)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이 땅의 모든 이를 당신으로 채우시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열매를
암울한 세상을 이기는 희망 가득한
기쁨의 열매를
하느님과 모든 벗들이 하나 되는
평화의 열매를
자유와 해방의 발걸음 이끄는
인내의 열매를
주님의 가장 작은이들을 품에 안는
호의의 열매를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일구는
선행의 열매를
뭇시선 의식하지 않고 제 소명에 충실한
성실의 열매를
약한 자에 약하고 강한 자에게 강한
온유의 열매를
감정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하는
절제의 열매를
지금까지처럼 이제와 영원히
저희 안에서 저희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맺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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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셨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다.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준다. 예수님의 승천이 가져온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셨다.
다양한 성령의 활동을 느끼고 받아들이려면 영적인 삶이 꼭 필요하다. 영은 영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 뜨거운 열기, 시원한 바람, 이상한 언어,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 용서의 마음 등 성령의 역사는 오만가지 방법의 맞춤형으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신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시기도 한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린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세상 것을 우선하던 삶을 천상을 갈망하도록 한다. 불로 표상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하였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임하기도 한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신다. 성모님을 통해서 다가오시기도 한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한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하고, 평화와 온유함으로,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비둘기처럼 다가오신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길 희망한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시지만,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다.”(갈라5,22-23).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다. 그리하여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본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좋겠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더 요청되고 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어 주신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시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시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시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성 아우구스티노).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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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칠은 은사
1) 슬기 (지혜) : 하느님과 하느님께 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맛들이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다. 모든 것을 하느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며,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2) 통달 (깨달음, 이해) : 하느님 계시 진리를 깊이 통찰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혜다. 성경의 의미, 전례의 의미등 숨은 뜻을 알게 된다.
3) 의견 (일깨움) : 마땅히 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하는 은혜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기 분수를 알며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게 된다.
4) 지식 (앎) : 영원한 생명, 피조물에 관해 올바로 판단하는 습성이다. 믿어야 할 진리, 믿지 말아야 할 거짓에 대해서 확실히 분별하는 은사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분명히 피조물이다.
5) 굳셈 (용기) :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를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성령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힘이다.
6) 공경 (받듦, 섬김, 효경) :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자녀다운 사랑과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 사랑의 정을 담아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하셨다.
7) 두려워함 (경외) :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는 은혜다. 무서움과는 다르다. 벌받을 것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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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는 책을 많이 읽기는 하지만, 2번 이상 읽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관하지 않고 성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읽는 감정에 지루함이 들어가고, 또 세상에는 새롭게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주님께서 빛을 비춰주심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도 같은 내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해 주시는 생생함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집을 방문해서 성경을 보면 반갑습니다.
언젠가 어느 집에서 거실 한가운데에 자그만 책상이 있고 그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았습니다. 경건함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책 앞에 갔다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인의 삶은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펼쳐 놓은 성경책처럼 말로만 신앙인이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신앙의 기쁨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움으로 또 커다란 의미로 매 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탄생한 날이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거룩한 날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지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19)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또 스승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닫혀 있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는 영입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장면과 일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위는 십자가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제2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낡은 자아를 벗고 하느님의 생명을 품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성령의 숨결을 받아들일 때 새롭게 창조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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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 -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는 일부터 하신 것은, 그들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7-49)
이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라.”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다음에 곧바로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루카복음에 있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선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리해서 사람들의 죄를 실제로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까지 사도들의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단순히 권한만 주신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직무’, 또는 ‘임무’를 맡기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죄를 용서하는 일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수행해야 하는 일이고,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안 되고, 직무유기나 직무태만도 안 됩니다.
사도들이 받은 ‘고해성사의 권한과 직무’는 주교들에게 계승되었고, 신부들은 교구장 주교로부터 그 권한과 직무를 위임받아서 수행합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 쪽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나서 곧바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을,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의 내부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직후에 공동체의 내부 분위기는 몹시 안 좋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배반자 유다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동체의 일치가 아주 많이 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동체의 일치를 회복시켜 주는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고, 일치는 사랑, 용서, 화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면,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지만, 만일에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고, 일치를 이루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사도 2,41),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을 잘 모릅니다. 사도들이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그렇게 되었다면 그 능력은 그날만 있었는지, 그 후에도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 쪽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 쪽입니다.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창세 11,7-9), 실제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닫히고, 멀어지고...... 마음이 멀어지면서 말도 멀어졌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때의 상황을 보면, 열린 마음으로 사도들의 말을 들으려고 한 사람들은 말을 알아들었고, 믿었고, 회개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자 성령께서 그들의 귀를 열어 주셨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면서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그들은 안 들으려고 해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만능 해결사도 아니고, 자동 기계 장치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로봇처럼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사람들 앞에 섰고, 자신들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노력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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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양희창 세례자 요한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와 더불어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 서는 당신의 평화와 성령을 통한 기쁨을 선물하고 계십니다.
전례력으로 성령 강림 대축일은 부활 시기의 마지막에 놓여 파스카 신비를 더욱 깊게 묵상하도록 해줍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더욱 일치되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학교 저학년 때 본당신부님께서 “넌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니?”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바람, 물, 불, 구름과 빛, 비둘기... 등등.” 주저리주저리 아는 것을 끌어모아 대답하려 했지만, 자신 있는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런 거 말고 네가 이해하는 성령!” 그간 ‘1+1=2’ 라는 답처럼, 성령에 대해 지식으로만 알려하던 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몇 년을 더 고민하고 나서야 성령에 대한 저의 답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성령’에 대해 생각하고 ‘성령께’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사도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도록 해주었으며, 신앙을 증거할 용기를 부어주었고, 주님 영광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을 의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주님 안에 새 생명을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굳은마음 풀어주고 차디찬맘 데우시고’라고 노래한 것처럼,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돌과 같은 부분은 살과 같이 부드럽게’(에제 11,19참고) 해주시기를 청하고, 성령의 열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갈라5,22-23)를 맺으며, 메마른 이 땅에 갈증을 풀어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짧고 강렬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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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병덕 라파엘 신부님]
<교회의 시작, 그리고 또 다른 시작>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 부활 시기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령강림 대축일로 마감됩니다. 이는 성령강림이 예수님의 부활과 별도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교회가 기쁘고 담대히 복음선포에 나섰던 것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태에 있던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야 기쁘고 담대하게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부활은 서로를 비추는 빛으로, 성령강림은 부활 신비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첫 번째 증언(사도 2,14-36 참조)을 통해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세례를 받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이런 모임이야말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성령 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로 기념합니다.
이처럼 오순절에 내려온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성령은 인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되면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사도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령은 우리를 깨끗이 정화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붙여주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합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탄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지 못해 칭얼대는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기가 울 때, 배가 고파서 우는지,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해 우는지, 아니면 어딘가 아파서 우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기에 다 똑같은 소리지만, 어머니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왜 우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합니다.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들의 무기력함이 어머니의 동정심을 더욱 강하게 유발시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어머니보다 더 뛰어난 감수성으로 우리의 신음 소리를 분별해 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무기력함 속에서 역사하기를 기뻐하시며, 우리의 약함 속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항상 찾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정체를 알지 못하는 괴로움을 정확히 찾아내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며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는 그사이의 공백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이 활기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비추심과 인도하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생활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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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거룩하게 일치시켜주시는 성령님>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로 50일간의 부활 시기를 마칩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제대 주위를 밝히던 부활 성야 때 축성된 부활초도 이제 거둬들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부활이 완성되고 충만해집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어떤 분이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많은 신자분들은 성부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요, 성자께서는 아들 예수님이시라면, 성령께서는 어떤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합니다.
성령께서는 성자와 똑같은 위격을 가지신 독립된 분이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께로부터 함께 뿜어나오는 기운이요, 영이며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아드님을 아드님답게 하는 능력이십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숨결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성령께서는 똑같은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이십니다. 그리고 더 가까이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생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과거 미사통상문의 사제 인사 부분에는 성삼위를 매우 잘 표현하였습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즉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은총으로 구원하셨으며 성령께서는 거룩하게 일치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도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으로 제자들 곁에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육신을 볼 수 없게 되었어도 주님께서 계실 때와 똑같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함께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육으로 오신 사건이 성탄이라면, 영으로 새롭게 오신 사건이 성령강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더 사랑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모든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고 그리스도 중심이 되게 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필요한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시지만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해 하나가 되게 하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을 통한 일치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저마다 안에 계시는 수많은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섬기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입니다.
실제 주님께서 ‘곁에’ 계실 때보다 ‘안에’ 계심으로써(즉 성령 강림을 통해) 제자들은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 강림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실패로 보여졌지만 부활의 승리를 이루셨고, 제자들도 스승을 배반하고 두려움에 숨어버렸지만 성령 강림으로 복음의 선포자로 월계관을 쓰게 되었듯이 우리도 생활 속에서 성령 안에 말씀을 실천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신앙을 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알며,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이제 성령 강림 대축일로 부활 시기를 마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 주간에는 일상에서 항상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묵상하며 체험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세상에 복음을 실천하며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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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랜 세월 동방 전례의 전통에서 살아오신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님은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대 교회에 성령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잠시 들어볼까요?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배신에 따른 죄책감 그리고 유다인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을 떨쳐 일어나, 복음 선포의 굳센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도 그 같은 힘을 주십사고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안일했던 신앙, 배신적인 삶, 비겁했던 복음 정신, 나약했던 믿음에 활활 타는 불꽃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 송가와 복음 환호성’에서 힘이신 성령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 주님,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행복의 빛’이신 성령님께서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
비록 우리가 세속에 얽매여 신앙의 참된 진리를 증거하지 못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으로 위로받고서 또다시 성령의 뜨거운 믿음을 청해 봅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3, 17~18)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왜 성령을 통해, 용서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당부 말씀도 많으셨을 텐데! 사실 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인도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가 공동체의 바탕이요 토대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지 않을 때, 또 이를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때 우리의 선포는 개인적인 치적이나 영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살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받은 상처와 아픔, 분노와 앙갚음에서 연유된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닫곤 합니다. 저 역시도 예전 베트남에서 함께 살았던 필리핀 형제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인식 차이는 물론 공동체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그에 따른 삶의 양식이나 습관의 차이로 마음이 불편했고 힘들었습니다. 생각으론 다름은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다, 라고 알고 있었지만, 감정으로 동감하기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없는 상황에서 무려 5개월 동안 저와 그 형제만이 살아야 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간이 저에게는 힘든 도전의 시간이었고 저 자신과 처절한 싸움의 기회였습니다. 저를 단련하고 정화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 혼돈이고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이고 어두움의 심연과도 같습니다. (창1,2참조) 이런 닫힘의 상황을 벗어나도록 이끄는 힘은 주님의 영에서만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2,7) 화답송 후렴은 이 신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생명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닫힌 다락방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적 갇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시는 힘이십니다.
어느 시인이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 바다가 넓어서 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배가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넓어서 비행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비행기가 다니는 길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각도 자유스럽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생각하는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자신만의 생각의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 보이는 산길도 사람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나듯이, 사람의 생각도 한번 그 길이 뚫리면, 그 길로 생각하고 사유하게 됩니다. 용서란 자신이 갖고 있는 이런 좁은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일상의 틀에서 한 번 벗어나 봐야 한다고들 합니다. 고정된 틀을 깨보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는 멀리서 바라보면 뜻하지 않았던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성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생각을 주곤 합니다. 성령은 닫히고 폐쇄된 공동체에 죄의 용서와 함께 화해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방향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위해 자신의 영적 내면을 올바르게 정리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까지 걸어온 길에 마음을, 미련을 두지 말고 기꺼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 때에 평화가 새롭게 시작합니다.
성령은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우리 서로를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주님 사랑을 통해 폐쇄적인 우리 마음속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생명의 물과도 같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물은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해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은 모두를 위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해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 12,6-7)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인 구원의 신비를 알아가는 지혜, 믿음의 신비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통찰,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견,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 악과 싸워 순교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공경,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기도드립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알렐루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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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21-22)
사람들과 세상이 무서워 다락방에서 숨어 숨죽이며 살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의 영을 주시며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도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을 받아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옛사람들의 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영을 받아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셔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영을 받아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께서 이끄시고, 무슨 말을 하든지 성령께 도움을 받아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을 받고, 주님의 영에 취해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영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주님의 숨길은 천지창조 때 우리가 받은 숨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하는 거짓 자아인 옛사람의 혼에서 깨어나,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숨입니다.
주님의 영을 받으려면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터로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간절하게 갈망하여야 합니다. 내면에 있는 조급한 마음을 날숨으로 불어내고 간절함을 안고 인내를 가지고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고, 성령을 받은 우리를 오늘 주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언제 어디든지 주님께서 보내셨고, 주님의 이름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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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 성령을 거부하는 사람인가? 성령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받지 못한 사람은 아닌가?
악령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저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을 거부하지 않고 오시기를 원한다는 면에서도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뭔가 자신이 없습니다.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 같지 않고 적당히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악령의 사람은 아니지만 더러운 영에 이끌리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가면서도 세상에 안주하기도 하고 가더라도 세상을 곁눈질하느라 전속력으로 가지 못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정신이 온전히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지 못한 것입니다. 금으로 치면 불순물이 얼마간 있어서 순금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있다가도 육의 정신이 제 안에 있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성령을 모셔 들였다가도 육의 정신이 내 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땐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성령과 악령은 우리 안을 들락날락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고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하였지요.
복음을 보면 어떤 집에 더러운 영이 머물다가 나갔는데 그 영이 다시 와 보니 말끔히 치워진 채로 있어서 일곱 영을 더 데리고 온다고 주님 말씀하셨더랬지요. 이는 더러운 영이 나갔을 때 얼른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성령과 악령이 우리 안에 들락날락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모셔 들이기 위해 할 것은 정신을 차리는 것인데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서 육의 정신을 몰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듭거듭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는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이 정신을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를 반성하면 적당주의입니다. 영의 움직임과 나의 정신 상태에 민감하거나 깨어있지 못하고 육의 만족을 얼마간 눈감아주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주님께 된통 혼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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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ㄴ)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요한20,19-23)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이 되었을 때, 한자리에 모여 있는 사도들 위로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2,4)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12,3) 그리고 "우리는 ...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12,13)
우리 안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참으로 행하기가 힘들고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사랑하기도 힘들고,
용서하기도 힘들고,
화해하기도 힘들고,
낮아지기도 힘들고,
나누기도 힘들고,
하나가 되는 것도 힘들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렵고 힘이 듭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곧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온전하게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미사 때에도, 기도를 할 때에도, 말씀과 함께 할 때에도, 온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뽑기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요란한 가운데 오시지도 않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을 받기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2마카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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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눈부시게 푸른
이 아름다운 오월에
성령의 바람 또한
우리 삶 안에 새롭게 불어오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재의 은총이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현존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이시며,
사랑의 영이고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단순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도록
우리 존재를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바벨탑이
인간의 교만으로 인한 분열이었다면,
성령 강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일치와 친교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본질은
지배와 분열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이어 주는
사랑의 힘입니다.
성령께서는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
참된 관계의 숨결이십니다.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존재 자체로 살아가는 평화와
참된 자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닫혀 있던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두려움을 넘어
세상으로 나아갔듯이,
우리 또한 성령 안에서
더 큰 사랑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빛과 진리를 비추시며,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서로를 살리고 이어 주는
성령의 삶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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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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